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평강공주
* * *
복잡한 심경으로 집에 돌아와 방구석을 서성거렸다.
지난 생에 구단과 연봉 협상으로 마찰이 아주 없던 것이 아닌지라 그때 500만 원 더 달랬다가 트레이드됐던 기억부터 소소하게 스프링캠프 명단에서 빠졌던 기억까지 다 소환돼서 올라온다. 아무리 그래도 내 성적에 4천6백은 너무 하잖아.
너무 답답해 누구에겐가 하소연이라도 해야겠다는 기분이 강하게 올라온다. 전화기를 들고 통화 버튼을 누른다.
- …왜.
“어제 심하게 말한 것 같아 미안하다고.”
- 어. 그럼 안녕.
“자, 잠깐.”
그 말 많은 루다가 단답으로만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으려고 한다. 내가 어제 현실을 좀 알려주긴 했지만, 많이 속상한가 보네.
이럴 땐…. 비싸지만 방법이 있지.
- …….
“밥 안 먹었으면 밥 먹자. 밥 사줄게.”
- 하… 밥.
“내가 고깃집 좋은데 알아. 거기 한우야.”
- 한우…….
“거기가 어디냐면.”
- …….
“응… 여, 여보세요? 안 들? 어? 끊겼어?”
전화를 끊어버리다니……. 하지만 난 노력형 선수. 다시 전화를…….
- 전화를 받을 수…….
- 전화를 받을 수…….
- 전화를 받을 수…….
목소리에 힘도 없는 게 밥 사준다 그래도 거부를 하다니…….
그래 봐야 너만 손해다!
에라 모르겠다.
침대에 몸을 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본다.
따뜻한 이불……. 안전한 이불속에서 한숨 푹 자고 내일 일은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눈을 꼭 감은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한다.
잠이야 와라. 나는 자고 싶다. 자야 한다.
하늘에 양을 한 마리씩 그려 넣은 게 4,600마리가 됐을 때. 더 이상 침대에 누워 있을 수가 없어 벌떡 일어났다.
창밖에는 이미 어둑어둑해져 가는 하늘.
저 하늘이 컴컴해지는 만큼 내 미래도 어두워져 가는 듯하다.
또다시 흔들리는 심장. 하소연할 곳 없어 하늘을 바라보다 베개 옆 전화를 손에 들었다.
[루다야, 미안.
그렇게 이야기할 생각은 아니었어.
선수들에게 연봉 협상은 민감하다 보니 그랬나 봐.
네가 나 도와주려고 한 건데 이렇게 됐네.
오늘 구단 가서 연봉 협상하는데
홍시 누나가…….
…
그리고 계약서를 보는데 4,600 제시받았어.
…
이건 도저히 찍을 수가 없더라고…….
…
그래서 한참을 얘기하다가…….
…
그래서 그냥 나왔어.
그게 다야. 오늘 있었던 일은 여기까지.
네게 오늘 일은 얘기해 주고 싶었어.
그게 전부야. 안녕, 잘자…….]
붉은색과 검은색이 혼재된 노을을 바라보며 집필한 단편 소설을 까똑에 담아 루다에게 보냈다.
보내고 나니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게 요즘 보는 박스 쓴 단장이 무쌍 찍는 웹소설보다 잘 쓴 것 같다.
그래, 내가 야구 말고 글에도 소질이 있었어. 연봉 협상 안 되면 작가님으로 전업을 하고 말 테다. 내가 아무리 못써도 저 작가보다는 잘쓰겠…….
- 승리~ 승리의~ 랩터스~ 승리~ 승리의~ 랩터스~
난데없이 울리는 전화기. 발신자는 루다…….
너… 내 소설에 감동받았구나.
“여보세….”
- 야! 이 머절한 XX야! 어디야! 만나 만나서 얘기하자.
“뭐, 뭐야. 갑자기?”
- 1억을 받아오랬더니 4천? 이런 호구 XX가. 어디야!
“너… 아무리 그래도 여자애가 입이 너무 험한 거…….”
