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억 FA선수가 되다-68화 (68/204)
  • 68화. 신임 코치

    랩터스가 시즌을 치르면서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건 게임을 하면서 트롤을 안 만나는 것보다 어려운 일.

    전력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1위를 질주할 거라 예상되던 랩터스가 팀 내부의 사정으로 흔들린다.

    [랩터스 김민중 감독 독단적인 팀 운영에 잡음]

    [랩터스 박수훈 타격 코치 경질]

    [박수훈 코치, 스타 플레이어에 끌려가는 팀은 미래가 없다.]

    [랩터스 단장 막말 논란 ‘짤리고 입 터는 건 도리가 아니다.’]

    자리 잡고 잘나가던 팀에 코치 한 명이 잘리자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팀 내부에서도 정확한 사유에 대해 딱히 이야기하지 않고 팀 방향과 맞지 않았다는 발표만 하고 추가 발표를 하지 않는다.

    정보를 빼 오기 힘든 기자들이 선수들을 괴롭혀 보지만 선수들도 깊은 속 얘기를 모르니 일방적으로 떠난 코치의 이야기만 세상을 떠돈다.

    * * *

    휴식을 맞아 랩터스의 수뇌부가 전부 회의실에 모인다.

    무거운 분위기에서 시작되는 회의. 회의를 주재하는 단장도 표정이 어둡다.

    “시간을 길게 끌 필요 없습니다. 정리할 건 정리하고 빨리 수습합시다. 운영팀장님. 코치진 개편안 발표하세요.”

    단장의 말에 운영팀장이 내정된 인사를 발표한다.

    “공석인 타격 코치에 정진효 전력분석 과장, 주루 코치에 이영규 2군 수비 코치, 2군 수비 코치에 김바다 재활군 코치. …우선 급한 재활군은 이번 시즌 끝으로 은퇴할 민정규 선수가 플레잉 코치로 지도하고, 남은 자리는 최대한 빨리 선임해서 발표하겠습니다.”

    그제야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이 중간중간 비어 있는 자리에 대해 인지를 한다.

    야구로 밥 먹는 사람들이 이번 코치진 개편안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챈다.

    “타격 코치님이 다 데리고 떠나는 건가요?”

    “타격 코치, 3루 주루 코치, 2군 수비 코치, 2군 트레이닝 코치, 재활군 코치가 폭스로 갑니다.”

    “울브스가 아니고요?”

    “울브스는 이번 시즌 감독 대행으로 갑니다. 박수훈 코치는 폭스 감독으로 갑니다.”

    회의실에 탄식이 흘러나온다. 소문이 있었지만 시즌 중에 실제로 타 팀의 코치가 자기 사단을 꾸려서 팀을 나간다는 소리에 남은 사람들이 충격에 빠진다.

    “폭스에서 박수훈 코치 선임 조건이 경질이었습니다. 구단에서 박수훈 코치와 폭스에 이번 시즌 끝나고 움직여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그 이후의 일은 여러분이 보셨으니 판단은 알아서 해주시면 됩니다. 구단의 행보가 불합리하다 느끼시면 말씀하세요. 바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단장이 회의실을 압도하며 사람들을 찍어누른다. 단단히 화가 난 단장에게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한다.

    “여러분은 다른 생각 마시고 동요할 선수단 잘 다독여서 시즌 치러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머지는 구단이 알아서 합니다. 불만 있으신 분은 지금 얘기하세요. 마지막 기회입니다.”

    마지막 기회라고 말하는 단장의 말이 살 수 있는 마지막이라는 소리로 들은 참석자들이 아무 말 않고 침묵을 이어 나간다.

    “회의 끝입니다. 감독님만 남으시고 돌아들 가세요.”

    숨 막힐 듯한 공간에 더 이상 있기 힘들었던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단장과 감독의 독대가 시작된다.

    “폭스에 한 경기라도 지면 감독님이 책임지시는 겁니다.”

    “마음 떠난 사람입니다. 붙들고 있어 봐야 소용없습니다.”

    단장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는 감독. 평소라면 단장에 호의적이었던 감독도 오늘은 쉽게 받아주지 않는다.

