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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FA선수가 되다-69화 (69/204)
  • 69화. 필살기 학습

    * * *

    팀은 빠르게 수습하려고 하지만 충격이 없지 않다. 한 무리의 코치진이 빠진 랩터스의 성적이 슬금슬금 내려가기 시작한다.

    떨어지는 순위와 상관없이 랩터스의 1번 타자는 일생일대의 라이벌을 만나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스팀을 해야 각이 산다니까요.”

    “스팀은 안 하는 게 맞아.”

    “스팀하고 기름 먹여야 더 잘 먹는다니까요.”

    “기름은 최소한. 그것보다 좋은 건 자주 만져서 손 기름이 먹는 게 최고지.”

    “아니, 손으로만 그게 가능합니까!”

    “안 쓴다는 게 아니라 최소한으로 써주고 항상 만져서 예뻐해 주라고.”

    “그건 당연한 거고, 그 전에 기본은 잡아줘야 하잖아요.”

    타격 코치와 배팅 얘기는 안 하고 글러브에 대해서 난상 토론을 벌이는 랩터스의 1번 타자. 치열한 전투를 옆에서 지켜보던 랩터스의 2번 타자가 슬그머니 끼어든다.

    “저… 글러브 그냥 업체에 맡기겠습니다.”

    괜히 글러브 새로 샀다고 자랑했다가 전쟁을 일으킨 죄인이 제3세계에 도움을 요청하겠다고 선언하자 전쟁 당사자들이 대번에 반발하고 나선다.

    “무슨 소리! 비싸기만 하고 각도 이상하게 나와.”

    “각보다도 흐물거려서 못써. 그런 덴 양산형 글러브나 맡기는 거야.”

    한마디 했다가 본전도 못 찾은 의뢰인이 꼬리를 내리고 조용히 관전자 모드로 변경되니

    자존심을 건 두 글러브 장인의 2차전이 시작된다.

    “소전아. 글러브라는 게 사용하려고 길들이는 것 아니겠냐? 망치로 두드리고 손으로 주무르는 것보다 확실한 방법이 있긴 한데…….”

    정파의 초고수가 숨겨진 비전에 대해 운을 떼자 사파의 은둔 기인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말을 받는다.

    “코치님. 그거 함부로 하는 거 아닙니다. 인내와 끈기, 그리고 일구일구에 혼을 담아야 하는 겁니다.”

    “글러브와 내가 하나가 되려면 그 정도는 당연하지 않겠어?”

    “괜찮으시겠습니까?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포기는 없는 겁니다.”

    “바로 시작하지.”

    랩터스 훈련장에 새로운 볼거리가 나타났다. 타격 코치와 주전 유격수의 캐치볼. 외야 글러브를 끼고 시작한 캐치볼은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야간 조명이 들어올 때까지 끝날 줄 모른다.

    “이제 포기하시는 겁니까? 공이 날립니다.”

    “무슨 소리! 다양한 자세로 잡아보라고 던지는 거다!”

    “그러기엔 공에 힘이 없는데요?”

    “빗맞은 타구도 놓치지 않는 글러브. 그게 진짜 글러브다.”

    혼자 타격 연습을 한참하고도 시간이 남아 웨이트까지 한탕 더 뛰고 와서 미친놈들 옆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신인선수에게 선배들이 질문을 쏟아낸다.

    “경준아. 저기 뭐 하는 거냐?”

    “제가 글러브 새로 샀는데 글러브 길들여 주신답니다.”

    “언제 끝나냐?”

    “모르겠습니다.”

    “저 글러브 네 거라며? 그런데 왜 딴사람들이 저러고 있어?”

    “모르겠습니다. 그냥 업체에 맡길 걸 그랬습니다.”

    다들 연습이 끝나고 퇴근을 준비하는 시간 집에 가려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후, 후……. 부족하지만 이 정도면 연습용으로는 쓸만하겠구나.”

    “후, 후……. 제가 쓰긴 부족하지만, 저 돼지한테는 진주목걸이죠.”

    “제법이구나. 야구를 대하는 자세가 아주 제대로야. 다시 봤다.”

    “저도 코치님을 다시 봤습니다. 정확한 자세와 포구, 야구를 보는 진지함. 존경합니다, 코치님.”

    두 미친놈이 몇 시간에 걸친 캐치볼을 마치고 글러브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는 사라진다.

    한심한 눈으로 글러브를 돌려받은 주인이 확인차 손을 넣어 이리저리 움직여 본다.

    “경준아 어때? 뭐 다르냐?”

    “정진효 코치가 우리나라 글러브 3대 장인이었다는데 뭐가 다르냐?”

    “야, 말 좀 해봐.”

    글러브를 끼고 공을 팡팡 던져보던 의뢰인이 초점 없는 눈으로 간증을 시작한다.

    “미쳤어요. 글러브가 손에 붙어 있는 것 같아요. 아니, 글러브가 그냥 손 같아요. 워…….”

