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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FA선수가 되다-52화 (52/204)

52화. 연봉 협상

* * *

랩터스 에이스님의 우승 공약 및 한 놈을 저격하면서 한 발언으로 구단은 한가로운 겨울은 포기하고 언론과의 전쟁에 들어갔다.

덕분에 내 발언은 상대적으로 확 묻히는 바람에 운신의 폭이 좀 생겼다.

아니었으면 지금 이시윤 선배처럼 움직일 때마다 기레기들이 달라붙었을 텐데. 으… 생각만 해도 무섭다.

랩터스와 기자들 간의 한바탕 소동 후 랩터스와 타이탄스와의 2차전이 발발하여 한창 바쁘던 그때 구단에서 호출이 왔다.

구단에서 부르면 힘없는 선수는 즉각 가야지.

오랜만에 방문하는 사무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여긴 시장 바닥이 따로 없다.

미친 듯이 울려 퍼지는 전화벨 소리. 전화기를 들고, 욕인지 아닌지 모를 응대를 하는 직원들. 정신이 하나도 없다.

괜히 잘못 끼어들면 죽겠다 싶어 벽에 딱 붙어 슬금슬금 운영팀으로 숨죽여 이동하는데 뒤에서 누가 툭 하고 친다.

“일찍 왔네.”

얼마나 바쁜지 생얼에 큰 해리포터 안경을 쓰고 머리는 볼펜으로 말아 올린 홍시 누나.

누나. 누나는… 피부가 좋으니까 생얼이… 빛이 나는구나…….

“누나가 부르면 당장 뛰어와야죠. 오늘 저 연봉 계약하나요?”

“어. 연봉 계약해야지. 우리 소전이 고생했오… 우쭈쭈. 내 새끼 올해 잘했어.”

누나가 우쭈주 하며 궁디팡팡 해주자 어젯밤 통화했던 스토커와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싹 사라진다.

* * *

“네. 오늘은 무슨 문제를 틀리셨습니까?”

- 틀리다니! 서술형이 아니면 초딩 때부터 틀린 적이 없는 사람이야!

“그럼 오늘은 무슨 용건이야? 나 피곤해. 용건만 간단히.”

수화기 반대쪽에서 거칠어진 숨소리가 들리지만, 지가 어쩔 거야. 여기까지 쫓아올 것도 아니고 어쩔 거야?

- 그래, 멍청한 건 참아가면서 가르쳐야지. 내가 너 때문에 ‘참을 인’ 자 100번씩 쓴다. 어쨌든, 너 연봉 협상 안 하냐? 랩터스 이제 주전급부터 연봉 협상 들어간다는데.

“안 그래도 홍시 누나가 내일 들어오라더라. 내일 미용실 갔다가 사무실 들어가려면 일찍 자야 해. 안녕. 바이. 짜이찌엔.”

- 헛소리하지 말고. 얼마 받을 건데?

“얼마 받다니 주는 대로 받아야지.”

- 야! 자기 몸값은 자기가 정해야지! 주는 대로 받는 게 어딨어!

“주는 대로 안 받으면 어쩔 건데? 더 주세요, 해봐야 나 같은 저년차는 연봉 조정 신청 자격도 안 되고 계약할 때까지 훈련장 이용도 안 되는데. 그리고 구단이 어련히 알아서 잘 챙겨줄까 봐. 나 그래도 구단에서 이쁨받는 선수다. 엣헴.”

반대쪽에서 혀 차는 소리가 길게 들려온다.

왜 내 연봉에 네가 관심을 가져?

- 잘 들어라. 누나가 불쌍한 어린양 때문에 분석 좀 했다. 이번 시즌 너 WAR이 3.3 정도 나와. 분명 팀에서는 2점대 후반이라고 우길 거지만 수비 지표 생각하면 더 받아야 해.

얘가 타석에 한 번이라도 들어와 보고 이딴 소리를 하는 걸까?

- 우리나라 수비 WAR 계산하는 게 하도 지질 맞아서 보수적으로 해도 최소 3.3 이상은 나와. 우리가 FA를 기준으로 연봉을 산정하자고 할 건 아니지만 FA 기준으로 WAR 1당 5억 정도 책정하니까 랩터스가 너 같은 선수를 외부에서 바로 데려오려면 최소 16억 5천 이상은 필요하다는 거지.

