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거절
옥신각신 끝에 둘이 같이 택시를 탔다.
강남의 골목 골목을 돌아 들어가 그냥 봐도 비싸 보이는 입구로 들어가자 잘생긴 사람들이 앞을 막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박정환 씨가 불러서 왔습니다.”
“모시겠습니다.”
저놈이 돈이 이렇게 많았던가? 처음엔 그냥 흔한 강남의 술집 정도라고 생각했었는데 인테리어부터 직원들까지 무지하게 고급 같은데…….
나만 이렇게 느끼는 게 아님이 확실한 게 내 옆에 멍청이는 온갖 금빛으로 장식된 벽을 쳐다보느라 눈이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쪽팔려서라도 얘 안 데리고 왔어야 하는데. 어휴…….
“들어가십시오.”
한참을 따라 들어가자 한층 더 고급스러운 방이 나온다. 이 XX가 어디 재벌이라도 물었나. 이게 말이 되나…….
문이 열리고 방에 들어가자 이건 뭐… 가관도 아니다.
가장 먼저 한가운데 여자 둘을 끼고 앉아서 술잔을 들고 있는 중년의 아저씨가 시선을 강탈한다. 한숨이 푹 나오는데 그 옆에서 여자 품에 코를 박고 있던 XXX가 나를 바라보고는 말을 건다.
“이야~ 신인왕이 오셨네. 소전아, 이리 와. 와서 우선 인사부터 드리자.”
뭔… 개수작이야.
여자를 밀쳐내고 나에게 달려온 XXX가 나를 저 중년의 아저씨에게 소개하기 시작한다.
“하하, 본부장님. 제가 현역에서 가장 예뻐하던 동생 김소전입니다. 술자리 안 나오는 녀석인데 본부장님 뵈려고 특별히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랩터스에서 가장 핫한 후배 노경준이고요.”
나하고 경준이를 상품 소개하듯 소개하는 XXX를 보자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우선 할 일이 당장은 참는다.
얼굴에 확 피가 쏠리는데 갑자기 이 XX가 옆구리를 푹 찌른다.
“뭐 해. 본부장님께 인사드려야지. 연화 그룹 이배준 본부장님이시다.”
뭐야? 연화 그룹은 뭐야? 난 들어본 적도 없는 회산데.
그래도 할 일이 있으니… 인사는 해야지
“김소전입니다. 경준이 친구가 많이 취했다. 그래서 데리러 왔습니다. 데려가겠습니다.”
고개만 살짝 숙이면서 내 소개를 했다. 그리고는 여기 온 목적을 확실히 밝혔다. 이제 목적 달성을 해야지.
“경준아, 친구 업어라. 가자.”
대답도 안 하고 친구에게 다가가는 경준이. 그걸 보자 날 여기로 부른 박정환이 소리를 친다.
“야! 본부장님 계신 데 어딜 막 움직여! 이 XX들 버르장머리가!”
“박 사장.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세요. 소리 높이지 마요.”
경준이를 제지하던 박정환에게 핀잔을 주는 상석의 아저씨. 넌 뭐냐?
“하하. 선수들 힘드신데 스트레스 좀 풀다 가시라고 모셨더니 그럴 기분이 아니신가 봅니다. 그래도 아쉬우니까 내 술 한잔 받고 가세요.”
박정환에게 하는 톤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바라보며 술잔을 든다.
“저 술 안 합니다.”
“야! 본부장님이 주시면 얼른 받을 것이지!”
“박 사장. 소리 좀 낮춰요. 왜 좋은 자리에서 목소리를 높여요.”
“죄, 죄송합니다.”
허공에서 여러 눈빛이 교차한다.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똥개가 자기 주인이 목줄을 잡아당기자 덤비지는 못하고 꼬리를 내리는 모습. 보기만 해도 역겹다.
“술 한잔하면 좋을 텐데 아쉽네요. 아쉬우니까 물이라도 한잔 받아요.”
어이가 없네. 지가 날 언제 봤다고 술을 주고 물을 준다는 거야.
또다시 내 옆구리가 아파온다.
“얼른 가서 안 받아? 빨리 받아.”
이 XXX가 은퇴했으면 그냥 나 좀 놔주고 살지, 계속 지랄이네
“저 친구만 데리고 가겠습니다. 노시는 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야!”
이 정도 했으면 충분히 예의 차렸지, 왜 자꾸 소리를 질러.
“경준아, 뭐 해! 빨리 업어.”
