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스폰서
홍시 누나와 구단주 형의 노력으로 최소한의 법률적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받을 수 있게 된 건 된 건데… 상대가 만만치가 않다.
“형~ 미친놈 오늘도 왔어요.”
“알아.”
“오늘은 트럭에다 플래카드 걸었어요.”
“나도 봤다.”
그룹 변호사들이 법적으로 뭔 짓을 하는 것과 별개로 미친놈을 만나서 합의를 종용했더니 들어먹지를 않고 헛짓거리의 수위를 높인다.
처음엔 홈경기 때만 혼자 피켓을 들고 찾아오던 게 가까운 수도권 원정 경기까지 찾아오기 시작한다. 1인 시위를 해도 가난한 채무자가 돈 갚을 생각을 안 하자 트럭에 플래카드를 걸더니 급기야 유튜브에 나와 김소전 돈 갚으라고 방송까지 시작했다.
변호사들이 소송 일정을 당기려 노력을 해보지만 사기 사건으로 민·형사 소송을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지라 소송 진행이 더디기만 하다.
그리고 그 더뎌지는 기간만큼 내 성적도 지지부진하다.
- 김소전, 4구 타격. 2루 땅볼. 아웃. 투 아웃. 주자 없이 투 아웃이 됩니다.
- 초구, 2구 좋은 공을 놓치니까 4구째 몸쪽 높은 공을 억지로 잡아당겼죠. 이러면 좋은 타구 안 나와요.
- 개막 이후 김소전의 컨디션이 안 좋습니다.
- 분석을 당했다고 봐야겠죠. 작년에 김소전에게 당했던 상대 팀들이 철저히 분석하고 들어왔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지금도 보면 김소전을 상대로 우측으로 강하게 시프트가 걸리거든요.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미묘하게 타이밍이 안 맞는다. 조금씩 진짜 조금씩 중심에서 벗어나는 타구들이 나오고 타석에서 안 좋은 모습이 나오면서 수비까지 불안해진다.
- 유격수! 유격수 몸으로 막고 1루! 1루에 던지지 못합니다. 주자 올 세잎. 여기서 이런 타구가 나옵니다.
- 유격수 앞에서 공이 튀었어요. 불규칙 바운드가 나긴 했는데 유격수 김소전 선수가 잡을 수 있는 타구로 봤거든요. 김소전 선수의 수비를 생각했을 때 조금 아쉽네요.
개막 2주 만에 타선이 조정된다. 1번으로 시작했던 타선이 6번지나 7번까지 떨어진다. 배트 스피드가 살아 있는데 도무지 맞지 않는 공. 점점 나에 대한 확신이 줄어 간다.
- 삼진! 김소전을 삼진으로 돌려세웁니다.
- 김소전 선수 부진이 오래갈 것 같아요.
- 지난 시즌에 신인상을 받고 이번 시즌 초반 부진에 빠졌습니다. 이럴 때 2년 차 징크스라고 할 수 있을까요?
- 이 상황에선 그렇다고 봐야겠어요. 김소전 선수를 상대하는 팀들이 다 비슷비슷한 시프트를 걸면서 강하게 압박하고 있거든요. 우측으로 시프트를 걸면서 던지는 몸쪽 높은 공에 대한 해법을 찾지 못하면 김소전, 쉽지 않아 보여요.
답답하다. 뭐가 문제인지 조금씩 조금씩 타이밍이 안 맞는다. 다시 번트라도 대고 살아 나가봐야 하나.
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때쯤 홍시 누나가 훈련장에 있는 나를 은밀히 찾아왔다.
“소전아~ 고생하네. 오늘도 늦게 가려고?”
“야구도 못 하는데 훈련이라도 해야죠.”
“어째, 어째. 우리 소전이 손바닥 또 다 떨어지겠네. 누나가 소전이만 보면 가슴이 아파.”
저도 누나만 보면 가슴이 아파요. 어쩌다 이 험한 세상에 들어와서 이렇게 고생할까요.
“누나는 안 들어가세요? 밤늦었는데 언제 가시려고요?”
“선수가 집에 안 가면 나도 안 간다! 힘들어하는 소전이 내가 옆에서 응원이라도 해줘야지.”
역시 홍시 누나는 이런 사람이었어. 이렇게 착한 누나를 가면이라고 욕하는 루다. 그것이 여우지. 생긴 것부터 그것이 여우였어.
“소전아, 이것 좀 받아줄래?”
“네? 뭔데 그런 걸 가지고 다니세요? 뭐가 이렇게 커요? 누나 이거 들고 온 거예요?”
“너 주려고.”
무겁진 않은데 크기가 상당하다. 뭔지 모르지만, 엄청 고급스러운 포장지에 싸여 있다. 그냥 보기만 해도 나 비싸다를 풀풀 풍기는 물건. 이게… 뭘까?
“뭔데요? 저 주시는 거예요? 왜요?”
“선물.”
“갑자기요? 누나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고맙습니다.”
