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억 FA선수가 되다-70화 (70/204)

70화. 매의 눈 장착

- 치열한 순위 다툼이 벌어지는 가운데 최근 악연으로 엮인 두 팀이 만났습니다. 1위와 한 게임 차, 2위를 달리고 있는 랩터스와 시즌 중 감독을 새로 선임함 최하위 팀 폭스. 양 팀의 경기가 창원에서 펼쳐집니다.

타격 코치님이 폭스의 감독으로 가고 나서 처음으로 만나는 맞대결. 단장이 창원 원정전 팀 미팅에 나와 경기에 지면 올해 연봉 반으로 깎겠다고 협박하기까지 한지라 선수단의 긴장감이 사뭇 높아졌다.

코치는 자기들이 뺏겨놓고 괜히 선수들한테 화풀이야…….

- 오늘 폭스의 선발 투수는 부상에서 돌아온 정선우 선수입니다.

- 팔꿈치 수술로 지난 시즌을 통으로 쉬고 이번 시즌에 복귀하려다 마지막 단계에서 통증이 재발하면서 오래 걸렸어요. 이번 시즌 첫 등판인데 몸 상태가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 장선우, 이번 시즌 2군 경기 기록도 없습니다.

- 경기 전 박수훈 감독에게 물어봤더니 트레이닝 팀에서 OK를 했다고 하거든요. 길게는 안 쓰고 공 80개 정도를 보고 있다고 했어요. 한 시즌 반을 쉬고 나오는 복귀전 준비가 잘됐을 거라고 믿어봅니다.

이번 시즌에 외국인 투수를 둘 다 교체하고 타자도 교체 알아본다고 하고 있고, 그것도 모자라 감독도 바꾸고 포수도 부상……. 안되는 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폭스.

그냥 보기만 해도 느낌이 확 오지만 타석에 들어가 수비수들을 바라보니 분위기가 더 침울하다. 전형적인 지는 팀 분위기.

내가 이런 팀에서 오래 뛰어봐서 잘 아는데, 팀 분위기가 이렇게 잡히면……. 오래간다. 잘못하면 몇 년은 암흑기다.

한때는 16승도 했던 선발 투수가 오랜만에 올라와 그런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마운드를 정성껏 고르기 시작한다.

보통 1번 타자는 미리 시나리오 다 짜서 들어왔을 텐데도 바로 준비를 못 하고 오래 걸린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지는 않고 정말 간절해 보인다.

투수의 진지한 얼굴을 보는데 갑자기 우리 팀의 정신 나간 타격 코치의 얼굴이 떠오른다. 경기 중에 이상한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감독님 타격의 비밀이라는 헛소리가 머릿속을 떠다닌다.

“타석에 들어가면 우선 멀리 외야 넘어 산을 바라봐~ 산이 없으면 아파트나 건물, 그런 거라도 대충 바라봐. 괜히 집중해서 또렷하게 보지 말고 멍하게 바라봐.”

멀리 산…은 없고. 외야 뒤편에 마트가 있다. 마트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 마트 로고 송이……. 가격이~ 가격이~

뭐야, 이건…….

우선 머릿속에서 노래를 치우자 투수가 투수판 위에 올라선다.

“그다음에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가면 투수를 크게 대충 보는 거야.”

마트를 향했던 시선을 슬슬 투수에게 맞춘다. 투수의 손을 보는 게 아니라 스리슬쩍 투수를 전체적으로 훑어준다. 장선우 선배… 얼굴은 나만 못하지만 기럭지가 참으로 훌륭하군…….

“투수가 준비 동작에 들어갈 때부터 슬슬 시선을 팔로 움직여.”

마운드 위 투수가 포수와의 사인을 마치고 투구 자세에 들어간다. 이때까지 투수의 몸을 감상하던 눈이 투수의 팔로 이동하고 투수의 팔꿈치를 타깃 삼아 눈동자가 추적을 시작한다.

“투구가 시작되면 온 신경을 공에 쏟는 거야. 그러면 공을 흔들림 없이 정확하게 볼 수 있게 된다.”

몸 뒤로 숨어 들어갔던 공이 투수 머리 뒤로 까꿍 하고 나타나 탑포인트로 올라온다. 이 순간 투수의 손끝에 시신경의 모든 세포를 집중시킨다.

확연히 보이는 찍어 잡은 손가락 두 개. 직구다.

- 벼락같은 타격. 타구 쭉쭉 뻗어 나갑니다.

- 갔어요.

- 우측 관중석 상단으로 떨어지는 큰 홈런이 나옵니다.

- 초구부터 제대로 받아놓고 쳤어요. 장선우 선수, 복귀전부터 호되게 신고를 하네요.

릴리스 포인트에서 공을 놓는 순간부터 공에 회전이 걸려 들어오는 궤적까지 흔들림 없이 선명하게 보였다. 우투수의 바깥쪽 낮게 깔려 들어오는 140짜리 직구.