    “이건 상도덕이 없잖아요! 나가는 것도 모자라서 시즌 중에 코치들 싹 데리고 나가는 경우가 어딨습니까! 이건 인정할 수 없어요. 그러데? 경질? 이게 무슨 경우예요!”

    “폭스에서 구단 욕 안 먹게 경질돼서 오라고 했다잖아요. 더 놔뒀으면 팀 망가집니다. 더 안 망가지게 빨리 결정 잘했습니다.”

    화를 좀처럼 가라앉히지 못하는 단장이 감독에게 통보한다.

    “앞으로 시끄러워질 겁니다. 경질하고 보내주는 건 감독님 봐 드렸으니 앞으로 구단이 벌이는 일은 반응하지 마시고 팀 운영에만 집중하세요. 그때는 봐달래도 봐 드리는 거 없어요.”

    “절이 싫다고 떠난 사람입니다. 그분도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거 느껴보셔야지요. 지금껏 한집에서만 사셨던 분인데 고생 좀 하시겠네요.”

    감독에게 동의를 얻은 단장이 그제야 회의를 끝내고 먼저 회의실을 나간다.

    단장의 뒷모습을 보며 감독의 눈에 분노와 안타까움이 동시에 스쳐 지나간다.

    * * *

    휴식일에 세수도 안 하고 슬리퍼를 끌고 훈련장에 나오니 내가 1등이다. 별것 아니지만 1등. 뿌듯하다.

    “아~ 김소전. 먼저 나왔네. 넌 안 쉬냐~”

    “과장님, 안녕하십니까. 과장님이야말로 훈련장에 어쩐 일로 나오셨습니까? 누구 체크하셔야 합니까?”

    거울 앞에서 내 멋진 몸매를 감상하면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우리 팀 프랜차이즈 스타는 아니고 프랜차이즈 백업이었다 은퇴한 전력분석팀 정진효 과장이 나타났다.

    선수 출신인 데다 나처럼 팀의 구멍 난 내외야 전 포지션을 돌아다녔던 랩터스의 대표적인 욕받이 무녀.

    어정쩡한 타격에 어정쩡한 수비, 뭐 하나 특출나지 않았음에도 나처럼 성실함 하나로 프로를 버티고 프런트에 취직한, 한때는 내 롤 모델이었던 사람. 그 사람이 나타나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체크를 하긴 해야겠지? 우선 너부터 할까?”

    “저요? 저 담당 바뀌나요? 저는 강 과장님이 담당이신데요?”

    “흐흐흐. 담당은 강 과장님이 아니고 내가 바꿨지. 오늘부터 타격 코치가 된 정진효다. 어서 코치님 해봐라.”

    헐… 이 아저씨가 코치라고? 그것도 타격 코치? 타격 코치라 하면 선수 때 빳다도 좀 치고 카리스마도 있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이 아저씨는 구단 내에서도 덜떨어지기로 소문났는데…….

    “과장님… 아니지. 코치님. 코치시라고요? 박수훈 코치님 대신 타격 코치로 과장님, 아니 코치님이 오신 거라고요?”

    “에헴, 그렇지. 자 코치님 저를 죽여주시옵소서 해봐.”

    아… 진짜 죽겠다. 이 아저씨한테 내가 뭘 배워야 하지? 현역 때도 타격은 젬병에 그저 센스로만 버티던 사람 아니었어? 그러고 보니 지난 생에 누구랑 비슷하긴 한데… 뭘 배우냐.

    “코치님, 저를 죽여주시옵소서. 뭘 해야 코치님 마음에 드실까요?”

    흡족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신임 타격 코치가 근엄한 목소리로 내게 첫 훈련을 내린다.

    “가서 너 하고 싶은 것을 하거라~”

    하… 이 아저씨 진짜.

    “과장… 아니, 코치님. 그래도 처음 코치 되셨는데 좀 봐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제 타격 폼도 봐주시고 앞으로 수정할 거도 봐주시고 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배트 가져옵니까?”

    내 급한 마음을 단칼에 거절하는 신임 타격 코치가 충격적인 말을 내뱉는다.

    “야! 나보다 좋은 타자한테 내가 무슨 타격 폼을 봐줘. 너 타격 폼 무너지면 강 과장님이 먼저 얘기할 거니까 넌 알아서 혼자 해. 알아서 잘하면서 날 괴롭히려고 하고 있어.”