- 이 벨도 없는 놈. 넌 그 꼴을 당하고도 살고 싶냐!
“아니, 사는 거랑 그거랑…….”
- 됐고, 어디야? 나와! 아니다. 내가 간다. 너희 집 어디야!
“우리 집은 봉천역 금강아파트 뒤에 하늘빌라 3층… 아니. 그건 왜?”
- 봉천역? 딱 기다려. 내가 봉천 가서 전화할 거니까 전화하면 튀어나와.
통화가 끝나자 현타가 세게 왔다. 스토커한테 전화번호 뺏긴 것도 모자라 집 주소까지… 이사를 가야 하나……. 요즘 전셋값도 비싼데 갈 데나 있나.
7시가 채 되지도 않았는데 컴컴하다. 두툼한 패딩을 입고 봉천역 앞에 기다리고 있으니 롱패딩으로 무장하고 살벌한 기운을 풍기는 여자가 다가온다.
“전철 타고 왔어? 빨리 왔네.”
“차 타고 왔다. 간만에 칼치기 하느라 진땀뺐구먼.”
“헐. 여기 주차할 데도 없는데 어디다 댔어?”
“은행에.”
“은행?”
“VVIP는 대충 은행 주차장에 차 대도 뭐라고 안 해.”
“아… 그렇구나. 내가 대출받을 때 말고는 그런데 가본 적이 없어서… 미안.”
갑자기 신분 차이 확 나네. 쳇.
“어디 카페라도 들어가자. 내가 할 말이 많다.”
“그전에… 밥이라도 먹어야 하지 않겠냐? 너 얼굴이 쪼그라들었다. 밥 안 먹고 다니냐?”
“지금 밥이 들어가냐?”
“너 아까부터 저 꼬맹이가 들고 있는 델리만쥬 보면서 침 흘리고 있는데… 진짜 배 안 고파?”
“하… 그래. 가자, 우선 먹자. 네가 사는 거지? 너 고기 산다고 했어.”
하여간 있는 것들이 더해. 은행 VVIP가 연봉 4천6백짜리 선수한테 뜯어먹을 생각이나 하고… 에효…….
“그래, 가자. 내가 아는 데는 강남인데 네 차로 가? 아니면 전철? 전철이 편하긴 한데……. 택시 탈까?”
“돈이 썩어나는구나. 따라와 소는 됐고 내가 국내산 고기 잘하는 데 알아.”
돈은 네가 썩어나고. 그런데 어딜 가려고?
간만에 큰돈 쓸 생각으로 스토커를 뒤따르니 나도 모르는 골목골목을 쑥쑥 지나간다.
그리고 도착한 식당. 여가가 진짜 맛집 맞냐?
“내가 누구 밥 사주는 일이 흔한 일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비싼 거 먹고 싶으면 딴 데 가자.”
“훗, 먹어나 보고 얘기해라. 봉천에선 여기가 가장 맛집이다.”
익숙한 듯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는 루다.
이 시간에도 문 안에는 웬 퀴퀴한 아재들이 잔뜩 들어차 있다.
“이모! 여기 제육 두 개 하고 소주 하나요.”
얘만 보면 어질어질하다. 자리에 앉지도 않고 주문부터 하는 매너는 어디서 배워온 거야.
“루다네? 넌 안 돼. 술 먹고 또 뭔 짓을 하려고. 안 돼.”
“이모~ 한 병만 주세요. 오늘 얘 고기 좀 먹여야 한단 말이에요.”
“잉? 이 멀대같이 큰사람은 누구야? 어디 못 먹고 다녀? 얼굴에 살이 하나도 없네. 학생, 공부만 너무 하면 안 돼. 공부하면서 밥 잘 챙겨 먹고 운동도 하고 해야지. 원… 에효…….”
적응이 안 된다. 여긴 어디? 난 누구?
“뭐 해. 가서 밥 퍼와. 여기 밥 무한이야. 이모 몰래 양껏 퍼와.”
팍!