구종도 궤적도 알았겠다, 배팅볼 머신 때리는 것처럼 마음 편히 풀스윙으로 잡아당겼다.

맞는 순간 느낌이 왔다. 이건 볼 것도 없다.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고 들어오자 뒤 타자가 반갑게 맞아준다. 초구부터 때려서 뒤 타자 공 볼 시간도 안 만들어줬으니 미안한 마음에 팁 하나 전수해 준다.

“경준아. 코치님 얘기대로 해봐. 공 진짜 잘 보여.”

“네? 형! 저 바보 아니에요!”

사람이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 저놈은 내가 진정성 있게 간증을 하는데도 듣는 척도 안 한다. 어휴… 난 분명히 알려줬다.

덕아웃에 들어와서 두들겨 맞고는 곧장 타격 코치에게 다가갔다.

“코치님. 진짜예요. 필살기 써봤더니 진짜 손가락부터 공까지 다 선명하게 보여요.”

내 홈런을 보고 빙그레 미소 짓던 코치가 갑자기 정색한다.

“홈런 쳤다고 까불어. 내가 현역 때 감독님한테 당한 게 억울해서 써먹었더니, 나 타격 못 한다고 놀리는 거지? 내가 써먹은 농담을 나한테 다시 하는 놈이 어딨어. 다음엔 참신한 거로 가지고 와서 해봐. 내가 알면서도 속아줄게.”

뭐야! 당신이 알려준 거잖아.

“코치님 진짜라고요. 코치님이 시킨 대로 하니까 정말 공이 잘 보인다고요. 진짜예요. 공에 집중이 확 되면서 공을 잘 볼 수 있게 된다니까요.”

내가 진지하게 간증을 이어가자 타격 코치가 귀찮다는 듯 나를 내쫓는다.

“알았어, 알았어. 믿는 척해 줄 게. 됐지? 아… 저 노경준. 너나 저놈이나 어쩜 저렇게 한결같이 나쁜 공에 손이 나가냐. 경준아! 천천히 해! 천천히!”

저놈은 그냥 선구안이라는 게 없어서 저러는 거고 나는 내 타격 스타일상 투수 움직임에 맞춰 무조건 중심이동을 해야 하니까 나쁜 공도 쳐야 하는 거고 엄연히 다른 겁니다.

“코치님. 제가 들어오면서 경준이한테도 비밀을 알려줬으니 기대하셔도 될 겁니다. 이거 되는 거예요. 확실해요.”

기적을 받은 신도가 신에 대한 찬양을 이어 나갈 때 신의 절망적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야! 되긴 뭐가 돼. 삼진이잖아. 저놈 떨어지는 공은 좀 보고 치라니까……. 아……. 소전아, 장선우 쿠세 좀 찾아서 알려줘 봐. 120짜리 커브에 속수무책이면 오늘 경준이 힘들다.”

그걸 왜 나한테 그러세요. 그거 하라고 타격 코치가 있는 건데. 난 이번에 배운 먼 산 보기를 마스터하겠습니다. 이거 마스터하면 귀찮게 쿠세 찾기 안 해도 돼요.

- 3회 초. 1사 주자 없이 타석에 김소전 들어옵니다. 오늘 첫 타석에 솔로 홈런이 하나 있습니다.

- 장선우, 1회 초에 김소전에게 홈런 맞고 정신이 확 들은 거 같아요. 1회에 홈런, 2회에 빗맞은 안타 하나 말고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 재활 기간이 길었는데 재활이 잘된 모습입니다.

- 그래 보이죠. 구속도 147까지 나오고 있고 커브의 각도 좋아 보이거든요. 선발진이 붕괴된 폭스의 큰 힘이 되겠어요.

안 맞을 때는 그렇게 들어가기 싫었던 타석이 오늘은 너무 즐겁다. 웨이팅 서클에서 타석으로 가는 길에 꽃향기마저 피어오르는 것 같다.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걸 참지 못하고 헤헤거리며 타석에 들어가자 시비가 걸려온다.

“하나 쳤다고 까불지?”

“아닙니다. 장선우 선배님 돌아오신 것 같아 기뻐서 그렇습니다.”

“너 선우랑 만난 적이 있어? 너 상대 전적이 없는데?”

아… 그랬나요? 지난 생에 탈탈 털렸던 기억은 수두룩 빽빽한데… 이번 생엔 없었군요. 미안합니다.

“TV로 봤습니다. 평소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푸, 풋……. 존경. 적당히 해라. 그럼 난 어떠냐?”

너? 이영창? 백업 포수? 국가 대표 송철형도 아니고 이영창은… 뭐……. 타격은 재능 없는 평범한 백업이지.

“이번에 하나 주시면 앞으로 존경하겠습니다.”

“오냐~ 가운데 줄 테니까 앞으로 존경해라.”

