87화. 함정
3년 차 선수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여러 사람의 잠을 방해했다.
구단주 명령으로 한밤중에 랩터스 승부 조작 대응 테스크포스팀이 꾸려지고 대한 그룹 감사실에서 30명이 지원 인력으로 투입된다.
동시에 KBO에 보고를 하고 이런 일 벌어졌을 때 KBO만 믿고 기다리다가는 해결은커녕 바로 일을 망칠 걸 알기에 검찰에 긴급으로 고발하고 특수조사팀을 꾸리게 압력을 넣었다.
야구 말고는 다 잘하는 랩터스의 능력이 십분 발휘되자 12시에 시작된 조사는 새벽 두 시에 윤곽을 잡아간다.
“뒤에 중국 친구들이 있습니다.”
“걔들은 뭐 하는 애들인데요?”
“상해 쪽에서 보이스피싱으로 성장해서 지금은 비자금 세탁에 한 발 걸치고 있는 친구들입니다.”
“거기가 직접 움직이는 거예요?”
“업계에선 유명하답니다. 축구를 전문으로 하는 친구들인데 최근에 야구 쪽을 보강하고 있는 듯합니다.”
구단주 주재로 진행되는 회의. 국내 최고의 그룹임을 실감하듯 대한 그룹 감사실이 한 번에 뒷배의 실체를 파악하면서 보고를 시작하자 랩터스의 단장이 입술을 꽉 깨문다.
“우리 팀만 엮인 건가요?”
“며칠 더 찾아야겠지만 우선은 랩터스, 폭스, 드래곤스, 타이탄스는 확실히 연결고리가 있는 것으로 보이고 썬더스와 워호스는 접촉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건 추가 조사가 필요합니다.”
“통화 내역만 뒤진 거죠?”
“기지국 확인해서 주변 CCTV까지 확인 중입니다.”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검찰에 넘기세요.”
“탈 안 나게 하겠습니다.”
통신사를 가지고 있는 대기업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확인시켜주는 감사실 직원의 브리핑이 끝나고 서로의 역할을 나눈다.
나쁜 놈들 처리는 그룹 차원에서 대응하고 이런 일에는 역량이 부족한 구단은 야구장에서 정리를 담당하기로 한다.
능력이 없어 테스크포스팀에서 입술만 깨물던 단장이 구단 회의실에 구단 핵심 인사들을 불러놓고 참았던 울분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구단 소속 인원 전원에 대한 감사가 시작됩니다.”
단장이 사람들 불러놓고 엄포부터 놓는다.
사람들의 숨소만 들리는 회의장에 단장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진다.
“신인한테까지 손을 뻗었으면 그동안 술 잘 얻어먹고 다녔던 선수들도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은밀하게 빠르게 진행됩니다. 여러분은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단장에게 직접 보고하세요.”
한밤중에 끌려 나와 풀메이크업도 못하고 큰 안경만 쓰고 나온 운영팀장이 머리를 쥐어뜯을 때 단장의 화살이 감독에게 날아간다.
“감독님. 멍청이도 당분간 치웁시다.”
한쪽 구석에 각 잡고 앉아 있는 선수 둘 중 어리버리하게 눈치만 보던 1년 차 신인을 쳐다도 안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단장이 감독에게 요구한다.
한숨부터 내쉬는 감독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경기력 부진으로 2군행 조치하겠습니다.”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해야겠지요.”
“안 그래도 경준이 경기력이 안 좋아서 몇 경기 빼려고 했습니다. 기자 몇몇은 알고 있었으니 쉽게 이해시킬 수 있습니다.”
이번 시즌 신인 중 단 한 번도 2군을 안 가고 1군에서 버텼던 경준이의 표정이 금세 바뀐다. 자기가 경기에서 빠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지 충격을 받은 듯하다.
“앞으로 일주일은 아무도 몰라야 합니다. 확실히 입단속들 해주세요.”