루다가 나에게 식당의 비밀을 말해 주는데 식당 사장님이 소주를 먼저 가져다 주며 루다의 등짝을 때린다.
“너 때문에 내가 적자야. 적당히 퍼 가.”
“이모, 배고파서 그래요 배고파서. 언제는 배곯지 말고 많이 먹으라면서요!”
“퍽이나. 배고픈 애가 술을 그렇게 먹어? 너 앞으로 우리 집 금지야.”
“어허, 이모. 손님이 왕인 거 몰라요? 자꾸 그러면 나 여기서 삼시 세끼 다 먹어요. 먹고 나서도 학교 안 가고 여기서 책 볼 거야.”
“어이구. 난 여태 네가 책 보는 거 구경도 못 해봤다, 이것아.”
사장님이 번개 같은 손으로 밑반찬부터 깔면서 쉴 새 없이 진상 손님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얘랑 대화하는 거 보니 여기 사장님도 보통 내공이 아니다.
“여기 뭐 하는 데냐?”
난 밥솥에서 밥 두 그릇을 퍼서 루다와 내 앞에 놓으며 물었다.
“여기? 동네 식당.”
“너 이 동네를 어떻게 알아?”
“누나 공부 잘한다고 안 했냐? 친구들이 서울대에 많이 있다.”
“서울대는 서울대고, 여기는 어찌 알아?”
“여기서 서울대 다니는 친구들이 많으니까.”
“그러니까 서울대 다니는 친구들이 왜 여기 있어? 서울대 앞에 안 살고? 고시촌 있는 데 사는 거 아니야?”
나를 또다시 한심하게 보는 루다.
“거기 방세 비싸. 여기까지 나오면 확 싸진다. 그리고 여기가 고시생들도 많이 오고 노가다 아저씨들도 많이 오는 맛집이야. 제육은 우리나라에서 여기가 원탑이다. 그리고 고기가 국내산 돼지야. 이 가격에 국내산은 여기밖에 없다.”
뭐가 뭔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든다.
“부잣집 딸내미가 왜 서민 코스프레야? 돈 많으면 그냥 비싸고 좋은 거 먹어.”
내 머리로 날아오는 숟가락. 저, 저… 성깔머리하고는. 여자만 아니었으면 너 멱살 잡았다.
“돈은 우리 아빠가 많지 내가 많냐? 난 돈 없다. 닥치고 소주나 따라봐. 날도 추운데 한잔하자.”
“차 가져왔다며?”
“야! 대리 불러도 되고 내일 찾으러 와도 되지. 하여간 꼭 술 먹을 때 판 깨는 것들이 있어요. 술이나 따라봐. …그렇지. 야! 누가 술을 반만 따르래! 눌러 안 담아? 그렇지. 꾹꾹.”
미치겠다. 어디서 이런 게 나타나서……. 내가 전생에 무슨 잘못을 그렇게 많이 했다고 이런 시련이…….
“넌 술 안 하지? 좋아. 이건 다 내 거다.”
내가 술을 안 먹는 걸 확인한 루다가 넘칠 듯 가득 찬 소주잔을 한 번에 털어 넣는다.
“크아~ 이거거든. 소주는 이거거든. 너도 콩나물부터 먹어봐. 여기 이모 콩나물은 특별해.”
“특별?”
“어. 꼬리를 안 떼거든. 꼬리를 안 떼면 해장에 좋대. 그래서 술 먹을 때 여기 콩나물 많이 먹으면 술에 안 취해.”
해장에 좋은 걸 먹으면 술에 안 취하는구나. 나도 어릴 땐 술 좀 먹어봐서 아는데 어디서 그딴 X 소리를…….
“밥 먹자고 안 했으면 어쩔뻔했냐?”
“야, 아예 여길 안 왔으면 안 먹었지. 여기오면 밥이 땡겨.”
“그래, 그래라. 많이 먹어라.”
