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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FA선수가 되다-54화 (54/204)
  • 54화. 취중

    날 막아선 이들에게 명함을 건네받고 술주정뱅이를 넘겼다. 그리고 술주정뱅이를 실은 차 번호판도 찍고 나서 뒤따라온 차에 떡대 아저씨와 함께 탔다.

    “아가씨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네…….”

    도와주기는. 진상 어디다 버리려고 한 거지.

    “술 많이 하셨는데 이것 좀 드시죠. 금방 풀리실 겁니다.”

    떡대 아저씨가 컨디션을 되찾는 음료와 알 수 없는 알약을 건넨다.

    “죄송합니다. 술은 먹었지만 제가 선수인지라 함부로 약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음료만 받겠습니다.”

    대기업 딸내미 경호하시는 분들이신 거 같으니 뭔가 술 확 깨는 좋은 약일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먹을 수가 없다. 프로 선수는 누가 주는 거 함부로 먹을 수가 없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게 규칙이고 한두 번 무너지면 답도 없다.

    “실례했습니다. 프로 선수한테 경우가 없었네요.”

    “아니요, 뭘.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요. 술 먹고 차 타니까 속이 벌써 울렁거리는 게 안 좋아지려는 것 같다고요.

    “회장님께서 뵙자고 청하셔서 모시겠습니다. 원치 않으시면 댁으로 차 돌리겠습니다.”

    “회장님이요? 세계 그룹 회장님? 왜요?”

    “회장님께서 아가씨가 실수하신 걸 아시고는 뵙자고 하십니다. 말씀 끝나시면 집까지 모시겠습니다.”

    “네…….”

    개념 없는 천방지축하고 놀다 보니 순간순간 얘가 재벌집 딸내미인 걸 까먹는다.

    무섭다. 나 불러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지?

    드라마처럼 우리 딸과 그만 만나면 봉투 하나 주고 뭐 그런 거?

    그런 거 기대하면 되나? 얼마를 받아야 하지…….

    울렁거리는 속이 참기 힘들어질 때쯤 자동차 두 대가 거대한 집으로 들어간다.

    앞차에 문이 열리고 뭔 짓을 했는지 머리가 떡 져버린 진상이 경호원들 등에 매달려 어디론가 업혀 간다.

    안 봐도 알 것 같지만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 내 등에서 저 짓거리 안 한 것만도 감사해야지.

    “가시죠. 회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 * *

    단독 주택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가니 복도가 나온다. 복도를 걸어 지나가니 하늘까지 뻥 뚫린 넓은 거실이 나타나고 그 앞에 전에 한번 본 적 있는 세계그룹 회장이자 진상의 아버지인 이현석 회장이 나타났다.

    “이런, 김소전 선수. 딸이 못난 모습을 보여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술을 자제시켰어야 했는데 주량을 몰라서 못 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허허, 사람 참. 이쪽으로 앉으세요. 밤늦게 미안해서 보자고 했습니다.”

    “괜찮습니다. 비시즌이라 내일 특별한 일정도 없습니다.”

    “이런, 술 많이 했을 텐데. 여기 차는 됐고 속 풀리게 꿀물 하나 주세요.”

    이현석 회장이 뒤쪽을 향해 말하자 30초도 되지 않아 테이블에 화려한 다과상이 꾸려진다.

    집에서 이런 걸 먹고 있으면서 봉천동 뒷골목에서 소주를 먹고 있었어……. 이거 참… 적응 안 되네.

    “요즘 루다랑 자주 통화한다고요?”

    “자주는 아니고…….”

    그러고 보니 거의 매일 통화한 거 같긴 하네. 아시안 게임에 일본 갔을 때도 했으니까. 그러네… 거의 매일 했네.

    “괜찮아요. 딸이 남자랑 통화한다고 뭐라고 할 사람 아니에요. 루다가 살가운 아이가 아닌데 자주 통화하길래 보기 좋아서 그래요.”

    “네… 감사합니다……. 아니, 감사한 건 아니고요. 아니, 감사합니다. 아니…….”

    “하하, 괜찮아요. 꿀물 들어요. 술 마시고 해장 못 하면 나중에 속 다 버려요. 내가 해봐서 알아요. 한창 좋을 때부터 관리해야 합니다.”

    윽… 제가 해봐서 알아요. 저도 해봐서 아는데 술은 관리가 안 됩니다. 아예 안 먹어야지.

    “네, 유념하겠습니다.”

    대답을 하면서 꿀물을 한 모금 입에 물었다. 무슨 꿀인지… 맛있네…….