    * * *

    과외를 받아 타격 폼을 정립했던지라 팀에서도 크게 내 타격에 대해 개입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잘 맞든 안 맞든 미국으로 영상을 보내고 고쳐야 할 점이 있을 때는 미국에서 피드백을 받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소전아. 이번에 배팅 장갑 한정판 나온 거 구했는데 한번 볼래?”

    “우와. 이런 건 어디서 구하신 거예요? 손끝에 엠보싱이 엄청 쫀쫀한데요.”

    “그렇지? 역시 너는 알아줄 줄 알았어. 다른 것보다 쿠션감이 좋지? 그런데 쿠션감이 좋은데 그립이 좀 아쉬워.”

    “음… 그러네요. 파인타르로 극복해야 할까요?”

    “해봤는데 타르 스틱만으로는 조금 아쉽더라고.”

    “아… 스파이더 택이라도 섞어 써야 할까요?”

    “배합이 중요하긴 할 텐데. 그럴 바에는 배트에 테이핑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 그런데 그러면 밸런스가 미묘하게 안 맞아서 별로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배트 그립 신상 내가 직구했거든. 오면 같이 연구 좀 하자.”

    “역시 코치님, 최고십니다.”

    타격 코치와 1번 타자가 타격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이어 가고 있는데 2번 타자가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겠다는 듯 끼어든다.

    “무슨 얘긴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넌 몰라도 돼.”

    “형, 배트 테이핑을 연구할 게 아니라 삼진을 어떻게 줄여야 할지를 연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시끄러워! 야구는 장비야! 장비 빨! 배트의 절묘한 밸런스값을 찾아서 배트와 내가 하나 될 때 타격이 완성되는 거야. 그러려면 배트에 테이핑할지 말지, 타르 스틱은 어느 회사 거를 쓸지 항상 고민해야 한다고!”

    내가 단호한 어조로 장비의 중요성을 피력하자 나와 야구관을 공유하는 타격 코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한다.

    이 둘을 보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 야알못. 준비 단계 때려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간다.

    “코치님. 배트에 뭘 바르는지는 모르겠고 삼진을 줄이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됩니다.”

    사랑스러운 배팅 장갑을 쓰다듬다 쓸데없는 질문을 들은 타격 코치가 심드렁하게 응대를 한다.

    “공 잘 보고 맞혀. 그러면 되겠지.”

    “코치님, 그러니까 그 공 맞히는 게 잘 안 됩니다. 직구는 치겠는데 직구 타이밍에 들어오는 떨어지는 공을 잘 못 치겠습니다.”

    여전히 글러브만 바라보는 코치

    “야!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네가 나보다 더 좋은 타잔데 알아서 해야지. 직구 타이밍에 들어오는 변화구를 잘 치는 방법을 알면 내가 현역 때 성적이 그랬겠냐? 나는 아니고 그래, 소전아. 직구 타이밍에 변화구 어떻게 치냐?”

    아… 우리 코치님, 사람 참 좋고 야구도 많이 알고 좋은데 타격 코치가 도무지 타격을 모른다. 모르는 건지 일부런지 타격 얘기는 꺼낼 생각을 안 한다.

    “던질 때 봐야죠. 어차피 릴리스 포인트에서 손가락이 보이기 마련이니까 최대한 던지는 손 보고 대비해야지요.”

    나를 묘하게 바라보는 타격 코치. 내 얘기가 끝나자 씩 웃으면서 경준이를 바라본다.

    “그렇다는데?”

    “네?”

    “손가락 잘 보래. 그러면 직군지 변화군지 보인다는데?”

    장비 볼 줄도 모르고 투수 손도 잘 볼 줄 모르는 둔한 놈이 한숨을 푹 쉰다.

    “코치님. 그런 건 소전이 형만 되는 겁니다. 이 형은 투수들 쿠세도 보고 포수 성향도 파악하고 수비수 위치도 보면서 볼 배합을 맞추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일반인은 못 합니다.”

    일반인은 못 하다니. 네가 절박하지 않아서 그래. 야구 절박해 봐라. 다 된다.

    “소전아. 얘는 안된다는데?”

    “의지가 없는 거예요. 얘가 게을러요.”

    진지하게 동의하는 타격 코치. 엄격, 근엄, 진지한 얼굴로 신인 선수에게 깨우침을 내려준다.

    “경준아, 네가 게을러서 그렇단다. 열심히 해라.”

    타격 코치에게 일격을 당한 일반인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한다.

    “코치님, 저는 진지합니다. 저도 소전이 형처럼 공 잘 보고 싶은데 그게 안 되어요.”

    흠… 내가 요즘 타율이 좀 올라왔지만 네가 나보다 타율이 높거든.

    “경준아, 너 타격할 때 어떻게 하는데?”

    “머리에 볼 배합 생각하고 들어가서 투수를 노려보다가 직구 대비해서 발사합니다.”

    “그러면 변화구는 어떻게 대응해?”