“그래. 먹으면서 우리 할 일이 있지. 자, 이제 얘기 좀 자세히 해봐라. 여홍지, 그 여시꼬빼기 같은 팀장이 뭐라고 했는지 소상히 밝혀봐라.”
얘는 왜 항상 홍시 누나를 안 좋게 보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늘은 나 때문에 나왔으니 한 번 참아주고 사무실에 있었던 일을 읊어 준다.
내 얘기를 들으면서 연신 딸꼭딸꼭 소주를 털어 넣는 루다. 술을 따라 주면서도 계속 따라 줘도 되나 싶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자기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애들은 꼭 호구 하나 잡으면 홀딱 벗겨 먹으려고 한다니까. 나도 많이 해봐서 그 심정 알긴 하지만 적당히 해야지. 그쪽은 ‘적당히’가 없네.”
“뭐, 뭘 해봐?”
자꾸 누나에게 뭐라고 하길래 루다를 째려보는데 얼굴 사이로 불쑥 손 하나가 들어온다.
“학생, 얘 술 못 먹게 해. 얘 술 먹으면 학생 막 때릴 거야. 그러니까 얘 취했다 생각되면 그만 줘.”
“이모! 왜 그런 얘기를 해요. 그리고 이모, 이게 뭐지요? 단골손님한테 양이 이게 뭔가요?”
“이것아! 저울 가져다 재봐. 이거 지금 4인분은 돼. 여기 학생 삐쩍 말라서 챙겨 줬더니 또 타박이야.”
“이모! 20인분 같은 2인분은 어디 가고 이렇게 조금 주시는 거죠? 안 되겠네. 이모 계란말이 하나 하고 삼치 한 마리 더해 줘요. 그러면 술이 모자라니까 후레쉬로 하나 더 주시고요.”
“다 먹을 수는 있고?”
“안주가 있으면 술은 언제든지 먹을 수가 있는 거 아닌가요? 빨리 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술은 가져다 먹어.”
쉽지 않다. 술 먹으려고 안주를 먹는 게 아니라 안주가 있으면 술은 언제든지 먹는다라……. 내가 봉천동에 몇 년을 사는데 이런 마계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안 해봤다. 무섭다.
“뭐 해?”
“뭘?”
“술 가져와야지.”
“내가?”
“누나 식사하시느라 바쁜 거 안보이냐? 너 때문에 내가 어제오늘 첫 끼야. 빨리 안 가져와?”
사람이 뻔뻔해도 정도가 있지. 어쩌다 이런 애랑 엮여서… 아……. 내가 까똑을……. 내 손가락이 잘못이구나.
냉장고에서 술을 가져오자 그사이 고기를 먹으며 또 한 잔 털어 넣은 술꾼이 내 잔에 남은 술을 또르르 따르기 시작한다.
“나 술 안 하는데.”
“알아, 알아. 받기만 해. 혼자 하늘에 짠~ 하기가 뭐해서 그래. 받아. 받기만 해.”
술잔을 받아 앞에 두고 처음으로 음식에 손을 대본다. 언제 어느 식당에 가서 제육볶음을 시키면 나올 듯한 비주얼의 음식을 같이 나온 상추에 가득 올려서 한입에 넣고 우걱 씹었다.
겉에 붙은 물방울마저 아삭하게 들리는 상추를 넘어 양념 가득한 고기가 혀에 감기자 눈을 크게 뜨고 루다를 바라봤다.
“비시즌인데 한 잔쯤은 괜찮겠지?”
야무지게 상추 위에 고기를 겹겹이 쌓은 루다가 만족스러운 눈빛을 하고는 한 손엔 상추쌈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가득 따라놓은 소주잔을 내 앞에 내민다.
짠!
여기 제육… 이거 밥반찬이 아니라 술안주다. 이걸 먹으면서 소주를 안 먹는 건 범죄다.
“얘도 그러더니, 학생도 진짜 못 먹고 살았어? 잘 먹네!”
추가로 시킨 오징어볶음을 가져다주는 사장님에게 이번엔 두부김치를 더 추가하면서 둘 간의 진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술 잘 먹네. 왜 여태 안 먹었어?”