덩치만 크지, 사람 하나 업는데 낑낑대는 멍청이를 도와주러 움직이자 상석의 아저씨가 다시 입을 연다.
“허허. 내가 좋은 일 하려다가 이런 꼴을 당하네요. 허허.”
좋은 일은 너희끼리 하시고, 언제 나한테 물어보고 하셨나요.
XX. 술을 얼마나 쳐 드셨길래 이렇게 안 들려.
둘이 붙어서 술 취한 멍청이를 끌어내겠다고 낑낑대자 아저씨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놔두세요. 저 친구는 여기 위에 방 있어요. 방으로 올려보내 줄게요.”
“아닙니다. 저희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어허. 술 먹고 쓰러진 친구 데리고 다니려면 힘들어요. 선수들도 다 방 잡아줄 테니까 올라가요.”
이 XX가 보자 보자 하니까.
있는 힘을 다해 술 먹은 포댓자루를 경준이 등에 올려놓고 힘겹게 일어났다.
“가보겠습니다.”
“허허. 술 먹은 사람 데려가기 힘들다니까 그러네. 그러지 말고 방 잡아줄 테니까 올라가요. 박 사장 뭐 해요? 애들 불러서 선수들 쉬게 해주지 않고.”
갑자기 총 맞은 박정환이 옆에 앉은 여자 뒤통수를 때린다.
“넌 뭐 해! 매니저라도 불러야 할 거 아니야!”
가관이다. 이 XX, 야구 경기를 할 때도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후배들 시키더니 여기서도 이러고 있네.
“노경준 뭐 해! 가자.”
“예, 형.”
여기서 더 있다간 못 볼 꼴 볼 것 같아서 등짐 진 경준이를 잡아끌었다. 그 순간…….
“웨… 웩… 우웨웩…….”
경준이 등 뒤에 있는 짐이 갑자기 알 수 없는 액체도 아닌 고체도 아닌 것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머리부터 옷 속으로 가득 알 수 없는 젤 같은 걸로 뒤집어쓴 경준의 발걸음이 멈춘다.
“그러길래 그냥 방으로 가라니까. 선수들 말 안 듣네.”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는 웨이터인지 뭔지 모를 사람들. 경준이와 들쳐메진 짐짝을 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전문가다운 솜씨로 뒷정리를 시작하기 시작한다.
엉겁결에 짐짝을 뺏긴 경준이가 당황하는 사이, 한가운데 앉아 있는 아저씨가 순식간에 여러 가지 명령을 하달한다.
“거기 그 친구는 보살필 애 하나 붙여서 방으로 보내고 여기 날벼락 맞은 친구도 씻겨줄 친구 하나 붙여서 올려 보내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움직이는 사람들. 순식간에 짐짝을 들고 나르더니 경준이도 팔짱을 끼고 데리고 나가려고 한다.
“혀, 형…….”
뭐 하는 놈이길래 이래…….
“걘 놔둬요. 제가 데리고 갑니다. 놔둬요.”
내 말을 들은 경준이가 가만 서서 버티자 옆에 사람들도 억지로 끌고 가지는 못하고 물주의 처분을 바라본다.
“쯧쯧쯧, 박 사장. 요즘도 이렇게 꽉 막힌 친구가 있네요. 나는 선한 마음으로 도와주려는데 이러면 내가 참 기분이 안 좋아지려고 하네.”
본부장인지 뭔지 하는 XX가 괜히 옆에 있는 박정환에게 화살을 날리자 공격당한 애완견이 으르렁거린다.
“김소전! 너 어디서 이렇게 예의 없이 굴어! 어르신이 말씀하시면 그냥 예 하고 따를 것이지! 내가 그렇게 가르쳤어?”
가르치시다니요. 너님이 나한테 가르친 거 시기, 질투, 갈굼. 이런 거밖에 없으신데요.
“술 취한 친구 길거리에서 쓰러질까 봐 데리러 왔습니다. 알아서 돌봐주신다고 하니 가겠습니다.”
박정환이는 보지도 않고 가운데 아저씨한테 통보하고 뒤를 돌았다.
“하… 꼴통이네. 가더라도 이건 가져가. 내가 사람 불러놓고 그냥 보내는 사람이 아니야!”
뭘 준다는 거지? 갑작스러운 선물 공세에 나도 모르게 몸을 돌린다.
지갑을 열어 뭉텅이 지폐를 꺼내는 아저씨. 돈을 들고 나한테 툭툭 손짓을 한다.
