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억 FA선수가 되다-57화 (57/204)
  • 57화. 혼돈의 시간

    * * *

    레그킥.

    모든 타격 폼이 장단점이 있지만, 레그킥의 가장 큰 장점은 체중을 전진 이동시키면서 타구를 멀리 때려낸다는 점.

    반대로 단점은 몸의 이동이 크기 때문에 중심 이동 간에 한 발이 떠 있어 타이밍 잡기가 힘들고 몸의 움직임이 커서 컨택에 약점이 있다.

    거기다 그것도 모자라서 나는 레그킥 시 타이밍을 세 가지로 쪼갰다. 하나는 지금처럼 구속 150에 대응하는 발 높이. 하나는 발을 지금보다 더 높이 가슴 높이까지 끌어올려서 구속 140 정도에 맞추는 발 높이. 마지막으로는 가슴까지 끌어올렸던 발을 홈 플레이트 쪽으로 쭉 펴주면서 중간단계를 더 가져가는 괴상망측한 자세.

    이게 말이 되나 싶지만 나를 대주자에서 타자로 바꿔준 코치가 해보자고 하니 믿어본다. 어차피 이 집에 앞으로 10년 다녀야 하는데 사람이 신뢰를 가지고 믿어본다.

    지금 좋다고 생각되는 상체 동작은 전혀 건드리지 않고 하체의 움직임만으로 타이밍을 조절한다. 이것만 코치와 일주일을 고민해서 만들고는 비활동 기간 두 달 중 남은 기간을 몸에 새겨넣는다.

    어차피 작년에 해봐서 루틴은 똑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연습장 가고 마지막에 문 닫고 나오고. 아니지. 작년엔 폼 하나만 연습했는데 이번엔 바뀐 동작이 두 개가 더 포함됐으니 밥 먹는 시간도 아껴서 몸에 새겨 넣어야 한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일주일의 시간이 지나자 작년처럼 사람들이 나를 연습장의 움직이는 장식품쯤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같이 밥 먹자고 하던 사람들도 이젠 내 밥 시간 챙겨주지도 않는다.

    매일 같이 비디오 보면서 바뀌는 동작을 같이 살펴주던 코치도 3주가 지나갈 무렵부터는 네가 알아서 장비 돌려보라고 하고는 봐주지도 않는다.

    뭐, 봐봐야 틀리는 데는 항상 틀리고 뭘 고쳐야 할지 뻔하니 서로 똑같은 말 계속하는 것도 민망하다. 같은 폼으로 3시간을 휘두르고 물 마시면서 몇 장면 보고 또 휘두른다.

    * * *

    선수단은 비시즌 기간에 한참 휴식을 취하고 개별 훈련을 진행하고 있는데 시즌 때보다 더 바빠진 랩터스 직원들이 회의실에 모였다.

    “급해서 다들 모이시라고 했습니다.”

    랩터스 대회의실 가운데 자리한 단장이 어두운 표정으로 직원들을 바라본다.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있는 직원들도 어두운 표정으로 단장의 입만 바라본다.

    “다들 보셨겠지만, 드래곤스에서 약물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것도 안영진이.”

    다들 기사로 확인해서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단장의 입을 통해 들으니 충격이 배가 된다.

    안영진. 랩터스에서 애지중지 키우던 외야 자원이었으나 지지난 시즌 드래곤스로 트래이드시킨 안타까운 선수.

    어린 선수 복권이라면 한두 번이 아니라 시간 날 때마다 너댓 번은 긁었어야 했는데 그때 상황이 급했던 랩터스는 한 번 긁어보고는 드래곤스로 보내버렸다.

    드래곤스에 간 안영진은 트레이드된 첫해는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지난 시즌 알을 깨고 나오면서 1군에서도 경쟁력 있는 모습으로 탈바꿈하였고 다음 시즌부터는 확실히 중견수 자리를 놓고 경쟁할 것으로 예상되었는데 약물에 연루되었다.

    “안영진이 약물과 연관됐다는 것만으로도 문제인데 김소전까지 파장이 번졌어요. 트레이닝 파트 보고하세요.”