    “입에 맞을까 모르겠어요. 중동에서 가져온 건데, 나는 술 먹고 그게 가장 맞더라고요. 하하.”

    “따뜻한 게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꿀물을 맛있게 마시는 나를 보는 이현석 회장이 환하게 웃는다.

    “그러면 내가 더 고맙고요. 그럼 그거 마시는 동안 내가 부탁 좀 해도 될까요?”

    “부탁이요? 제가 회장님 부탁을 들어드릴 게 있을까요?”

    뭐지? 무섭게 왜 그래?

    “김소전 선수. 우리 루다, 어떻게 생각해요?”

    “푸, 풋!”

    하마터면 입에 있던 꿀물을 뿜을 뻔했다.

    “저희 그런 사이 아닙니다. 그냥 루다가 일방적으로 연락하는…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러니까 저도 한번 연락한…….”

    내 당황하는 모습을 본 이현석 회장이 빙그레 웃으며 뒷말을 이어 간다.

    “알아요, 알아. 우리 애가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거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전에도 한번 보고 싶어서 찾아갔고 오늘은 루다가 청혼까지 했다길래 얼굴 보고 얘기 좀 하고 싶었어요.”

    처, 청혼이라니요. 미친X 술주정이지요. 그런데 방금 전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은 어떻게 아셨지?

    내가 그런 사건은 어찌 알았냐는 듯 눈만 껌벅이자 이현석 회장이 진실을 털어놓는다.

    “루다가 뭘 하든 상관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다 큰 딸내미 혼자 돌아다니는 걸 회사 식구들이 불편해해요. 그래서 루다 주변에 항상 지켜보는 직원들이 따라다녀요. 오늘같이 정신없이 쓰러지는 정도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는 직원들이에요. 하하.”

    “아, 예……. 그런 줄도 모르고 괜히 업고 나왔습니다.”

    “하하. 그런 얘기 하는 게 아닌데……. 우리 애 챙겨주려는 거 알아요. 뭐 딸내미가 먼저 청혼을 했는데 순서야 어쨌든 상관있겠냐마는…….”

    이 아저씨 큰일 낼 사람이네.

    “그런 거 아닙니다. 루다가 술 먹고 장난친 겁니다.”

    “알아요. 우리 애가 술 먹고 실언한 거로 알고 있어요.”

    알면서 왜 그래요.

    “우리 루다가 마음 둘 곳 없이 혼자 컸어요. 어릴 때 루다 엄마는 아파서 먼저 떠났어요. 그러다 보니 애가 좀 마음을 닫고 다른 사람에게 깊이 다가가질 못해요. 밖에서 보면 아는 사람도 많고 시원시원하고 할 말 다 하는 것 같지만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고 소심한 아이였어요. 엄마 아플 때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 돼서 혼자 잘 살아가겠다고 약속하고는 저런 천방지축이 됐어요.”

    소심, 내성. 내가 알던 단어가 잘못됐다.

    “그런 아이인데 왜인지 소전 선수한테 집착을 하더군요. 처음엔 진짜 스포츠 기자가 하고 싶고 야구 때문에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점점 더 빠지더라고요. 왜일까요? 루다가 왜 소전 선수에게 빠져들까요?”

    그거야. 잘생겨서…….

    아무리 생각해도 잘생겨서 말고는 생각이 안 나 우물쭈물하다 보니 이현석 회장이 계속 말을 잇는다.

    “그래서 김소전 선수 조사 좀 해봤습니다.”

    “제 조사요?”

    그런 거 불법 아닌가요?

    “어릴 때 화목하게 살다가 고등학교 때 크게 부상당하고 나서 집안이 많이 힘들어지셨더라고요. 그러다 아버지도 먼저 떠나시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하시고…….”

    “사실입니다만 제가 잘못 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말을 끊고 들어가자 앞에 있는 회장님이 정색하고 미안해한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요. 그렇게 느끼셨다면 미안해요. 내가 궁금한 부분은 루다가 김소전 선수 어느 부분에 끌렸느냐는 점이에요. 그걸 모르겠어요. 루다가 왜 소전 선수에 빠지는지 그걸 모르겠어요.”

    왜 몰라. 잘생겨서라니까. 그거 말고는 없다고요.

    “그래서 부탁 좀 하려고요.”

    이 양반이 나한테 왜 이러나 생각이 많아지는데 세계 그룹을 자수성가로 일으켜 세운 젊은 50대 회장이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우리 루다가 부족하지만 잘 좀 봐줘요. 어린 친구들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것까지 간섭할 생각은 없어요.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라 우리 애 너무 밀어내지만 말아줘요. 얘가 소전 선수하고 통화하고는 몇 번을 울었는지 몰라. 아빠 말고는 어디 누구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준 것 같아요. 내가 이 자리 오면서 엄마 대신 가족들한테까지 상처 많이 받은 아이예요. 이 부탁 하려고 얼굴 보자고 했어요.”