“나 운동선순 거 모르냐? 술 먹은 거 복귀시키려면 며칠 노력해야 해.”
“그래도 스트레스받고 하면 하루 이틀 풀어 주고도 해야지, 너 그러다 병나.”
“선배들이랑 술 먹어 봐야 스트레스만 더 받는다.”
“친구 없냐?”
“내가 집 밖에 나가는 거 안 좋아해.”
“그럼 스트레스는 뭐로 풀어?”
“영화 보고, 소설 좀 읽고… 뭐 그래.”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얼굴이 발그레해져서는 나를 향해 비웃는 루다.
“그래~ 영화? 소설? 문학 소년이셨다 이거지. 요즘 보는 소설이 뭔데? 같이 좀 봅시다.”
“요즘 보는 거? 방구석 워리어… 아니다. 너 안 좋아하는 거야. 야구 소설이야. 야구.”
“방구석 뭐? 하여간 봐도 지같은 것만……. 그건 내가 한번 보고 얘기하고. 우리 하던 얘기나 계속해야지.”
술을 많이 자셨나, 눈을 게슴츠레 뜨고 얼굴을 들이미는 루다. 순간 너무 부담스러워 몸을 뒤로 빼면서 물었다.
“뭔 얘기?”
“연봉.”
“다 했잖아.”
“그래서 그다음이 없잖아.”
“그다음 뭐?”
“이제 어쩔 거냐고.”
“어쩌긴 홍시 누나가 다음 주에 전화한다잖아.”
“그래서?”
“그래서라니?”
“그냥 기다리게?”
“그래야지.”
“끝?”
“끝.”
저, 저것이 또 찰랑거리는 술잔을 그대로 털어 넣는다.
그리고는…….
“아~”
“아?”
“아~”
“뭐 하는 짓이냐?”
“너 같은 놈한테 봉사할 생각 하니까 온몸에 힘이 안 들어가. 아~”
“아 뭐?”
“안주 넣으라고! 이 멍청한 놈은 눈치라는 게 없어.”
“손이 없어? 뭐 하는 짓이야?”
내가 정색을 하고 호통을 치자 힘없다는 손가락으로 오징어를 한껏 집어 입에 집어넣는다. 그리고는 또다시 털어 넣는 소주. 이거… 술꾼이네.
“크… 술 다 식었잖아. XXX야! 미인은 박복하다더니 내가 딱 그짝이네. 어쩌겠냐. 내 팔자가 이런걸. 잘 봐.”
손가락에 오징어볶음 양념을 가득 묻히고는 전화를 들어 새끼손가락으로 한참을 톡톡거린다.
“삼촌~ 왜긴. 삼촌 회사에서 부당한 일이 벌어지니까 전화했지~ 아니. 그건 부당이 아니고 불법이고. 아니 그건 우리 아빠가 불법한 거고. 그거 말고. 랩터스! 김소전. 아니! 삼촌 사람을 뭘로 보고! 누가 사귄다고 그래요! 아니! 차이긴 뭘 차여! 그런 거 아니라고! 그렇지요. 어디 불가촉천민이 아씨를 바라봐요. 그렇지요. 그럼요.”
불가촉천민? 뭔가 있어 보이는 말로 욕하면 내가 못 알아들을 거 같냐?
“아, 본론. 김소전 연봉 4천에 계약한다면서요? 엥? 몰랐어요? 삼촌은 구단주가 뭐 해요? 그런 것도 모르고? 단장을 왜 조져. 단장이 아니라 운영팀장이 그랬다는데. 삼촌! 여홍지가 뭐가 예뻐! 삼촌 눈 참 이상하네. 어쨌든 내일 내가 김소전 데리고 갈 테니까 연봉 협상 다시 해요.”
저기요. 홍시 누나는 예쁜 거 맞고 나 같은 쩌리 선수는 운영팀장이 연봉 협상하는 건데요.