    갑자기 터진 이슈라 상황이 난감하기는 트레이닝 파트도 똑같은데 단장이 보고하라고 하니 급하게 아는 대로 사실 관계만 얘기하기 시작한다.

    “안영진이 금지 약물을 썼다는 건 아니고 소지 및 유통입니다. 아직 KADA 결과는 안 나왔고 안영진이 약물을 구매했다는 것까지만 사실입니다.”

    말하기 무섭게 단장이 트레이닝 팀을 노려본다.

    “샀는데 안 했다? 똑같아요. 했다고 간주하고 얘기합시다.”

    단장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잔뜩 움츠러든 트레이닝팀이 계속 보고를 이어 나간다.

    “안영진이 그냥 약물을 산 것도 아니고 디자인된 약물을 구입했고 관리를 받기로 했습니다. 이건 본인이 인정했으니 사실로 봐야 할 것이고 문제는 디자이너가 최강훈 주치의입니다.”

    회의실에 깔리는 탄식.

    수석 코치는 머리를 쥐어뜯고 타격코치는 물만 들이켠다.

    “최강훈은 확인했어요? 그 주치의는요?”

    “최강훈하고 직접 연락이 안 됩니다. 주치의는 구속당했습니다.”

    “타이탄스에서는 최강훈한테 물어보라는데 아무도 연락 안 돼요!”

    급기야 목소리가 커져 버린 단장.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치고, 여기에 김소전 이름이 나왔어요. 이건 누가 확인할 거예요?”

    김소전까지 단장의 입에 올라오자 트레이닝 파트의 긴장도가 두 배로 높아진다.

    “그건 이름만 거론된 수준입니다. 안영진이 최강훈한테 약물 디자이너를 소개받았다고 증언을 했고, 최강훈이 조사받을 때 안영진뿐만 아니라 서준성, 김소전에게도 자기 주치의 번호를 줬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뿐입니다. 김소전이 실제 연락을 했는지는 아무도…….”

    “그게 말이냐고요! 우리 팀에서 약 빨던 XX가 팀 나가더니 여기저기 약을 뿌렸는데 이야기가 나왔을 뿐이다? 그게 지금 담당자가 할 말이에요! 김소전 했어요? 안 했어요?”

    당황한 트레이닝팀에서 면피를 시도한다.

    “저, 저희가 계속 추적한 바로는 김소전의 약물 사용 여부는 확인이 안 되지만 요즘 디자이너들의 기술이 뛰어나서 꼭 안 했다고…….”

    트레이닝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소리를 치는 단장.

    “모르겠다는 말 하지 말고 방법을 찾아와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했는지 안 했는지. 했으면 언제부터 했는지. 그리고 김소전 말고도 다른 누가 또 하고 있는지 확실히 찾아내요.”

    단장의 호통에 회의실이 안 그래도 조용하던 회의실이 더 고요해진다. 그 누구도 숨소리 하나 못 내는 회의실에서 운영팀 팀장이 적막을 깨고 입을 연다.

    “운영팀에서 트레이닝팀과 선수단 전수조사 및 면담을 시행하겠습니다. 면담 후 결과 보고드리겠습니다.”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시간이 필요함을 알고 있는 단장이 직원들을 향해 마지막 지시를 내린다.

    “안영진과 최강훈이 구단에 있었을 때부터 관련 사항 전부 조사해서 내일 아침까지 보고서 제출하세요. 우리 팀에 손톱만큼이라도 연관된 사항 있으면 전부 파악합니다. 그리고 혹시 누구라도 이 사건에 연루된 선수를 감싸주려는 시도가 있으면 저랑 끝장을 본다고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다들 나가서 상황 파악하시고 감독님과 운영팀장님은 남으세요.”

    사람들이 싹 빠져나간 회의실. 큰 공간에 사람 셋만 남으니 분위기가 더 스산하다.

    “감독님. 김소전도 했을까요?”

    단장이 한숨을 쉬며 팔짱을 끼고 감독을 바라본다.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 성실하고 착한 영진이가 했다는데 아무도 믿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 많은 데선 아닌 척하고는 있었지만, 감독도 심정이 답답한지 목소리가 많이 떨린다.

