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올스타전 퍼펙트 피처
올스타전.
리그의 전반기를 마치면서 이번 시즌 최고의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즐거운 게임을 팬들에게 선보이는 자리.
이 경기를 위해 스타 선수들은 우스꽝스러운 분장도 하고 다른 선수들 타격 폼도 흉내내고 라이벌 팀 선수들끼리 친목질도 하고 팬들을 위해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한다.
이런 즐거운 올스타전에 항상 문제가 되는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몰표. 특히나 올해처럼 랩터스가 전반기에 성적이 좋을 때 나타나는 올스타 줄 세우기가 타 팀 팬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올스타전에 참가하는 선수는 팀당 총 24명, 팬 투표로 뽑히는 포지션별 1인 12명과 감독 추천 12명. 그리고 평소에는 야구장에서 야구는 안 보고 먹방만 찍던 랩터스 팬들은 올스타전 투표가 시작되면 기가 막히게 하루 세 번 꼬박꼬박 올스타전 팬 투표에 참가한다.
물론 팬 투표 인증을 하면 야구장 내 식음료 20% 할인을 해주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는 일반 팬들도 참여율이 타 팀을 압도한다.
이게 다 긴긴 암흑기에 스트레스를 풀 길이 없던 랩터스 팬들의 한이 응축돼서 나타나는 현상이긴 하지만 실제로 줄 세우기가 발생하면… 난감하다
드림과 나눔으로 나뉜 올스타팀에서 나눔 올스타로 소속된 랩터스. 그리고 나눔 올스타 팬 투표 1위 12자리 중 8자리가 랩터스 차지가 되었다.
올해 팀 성적만 1등이지, 개인 성적으로는 선발과 마무리를 제외하고는 1위 자리를 지키는 선수가 하나도 없는데도 7자리를 쓸어 간 랩터스. 뽑힌 선수들도 감독 추천으로 나온 선수들도 서로 얼굴 보기가 참 민망하다.
그나마 올해는 팀이 1등이라도 하니 다행이지, 10년 전에는 팀 성적이 꼴찌일 때 항의의 표시로 12자리를 몰아 준 적도 있었다. 그때 생각하면 지금은… 양반이지.
“형 올해도 뽑혔네. 어째~”
“야, 말도 마. 나 집에서 소박맞게 생겼어.”
“올해는 2등이라고 그렇게 좋아하더니… 크크크, 형수님이 인별에 숙소 사진은 왜 올려서… 크크크.”
“말도 마라. 팬들이 그거 보더니 화력 집중하는데 장난 아니더라. 하루에 3만 표씩 따라붙더라.”
“크크크, 잘된 거 아니야? 형수님 호캉스 하시겠다고 애들은 다 형한테 맡긴다고 했다면서?”
“그렇게 생각하면 여기가 낫기도 하네.”
덕아웃에 모인 선수들끼리 한가롭게 즐거운 서로의 일상을 물어보는 가운데 즐거운 잔치에 초를 치는 멍청한 것들이 나타난다.
“경준아. 집중하고 명상해야지. 그렇지. 오늘 우리는 팀을 대표해서 팬들에게 최고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네, 형. 흡~ 하~ 단전에서부터 흡~ 하~”
식전 행사를 시작하기 전, 그라운드 한쪽 구석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빠져든 두 멍청이. 슬슬 입장하기 시작하는 팬들이 야구장에 들어와 처음 보는 게 못난이 형제임을 들고 왔던 대포 카메라의 렌즈를 바꿔 끼고는 인별에 사진을 올린다.
#올스타전 #날씨좋음 #멀리보이는선수들 #최강훈없어아쉽
- 2027시즌 별들의 잔치 KBO 올스타전. 시원한 돔구장 고척에서 보내드립니다.
- 이번 시즌 치열한 순위 다툼이 벌어지는 재미있는 시즌이죠…….
본 경기는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는데 12시부터 시작되는 중계. 경기에 앞서 진행해야 할 일정이 산더미다.
- 이번 올스타전은 진행 방식을 바꿔 봤습니다.
- 팬들이 발걸음을 두 번 하게 하지 않겠다며 홈런 레이스, 퍼펙트 피칭, 슈퍼 레이스까지 오늘 다 하죠.
- 어제 퓨처스 올스타도 똑같이 진행이 되었습니다.
