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재앙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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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돈질에는 소질이 있는 랩터스. 원정을 와서도 훈련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전국에 쫙 깔린 대한 그룹 호텔을 원정 호텔로 사용하면서 투숙객인 선수들이 호텔 헬스장을 24시간 사용해도 괜찮다.
10시쯤 일어나 선수단만을 위한 조식 뷔페를 먹고 호텔 헬스장으로 가서 몸을 푼다.
몸 좋은 외국인들과 수십 년간 갈고 닦은 복근을 슬쩍슬쩍 보여주는 노신사들의 눈길을 받으며 큰 거울 앞에서 천천히 스트레칭부터 시작한다.
거울을 보면서 항상 느끼는 거지만……. 누군지 몰라도 근질 참 좋네. 야구를 안 했으면 피트니스 선수를 했어도 대성을 했을 선수야.
30분을 넘게 온몸 구석구석 근육을 늘려주고 내 사랑스러운 쇳덩이들을 예뻐해 주기 시작한다. 고급 호텔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정위치에 가지런히 정리된 덤벨부터 들어 올려 쇠와 근육의 대화를 시도한다.
무게라고 같은 무게가 아니고 쇠라고 같은 쇠가 아니다. 똑같은 무게여도 내가 집에서 쓰는 마트 표 덤벨과 여기 있는 브랜드 덤벨은 무게가 다르다.
예전에 누가 봉 무게는 조상님이 들어주냐고 했었는데. 비싼 거는 같은 무게가 더 가뿐하게 들리고 근 자극이 더 짜릿하다.
한참을 루틴에 맞춰서 세트를 끝냈는데 뭔가 허전하다. 오늘의 개인 훈련이 끝날 때까지 몰랐던 사실을 알아냈다. 오늘… 내 노예가 안 왔구나.
6시 30분, 경기를 위해 2시에 구단 버스에 올랐다. 짬밥 순으로 뒷자리를 차지한 고참들. 밑으로는 경준이밖에 없는 나는 매니저 형들 뒤의 자리를 찾아 들어간다.
아침에 나랑 하는 개인 훈련도 안 나온 노예가 나보다 먼저 버스에 타서 기다린다. 그것도 꼴 보기 싫은 모습으로…….
“술 먹었냐?”
“형… 죽을 거 같아요.”
“그래서 시합은 하겠냐?”
“아니요.”
이 XX를 패버릴 수도 없고… 에효……. 내 앞가림도 힘든데 너까지 관리해야겠냐.
“이따 혹시라도 트레이너 형이 컨디션 안 좋아서 쉬라고 해도 무조건 경기한다고 해.”
“형… 지금 진짜 상태가 안 좋아요.”
한심한 XX.
“힘들다고 쉬겠다고 하면 오늘 한 경기가 아니라 이번 시즌 남은 거 다 통으로 쉬는 수가 있어. 괜히 토 달지 말고 무조건 한다고 해.”
“형… 그러다 경기장에서 토해요.”
정신 못 차리는 멍청한 XX를 보니 가슴이 답답하다.
“경준아. 너 아픈 데 없지? 사지 멀쩡히 움직일 수 있지?”
“움직일 수는 있는데 속이 너무 안 좋아요.”
이 XX는 좀 맞아야 한다.
“조영근 선배 지금 병원 가서 사진 찍으면 장애 등급 나와. 박경흠 선배 어깨만 두 번 열었고, 우리 팀에 수술대 한 번 안 올라간 강정상 선배도 팔에 뼛조각 돌아다녀.”
그제야 파묻혔던 경준이의 몸이 조금 올라온다.
“그런데 이 형들이 왜 기를 쓰고 경기 나가는 줄 아냐? 시즌에 홈런을 40개를 치는 조영근도 자기 자리 지키려고 아픈 몸을 이끌고 나간다. 알아?”
이제야 경준이의 눈이 내 눈높이까지 올라왔다.
“어디 부러져서 못 나가는 것도 아니고 술 먹고 경기를 못 나간다고? 너 진짜 남들이 신인상 감이라고 하니까 무슨 스타라도 된 거 같아? 너 야구 잘해? 조영근만큼 잘하냐고?”
팍!
노예에게 자기의 본분을 한참 일깨워 주고 있는데 내 뒤통수에 불이 난다.
“야! 조영근이 네 친구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민정규 선배가 내 뒤통수를 때리고는 실실 웃고 있다.
팍!
“얌마! 그럼 너는 내 친구냐?”
내 뒤통수를 때린 민정규의 뒤통수를 당사자 조영근이 나타나서 때리고는 자기 자리를 찾아 들어간다.
“아, 형! 사람이 눈치가 없어. 내가 지금 형 도와주는 거잖아.”
“애들 괴롭히지 말고 가서 앉아. 왜 막내들 노는데 껴들어?”