    이 아저씨가 왜 자꾸 몰아가는 거야. 얘는 내 취향이 아니라니까.

    “저희 정말 그런 사이 아닙니다. 만나고 헤어지고 그런 사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야구에 전념해도 모자랄 시간입니다.”

    내 대답에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는 이현석 회장.

    “이거, 이거. 우리 딸이 살면서 이런 대접받아본 적이 없을 텐데. 이러니 상처받았다고 와서 성질을 내지……. 후.”

    “제가 상처 주고 그런 것 없습니다.”

    답답해서 남은 꿀물을 들이켰다.

    “김소전 선수는 꿈이 뭐예요?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요?”

    꿈? 내가 꿈이 뭐였지?

    “야구 오래 하고 싶습니다. 할 줄 아는 게 야구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제 야구를 봐주는 사람이 없을 때까지 야구 하고 싶습니다.”

    이현석 회장이 빙그레 웃는다.

    “야구가 그렇게 좋아요?”

    “저도 좋아하고 제가 야구하는 걸 저희 엄마가 좋아하세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해 주는데 해야죠. 죽을 때까지 할 겁니다.”

    “그렇군요. 우리 애도 소전 선수가 야구하는 거 좋아하던데. 계속 좋아하라고 해도 되겠어요.”

    아니, 말이 왜 그렇게 빠져?

    “피곤할 텐데 여기서 자고 갈래요? 그래도 괜찮은데.”

    무슨 그런 소리를……. 누구 혼삿길을 막으려고 이 집에서 자고 가래?

    “아닙니다. 내일 운동가려면 집에서 자고 움직이는 게 좋습니다.”

    “난 소전 선수가 굉장히 마음에 들어요. 가끔 봐요. 딸 가진 아빠가 딸이 못하는 얘기, 가끔은 대신 전해야겠어요. 밖에 차 준비해 줄 테니 조심히 들어가요. 루다가 처음으로 청혼한 사람이란 거 기억하시고요.”

    마지막 말에 등골이 서늘하다. 저… 스토커가 처음으로 청혼… 청혼… 미친. 내 다시는 저것과 술 안 먹는다.

    * * *

    아침에 일어나 쓰린 속을 라면으로 달라고는 훈련장에 갔다. 뭐 하지도 않았는데 평소보다 땀이 찐득찐득하게 많이 난다. 술 먹을 때보다 다음 날 이 기분이 진짜 싫다.

    이럴 땐 아예 땀을 다 빼야지. 물을 콸콸콸 들이켜고는 땀복까지 꺼내 입고 다시 러닝머신 위에 올라선다.

    얼마나 탔을까 정신이 몽롱해진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점심을 먹으러 갈까 고민하는데 전화가 울린다. 요즘 내 전화기가 열일 중이다.

    “허, 헉……. 살아는 있냐? 괜찮냐?”

    “괜찮겠냐?”

    “왜… 휴… 왜? 어제 일 사과라면 받지 않겠다.”

    “어제 일이라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

    헐, 이 뻔뻔함. 이 아이의 매력은 이런 것… 아니, 매력은 아니고……. 하여튼 기억이 나지 않으면 기억나게 해주는 게 인지상정!

    “술 먹고 너한테 장가오라며? 네가 평강공주라며?”

    “그런 유언비어를 퍼트리면 죽여버린다.”

    “유언비어라니. 증인도 있는데…….”

    “그래? 그렇다면 모두 다 죽여버려야겠군. 사시미칼로 해줄까? 중식도로 해줄까? 그 정도 자비는 베풀어 주지.”

    이래서 미친것들은 나라에서 따로 관리하는 거구나. 도무지 대화라는 게 안 된다.

    “전화 왜 했냐고!”

    “연봉 협상 하러 가야지.”

    “연봉 협상? 홍지 누나가 연락 없었는데?”

    “내가 어제 희승이 삼촌한테 간다고 했잖아. 가야지.”

    “희승이 삼촌? 구단주 형? 야! 연봉 협상을 왜 구단주 형이랑 해!”

    또 전화기 반대편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 내가 VVIP가 뭔지 확실히 보여줄게. 너 2시까지 무조건 랩터스 사무실로 와!”

    저, 저것이 또 내 말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오, 지금 한 시 다됐는데 씻고 옷은… 아, 옷 갈아입으러 집에 갈 시간도 없는데.

    한숨만 나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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