그렇지 그렇게 비싸니까 FA지.

- 아, 신인상 수상에 따른 인지도 상승분도 포함하고…….

이 아마추어의 얘기를 얼마나 들어줘야 할지 모르겠지만 말 끊으면 또 밤새도록 샤우팅을 할 거니까 우선은 들어준다.

그런데… 중간에 왜 우리지? 난 너랑 우리로 엮이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 우리의 기준점이 이렇다는 거고, 넌 이제 풀타임 1년 차에 이번 시즌 연봉 3천 3백 받았잖아. 이럴 경우에 지금까지 선례에 비춰봤을 때. 1억 1천만 원이 최소 금액이라는 게 내 결론이야. 그런데 우리가 최소금액을 바로 제시하기는 억울하잖아. 그렇다면 1년 차 연봉 인상액 기록을 살펴보면…….

얘가 분명 조기 졸업인지 뭔지도 하고 자격증도 뭐 딴다고 하고 바쁘다고 했는데 왜 이런 헛짓거리를 이렇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 …그래서 1억 5천을 부르고. 2억을 부르고 싶은데 분명 그 여홍지 팀장, 그 여시깍쟁이 같은 여홍지 팀장한테 씨알도 안 먹힐 테니까, 1억 5천을 부르고 1억 1천에 합의를 봐야 해. 자, 이해했어? 이 누나의 전략을 이해했냐고!

그럼요. 이해했지요. 연봉 협상을 드라마로 배운 아가씨야.

“완벽한 전략이었어. 한 타 싸움에 펜타 킬 뜨는 각이야. 아주 훌륭해.”

- 그런데 말이 좀 그렇다?

“아니야. 난 진짜 네 전략에 감탄했어. 대단한 전략이야.”

우리 아마추어님께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듯하지만 내가 자꾸 칭찬하자 처음과는 다르게 자꾸 목소리에 힘이 빠진다.

- 그럼 내일 가서 1억 1천 받아와. 내 명령이다!

“나는 닥치고 주는 대로 받아올 것이다. 그것이 내 연봉이니까.”

- 뭐야, 이 미친놈아!

이럴 때는 전화기를 좀 멀리 떨어뜨려 놔야 한다. 내 에이전트도 아닌 것이 내 연봉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 스토커님의 화가 풀리려면… 음… 대략 2분 30초는 더 필요한 듯하다.

“다했음?”

- 야! 아. 목 아파. 죽을래! 죽고 싶어? 내가 여태 떠든 걸 뭐로 듣고 그따위야.

안 봐도 저것이 방방 날뛰는 게 훤히 보이지만 왜 지가 내 연봉을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야.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셨어. 3년 차 이하는 그냥 주는 대로 받는 거야. 미국 같으면 내가 홈런을 100개씩 때려도 최저 연봉이야. 그리고 3년이 지나도 구단이랑 연봉 협상은 잘하는 선수들이나 하는 거야. 나같이 포지션도 없고 타격도 어중간하게 하는 애들은 남들 연봉 오를 때 따라만 가도 감사합니다, 하는 거야. 이거 뭐. 일하면서 남의 돈 받아봤어야 알지. 공주님, 세상은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아요. 주제 파악을 해야 해요.”

전화가 끊겼다.

이런… 내가 말을 좀 세게 했나? 너무 앞뒤 없이 까불길래 현실을 조금 알려줬더니 화났나 보네…….

뭐… 돈 많은 집 딸내민데 알아서 잘하시겠지.

* * *

동그란 안경을 쓴 홍지 누나와 작은 회의실에 단둘이 들어갔다. 회의실에 큰 창문이 나 있지만, 누나와 한 방에… 내 마음은 평온한데 왜인지 얼굴에 살짝 열이 오르는 기분이다.

“소전이 커피 안 좋아하지? 잠깐만, 누나가 우리 소전이을 위해서 맛있는 거 하나 해줄게~”

강아지를 닮은 누나가 조막만 한 손을 놀려 노란색 떡이진 유자차 뚜껑을 열어 뜨거운 물을 붓고는 휘휘 젓는다.