여기까지만 듣고 경준이와 쫓겨났다. 정신 놓고 있는 경준이를 잘 어르고 달래서 집으로 보내고 택시를 탄다. 하루하루가 길다.
집에 와 씻고 누워보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내일 경기도 해야 하는데……. 머리가 복잡해…….
5시가 넘어 잠깐 눈을 붙였지만 9시에 눈이 떠졌다. 더 자야 하는데……. 어차피 더 자기는 틀렸다. 대충 차려입고 경기장으로 향한다.
언제나처럼 잠실 인근의 랩터스 단골식당에서 랩터스 선수단 히든 메뉴인 김치찌개와 계란밥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훈련장으로 들어간다.
거울을 보고 천천히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잠을 못 자 좀 멍한 기분이 들어 평소보다 조금 더 꼼꼼하게 몸을 푼다.
한창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데 하나둘 들어오는 선수들. 들어오는 선수들한테 인사를 하는데 나를 보는 눈이 다들 오묘하다. 뭔가 할 말은 있는데 선뜻 말을 못 하는 느낌……. 뭐지? 어제 일이 벌써 퍼졌나?
선수들이 하나, 둘 늘어가는 가운데 훈련장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주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김소전! 애를 왜 때려!”
뭐, 뭐야? 이건 또 뭔 소리야!
깜짝 놀라 주장에게 다가가 사건의 전말을 들었다. 그리고는 훈련장 밖으로 나가 게시판에 공고문을 확인했다.
- 엔트리 등록 : 김응규
- 엔트리 말소 : 노경준
- 징계(출장 정지 : 6경기, 봉사 활동 40시간) : 김소전(폭행)
미쳤네. 이 XX들 미친 게 틀림없어
어이가 없어 그대로 단장실로 찾아갔다.
“단장님! 갑자기 폭행이 무슨 얘깁니까!”
순간 눈에 보이는 게 없어 노크도 안 하고 그대로 단장실로 들어가며 소리쳤다.
“이제 오네.”
“제가 왜 출장 정지입니까!”
나를 똑바로 보며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는 단장.
“때렸잖아.”
“누가요? 언제요?”
“어제 노경준 귀싸대기 때렸다며? 본인이 증언했잖아.”
뭐… 이게 무슨…….
“그게 무슨 징계 거립니까! 정신 못 차리는 애 정신 차리게 하고 수렁에 빠진 거 건져 올렸더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냐고요!”
“그거 인정하니까 벌금도 없이 6경기야. 그런 거 없었으면 최소 60경기였어.”
확실해. 이 XX들은 나 싫어해.
“인정할 수 없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경준이도 불러서 물어보세요. 내가 나쁜 뜻으로 때렸는지 물어보시라고요!”
“소전아.”
눈이 시뻘게져서 소리를 지르는데 옆에 있던 홍시 누나가 나를 부른다.
그제야 이 방에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단장, 운영팀장, 감독. 팀의 코어 중의 코어. 어제부터 잠도 안 잔 듯한 세 사람이 테이블에 빈 커피잔을 산처럼 쌓아놓고는 앉아 있다.
“수사 과정에 필요해서 일주일 정도 널 엔트리 제외하려고 해. 그래서 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화제도 돌리고 확실히 이유도 만들려면 이게 최선이었어.”
누나, 최선이라니요. 이게 어떻게 최선인가요. 멀쩡한 사람을 폭행범으로 만들었는데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아요. 폭행이라니요. 눈앞에서 헛소리하는 놈 정신 차리라고 따귀 한 대 때렸는데 이걸 징계한다고요?”
“온 김에 재심 신청서나 쓰자. 재심할 때까지 시간 끌면서 구단이랑 싸우는 모습을 보이면서 조작범들이랑 계속 연락해. 검찰 쪽에서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래서 구단에서 억지로 만들어 낸 생각이야. 이해해 줘.”
이해라니요. 난 후배 때린 쓰레기가 되는데 이걸 어떻게 이해합니까?
