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억 FA선수가 되다-49화 (49/204)
  • 49화. 반격의 서막

    * * *

    한국 시리즈가 다르긴 다르다.

    작년에 와일드카드 경기한 거랑은 또 다르다. 딸랑 한 경기 치렀을 뿐인데 기운이 쭉쭉 빠진다. 심지어 첫 경기를 1점 차로 져버리니… 이건 팀 분위기마저도 좋지 않다.

    - 한국 시리즈 3차전 경기가 열리는 고척입니다.

    - 타이탄스의 기세가 좋습니다. 타이탄스가 창단 첫 우승을 거머쥘 좋은 기회가 왔어요.

    - 그렇습니다. 시리즈 전적 2 대 0. 잠실에서 2승을 따낸 타이탄스는 홈구장 고척에서 우승을 확정 지으려 하고 있습니다.

    - 잠실 두 경기, 고척 세 경기, 다시 잠실로 두 경기란 말이죠. 고척 세 경기 중에서 두 경기를 이기겠다는 계산인데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에요.

    첫 경기, 에이스 이시윤이 호투했지만 패하고 두 번째 경기마저 퇴출이 거의 확실시 되는 외국인 1번이 나와 3이닝도 못 버티고 털렸다.

    잠실에서 아연실색한 팬들을 바라보며 감독님이 이동 일인 휴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라는 명령을 내렸다.

    우리가 1등 팀인데도 잠실에서 한 경기도 못 따내다니. 억울해도 너무 억울하다.

    감독님 말씀을 뒤로하고 휴식일에 훈련장을 찾았다.

    “이거 봐. 오지 말래도 꼭 오는 놈들이 있어요. 감독님이 쉬라고 하셨잖아. 가.”

    10시에 밥 먹고 훈련장에 들어서자 이번 시즌 1루와 2루를 번갈아 가면서 보는 정현기 선배가 스트레칭을 하다가 날 보고는 집에 가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일찍 나오셨습니다?”

    항상 안 좋은 무릎을 정성스럽게 펴는 정현기가 주섬주섬 훈련 준비를 하는 나를 보며 따뜻한 대화를 건넨다.

    “오늘 같은 날은 그냥 쉬어도 돼. 한국 시리즈에서 털렸으면 쉬면서 멘탈도 정리하고 해야지. 그렇게 해야 야구 오래 한다.”

    슬쩍 스트레칭 하는 선배의 뒤로 가 팔을 당겨주며 궁금했던 걸 물었다.

    “전 항상 훈련장 나오니까 안 나오면 이상해서요. 그런데 선배님은 쉬는 날 왜 나오셨어요?”

    “나? 난 아침에 일어났는데 마누라가 애 밥하라고 해서 도망 나왔지. 이게 말이 되냐? 한국 시리즈 하는 선수한테 애 밥을 하라는 게 말이 돼? 타이탄스 애들은 포스트 시즌 기간 동안 합숙한다는데 왜 우리는 출퇴근하는 거냐? 이따가 주장 오면 내년부터는 합숙하자고 건의 좀 해봐라. 이건 유부남 복지 차원에서 해야 하는 일이야.”

    아… 그런 큰 뜻이……. 내가 결혼을 안 해봐서 몰랐네.

    근데 애들 밥하는 게 어려운가? 전에 친구들 하는 거 보니까 대충 라면 끓여주면 잘 먹던데.

    스트레칭을 마치고 몸도 풀 겸 정현기 선배와 캐치볼을 하면서 이것저것 듣게 되었다.

    “소전아. 너 내야에서 송구할 때 꼭 오버핸드로 손을 드는 이유가 있어?”

    “제가 유격에도 들어가고 3루에도 들어가잖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외야 때보다는 작게 해도 폼을 좀 크게 가져가서 강하게 뿌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내 대답에 정현기 선배가 골똘히 생각을 한다.

    “그래? 그래서 2루에서도 꼭 발 모양 만들어서 송구하는 거야?”

    “네. 딱히 의식은 안 해봤는데 계속 그렇게 연습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되는 거 같습니다.”

    “그렇구나. 오버핸드 송구가 좋긴 좋지. 공이 빠져도 위아래로 빠질 확률이 좋긴 한데……. 아니다. 잘하는데 뭘.”

    응? 뭐지?

    “해주실 말씀 있으면 해주세요.”

    성격이 차분하고 점잖은 정현기가 괜히 말을 꺼냈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고는 속에 품어 왔던 이야기를 한다.

    “할 수 있으면 옆으로나 언더 토스도 하면 어떨까 싶어서. 너 잘하고는 있는데 야구하는 게 너무 억지스러워.”

    순간 뭔가에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해진다.

    억지스럽다고? 내가? 내가 내 야구 하는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만들려고 얼마나 노력을 많이 했는데 억지스럽다니. 이건 좀 선 넘는 거 같은데.

    “선배님. 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제가 잘할 수 있는 걸 하고 있습니다.”

    말을 괜히 꺼냈다는 듯 미안한 표정을 지은 정현기가 손을 흔들며 미안함을 표한다.