누나. 솔직히 누나를 향한 마음이 좀 흔들리고 그랬어요. 하지만 누나의 진심을 알아요. 나한테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어요. 구단이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나한테 야박하게 했겠죠.
전 다 이해해요.
“열어봐.”
“열어도 돼요?”
“그럼. 내 맘대로 골라서 좋아할지 모르겠어.”
“좋다마다요. 아니요. 제가 보고 확실히 말씀드릴게요. 얼마나 좋은지.”
날 보고 세상 예쁘게 웃어 주는 누나. 누나의 마음을 생각하며 비싸 보이는 포장지를 조심조심 뜯어내었다.
“호, 홍삼이네요.”
“아무거나 가져오면 안 돼서 백화점 가서 인증받은 거로 가져왔어. 이거 감독님도 드시는 거야.”
호, 홍삼……. 홍시 누나가 홍삼을……. 내가 쓴 거 안 좋아하긴 하지만……. 아니지, 난 언제나 쓴 거를 좋아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보약은 이제부터 홍삼이다.
“누나. 이거 비싸지 않아요? 너무 고맙지만, 앞으로는 안 주셔도 괜찮아요.”
누나 마음 다 알아요. 다 아니까 이렇게 무리해 가면서 비싼 선물 안 사줘도 돼요. 내가 누나 마음 다 아니까…….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내 모습을 본 누나가 활짝 웃고는 부담 갖지 말라며 수줍게 선물의 출처를 이야기해 준다.
역시… 하늘 위에 하늘이 있고 미치는 데는 끝이 없다.
* * *
지난주 인천에서 4타수 무안타로 경기를 끝마쳤던 날 어김없이 유튜브에 ‘돈 갚아라 김소전 채널’이 스트리밍 방송을 시작했다.
이미 랩터스 팬들에게는 암암리에 알려진 돈 갚아라 김소전. 오늘도 채권자라는 사람이 김소전을 신랄하게 까기 시작한다.
“작년에 좀 하나 했더니 또 저 XX이네. 그래서 내 돈 갚겠나? 잘 좀 해라!”
“치라! 치라고! 멀뚱멀뚱 서 있으면 뭐 할 낀데?”
“저거. 밥은 먹고 다니나. 저래 말라서 야구는 어찌하는데? 그래가 내 돈 갚겠나?”
어디 후줄근한 방구석에서 카메라 각도도 안 맞아 목소리만 나오는 방송에 소문 듣고 찾아온 손님들이 하나둘 들어온다.
다른 내용은 없고 오로지 김소전의 김소전에 의한 김소전을 위한 방송. 선수를 까는 데라면 어김없이 찾아드는 날파리들과 함께 오늘도 신나는 방송이 성황리에 진행된다.
방송에 참여한 사람들이 선수의 안부와 주위 친척, 사돈의 팔촌, 고조할아버지까지의 안부를 묻는 사이, 채팅창에 이질적인 문장이 하나 뜬다.
[전화 주세요. 랩터스 운영팀장 여홍지.]
채팅 창이 폭발했다.
어그로 꺼지라는 사람부터 당장 전화하라는 사람, 전화하면 스미싱으로 통장 털린다는 사람 별별 사람들이 나와서 참견질을 한다.
간신히 유튜브 방송키는 법이나 배운 50대 채널주가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연결하고는 노기 가득한 목소리를 낸다.
“누구요?”
- 랩터스 운영팀장 여홍지입니다. 방송 내리세요.
전화기 건너편에서 앳된 여자 목소리가 들리자 유튜버가 순간 놀란 듯하지만 곧 자기 페이스를 되찾고는 하던 대로 막말을 쏟아낸다.
“빚쟁이한테 돈 갚으라고 하는 게 뭔 잘못인교? 돈 갚으소.”
- 돈은 김소전이 갚겠지. 왜 나한테 소리 질러요!
전화하래서 전화했더니 버럭 소리부터 지르는 상대에 유튜버의 기분이 확 상한다.
“그럼 가서 김소전이한테 돈 갚으라고 하소!”
- 그래서 아저씨가 고소했잖아요. 법원에서 알아서 갚으라고 하겠지! 왜 나한테 소리 지르냐고요!
전화하래서 호기심에 전화를 걸었던 유튜버가 연속으로 고함소리를 듣고는 정신이 멍해진다.
“그럼 왜 전화하랬는데? 전화하래매!”
- 방송 끄라고! 방송 끄라고요! 누가 우리 팀 선수 이름 팔아서 방송하라고 했어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돈 못 받은 것도 서러운데 오히려 공격을 받아버린 유튜버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내 맘이다! 내 맘이라꼬! 내 돈 내놓으면 하래도 안 한다. 돈 내놔라!”
- 돈 얘기는 판사님이랑 하시고 방송 내리시라고요.
“못 내린다.”
- 왜 못 내리는데요?
“하… 가시나. 말귀를 못 알아듣네. 돈을 받아야 내릴 거 아니가!”
- 돈은 판사랑 얘기하고, 선수 얘기는 하지 말라고요.
영양가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는 이야기만 흐르자 답답해진 유튜버가 마이크에 대고 답답함을 호소한다.