뚜껑에서 떨어지는 유자차 두께로 봤을 때 먹어도 되는 건가 잠깐 고민됐지만 음식은 손맛이라는 진리에 따라 누나 손을 믿어본다.

“자, 누나가 아무나 차 안 타준다. 마셔봐.”

“우와~ 누나… 정말… 우… 호… 오훗… 후웃…….”

“왜, 왜? 이상해?”

“아, 아니요. 뜨, 뜨거워서요……. 좀 식혔다 마실게요.”

유자차에서 쓴맛이 난다…. 더 먹으면 생명의 위험이 생길 수도 있다. 그래. 예쁜데 요리까지 잘하면 반칙이지. 누나 우리 앞으로 사 먹어요…….

차를 내어준 누나가 손때가 덕지덕지 묻은 김소전이라고 이름이 붙은 파일을 꺼내 내 앞에 꺼내 놓는다.

누나의 작은 손으로 첫 장을 펼치자 한국 시리즈 첫 타석에서 홈런을 때리던 장면이 종이 한가득하게 출력되어 나타났다.

그 사진을 보자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온다.

누나, 민망하게 이런 사진을 다.

내 모습을 본 누나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나에게 90도로 고개를 숙인다.

“김소전 선수. 이번 시즌 고생 많으셨습니다. 랩터스를 대표해서 감사드립니다.”

누나의 모습에 나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같이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누나, 갑자기 왜 이래요. 이러지 마요.”

“헷, 진짜야. 랩터스 운영팀장으로 소전이한테 이번 시즌 잘해 줘서 고맙다고 꼭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고.”

피곤에 찌든 얼굴에도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보며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는 누나를 보니 진정성이 느껴진다.

누나가, 그리고 랩터스라는 팀이 나른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 주는지에 관한 생각이 들자 아까 홈런 사진을 본 감정과 더불어 속에서 뜨거운 게 솟구쳐 올라온다.

“누, 누나……. 고맙습니다. 누나한테 고맙고 랩터스에도 고맙습니다. 저 열심히 하겠습니다.”

“으이구, 소전아~ 또 우네. 울지 마. 키는 이렇게 큰데 마음은 아직도 애기네. 울지 마. 뚝.”

휴지를 건네주며 토닥여 주는 누나.

여기 참 따뜻하고 행복하다.

내가 야구 하길 정말 잘했다.

그렇게 울고 웃으며 한참을 이번 시즌 지나간 이야기를 나눴다. 내 기억과 조금은 다른 이야기들도 있었지만 큰 분기점마다 내 활약상을 호들갑 떨면서 집어주는 누나의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이번 시즌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잘했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아… 뿌듯하다.

“우리 이제 슬슬 도장 찍을까?”

“하하하. 네, 누나. 도장 찍어야지요.”

누나가 차게 식은 컵 옆으로 깨끗한 결재판에 꽂힌 종이를 내민다.

“자, 여기 연봉 계약서. 다음 시즌에도 잘 부탁해.”

“그럼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별 내용은 없겠지만 그래도 계약선데 한번 훑어보는 시늉을 해본다. 사실 다른 내용은 다 관심 없고 다음 시즌 연봉 항목만 찾아본다.

[보수액 : 46,000,000원]

잠깐. 이게 얼마지.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4천6백?

4천6백만 원?

내년 연봉 4천6백? 이게 실화?

결재판에서 종이를 뽑아 들고 눈 비비고 다시 바라봤다.

“소전아~ 도장 찍고 밥 먹으러 가자. 누나가 오늘 맛있는 거 사줄게. 누나만 아는 맛집이야~ 기대해도 좋을 거야~”

둘만의 데이트라는 소리에 산산이 조각나 있던 머릿속이 어제 스토커와 통화하던 시간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 2년 차 연봉 기록이 1억 1천이야. 그리고 3년 차 때 2억 3천. 내가 전면에서 진두지휘하면 너를 3년 차라고 주장하면서 3년 차 대우를 받게 해주겠지만 네가… 음… 너는 아무리 봐도 그 정도 협상 능력은 없고……. 네 능력에 맞게 풀타임 1년 차 기준으로 협상에 임해야 해.

그래. 내가 1년 차냐 2년 차냐로 싸웠지.