    “아니야, 너 잘해. 열심히 하는 것도 알고. 그냥 그렇게 보인다고 얘기하는 거야. 캐치볼 더 할 거야? 난 이제 배팅 좀 칠 건데.”

    “아닙니다. 저도 몸 다 풀었습니다.”

    베팅 케이지에 선배가 들어가고 나서도 내 머릿속엔 선배가 한 말이 떠나지 않는다.

    억지스럽다고? 내가? 내가 자연스러워지려고 얼마나 노력 중인데 억지스럽다고?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 훈련장을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밖에서 문이 ‘끼익’ 하고 열린다.

    “아~ 나오지 말라는데 누가 나왔어! 나가! 나가!”

    “정안이 왔냐?”

    “형은 애 봐야지 왜 나왔어. 어? 소전이도 나왔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넌 애도 없는데 왜 나왔어? 들어가, 들어가.”

    주장이 선수들을 혼내고 있는데 주장 뒤로 검은 그림자가 덮쳐 온다.

    “왜 아침부터 애들을 잡아. 왔으면 얼른 가서 운동이나 해.”

    “아… 진짜……. 영근이 형은 왜 왔어요. 병원이나 가요. 움직이지 말라는데 왜 말을 안 들어! 형 더 아파지면 나 감독님한테 혼나요.”

    “주장이라는 놈이 훈련 온 선수들 커피는 못 사줄망정 왜 훼방을 놓고 그래. 가서 커피 사와.”

    “돈 줘요. 형 여자 친구도 없어서 돈 쓸 데도 없잖아. 돈 줘요.”

    주장의 택도 없는 요구에 자기는 아니라고 우기는 모태 솔로 최고참 4번 타자가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 카드를 건넸다.

    카드를 받아들고 의기양양한 주장이 전화기를 들고 뭔가 한참을 조작하더니 이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어, 정안이. 어디냐? 어. 차대지 말고 돌려서, 단장 누나 잘 가는 카페 알지? 어, 거기. 거기 내 이름으로 포장 주문해 놨으니까 그거 가져와. 어, 결제했어. 가져만 와. 어. 3분 준다. 바로 갔다 와.”

    카드를 뺏긴 채 눈만 껌벅껌벅거리는 야구만 할 줄 아는 4번 타자가 주장에게 카드를 돌려받으며 이 상황을 파악해 본다.

    “누구한테 가져오라는 거냐?”

    “아, 수경이. 수경이도 어차피 올 거니까요.”

    “수경이 것도 산 거야?”

    “당연하지. 수경이는 안 사주려고? 사람 참 못됐네.”

    주장이 민수경 선수의 커피를 얘기하고 있는데 조영근 선배 전화기에 문자가 도착한다.

    “자… 잠깐……. 너 뭘 긁었길래 카드값이 34만 원이 나와!”

    “뭘 긁긴. 커피 좀 사고, 나 배고프니까 빵하고 디저트 몇 개 샀지. 이따 애들 더 올 거니까 겸사겸사 좀 더 사고. 설마 형……. 카페에서 밥 되는 거 파는 거 모르는 거 아니지? 진짜 치어팀 커피 사갈 때 커피만 사다 준 거 아니지? 형… 설마……. 아니지? 진짜 아니지? 커피도… 설마……. 진짜 아메리카노만 사간 거 아니지? 돌체라떼 이런 거……. 에이… 설마……. 형, 아무리 모쏠이어도……. 치어팀 송 팀장 사다 주는 거라면……. 에이, 아닐 거야. 설마…….”

    주장이 쏘아붙이는 말에 자기 돈 쓰고도 죄인이 된 조영근 선배는 땀만 삐질삐질 흘린 뿐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다.

    뭐지? 커피가 아메리카노나 라떼 먹으면 되는 거지, 뭐가 있다고 저러는 거야? 메뉴판에 이상한 건 커피 애호가들이나 먹는 거 아닌가?

    그리고 안 그래도 영근 선배 치어팀 송진영 치어가 거리 두기 하는 거 같다고 힘들어하는데, 주장은 꼭 저렇게 얘기를 해야 하나……. 사람이 말이야, 참 못됐네. 그렇게 안 봤는데 못됐어.

    에휴… 뭐, 선배들 연애사는 알아서들 하시겠고, 우선 나는 두 개만 기억하자.

    카페에선 먹을 거를 사도 된다. 여자한테는 돌… 돌… 돌 뭐시기 라떼를 사줘라.

    흠… 오늘도 보람찬 하루군.

    역시 연애는 해본 사람 말을 들어가면서 해야 해.

    주장이 망연자실해 있는 최고참을 데리고 연애 상담을 하기 위해 나가자 속속 주전 선수들이 연습장에 모여든다.

    감독이 운동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여느 때처럼 훈련장에 모인 선수들. 서로 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이기고 싶다는 의지가 절로 느껴진다.

    * * *

    - 랩터스의 첫 타자 김소전부터 경기 시작됩니다.

    - 김소전, 한국 시리즈에서 좋아요. 9타수 4안타, 홈런도 한 개 있습니다. 랩터스에서 야구 혼자 하고 있어요.