- 어제는 진행이 엉망진창이었는데 오늘은 잘했으면 좋겠네요.
야구장에서 샤우팅 넘치는 홈구장 응원 단장의 사회로 홈런 레이스부터 시작이 된다.
각 팀의 홈런 타자들이 나가서 홈런을 하나둘 만들어 낼 때마다 팬들의 함성이 터져 나온다.
- 조영근! 5홈런! 나눔 올스타 예선 1위로 결승에 진출합니다.
- 이번 시즌 장타력이 많이 줄어든 모습을 보여준 조영근이거든요. 세간의 우려를 싹 잊게 만드는 홈런 쇼를 보여주네요.
- 후반기에 더 기대가 되는 조영근, 결승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됩니다.
시간은 없고 할 것은 많고. KBO 행사 진행 능력을 보면 하루에 한 개 이상의 이벤트는 절대 무리인데, 한날에 갖가지 행사를 다 때려 넣다 보니 경기장에 뭘 하는지 모르게 주변 진행 요원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그 와중에 그라운드에 난입해서 중계 화면을 뽑아내는 카메라까지. 이게 야구를 하겠다는 건지 운동회를 하겠다는 건지, 도무지 구분이 안 가는 상황들이 어지럽게 펼쳐진다.
- 다음은 퍼펙트 피처입니다.
- 각 팀의 대표 선수들이 나와서 세워놓은 10개의 배트를 쓰러트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최고 기록은 소닉스 임태수 선수의 8점입니다.
“형, 긴장하지 말고 호흡… 호흡… 좋은 생각하고. 다시 호흡… 후… 후… 호흡…….”
랩터스 대표로 이벤트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를 팀 후배가 개인 마크로 케어를 시작한다. 한국 시리즈도 나갔던 선수가 마음 편하게 해야 하는 이벤트 경기에 쓸데없이 긴장을 한다.
점점 다가오는 출전시간. 선수의 심장 박동이 더욱 빨라진다.
- 타이탄스 고우준! 5점을 기록하면서 나눔 올스타 1위에 올라섭니다. 고우준 제구가 안 좋은 선수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최고의 기록입니다.
- 알던 고우준 맞나요? 이 정도면 구속을 조금만 줄여볼 생각을 가져도 될 것 같아요. 고우준 선수의 제구가 이 정도인 줄은 저도 몰랐어요.
타이탄스의 고우준 선배가 배트를 5개 쓰러트리고는 의기양양하게 내려온다. 다음은… 내 차례다
- 나눔 올스타의 마지막 선수. 랩터스의 김소전입니다.
- 고등학교 때 투수 출신이죠. 송구가 정확한 선수로 알려져 있는 만큼 오늘 기대가 큽니다.
“형, 파이팅~”
“호… 파이팅…….”
빨라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마운드로 향하는 한 걸음 한 걸음에 호흡을 크게 가져 간다.
- 김소전 시작합니다.
- 공 10개로 배트 10개를 쓰러트려야 합니다. 절대 쉽지 않아요.
- 1구. 가운데 배트를 정확하게 넘어트립니다.
- 와… 지금 뭐죠? 스피드 건을 대봤으면 좋겠어요. 전력투구거든요. 그냥 봐도 150은 넘을 거 같아요.
- 다른 선수들과는 확실히 다르긴 합니다. 다른 선수들은 배팅볼 던지듯이 살살 던지는데 김소전 선수는 확실히 강하게 던지고 있습니다.
천천히 던졌다가는 핀 포인트 제구를 할 자신이 없다. 차라리 경준이하고 배팅 연습할 때처럼 제대로 세게 던지는 게 확률이 높을 것 같다.
자세를 가다듬고 구분 동작을 신경 쓰면서 쾅 하고 공을 때린다.
- 8구. 다시 넘어갑니다. 공 8개로 8번째 배트를 넘어트리는 김소전! 임태수의 8개와 타이를 이룹니다.
- 재작년 임태수 선수가 8개로 최고 기록이었거든요. 그런데 김소전 아직 두 개가 남았는데도 8개에요. 심지어 김소전은 투수가 아니라 야수란 말이죠. 대단합니다.
배트 헤드에 경준이 얼굴을 떠올리면서 투쟁심을 끌어올린다. 배트가 경준이보다 잘생기긴 했지만 그 정도는 무시하고 공을 쥔 손에 힘을 불어 넣는다.