    “소전이는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 팀 핵심 관리대상이라 매달 메디컬 테스트를 하고 있고 소전이 연봉이나 재정 상황상 고액의 약물 디자인을 사용하기는 힘듭니다.”

    확신이 없는 감독을 대신해 여홍지 운영팀장이 선을 긋고 나선다.

    “아니야. 아무도 몰라. 영진이도 연봉 얼마 되지 않아. 모를 일이야!”

    서로 다들 아니었으면 하면서도 명확한 답을 내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

    “감독님, 우리 팀 다른 선수들은 문제없을까요?”

    “확인은 해보겠지만 알 수 없습니다. 확인해 봐야 합니다만 이게 워낙 음성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 찾을 수 있다고는 못하겠습니다.”

    “이미 운영팀에서 선수들 면담하고 있습니다. 그거와 별도로 그룹 감사팀에 협조 요청했습니다. 구단주님이 도와주시겠다고 하셨고요.”

    여홍지 팀장이 구단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소리에 단장이 머리를 쥐어 잡는다.

    “감독님. 드래곤스는 안영진 없이 중견수 괜찮겠습니까?”

    갑작스러운 드래곤스 전력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감독도 말없이 자세를 고쳐잡는다.

    “쉽지 않겠지요. 김민구, 안영진 경쟁으로 다음 시즌 운영할 생각이었을 텐데 시작 전부터 안영진이 빠지면… 글쎄요. 쉽지 않겠지요…….”

    고개도 못 들고 감독의 얘기를 듣던 단장이 운영팀장에게 질문을 한다.

    “여홍지 팀장. 드래곤스의 박라빈 FA 참전 가능성은?”

    “안영진이 빠지면 참전하지 않을까요? 지난 시즌 후반부터 누가 봐도 안영진 메인에 김민구가 백업이었는데요. 중견수가 급하면 박라빈 생각해야죠.”

    “우리가 박라빈에게 줄 수 있는 금액 한계선은?”

    단장의 의중을 알아차린 운영팀장이 한숨을 쉬면서 불가능한 숫자를 입에 올린다.

    “연간 10억. 무리하면 연간 11억 5천. 4년 40억이면 다른 팀들도 다 달려들 겁니다. 특히나 워호스에서 4년 44억을 준비했다고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6년 60억을 오퍼하고 있었고요. 상황이 이렇게 되면… 이걸 웬만한 팀들은 다 아는데 드래곤스라면……. 연간 13~14억까지는 오퍼하지 않을까요?”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던 단장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아 감독을 향해 웃으며 요구를 한다.

    “이렇게 됐네요. 감독님, 올해 중격수 FA는 없습니다. 박라빈을 못 잡았다고 해서 다른 FA 미계약자가 나와도 패닉 바잉 따윈 없습니다. 박라빈 정도 아니면 의미도 없어요. 감독님, 있는 자원에서 무조건 전력을 만드세요. 저는 상황에서 더는 전력 유출이 안 되도록 하겠습니다.”

    화가 많이 났음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을 한 감독이 단장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숨을 골라본다. 단장과 감독이 서로를 치열하게 노려보다 감독이 먼저 꼬리를 내린다.

    “어쩔 수 없네요. 있는 전력으로 해야죠. 스프링캠프에서 바쁘겠습니다.”

    감독의 항복 선언을 들은 단장이 다시 운영팀장을 보고 출장을 요청한다.

    “운영팀장은 미국 가서 김소전 직접 보고 오세요. 혹시라도 거기서 흔드는 놈들 있으면 싹 정리해 버리고.”

    “다녀오겠습니다.”

    * * *

    매일 똑같은 일상이 진행된다. 연습장 문 닫을 때까지 훈련하다 나와서 저녁 먹고 웨이트 하고 씻고 루다랑 통화하고.

    루다랑 통화해 봐야 지난 시즌에 내가 잘못한 장면들에 대해서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자아비판을 하는 시간들이지만 처음엔 별것 아니었던 것들이 매일 하다 보니까 내가 잘못했던 것들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점점 명확해진다.

    그리고 또 하나 알게 된 사실. 나 야구 진짜 못하네.