- 그리고 랩터스의 그 가면 쓴 여우 여홍지라면 너 같은 덜떨어진 애한테는 밥이라도 같이 먹자고 꼬시면서 연봉을 반으로 후려칠 수도 있어.

그래, 누나랑… 밥… 중요하다고 했다가 욕먹었지.

- 절대! 네버! 그딴 허접한 미인계… 아니지. 여홍지는 미인도 아니니까. 음… 하여간 그딴 허접한 술수에 넘어가지 말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야! 대답 안 해!

어제 스토커가 떠들던 얘기가 기억이 났다.

내가 아무리 구단이 양아치여도 2할 9푼에 잠실에서 두 자릿수 홈런을 때린 타자한테 5천을 제시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었는데……. 이게… 진짜로 나타날 줄이야.

“누나, 잠시만요. 뭐가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응? 뭐가?”

짐 싸서 일어나려던 누나가 눈망울을 초롱초롱하게 뜨고는 나를 바라보며 간드러진 목소리로 되묻는다.

“저 내년 연봉이 4천6백인 건가요?”

미안해서 금방이라도 울 듯한 눈을 가진 누나가 정말 미안한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좀 적지? 누나도 소전이 많이 챙겨주고 싶었는데 쉽지가 않네.”

“누나, 그래도 이건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요. 제가 109경기를 나왔고 홈런만 19개를 쳤는데 4천6백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자 진짜 누나의 눈에 살짝 이슬이 맺힌다.

이슬 맺힌 눈으로 목소리도 살짝 잠긴 누나가 사정을 설명한다.

“그래도 말이야. 소전이도 올해 연봉 받아봐서 알잖아. 1군에 뛰면 1군 출장 수당이랑 해서 계약 연봉보다 훨씬 더 나오잖아. 우리 소전이 같은 경우에는 1군 붙박이다 보니까 계약은 5천이 안 돼도 5천은 맞춰지잖아. 그러니까 소전이는 기본 연봉이 5천이라고 생각하면 돼.”

5천을 강조하는 누나의 입술이 아찔하게 눈을 홀린다.

“거기다 소전이가 너무 잘하다 보니까 오늘의 선수, 이 주의 선수, 이달의 선수, 신인상 이런 거에 따른 상금이 많이 나오잖아. 올해도 소전이가 연봉 외로 받은 게 5천이 넘어.”

다시 한번 5천을 강조하며 깜빡이는 눈망울. 정신이 혼미해진다.

“누나가 봤을 때는 내년에 소전이가 더 잘할 것 같거든. 내년엔 누나가 더 열심히 응원해 줄게. 내년에 잘해서 진짜 많이 받아보자.”

혼란스럽다. 저 눈을 보면 그래 그러려니 하다가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고.

도저히 안 되겠다. 말도 안 되는 금액에 찍을 때 찍더라도 물어는 봐야겠다.

“누나.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왜 4천6백이에요?”

“아직 소전이가 연차가 낮아서 어쩔 수가 없어. KBO 소양 교육할 때 들었을 텐데, 누나가 더 설명해 줄게. 3년 차 이하 선수는 구단이 정하는 대로 연봉이 책정되거든. 그래서 우리 팀 다른 3년 차 이하 선수들도 다 연봉이 적어. 3년 차 중에 4천 넘는 건 김소전 너 하나야!”

누나……. 내가 누나를 좋아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누나. 우리 팀 3년 차 이하엔 1군에 뛰는 선수 없잖아요. 선배 중엔 2년 차에 1억도 넘게 받은 선배도 있고 미국 간 임수검 선배까지는 얘기도 안 할게요. 당장 이시윤 선배만 해도 2년 차에 5천 넘지 않았나요?”

“이시윤은 1년 차 중간에 군대 갔잖아. 팀에서 뛴 기간이 있지. 그리고 그때 랩터스랑 지금 랩터스는 좀 달라. 소전이도 알다시피 구단에 돈이 없어.”

구단에 돈이 없다고? 랩터스가 돈이 없으면 타이탄스는 내일 파산이라도 해야 하는데?

“누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지 않아요? 저도 누나 생각해서 그냥 도장 찍고 싶은데… 이건 아닌 것 같아요.”