너는 나한테 높은 공만 던지지! 난 네가 절대 칠 수 없는 낮은 공을 찔러 넣어 줄 것이다!
- 9개! 공 9개로 배트 9개를 쓰러트리는 신기를 보여주는 김소전!
- 김민중 감독, 표정이 묘하네요. 저 같아도 그럴 것 같아요. 그냥 눈으로 봐도 150은 되는 공이 묵직하게 날아가서 배트를 터트릴 듯 때려주고 있어요. 이 선수, 왜 야수 하죠? 당장 마운드에 세우고 싶은 공을 던지고 있어요.
후… 후……. 하나… 하나 남았다.
하나…….
노경준! 네놈 얼굴을 박살 내고 내가 너보다 낫다는 걸 보여주겠다!
“이얍!”
- 10개! 김소전 기합까지 넣어가며 던진 마지막 공에 10번째 배트가 넘어갑니다! 퍼펙트! 진짜 퍼펙트 피처에 걸맞은 투구를 보여준 김소전! 나눔 올스타 1위로 결승에 진출합니다.
- 마지막 공은 진짜 무섭네요. 타석에서 보면 더 위력 있어 보일 것 같거든요. 이따 김민중 감독 좀 만나 봐야겠어요. 이게 뭔가요.
끝났다. 나의 완벽한 승리. 치열한 승부를 끝내고 덕아웃으로 걸어 내려오는데 멀리서 누렁이 같은 경준이가 뛰쳐나온다.
“형, 최고예요!”
미친 누렁이가 갑자기 달려들어 내게 안긴다.
야 이~ 무거워 꺼져!
- 하하하, 노경준 선수가 김소전 선수에게 달려들어 얼싸안습니다. 랩터스 팬들이 두 선수의 캐미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오늘 또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장면을 연출해 주네요.
- 김소전과 노경준, 랩터스의 미래죠. 랩터스 팬들, 밥 안먹어도 배부르시겠어요.
욕을 해야 하는데 보는 눈이 많으니 욕도 못 하고 조심조심 누렁이를 떼어내 본다.
“형. 형이 진짜 최고예요. 어쩐지 형이 배팅 볼 던져줄 때마다 공이 잘 날아가던데. 그게 다 형 제구가 좋아서였나 봐요.”
뭐… 난 안 맞으려고 별별 짓을 다 하는데 공이 잘 날아가? 넌 다음에 보자.
내가 잡아먹을 듯 쏘아보는데도 눈치 없는 누렁이가 웃으며 다시 마운드를 가리킨다.
“형. 결승이래요. 가서 이번에도 이기고 와요.”
응? 아… 이거 예선이지? 결승은 따로… 하, 괜히 힘 뺐어.
- 퍼펙트 피칭, 바로 시작합니다. 드림의 이현이가 결승에서 먼저 던지겠습니다.
- 오늘 올스타전 재미있네요. 나눔에선 야수 김소전이 결승에 올라오고 드림에선 리그 대표 제구 안 되는 투수 이현이가 결승에 올라왔습니다.
- 3개씩 던지는 서든 데스 방식이죠. 이거 재미있네요. 제구 안 되는 투수가 이기느냐, 송구 좋은 야수가 이기느냐. 누가 이겨도 팬들은 재밌겠어요.
내 할 일에 몰두해, 상대가 누가 나왔는지도 몰랐는데… 이현이라니… 뻑하면 손에서 공이 빠져 타자들을 홈플레이트에서 멀리 떨어지게 만드는 이현이가 배트를 4개나 맞추면서 결승에 올라왔다고?
저 XX… 사기꾼이었네.
- 이현이, 하나도 못 맞추고 마운드를 내려옵니다. 김소전에 예선에서 10개 던진 걸 봐서 그랬을까요. 부담감이 있었나 봅니다.
- 얼굴은 편해 보이거든요. 이현이 제구를 생각하면 예선에 평생 운을 다 쓴 것 같긴 해요.
- 다음 선수, 오늘 말 그대로 퍼펙트한 피처 김소전입니다.
- 저기 카메라에 스피드 건 들고 뛰어가는 사람 보이죠? 우리 피디예요. 스피드 건 찍을 줄이나 아는지 모르겠어요.
상대가 0점을 기록했다고 마음을 놓으면 안 된다. 항상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가짐으로 호흡을 가다듬고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다 깨운다.