하… 재미있게들 사시네.
“가자.”
여전히 옆에서 멍청하게 나만 바라보는 경준이 손을 붙들고 문을 나선다. 금빛으로 물든 복도를 지나 문밖으로 나오니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형. 선원이는 그냥 둬도 되겠죠?”
“이 정도 비싼 데면 네 집보다 훨씬 좋겠다. 신경 꺼.”
“그래도 걱정이 돼서요. 얘 술도 잘 못 먹는데 이렇게 놔두고 가도 되나 싶어요.”
“이제 막 고등학교 졸업한 놈들이 술은 언제 먹었길래 잘 먹는지 못 먹는지 알아?”
“다들 학교 다닐 때부터 먹지 않아요? 그래도 전 운동하느라 안 먹었습니다.”
“왜? 술 먹고 싶어?”
“사주시게요?”
“다시 들어갈까? 아까 예쁜 누나들이 술 따라주면 더 맛있을 텐데.”
“그럴까요?”
찬바람 맞고도 정신 못 차리는 멍청이의 뒤통수를 빵 때려주었다.
가만있다 봉변을 당한 경준이가 소리를 지른다.
“왜 때리고 그래요!”
“세상에 공짜 술은 없다. 너 아까 그 아저씨, 박정환이 얼굴은 본 적 있냐? 얼굴도 모르는 XX들이 사주는 공짜 술은 없어. 그냥 외워.”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는 어린 것을 데리고 다니려니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러고 보면 프로 하면서 공짜 술 먹다 망가진 애들 참 많았는데
야구 선수가 야구보다 다른 게 재미있어지면 성적이 떨어진다. 절대. 절대로 야구보다 재미있는 걸 만들면 안 된다.
“형… 저 저기.”
머리를 흔들며 아까 본 예쁜 누나들의 얼굴을 지워보려 하는데 입구에서 오늘 사태의 주범이 기어 나온다.
“아… 똘아이 XX. 넌 왜 그러고 사냐?”
너처럼 야구 3년하고 은퇴하기 싫어서 이러고 삽니다만.
“선배님, 앞으로 연락 안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이런 식으로 말해 준 게 처음이라 그런가 XXX가 당황했는지 목소리가 커진다.
“무, 무슨 말을 그런 식으로 해? 내가 너랑 경준이 좋은 사람도 소개해 주고 맛있는 것도 먹이려고 하는 거지 다른 거 뭐가 있냐?”
“아까 그분 뭐 하시는 분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분 소개 안 시켜주셔도 되니까 연락하지 마십시오.”
애초에 싹을 잘라야 한다. 못 알아들을 수 없게 강하게 이야기를 해주자 저 쓰레기가 나랑은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쪽을 공략한다.
“아, 이 꼴통 XX. 너야 그렇게 무미건조하게 산다고 치고 네 옆에 경준이까지 너처럼 살게 해야 마음이 편하겠냐?”
나를 보고 이야기하던 놈이 갑자기 경준이에게 쓱 하고 다가간다.
“얘도 이제 성인이 됐는데 술도 한잔하고 사회생활도 하고 지금부터 좋은 사람들 인맥도 쌓아야 하지 않겠어?”
그러더니 토사물 잔뜩 묻은 경준이의 등을 바라보면서 혀를 끌끌 찬다.
“이러고 택시나 타겠어? 방 잡아줄 때 갔으면 샤워도 하고 재미있게 놀 수도 있고 얼마나 좋아. 경준아, 너도 선배 잘못 만나서 고생이 많다.”
저, 저 XX가.
“경준아. 소전이 있는데 내가 뭐 더 붙잡기도 뭐하고……. 가다 목욕이나 해라.”
내 눈치만 보면서 어버버 하는 경준이 손에 뭔가 묵직한 봉투를 쥐여준다.
엉겁결에 봉투를 받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경준이를 보니 화가 치민다. 저 멍청한 놈. 나랑 같이 다녀서 그런가 하는 짓이 나랑 똑같네.
멍청하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을로 사는 건 나 하나로 족하다. 너는 갑으로 살아야 한다.
“노경준! 난 너한테 해줄 건 다 해줬다! 그거 받고 목에 줄달고 저 선배처럼 살 건지, 아니면 몇 년 더 고생해서 네 연봉으로 이런 데서 술 먹을 수 있는 선수가 될 건지 결정해.”
이러고도 안 되면 내가 해줄 게 없지. 난 정말 해줄 수 있는 거 다 해줬다.