“내일! 내일 간다고요! 바빠? 삼촌이 뭐가 바빠? 몰라! 내일 나 갔는데 안 만나주면 아빠한테 일러요. 뭐 일러? 나 진짜 일러! 몰라! 나 내일 두 시에 랩터스 사무실로 이 멍청이 데려갈 테니까 봐요.”
식당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통화를 하던 루다가 전화를 끊더니 반쯤 풀린 눈으로 날 보고 V를 그린다.
이래서 사람이 술을 먹으면 안 되는데. 한숨이 나온다.
더 취하기 전에 어째야 하나 짱구를 굴리고 있는데 식당 사장님이 두부김치와 꿀물을 타가지고 나타난다.
“으이그, 소리 지르는 거 보니까 갔네! 갔어. 이루다! 일어나! 이거 마시고 집에 가.”
꿀물보다 두부김치를 먼저 본 루다가 전화기를 만졌던 손으로 두부를 집어 입에 넣더니 말릴 새도 없이 소주를 또 털어 넣는다.
사장님의 등짝 스메싱.
“이것아! 가! 집에 가! 술 먹지 말라니까 여기서 또 이러네!”
사장님한테 맞으면서 실없이 웃는 루다.
“헤, 이모. 나 멀쩡해. 하나도 안 취했어. 나 내일 얘 부자로 만들어 줄 거예요. 봐봐. 내가 내일 얘 연봉 1억짜리로 만들어 온다고!”
매가 부족할 땐 연타. 사장님의 등짝 스매시가 연속으로 들어간다.
“네가 무슨 평강공주야! 남자 부자 만들 생각하지 말고 너나 취해서 돌아다니지 말고 잘해, 이것아!”
사장님의 연타를 맞고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술잔에 술을 또 따르고는 한 번에 탁 털어 넣는다.
“그래! 까짓거 내가 이 바보 멍충이 키워 준다! 내가 평강공주다! 너 나한테 장가와라!”
식당 전체가 고요해졌다.
소리를 지른 미친X은 바보같이 웃고는 그대로 자리에 앉더니 두부 위로 푹 고꾸라진다.
살면서 이런 경우를 당해 본 적이 없어서 뇌가 정지했다. 앞에 꼬꾸라진 미친X을 두고 도무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이고, 얘 또 갔네. 학생. 너무 신경 쓰지 마. 얘 이런 거 수십 번은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이대로 두고 가 내가 챙겨줄게. 그나저나, 호호호. 루다가 학생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네. 저런 말 절대 하는 애가 아닌데. 호호호.”
마음에 들기는요……. 우리는 처음부터 악연인데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고 계십니까.
차분히 머릿속을 정리해 본다. 이 상황을 어찌 해결해야 하는가. 진짜 사장님한테 맡기고 내가 가도 되는가. 날도 추운데 얘는 어디서? 여기서 재우는 걸까? 내일 술 취한 애를 버리고 갔다고 또 진상을 부리면 어쩌나.
아오, 진짜. 이 진상 스토커.
우선 여기까지 계산을 하고 술에 전 무거운 여자를 힘겹게 업었다.
사장님이 놔둬도 괜찮다는 얘기를 했지만, 내일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그냥 버리고 가면 안 될 듯싶어 업고 나왔다.
큰길. 큰길까지 가서 택시 타고 대한 호텔로 가서 벨보이랑 같이 얘 던져 놓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 아무 일도 없고 얘도 나한테 지랄 못 하고… 완벽하다.
내 완벽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식당 사장님의 알 수 없는 웃음을 뒤로하고 추운 밤거리로 나와 골목 두 개를 지나쳤을 때 검은 차가 내 앞으로 달려와 내 앞을 막아선다.
차를 피하려고 골목 옆으로 피하려는데 차에서 우르르 내리는 검은 양복들.
그중 가장 대장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습기라고는 1도 없는 목소리로 용건을 밝힌다.
“아가씨는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김소전 선수도 같이 가시죠.”
아 XX. 이게 뭔 X 같은 상황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