형들이 뒤로 이동하고 나도 자리에 몸을 푹 뉘이고는 술 먹은 멍멍이에게 한마디 더 던졌다.
“오늘, 어제보다 무조건 잘해라.”
- 랩터스 1회부터 선두 타자가 볼넷을 골라 출루에 성공합니다.
- 김소전, 후반기 들어 가장 크게 바뀐 부분이 이거예요. 공을 참습니다. 공을 참아요.
- 후반기 볼넷이 늘면서 삼진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 확실히 선구안이 생긴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리그 대표 배드볼 히터였거든요. 선구안이 좋아졌어요. 시즌 중에 선구안이 좋아진다? 이건 정말 대단해요.
머릿속에 내가 경준이한테 너무 뭐라고 했나 고민을 하다 높은 공 들어오는 거를 그냥 놔뒀더니 볼넷이 생겼다.
이러고 걸어 나가니 미안하긴 하지만 오늘도 코치님한테 치느님을 받을 생각을 하자 미안함이 싹 가신다.
과정이야 어땠든 결과가 좋으면 장땡이다. 코치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 오늘 2번 오랜만에 라정안 선수가 올라왔습니다.
- 이번 시즌 2번으로 나오던 노경준 선수가 오늘 컨디션 난조로 9번 타순에 배치됐죠. 선수들 컨디션 관리 잘해야 합니다.
투구 폼 큰 우완 투수에 작전 능력 좋은 좌타자. 거기에 발 빠른 1루 주자. 그러면 뭐… 뛰어야지.
- 타자 크게 헛스윙. 1루 주자, 2루로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세잎! 김소전 초구부터 과감하게 뜁니다.
- 타이밍을 완벽히 뺏겼죠. 김소전 1회부터 폭스 배터리를 힘들게 합니다.
확실히 센스있는 타자가 타석에 있으니 뛰기도 쉽다. 경준이도 나 뛸 때 헛스윙 많이 해주긴 하지만 그건 진짜 치려다 못 치는 거고, 라정안 선배는 애매하게 느리게 그리고 마지막까지 포수의 팔 각도에 걸리적거리는 스윙을 돌린다.
시작부터 참 좋다.
- 번트! 라정안 3루로 기습적인 번트를 댔습니다. 3루수 대쉬. 1루 송구! 1루. 세잎! 세잎입니다.
- 살았나요? 잘댔어요. 좋은 코스로 잘댔고, 3루수 이현복 선수도 잘 잡아서 던졌거든요.
- 폭스, 비디오 판독 신청합니다.
- 1회부터 양 팀 다 필사적으로 경기에 임하네요. 작전 없는 랩터스가 번트를 대지 않나 폭스는 1회부터 비디오 판독을 실시하지 않나. 오늘도 재미있겠습니다.
- 판독 결과 나왔습니다. 아웃! 비디오 판독 결과 아웃으로 결과가 바뀌었습니다.
- 저는 모르겠습니다. 간발의 차이거든요. 라정안 아깝겠네요.
나이 많은 선배들이 낡아서 못 뛰는 건 이해하지만 주장은 이제 몇 살 먹었다고 주력이 떨어지고 있어. 안 되겠네. 내 운동 노예가 뺀질거리려는 거 같은데 고참을 노예로 삼아볼까나.
- 3번 황경철입니다.
- 황경철. 이번 시즌 자리를 잡는 모습이죠.
- 이번 시즌 24홈런을 치면서 랩터스의 6번을 치고 있습니다만 오늘은 전격적으로 3번에 배치된 황경철입니다.
- 랩터스에서 10년을 키우는 유망주예요. 이제는 뭔가 보여줘야 해요.
오늘 타선 정말 적응 안 되네. 선풍기는 2번에 있어야 제맛인데 3번에 선풍기가 들어오니까 적응 안 되네.
- 황경철 공을 띄웠습니다. 우익수~ 우익수~ 잡아냅니다. 3루 주자 택업~
- 충분하죠.
- 김소전 홈을 밟습니다. 1:0. 랩터스 1:0으로 앞서갑니다.
안 맞아서 문제지 맞기만 하면 황경철 선배 타구는 최소 워닝트렉이지.
뜬 타구를 끝까지 바라보다가 잡히는 걸 확인하고 홈까지 전력으로 뛰어든다.
대기 타석에 있던 조영근 선배만 보고 뛰다가 천천히 들어오라는 사인을 보고는 슬라이딩은 하지 않고 그대로 홈을 밟는다.
고민할 것 없이 야구 쉽게 되네.
- 지금 굉장히 고급 야구가 나왔어요. 안타 하나 없이 점수가 났어요.
- 그렇습니다. 선두 타자 볼넷, 도루에 이어 희생 번트와 희생 플라이로 간단하게 한 점을 낸 랩터스입니다.