한숨을 푹 쉬는 홍시 누나. 안 되는 걸 해야 한다는 듯 입술을 깨물고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누나가 얼마나 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맞춰볼게. 소전이는 내년 연봉 얼마를 받고 싶어?”

여기서 말 잘해야 한다. 어제 스토커가 얘기한 내 첫 제시액은 1억 5천, 현실적인 기대액은 1억1천.

얼마를 던져야 하는가.

선뜻 말을 하기 어려워 앞에 있는 홍시 누나를 바라보니 여전히 촉촉한 눈망울로 내 입만 처연하게 바라보고 있다.

흔들리면 안 돼…. 누나 눈을 피해 고개를 떨구고는 작게 내 요구액을 이야기한다.

“2억이요…….”

“2억?”

누나의 목소리가 3배는 커졌다.

나도 말하고 나서 순간 실수했다는 생각이 확 들었다.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 내려온다.

언젠가 FA 되면서 100억 달라고 했다가 FA는커녕 유니폼을 벗어야 했던 때가 머릿속에 확 스쳐 지나간다.

멍청하긴……. 적당히 해야지, 나오는 대로 막 뱉으면 어쩌라는 거냐 이 개념 없는 혓바닥아!

내가 혼자 자책하는 사이 누나가 그 예쁜 얼굴로 빙그레 웃는다.

“소전이 그 말을 못 해서 그렇게 힘들었어?”

“네…….”

내 기운 없는 대답에 누나가 따뜻한 목소리로 다독여 준다.

“괜찮아. 선수가 연봉 많이 받고 싶은 건 당연하지. 2억이래서 조금 놀라긴 했는데 우리 소전이라면 언젠가 받을 수 있는 돈이잖아. 우리 소전이 배포가 대단한데? 이제 3년 차. 그것도 이제 처음 규정 타석 채운 선수가 2억을 받고 싶다고 하다니.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우리 소전이 크게 될 거야.”

나는 진지한데 날 여전히 아기로만 보는 홍시 누나의 눈빛. 순간 알 수 없는 반항심 같은 게 처음으로 올라왔다.

“누나. 제가 연봉 때문에 나름대로 생각을 했었는데요. 제 작년 WAR이 수비랑 주루까지 합하면 최소 3은 돼요. 거기다 WRC+도 통계 사이트 기준으로 130이 넘고요. 아무리 3년 차까지 연봉 조정 신청 권리가 없어도 이 정도 성적에 4천6백은 납득이 안 돼요. 여기 누나가 주신 고과표만 봐도 경기 수, 안타, 타점, 홈런…….”

내가 누나가 준 고과표를 보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누나의 손이 내 손을 덮쳐온다.

“소전아. 기록을 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어. 안타라고 다 같은 안타가 아니고 홈런이라고 다 같은 홈런이 아니야. 누나한테는 다 이긴 상황에서 때린 홈런보다 9회 말에 댄 희생번트 하나가 더 소중할 때가 있어.”

손이 차다. 역시…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홍시 누나를 따뜻하게 보살펴줘야 한다.

“그래서 제가 그것도 생각을 해봤는데요. 어제 루다랑 먼저 살펴봤었거든요. 제가 결승타라든가 득점권 타율, 그리고 접전에서의 성적도 확인했었는데요…….”

순간 누나의 눈매가 날카로워진다.

“잠깐. 지금 누구랑 뭘 살펴봤다고? 루다? 그 세계 그룹 외동딸 이루다? 너 요즘 걔랑 만나니?”

들어본 적 없는 차가운 누나의 목소리에 순간 온몸에 한기가 서렸다.

“우리 연봉 협상은 좀 뒤로 미뤄야겠다. 다음 주에 다시 연락해 줄게.”

아까의 허둥대는 모습은 어디 가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서류를 정리한 홍시 누나가 의자를 밀고 일어나며 나를 향해 무서운 말을 던진다.

“이건 랩터스 운영팀장으로 하는 말인데. 김소전 선수. 외부인, 그것도 야구판 잘 모르는 여자한테 놀아나지 마세요. 우리 팀 선수에게 충고하는 겁니다.”

쌩하는 바람과 함께 홍시가 아닌 여홍지 팀장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나 찍힌 거 같은데…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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