“누나, 이건 아니지 않아요? 제가 조작범도 제보해, 뭣도 모르고 범죄 저지를 뻔한 멍청이도 제가 막았는데 왜 제가 징계를 받아야 해요? 이건 아니잖아요.”
나도 이제 이 팀에서 굴러먹다 보니까 꿈틀거리라는 거를 해볼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확실히 이야기할 시간이다.
내가 계속해서 부당함을 외치자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지켜보던 감독이 입을 뗀다.
“소전아. 난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거 말고는 네가 안 다치는 방법을 못 찾겠다.”
안 다치다니요? 전 쓰레기가 됐다고요.
“지금 부당하다고 생각돼도 우선 나 믿고 참자. 딱 일주일 후에 박정환이 잡고 내가 네 짐까지 다 가져갈 테니 나만 믿자. 일주일이다.”
“감독님, 그게 무슨 말이죠? 감독님이 무슨 짐을 가져가죠? 김소전 선수가 좀 억울한 부분이 있지만 때린 건 때린 건데? 제가 전에도 얘기했죠.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 사태는 안 된다고.”
감독이 나에게 부탁을 하는데 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단장이 말을 끊고 나온다.
“단장님,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까?”
“잘못했지요. 애를 왜 때려요!”
“애가 정신을 못 차리면 때려서라도 알려줘야 할 거 아닙니까!”
내가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자 단장이 쓱 일어나 내게 다가온다.
그리고는 얼음 같은 목소리를 내 귀에 밀어 넣는다.
“내 새끼들 패도 내가 팬다. 네가 쳤으니까 경준이 2군 가는 거로 참는 거야. 아니었으면 걔 나한테 죽었어.”
분명 나보다 키도 이만큼 작고 어깨너비도 내 반도 안 될 듯한 여잔데, 저 목소리만 들어도 싸우면 죽을 것 같다.
“일주일입니다.”
그래도 나도 가오가 있지. 쫄아서 나간다는 말은 못 하고 일주일만 기다리겠다고 소리치고는 굳은 얼굴로 단장실을 빠져나온다.
후……. 문 하나 차인데 여기 공기는 가볍네. 저 안에서 숨 막혀 죽을 뻔했어.
어차피 일주일 할 것도 없다. 조용히 락커로 들어가 굳은 얼굴로 짐을 챙기자 선수들이 다가오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만 본다.
기분이 아주 그런 건 아닌데 이제는 이 굳은 얼굴을 펴면 안 될 것 같아 쥐가 나는 볼때기에 한 번 더 힘을 주고는 매니저 형이랑 이천 훈련장으로 출발을 한다.
이번 시즌 전 경기 출장 중이었는데……. 지금 타격감도 괜찮았는데……. 기분이 참… 더럽네…….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나를 옆에 태운 매니저 형도 나에게 말을 붙이지 못하고 운전에만 집중하며 이천으로 달린다.
경기 시작 전 엔트리 변동 사항이 발표되고 라인업이 발표되는 시간. 지금껏 조용하던 전화기가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한다.
“여보세요?”
- 야, @%#$^@#[email protected]#!
아오… 귀 떨어지겠네.
“귀 안 먹었다.”
- @%##$^#$%!
욕이 이렇게 찰지니 어디 시집이나 가겠어. 논문 쓴다고 바쁘다더니 야구는 다 챙겨보고……. 우리나라 대학생이 다 한량인 거 내가 아는데 어디서 구라를…….
“그래도 내가 꼴뚜기보다는 잘생기지 않았냐? 그건 취소하…….”
괜히 한마디 해서 욕을 더 먹었다.
스피커를 막아도 튀어나오는 소리가 너무 커 볼륨을 영으로 줄여보니 고요한 것이 살 만하다. 잠깐 숨 고르기를 하는 도중 다른 전화가 왔다는 표시가 뜬다.
그래. 이 모든 사단의 원흉……. 이놈 전화는 받아야지
“루다야. 전화 온다. 내가 이따 전화할게.”