“선배님. 이거 도로 가져가십시오. 전 소전이 형이랑 돌아가겠습니다.”
경준이가 받은 봉투를 그대로 박정환의 손에 돌려주자 오늘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XXX가 성질을 낸다.
“김소전!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내가 너한테 해준 게 얼만데, 너도 아니고 후배한테 해주는 거까지 이렇게 초를 쳐야겠어!”
나한테 해준 거? 저 XX가 기억이 안 나나.
안 그래도 내 옆에 멍청이가 자꾸 나 닮아가는 거 같아서 화가 머리끝까지 뻗치는데 감정이 한 번에 확 올라와 헛소리하는 XXX한테 확 다가갔다.
“선배님. 선배님이 후배들한테 해준 거요? 식사 시간에 밥 떠오라고 시키고, 훈련 뒷정리시키고, 방 청소시키고, 야식 배달시키고, 기분 나쁘다고 후배들 집합 걸고. 이런 걸 얘기하시는 겁니까?”
내가 옛날 기억을 상기시키자 또다시 발끈한다.
“그, 그런 건 후배들이 예의상 선배들한테 하는 거야! 나는 인마! 강훈이 형 여자 친구 스타킹도 사다 주고 그랬어!”
미치겠네…….
“그건 선배님이 XX 같아서 그런거고, 여기까지 하시죠. 선배님 경준이부터만 해도 선배님이랑 공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앱니다. 그만 해요. 저랑만 합시다.”
박정환보다 10센티미터는 큰 내가 위에서 내려다보며 얘기를 하자 밑에 있는 얼굴이 발악을 한다.
“이 XX. 야구 좀 되니까 이제 위아래가 없지! 이 XX야! 내가 너 선배야! 어디서 눈을 부라려.”
“그래서 내가 선배님 해주잖아요. 나랑만 하시라고요. 얘는 건들지 말고.”
“이 XX. 반짝한다고 개념이 없어졌어. 너 XX. 그렇게 까불다 죽는다.”
이렇게 대들어 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내가 위에서 내려다보니 얘가 입만 살아서 참… 없어 보이네. 더군다나 전에는 얘가 몸이 더 좋았던 것 같은데 내가 벌크업이 돼서 그런가, 얘가 더 왜소해 보이고 어쩐지 안쓰러워 보이네.
안타까운 마음을 뒤에 두고 경준이에게 소리쳤다.
“노경준! 너 뭐 하냐! 택시 안 잡아!”
“네… 네, 형…. 잡아 올게요.”
내 고함에 경준이가 큰길로 나서서 손을 흔들고 택시 앱을 켜고 별짓을 다 하기 시작한다.
“이… 꼴통 XX. 넌 진짜 조심해라.”
은퇴하신 선배의 경고가 어쩐지 무섭지 않다. 이제는 그저 좀 애처롭다.
“노경준! 따로 연락할게. 형이랑 따로 보자.”
내 뒤에 큰길에서 미친놈처럼 손을 흔드는 경준이에게 한마디를 하고는 다시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미친놈을 보니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몰아친다.
살면서 이렇게 누구에게 크게 이야기해 본 적이 별로 없는데. 그것도 나 때문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서 본 적이 별로 없는데. 가슴이 후련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부담감도 생기고 복잡하다.
어쨌든 조용해진 거리. 천천히 발걸음을 경준이에게로 옮긴다.
“형… 택시 기사님들이 저 토 묻었다고 택시 안 태워준대요.”
“하… 진짜……. 우리 그럼 어떻게 가냐?”
“거, 걸어갈까요?”
꼴통은 진짜 이 XX가 꼴통이지. 머리가 아파온다.
- 승리~ 승리의 랩터스~
“형, 전화 오는데요.”
응? 전화? 누구지? 아… 얘는 왜…….
“여보세요.”
- 너 어딘데 그렇게 시끄러워? 집에 안 갔어? 밖이야?
“어. 그게 여기 강남인데.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하필 이 시간에 전화를 건 루다. 루다에게 강남 한복판에서 택시를 못 타고 잠실까지 걸어갈 거라는 얘기를 털어놓았다.
- 하여간 허우대만 멀쩡하지 잘하는 게 하나도 없어요. 기다려! 누나가 간다.
“오긴 어딜 와.”
- 택시도 못 탄다며. 10분만 기다려 금방 갈게.
아… 얘 오면 더 머리 아파지는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