    뭐야. 타격 코치가 오자마자 왜 이래.

    나를 내버려 두고 훈련장 여기저기를 산보하는 코치. 타격 코치라고 온 사람이 쓸데없이 훈련장 장비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어슬렁거린다.

    신경 쓰이네.

    날 바라봐 주지도 않는 코치의 기운을 등 뒤로 느끼면서 내 루틴을 시작하자 하나둘 선수들이 훈련장에 들어온다.

    “쉬는 날 왜들 이렇게 많이 와~ 다 집에 가~”

    “어~ 진효 형~ 형도 애 보기 싫어서 형수님한테 뻥 치고 왔지? 다 알아~”

    “아니거든! 난 오늘은 우리 애 아침밥 뺏어 먹다가 쫓겨난 거거든. 이건 엄연히 다른 거다.”

    “자랑이다~ 그런데 여기를 왜 왔어? 가서 친구나 만나.”

    “얌마. 월요일에 나랑 놀아줄 친구가 너희밖에 더 있냐? 다른 데 갈 데가 없어.”

    “난 형 싫어. 딴 데 가서 놀아. 나 요즘 타격감 안 좋아서 힘든데 귀찮게 굴지 말고 딴 데 가.”

    “흐흐흐, 어쩌냐. 오늘부터 내가 너 타격 코친데.”

    “뭐? 형이 코치라고? 형이 타격 코치? 통산 2할 5푼 친 양반이 무슨 타격 코치를 해!”

    “기대해라. 넌 이제 죽었다.”

    “아, 팀에 망조가 들었네. 정진효가 타격 코치라니. 내가 은퇴할 때가 됐어.”

    훈련장에 들어오는 선수마다 친한 척을 하는 신임 코치가 여기저기 순회 공연을 하더니 케이지에서 배팅 훈련을 하는 내 뒤에 서서 가만히 바라본다.

    신경 쓰이는데…….

    뒤에 타격 코치가 지키고서 있으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내색을 안 하려고 하지만 아무래도 뒤통수가 뜨겁다.

    “코치님.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해주셔도 됩니다.”

    “아니야~ 나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계속해.”

    쉬는 날 코치님들은 잘 안 오는데 첫날이라 그런가 왜 오셔서……. 꽤 신경 쓰이네

    한참 동안 배팅 머신을 전세 내고 치고 있는데 랩터스의 루키 슈퍼스타 노경준 님이 내 옆 케이지로 들어오신다.

    “후… 후……. 너 왜 이제 와?”

    “헤~ 머리 잘랐어요. 어때요? 잘 됐죠?”

    음… 미안하다. 네 머리 스타일 따위에 관심이 없어서…….

    “잘 잘랐네. 집에서 밀었냐?”

    “형! 이거 미용실에서 자른 거예요! 진짜, 야구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시네.”

    저런 건 그냥 바리캉으로 밀어도 되는 거 아닌가. 돈 주고 잘랐다기엔……. 좀 양심 없는데.

    “너 타격 코치님 바뀐 건 아냐?”

    “네? 코치님이 바꿨어요? 누구로요? 박수훈 코치님이 나가시는 건 알았는데……. 누가 오셨어요?”

    “응~ 나~ 안녕~”

    “안녕하십니까. 그런데… 선배님이 코치님?”

    어디 갔다 때맞춰 쓱 들어온 신임 코치님. 볼수록 부담스럽다.

    “전력분석팀에서 온 정진효다. 경준이도 강 과장님 담당이지?”

    “네, 선배님. 그런데 선배님이 타격 코치님이시라고요? 코치님 현역 때 타격이 망…….”

    “서, 선배님. 얘가 그런 게 아니고……. 선배님.”

    이놈 입에 테이프라도 붙여놨어야 하는데 코치님 오신 첫날부터 이 사회성 없는 놈이 팩폭을 날린다.

    “오~ 노경준. 나 현역 때 경기도 봤어?”

    “많이 봤습니다. 떨공삼이라든지. 루킹 삼진이라든지…….”

    “서, 선배님. 그러니까. 얘 말은. 그런 게 아니고…….”