“직구 부탁드립니다.”

“주는 대로 칠 것이지 주문이 많아. 기분이다. 한가운데 직구 잘 쳐봐.”

“존경합니다, 선배님.”

투수가 자세를 잡기 전 경기장을 쭉 둘러보았다. 지금까지 타석에 들어서서 투수만 노려보느라 특별한 일 아니고는 주변을 살펴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보니 여러 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다시 돌아온 팀의 에이스를 간절히 응원하는 홈팀 관중들, 한 줌밖에 안 되지만 서울서 여기를 어떻게 왔는지 와준 것만도 고마운 랩터스 팬들.

저 멀리 외야 관중석에서 뽀뽀를 하고 있는 연인… 뭐, 뭐야? 저건? 신성한 야구장에서 저게 무슨 해괴망측한 짓거리야?

왜인지 모르겠지만 뱃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게 쭉 차고 오른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투수를 바라보고 투수의 던지는 타이밍에 맞춰 눈으로 공을 쫓는다.

탑으로 올라간 투수의 손. 내 눈에 투수의 손등이 보이고 공이 살짝 떠오른다.

커브구나.

들어 올리던 다리를 조금 더 높이 끌어올려 본다. 투구의 궤적을 쫓으면서 중심을 그대로 앞으로 끌고 나가면서 팔을 최대한 뒤에 남겨둔다.

앞발이 땅에 착지하고 잔뜩 꼬여 있던 몸을 단번에 풀어내며 투수를 향해 퍼 올려본다.

아, 실수. 다 너무 잘 맞았네.

- 김소전! 폭스의 야수들, 공을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김소전~ 타구~ 창원 폭스 파크 가장 깊은 곳을 날아 전광판 하단을 때립니다~ 홈런~ 연타석 홈런을 때려내는 김소전! 장선우 선수의 고개를 떨구게 만드는 김소전의 대형 홈런이 나왔습니다.

- 큰 타구가 나왔어요. 야구장 가장 먼 센터 방향으로 날아간 타구였거든요. 전광판이 아니었으면 장외로 나갔을 수도 있을 타구가 나왔어요.

- 중계하면서 이 정도로 큰 타구는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 오늘 김소전 선수의 두 타석을 보면서 뭔가 타격이 한 단계 상승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느린 화면 보면 타격 메커니즘 상의 변화는 거의 없어요. 그런데 어딘지 모르는 여유가 느껴집니다.

- 심리적인 변화가 있을까요? 아니면 선수를 두고 떠난 타격 코치에 대한 마음이 경기에 반영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까요?

- 김소전 선수, 굉장히 성실하고 코치진의 예쁨을 많이 받는 선수거든요. 다른 팀 감독으로 간 스승님에게 이만큼 컸다고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느린 화면 다시 나오는데 완벽하네요. 레그킥 하면서 타이밍 맞추는 거 보세요. 어린 선수가 타격의 정점에 오른 모습이에요.

아… 이게 아닌데……. 공이 너무 수직으로 떨어지다 보니 일직선으로 뻗어버렸다.

내가 원한 타구는 살짝 잡아당겨서 신성한 야구장을 더럽힌 커플에게 응징을 가하는 거였는데, 실패했다.

홈런을 치고도 기분이 안 좋아 씩씩거리며 그라운드를 돌아 들어오는데 홈에서 다시 한번 나와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2번 타자가 내 신앙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형. 진짜 산보다 치면 홈런 나와요?”

“여기는 산이 없으니까 저기 마트 보고 있다가 투수 봐. 확실히 효과 있다.”

몸으로 신의 축복을 보여준 나를 항해 긴가민가한 눈으로 계속 의문을 제시하며 타석에 들어가는 타자.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내가 이렇게 기적을 행하는데 보고 믿어야지……. 쯧쯧쯧.

- 헛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노경준. 떨어지는 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합니다.

- 저런 애매한 스윙을 하면 안 되거든요. 치겠다고 판단을 했으면 확실히 스윙을 해줘야 해요. 공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까 저런 스윙이 나오는 거예요. 노경준, 이렇게 자신감 없는 보여준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습니다.

“형! 안보이잖아요! 손가락은 무슨 손가락이 보여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마트 노래 따라부르다가 제대로 돌리지도 못하고 죽었잖아요.”

에효… 이 믿음이 부족한 놈. 슬슬 보다가 마지막에 딱 집중해야 하는 것을…….

“너 정성이 부족해서 그래. 저기 타격 코치님 보이지? 가서 얼음물도 좀 떠다 드리고 부채질도 좀 하고 해야 기도발이 받는 거야! 너 교회 안 다녀봤지? 교회도 다니고 절도 다니고 했어야 알지. 에효… 너 내일 새벽 기도 갔다 와. 그래야 기도발 받아.”

저, 저… 어린놈의 자슥이 선배한테 왜 멱살을 잡으려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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