여전히 혼자 속사포 랩을 쏘아내고 있는 루다에게 미안함을 표하고 쓰레기에게서 온 전화를 받아본다.
“네, 선배님.”
- 무슨 일이냐? 너희들 갑자기 왜 둘 다 경기에서 빠져?
“그러기에 적당히 하셨어야죠.”
- 적당히라니?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얘길 해봐!
“요즘 경준이 하도 불러다 술을 먹이니까 애가 성적이 안 나오잖아요. 그래서 2군 갔어요. 야구도 못하는 놈, 밤마다 불러대면 1군에서 무슨 수로 버팁니까?”
내가 사실을 알려주는데도 1군에서 몇 경기 뛰어보지도 못한 놈이 어이없는 소리를 한다.
- 선수가 스트레스도 풀고 해야지, 감독이 꼴통이라 그걸 모르네. 아니지, 감독이 김민중이잖아. 지도 술 먹고 경기장 나오고 했으면서 이래도 돼? 이거 고소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멍청한 놈아, 야구 선수 김민중은 밤새 술 먹고도 그다음 날 홈런 치던 초천재고, 네가 술 먹인 노경준은 밤새 나랑 특타 해도 그다음 날 안타 하나 칠까 말까 한 학습 부진아고.
- 경준인 그렇고, 너는 왜? 너는 왜 6경기 정지야?
“경준이 말 안 들어먹길래 머리 좀 쥐어박았더니 선수 폭행이라네요. 6경기 정지랍니다. 후배 머리 한 번 쥐어박았다고 폭행이 말이 됩니까?”
원래는 연기로 이야기하려고 한 건데 진짜 불만이 있어서 그런가? 진심이 좀 섞여서 나도 모르게 억울함을 같이 토로해 버렸다.
내 통화를 운전하면서 듣던 매니저 형이 나를 바라보다 살짝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별것도 아닌데 놀라고 그래요, 형.
- 아, 똘아이 XX들. 그러면 어떡하냐? 당장 오늘 경기부터 맛보기 해보려고 했는데 둘 다 사라지면 어쩔 거야?
어쩌긴 뭘 어째. 경기 못 뛰는 거지.
“그러길래 애를 적당히 불러냈어야지요.”
- 술 얼마 먹이지도 않았어. 그것보다 오늘 경기 어쩔 거야? 둘이 같이 빠지면 손해가 얼만 줄 알아?
“얼만데요?”
- 3억이야, 3억! 가볍게 3억. 여기에 오늘부터 작업 맞춘다고 들어간 돈이 얼만데. 이거 어쩔 거야?
뭘 자꾸 어쩌라는 거야?
“그걸 왜 저한테 그러시죠? 우리가 아직 딱 부러지게 계약서 하나 쓴 것도 없잖아요?”
- 이 XX. 어제 같이 하기로 했어, 안 했어? 이따위로 나올 거야?
“지금 누가 누구한테 성질을 내야 하는데 그래? 내가 술을 얻어먹길 했어? 돈을 받길 했어? 같이하자고 말만 하고 해준 게 뭔데 나한테 그러냐고요?”
- 너 진짜 이렇게 나올 거야?
“지금 나는 X됐다고. 몰라? 후배 패고 출장 정지당한 쓰레기가 됐는데 나는 어떻게 보상할 거야?”
- 지금 그게 중요해? 오늘 3억 어쩔 거냐고!
미친놈……. 하긴 이 정도 미쳤으니 이렇게 뻔뻔하지.
“약속 따윈 모르겠고 나랑 계속할 생각 있으면 3천만 원 현찰 들고 와서 얘기해. 그전엔 어제 했던 얘기는 다 없는 거야.”
어차피 더 할 말도 없어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 소전아……. 너… 뭐냐?”
운전하면서 사색이 된 매니저 형이 묻는다.
앞을 보는 건지 나를 보는 건지 모르겠는 형을 보면서 씩 웃으면 말해 준다.
“뭐긴요. 돈에 미친 김소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