    개XX야. 너 이따 나 좀 보자.

    “흐흐흐, 그렇지. 나도 그거 많이 돌려봤다. 그럼 감상 좀 얘기해 볼까?”

    저 사람은 속이라는 게 없는지 자기 폭망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자기 속은 꽤나 쓰릴 텐데……. 노경준이 이놈……. 이놈을 잡아 족쳐야 한다.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겠다. 볼 카운트 몰리면 저렇게 추해진다. 뭐 이런 거…….”

    “야~ 노경준! 넌…….”

    당황한 내가 저 멍청이를 잡으러 나서는데 뒤에 있는 코치가 기쁨 가득한 목소리로 칭찬을 한다.

    “좋아~ 아주 좋아~ 내 영상만 잘 봐도 타석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들 다 볼 수 있어. 아주 훌륭해. 넌 좋은 타자가 될 거다. 내가 기대가 크다.”

    큰일이다. 똥차 가고 외제 차가 와도 모자랄 판에 똥차가 갔는데 인력거만도 못한 게 왔다.

    “그럼 하던 거 계속들 해. 코치님은 피곤해서……. 어? 경준아, 이거 네 배트냐?”

    “네. 그거 새로 받은 배트입니다.”

    “너 배트에 테이핑하지? 코치님이 배트에 테이핑해 줄까?”

    “네? 배트 테이핑은 소전이 형이 해주는데요…….”

    “나 한번 믿어봐라. 다른 건 몰라도 코치님이 장비 관리는 국내 탑이라고 자부한다.”

    뭐지……. 내가 예전에 정진효가 글러브 관리 장인이라는 소문은 들어봤지만 은퇴하고 장비 손질 안 한 지가 몇 년인데, 어디서 내 고객을 뺏어가려고…….

    “코치님. 이따 저녁에 제가 해도 됩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평소라면 팍팍 생색내면서 해줄 작업이지만 급한 마음에 내가 먼저 해주겠다고 나섰다.

    “아니야. 나 한번 믿어봐. 내가 배트 테이핑은 국내 탑이다.”

    야구 선수 출신이 타격이 아니라 배트 테이핑이 국내 탑이라며 거드름을 피우는 꼴이라니…….

    “코치님, 두시면 제가 저녁에 해주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코치님. 항상 소전이 형한테 시키기 미안했는데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뭐, 뭐? 시켜? 이놈 자식을 진짜.

    “그렇지? 내가 해줄게. 자, 다들 훈련해. 어디 보자.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해보자. 0.5밀리짜리가… 기다려. 내가 가서 그립 좀 가져올게.”

    “너 이제 나한테 테이핑해 달라고 하지 마!”

    “왜요. 형 맨날 테이핑하기 힘들다고 그랬잖아요. 저도 형은 테이핑 안 하는데 제 것만 부탁하기 미안했다고요. 코치님 해주시는 거 보고 반반씩 부탁드릴게요~”

    “얌마! 반반이라니! 코치님은 은퇴한 지 오래된 사람이고 난 팔팔한 현역인데. 어딜 같은 급으로 놔! 이따 봐봐. 직접 써보고 느껴봐야 이 형님의 실력을 알게 될 거다!”

    기분 좋게 훈련 왔다가 기분이 팍 상했다. 차라리 타격을 못 한다 그러면 덜 억울할 텐데 나보다 배트 테이핑을 잘한다고? 이건 선 넘었지.

    울분을 털어 넣은 배팅 훈련을 마치고 케이지를 나왔을 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형… 이거 장난 아닌데요……. 코치님, 이거 소전이 형하고는 다른 느낌으로 쩔어요. 와~ 손에 짝짝 달라붙어요.”

    이게 벌써 사회생활을 하려고! 덜떨어지게 봤더니 구라가 늘었어

    “줘봐! 나도 보자.”

    XX… 누구냐… 넌…….

    “맘에 들어? 감독님이 어떻게 홈런 타이틀 땄는지 알아? 내가 배트에 테이핑해 준 다음부터 홈런이 늘었어. 자, 훈련은 알아서들 하고 알아서 시간 걸리는 것들은 다 가져와 내가 다 책임져줄게.”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내 야구 인생 처음으로 누군가를 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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