    “딱 던질 때 느낌이 변화구다 싶을 때가 있거든요. 그러면 이제 손을 계속 뒤에 두고 있다가 공 궤적 보고 쫓아갑니다.”

    재미있다는 듯 경준이를 바라보는 타격 코치.

    “그럼 그냥 다 찍어? 구종을 다 찍고 들어가?”

    “아니면 가끔 소전이 형이 투수 쿠세 알려줄 때 있거든요. 그거 맞으면 준비하고 때립니다.”

    “결론은 직구나 아니면 소전이가 알려주는 변화구만 때린다는 거네?”

    “네.”

    홀가분한 표정의 타격 코치. 수학 공식 증명이라도 성공한 듯 허탈한 목소리를 낸다.

    “이제야 이해가 되네. 어쩐지 너 구종별 컨택 비율이 말이 안 됐거든. 그런 비밀이 있었어.”

    멍청이의 비밀을 푼 타격 코치가 능글맞은 얼굴을 하고는 나를 바라본다.

    “김소전. 넌 영업 비밀을 그렇게 털어놔도 돼? 얘는 네 경쟁 상대가 아닌 거야?”

    웃는 얼굴로 갈구는 타격 코치.

    칫. 나도 안다고요

    “얘가 열심히는 하는데 하도 못 해서 몇 개 알려줬습니다. 그래도 못 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그만 알려줄까 생각 중입니다.”

    “형!”

    내가 그동안 제공하던 서비스를 중단할까 검토 중이라고 얘기하자 공짜로 나를 뜯어먹던 거머리가 바로 반발한다.

    “이거 프로 선수한테 영업 비밀을 계속 털어놓으라고 얘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타격 코치가 당장 신인 선수 성적 떨어지게 생긴 걸 볼 수도 없고, 고민스럽네.”

    고민스럽다니요. 지금까지 업어 키웠으면 이놈도 이제 독립할 때가 됐다고요!

    “소전아. 내가 필살기 하나 알려주면 얘한테 계속 쿠세 알려줄래?”

    음… 뭐지?

    “코치님 필살기요? 어떤 건데요? 제가 모르는 글러브 손질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내 적극적인 모습에 그저 미소만 빙그레 짓는 코치.

    “아니. 내가 우리 감독님 타격의 비밀을 알려주면 경준이 좀 계속 챙겨줘라. 내가 경준이 안타까워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얘가 나보다 타격 성적이 좋은데 뭘 안타까워.

    그런데 잠깐…….

    “저 코치님……. 감독님 타격의 비밀… 혹시 코치님 현역 때도 알고 계셨던 건가요?”

    “그럼 알고 있었지.”

    “그럼 안 배우겠습니다.”

    “뭐, 뭐야? 왜! 진짜 감독님이 아무한테나 안 알려주는 필살기라고!”

    훗… 어디서 그딴 쓰레기 스킬을 필살기라고.

    “제가 코치님 현역 때 경기를 봤어요. 필살기가 있다면 그런 성적이 나올 리가 없잖아요.”

    옆에서 내 이야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놈까지 무언의 협공이 시작되자 좋은 마음으로 입을 열었던 코치의 마음이 차갑게 식어간다.

    “됐어. 안 해. 빳따 좋은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

    으이구… 좀 삐지신 거 같은데…….

    “드, 들어나 볼까요? 코치님? 들어만 볼게요. 말씀해 주세요~”

    타격에 관해선 별로 듣고 싶은 이야기가 없었지만 장비 관리에 관해서는 들어봐야 할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을 것 같기에 아까운 시간을 조금이나마 투자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됐어, 안 한다고. 내가 이래서 타격 코치 안 한다니까. 하여간 감독님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산다.”

    “아, 코치님. 얘기해 주세요. 감독님 필살기라면서요. 뭔가 코치님이 캐치하지 못하신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알려주시면 잘 취사 선택해서 몸에 새겨넣겠습니다.”

    한동안의 실랑이 끝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코치가 입을 떼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잘 들어봐. 경준이도 잘 들어봐. 너희 둘의 문제가 뭐냐면 너무 열심히 한다는 거거든. 그러다 보니까 너희들이 모든 상황에 집중하려고 한다는 말이지.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건데……. 그러니까 감독님이 현역 때……. 나도 해봤는데……. 그럴 때……. …알겠어?”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괜히 들었어.

    경준아. 그냥 가자. 헉! 뭐야, 이놈은?

    “코치님. 정말 그렇게만 하면 되는 겁니까? 그런 얘기는 처음 들어 봤어요. 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뭐, 뭐야……. 이 멍청이는……. 그딴 짓 할 시간에 쿠세를 더 찾으라고!

    “역시 우리 경준이, 머리가 좋으니까 이해가 빨라. 이게 우리 감독님의 비밀이다.”

    감독님의 비밀은 무슨……. 웃자고 한 소리에 죽자고 달려드는 거지.

    미국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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