- 1구. 가운데 배트가 쓰러집니다.
- 배트가 박살 나는 줄 알았어요. 공 진짜 좋네요.
- 고등학교 때 150을 던졌다고 하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네요.
- 외야에서 스텝 밟으면서 던지는 것만 봐도 강견임은 확실한데, 마운드에서도 강력하네요. 투수를 시켜봐야겠어요.
- 저… 피디에게서 구속이 들어왔는데 143. 143이 찍혔다고 합니다.
- 143… 보이기는 더 나올 것도 같은데… 투수도 아니고 야수가 143은 대단한 겁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운드에 오르니까 야구장의 모든 기운이 나에게 몰리는 것 같다.
공을 채는 손끝의 느낌도 너무 좋고 배트가 튕겨져 나가는 걸 보는 것도 너무 좋다.
이대로 계속 간다.
- 2구, 다시 한번 배트가 쓰러집니다.
- 이번엔 전광판에 구속이 표기되네요. 저건 좀… 믿기 힘드네요.
- 154가 나왔습니다. 전광판에 구속 154가 표기됩니다.
- 스피드 건이 항상 정확한 숫자를 찍어주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이런 이벤트성 투구에서는 정확하지 않을 때가 있어서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대단하네요. 154.
- 투수 중에도 154를 못 던지는 투수가 많은데 김소전이 154를 기록합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내가 연속 두 개를 맞추니 관중들의 관심도 올라가는가 보다. 하나 더, 마지막 공은 내 베스트로 달려든다.
- 승부는 이미 두 개를 쓰러트린 김소전의 우승으로 확정된 가운데 퍼펙트 피처 우승자 김소전이 마지막 투구를 준비합니다.
- 자세부터 진지하죠. 투수들이 배워야 해요. 마운드 위에 올라간 투수는 저래야 하거든요. 준비 자세부터 이미 집중하고 있어요.
- 퍼펙트! 마지막 배트까지 넘어트리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13개의 공을 모두 배트에 맞추는 김소전. 2027 올스타전에서 말 그대로 퍼펙트 피처에 등극합니다.
- 농담이 아니라 진짜 감독을 만나봐야겠어요.
- 전광판에 스피드… 믿을 수가 없네요.
- 158. 이번 시즌 이시윤의 최고 구속이 얼마죠? 이거 이시윤보다 빠른 거 같은데요. 투수를 했어야 하네요. 김소전, 투수를 했어야 해요.
후… 안도감과 성취감이 한 번에 몰려든다.
올스타전에 와서 팬들의 투표에 보답은 했다는 생각과 이벤트 경기지만 1등을 했다는 기쁨. 두 가지 마음이 피어오르면서 내 의지랑 상관없이 입꼬리가 쓱 올라간다.
뿌듯한 마음을 안고 마운드를 내려가는데 사회자가 나를 불러 세운다. 그리고는 곧바로 KBO 총재님에게 데려간다.
- 시상식이 바로 진행되네요. 김소전 선수에게 퍼펙트 피처 우승 상금 300만 원이 수여됩니다.
엉겁결에 끌려가서 총재님과 악수하고 피켓을 들었다. 상금 300만 원. 공 13개 던지고 300만 원……. 이거 할 만한데.
“퍼펙트 피처 우승자 김소전 선수입니다!”
300만 원으로 뭘 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갑자기 타이탄스 응원단장이 나타나 마이크를 들이민다.
“우승 소감 좀 말씀해 주세요.”
“팬분들이 이 자리까지 보내주셔서 열심히 했는데 좋은 결과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구속이 158까지 나왔습니다. 투수를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뭐? 158? 내가? 에이, 설마.
“구속은 모르겠고 오늘 공이 잘 채여서 좋았습니다. 타자만 하기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투수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퍼펙트 피처 다음 슈퍼 레이스에도 참가를 하셔야 하는데, 슈퍼 레이스도 우승하실 자신 있으십니까?”
“노경준 선수와 연습 많이 했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승 상금이 300만 원인데 어디다 쓰실 건가요?”
“음… 뭐 할까요? 아… 구단에서 구단 버스 타지 말고 차 타고 다니라는데, 상금으로 중고차 하나 사겠습니다.”
다들 올스타전 현장으로 나가 있느라 조용하던 랩터스 사무실에서 단장의 날카로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