“다들 들었지요? 이렇다니까. 이놈들이 내 돈을 이렇게 뜯어먹으려고 헛소리를 하고 있다니까. 다들 봤제? 내가 나쁜 놈이 아니다. 알았제?”
자기편을 늘리려고 마이크에 한마디 했던 유튜버가 갑자기 늘어나는 동접자를 보고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봐라. 다들 의식이 깨어 있네. 싸가지 없는 기집애가 헛소리를 하니까 사람들이 이리 많이 들어오네. 자, 다들 김소전이한테 돈 갚으라고 해주소. 내 돈 20억을 안 갚고 있소. 내 평생 번 돈 받을 수 있게 다들 힘 좀 보태소.”
유튜버가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순식간에 쭉쭉 늘어나는 접속자 수를 보다 채팅 창을 보고는 입을 떡 벌린다.
[여홍지가 네 친구냐! 팀장님 안 붙이냐!]
[홍지 님. 지난 경기 직관하다 뵀습니다. 306블록이었습니다.]
[우와~ 여홍지다. 목소리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
[XXX야. 너 혼자 떠들지 마! 홍지 님 목소리 안 들리잖아.]
자기편일 줄 알았던 채팅 창에 자기를 욕하는 글들이 가득 올라오자 할 말을 잃고는 입만 뻐끔거린다. 방송 중 비어버린 오디오. 빈 오디오를 전화기 밖에서 채운다.
- 김소전 돈 갚아라 보고 있는 랩돌이들~ 안녕~ 홍지에요~
[이, 인사했어. 홍지가 인사했어.]
[XXX야! 홍지가 친구냐고! 팀장님 안 붙여!]
[누나! 누나 너무 예뻐요!]
터져 나가는 채팅 창을 바라보며 연예인이 전화기를 통해 말을 이어 간다.
- 많이 보던 닉네임이 있네~ 랩터스 V5, 너 토익 450 못 맞으면 야구 안 본다더니 여기 있었네? 성적표 가지고 사무실로 와~ 450 넘었으면 시즌 티켓 줄게~ 박스신도 있네? 너 야구파크 아이디 정지 다음 달까지지? 너 없으니까 소닉스 애들한테 너무 털린다. 계정 풀리면 너도 사무실로 와. 2군 트래킹 데이터 줄게. 와, 절세미녀여홍지. 너 재수생이 여기서 뭐 해! 공부 안 해? 그리고. 공룡띠청년…….
어느샌가 랩터스 팬 클럽 모임이 된 타인의 유튜브 채널. 랩터스 운영팀장이 직접 팬들 이름을 불러주며 아는 척을 해주자 채널주는 어디 가버리고 지들끼리 신났다.
- 그런데 너희들 랩터스 TV는 보고 여기서 노는 거지? 요즘 랩터스 TV 조회 수 안 늘어. 너희들 영업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아?
여신님의 질책에 하나 된 마음으로 영업 활동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다짐하는 랩터스 신도들.
그 추종자들에게 여신님이 미션을 하나 내린다.
- 요즘 홍지가 걱정이 있어. 그게 뭐냐면. 랩터스의 1번 타자가 성적이 안 나와. 왜 안 나올까?
멍청한 신도들이 발사각, 타이밍, 원래 재능 없음 등 여신님이 원하지 않는 답을 내뱉는다.
- 아니지. 요즘 김소전이 빚 독촉에 시달리느라 딴생각이 많아서 야구에 집중을 못 하네. 김소전 연봉이 쥐꼬리라 못 갚는 건데, 눈곱만 한 빚을 20억이라고 사기 치는 사람 때문에 애가 정신이 없어.
여신님이 은근슬쩍 찍어주신 좌표에 신도들이 타겟을 정확히 잡기 시작한다.
- 김소전은 빚을 갚고 싶은데 연봉도 적고 소송도 오래 걸리고 그러다 보니 자꾸 지치고. 이러다 연봉 더 깎이면 빚을 갚기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이럴 땐 빌려준 사람이 보약도 좀 사주고 응원도 좀 해주고… 그래서 야구 잘하게 해주면 좋지 않을까 싶은데. 이런 쓰레기 같은 얘기는 소닉스한테 해야지, 랩터스가 들을 순 없지 않아?
방금까지 신성력으로 깨끗하던 채팅 창이 점점 험악해진다. 채널주의 부모, 자식의 안부를 묻는 글들로 가득 찰 때쯤…….
- 내가 이래서 랩돌이들을 사랑해. 랩돌이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여기 아저씨가 채널 내리고 재판 끝날 때까지 매달 김소전한테 몸보신할 선물 보내주면, 어쩐지 우리 1번 타자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어때? 랩돌이들이 그렇게 해주면 내일 공홈에 랩터스 치어 팀 풀빌라 화보 B컷 사진이 올라갈 것 같은데. 나 내일 아침에 대한 백화점 갈 거니까 잘들 생각해 봐. 금액에 따라서 수위 달라진다~ 홍지는 이만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