- 이래서 야구가 어려운 거예요. 투수가 선두 타자에게 볼넷 하나 준 죄로 한 점이 났어요. 투수 괴롭죠.
가볍게 들어와 4번 타자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덕아웃에 들어온다. 새뽁으로 점수가 났다고 축하해 주는 선수들. 자리로 들어가는 내 머리를 툭툭 쳐주는 선배들을 지나 내 자리로 들어가자 구석에서 좀비가 쓱 다가온다.
“형어어… 멋져요…….”
이 자슥, 말에 진심이 하나도 안 담겼는데…….
“살아는 있는 거냐?”
“그래도 9번이니까요.”
- 조영근 3구 제대로 받아놓고 칩니다.
- 갔어요.
- 좌익수, 쫓아가기를 포기합니다. 달아나는 솔로 홈런! 랩터스 조영근의 홈런으로 한점 추가하며 2:0으로 앞서나갑니다.
- 오늘 랩터스, 야구 정말 쉽게 하네요. 안타 하나 없이 한 점을 내더니 홈런 한 방으로 간단히 한 점을 더 추가해요. 야구 이렇게 해야죠.
눈치 없는 조영근 선배. 이 타이밍에 홈런을 치고 그래. 이 XX 빨리 수비하러 보내야 하는데. 오늘 힘들어 봐야 해.
- 1회 말, 수비에 들어가는 랩터스. 2점을 안고 오스틴이 마운드에 오릅니다.
- 아무래도 선취점을 얻고 가면 투수의 마음이 편하죠. 기복이 있는 오스틴인데 오늘 편하게 잘 던져줬으면 좋겠네요.
2점을 가지고 1회를 시작하니 선수들의 분위기도 좋다. 수비는 세팅이 끝났으니 우리 퐁당퐁당 투수님아. 너만 잘하면 된다.
- 삼진!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잡고 시작하는 오스틴! 컨디션 좋아 보입니다.
좋구나. 오늘 쉽게 가자.
- 오스틴 공 무시무시합니다.
- 구위는 좋은 투수죠. 제구가 항상 문제인데 오늘은 제구도 되는 모습이에요. 폭스, 쉽지 않겠습니다.
야구라는 게 괜히 투수놀음이라고 하는 게 아니지. 투수 놈이 이렇게 잘하면 답 없지. 난 뭔… 내가 저 공 칠 거 아니니까 그냥 좋다.
- 한복판에 그대로 들어가는 빠른 공! 스트라이크 투! 오스틴 자신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 오늘은 그래도 될 것 같네요. 긁힌다고 하죠. 오늘 그런 날이에요. 공 정말 좋네요.
메이저에 가면 저런 공을 상대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난 안 가겠어요.
- 3구. 이인성 짧게 돌린 배트에 맞았습니다. 유격수! 2루수! 중견수! 중견수 노경준 내려옵니다.
내야 뒤로 애매하게 떴다. 지금은 콜을 확실히 할 때.
“센터! 센터! 경준아! 센터!”
유격수에서 뛰어가는 나보다는 2루가 그리고 2루보다는 들어오는 중견수가 잡아야 할 타구. 중견수를 가리키면서 콜을 계속해 준다.
공을 보고 뛰어드는 중견수. 경준이 정도의 주력이면 앞으로 전력 질주하면서 달려들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타구. 중견수 앞에 짧게 뜬 타구를 잡겠다고 랩터스의 중견수가 꼴사나운 자세로 다이빙을 시도한다.
뭐, 뭐냐. 그 개X 같은 개구리 점프는…….
- 공 빠집니다. 이인성 달립니다.
우선 욕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저 뒤로 흐른 공을 찾아 뛸 시간이다.
개구리가 공을 잡기 쉽도록 공을 쫓다 말고 앉아준 2루수를 뒤로하고 공을 찾아 미친 듯이 뛴다.
공을 잡아챌 때 이미 2루에 다 도착한 타자 주자. 공을 내야로 던지지 않고 그대로 들고 내야로 들어간다. 들어가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개구리의 엉덩이를 툭 쳐준다.
“정신 차리자. 그라운드 나와선 잘하자.”
“네, 형…….”
목소리가 기어가는 이놈, 마음에 안 들지만 갈구는 건 다음이다. 지금은 아니다.
- 1아웃에 주자 2루. 폭스 1회 말 바로 반격의 기회를 잡습니다.
- 주자가 스코어링 포지션에 나갔거든요. 기회를 잡았을 때 점수를 내야 합니다. 점수 낼 수 있을 때 내야 대등한 경기를 할 수 있어요.
우리 투수님, 주자를 등 뒤에 놓고 셋 포지션에 들어가니 어깨부터 허리 발꿈치까지 어색해지시네…….
어쩐지 오늘 1회부터 경기가 쉽다 했어. 랩터스가 이러면 안 되지 암……. 이러면 안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