    매일이 매일 같던 어느 날 루다가 전화를 하더니 야구 이야기는 안 하고 안영진 선배에 대해서 묻기 시작한다.

    안영진 선배야 성실하고 또 성실하고 또 성실한 사람이지. 사람 나쁘게 말할 필요도 없고 있는 그대로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한참을 얘기하자. 특별히 원하는 것 없이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그다음 날 그분이 오셨다.

    “소전아~ 잘 있었어?”

    “누나~ 언제 오셨어요? 무슨 일 있어요?”

    “아~ 난 소전이 보고 싶어서 왔지~”

    “저도요, 누나~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는 누나 입에서 차마 들어줄 수 없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서 소전이 입으로 듣고 싶어서 왔어. 나한테 해줄 말 없어?”

    해줄 말이라니요? 이런 거에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없습니다. 저는 그런 거 해본 적이 없습니다.”

    “구단이 아니라 그룹 감사팀이 소전이 찾아올 거고, 가능하면 검찰에서도 소전이 조사해 달라고 요청할 거야. 소전이가 했다면 지금 확실히 얘기해. 지금 얘기하면 그룹 법무팀이 소전이 방어할 거야. 야구야 못하게 되겠지만 최소한으로 벌을 받고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어. 다시 물어볼게. 나한테 할 말 없어?”

    그 사랑스럽던 사람이 알 수 없는 눈을 하고는 나에게 대답을 강요한다.

    “전 따로 드릴 말이 없어요. 야구를 못 하면 못했지 반칙하면서까지 야구 하지는 않았습니다.”

    “김소전.”

    나와 누나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친다.

    “최강훈은 너에게 주치의 번호를 줬어. 맞지?”

    “그런 적 없습니다.”

    “너랑 연락한 주치의가 안영진을 통해서 너에게 꾸준히 약을 전달했어. 맞지?”

    “저한테 뭘 전달해요? 영진 선배가 저한테 약을 전달했다고요? 언제요?”

    “넌 우리 팀 왔을 때부터 최강훈 주치의 통해서 약을 전달받았어. 락커 CCTV 5년 치를 돌려보고 얘기하는 거야. 영진이가 락커 문을 열어뒀고 2군의 박정환이 네 락커에 물건을 두고 나오는 게 찍혀 있어. 언제부터야? 우리 팀 오기 전부터야? 오고 나서야? 안영진만 알고 있어? 아니면 최강훈도 엮인 거야? 그것만 말해. 최강훈도 엮인 건지 아닌지.”

    이 사람 미친 게 틀림없다.

    내가 약을 구경이라도 해보고 먹어라도 봤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이게 무슨…….

    “전혀 모르는 얘깁니다. 정환 선배가 제 락커에 약을 두고 간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그게 언젭니까? 제가 매일 락커 정리를 하는데 본적이 없습니다. 그 CCTV 화면 보고 싶습니다.”

    못 믿겠다는 식으로 계속 노려보는 홍시 누나.

    난 속이 타들어 가는데 저런 눈빛을 받으니 더 미치겠다.

    “이런 식으로 할 거야? 증인에게 증거까지 있는데 이런 식으로 피해 가려고? 소전아. 쉽게 가자. 자꾸 이러면 내가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가 없어.”

    확신을 가지고 얘기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항을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누나…….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전 정말 아니에요. 그런 거 한 적이 없습니다. 전 그냥 운동만 했습니다. 정말이에요. 야구 하면서 해서 안 될 짓을 한 적은 없습니다. 믿어주세요. 아니, 안 믿으셔도 사실이니까요. 전 정말 해서는 안 될 짓은 한 적이 없어요.”

    억울하다. 억울하고 또 억울해서 눈에 눈물이 고인다.

    한참을 나를 뚫어지라 바라보던 누나가 내 눈물이 또르르 떨어지는 걸 보더니 입을 열었다.

    “됐어. 믿을게. 여기서 훈련만 해. 아무하고도 얘기하지 말고. 나머진 누나가 다 책임질게.”

    이 말만 남기고 누나가 사라졌다.

    졸지에 약쟁이가 돼버린 나.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밤새도록 배팅 머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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