    - 김소전, 초구부터 강하게 잡아당깁니다. 2루수 키를 넘어가는 안타. 한국 시리즈 3차전, 먼저 공격의 실마리를 풀어 나가는 랩터스입니다.

    - 이제 다들 김소전 선수의 약점을 알거든요. 바깥쪽 흘러나가는 변화구. 그걸 노리고 바깥으로 빠지는 체인지업을 던졌는데 공이 좀 몰렸어요. 빼려면 더 확실하게 빼줘야 해요.

    야구를 하면 할수록 어려운 게 눈으로 보고 타이밍을 맞추는 게 너무 어렵다.

    오늘 경기에 이겨야 한다는 마음으로 1회부터 집중력을 최대로 끌어올려 투수의 손끝을 바라봤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최고로 집중했을 때 투수가 공을 놓는 순간, 공을 잡은 그립이 보인다.

    손 안쪽으로 검지와 엄지가 만나 OK 사인을 그리는 게 보였다.

    체인지업. 궤적상 직구처럼 오다가 바깥쪽으로 도망가는 공. 최대한 앞에서 덜 도망갔을 때 강하게 앞으로 밀어내야 한다.

    언제나처럼 직구 타이밍에 움직인 몸뚱이가 느릿느릿한 체인지업에 너무 빨리 다가섰다. 의식적으로 최대한 뒤에 두고 있는 팔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돌아가는 몸뚱이를 따라 공을 마중 나온다.

    조금 빨리 맞아버린 공이 수없는 반목으로 만들어 낸 배트의 움직임을 못 이겨 2루수 키를 살짝 넘어 잔디에 떨어진다.

    휴… 잡히는 줄 알았네. 살았다.

    - 2번 라정안, 타석에 들어옵니다.

    - 라정안이 안 좋아요. 배트에 맞히긴 하는데 타구의 질이 좋지 않거든요. 못 맞히면 모를까, 맞히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럴 때 빗맞은 안타라도 하나 나오면 타격감이 올라올 수도 있어요.

    어제 주장은 훈련하러 온 선수들에게 뭐라고는 했지만 가장 늦게 문을 닫고 나간 게 주장이다.

    문제는 모르겠는데 계속해서 조금씩 안 맞는 타이밍. 그걸 조절해 보겠다고 하루 종일 베팅 케이지에서 미친 듯이 배트를 휘둘렀다.

    1루에 나가 최대한 머리를 굴려본다.

    상대는 우투수. 타석엔 좌타자. 1루엔 발 빠른 주자.

    타이탄스 배터리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게 만들어야 한다.

    많이 뛰지는 않지만 성공률이 높은 주자가 2루에 들어가면 한국 시리즈에서 타격감이 안 좋지만 번트 능력은 충분히 있는 2번 타자는 선취점을 위해서 번트를 댈 것이다.

    그러면 주자 3루. 원 아웃 주자 3루에서 안타는 못 때려도 외야 플라이는 충분히 때려낼 수 있는 강정상이 손쉽게 희생 플라이.

    그게 아니라면 타선에서 나를 제외하고 그나마 사람답게 타격하고 있는 조영근이 어떻게든 점수를 만들어 내면서 한 점.

    앞선 두 경기 계속 선취점을 뺏기면서 끌려가는 경기를 치러온 랩터스로서는 충분히 해볼 만한 경기 상황이 만들어진다.

    타이탄스도 분명 이 상황까지 머리에 그릴 것이고 1루 주자가 2루 가는 걸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직구, 무조건 직구 위주의 볼 배합을 가져가겠지. 그러다 볼 카운트가 유리해져야 떨어지는 변화구를 섞어볼 것이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정석적인 그림. 그렇다면 나는 이 상황을 실현해야 한다.

    - 1루 견제. 날카로운 견제가 들어갔습니다.

    - 김소전 선수, 리드가 커요. 아직 경기 초반이거든요. 너무 노골적으로 뛰겠다는 의사를 보이고 있어요. 위험합니다.

    - 또다시 견제. 이번엔 잡힐 뻔 했습니다.

    - 이거 뛰겠는데요. 언제냐가 문제지, 김소전 뛰겠다는 의사 표현을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 또다시 견제. 1루 견제가 연속해서 3개 들어갑니다.

    - 김소전, 무모할 정도로 리드를 길게 잡고 있어요. 무게 중심을 1루에 남겨 두고 있어야 하거든요. 아니면 못 돌아 오니까요. 배터리의 신경을 건드리겠다는 건가요. 뛸 생각이라면 너무 무모해요.

    - 1구 피치 아웃. 포수 1루에 공 뿌립니다. 세잎. 포수의 송구가 살짝 높았습니다.

    - 이거 걸릴 뻔했어요. 완전히 걸렸다고 봤는데 1루로 간신히 돌아왔어요. 2루 가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너무 무모해요.

    - 2구, 또다시 피치 아웃. 1루 송구. 세잎. 세잎입니다.

    - 주자와 배터리와의 싸움이 치열합니다. 랩터스, 선취점을 뽑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네요.

    어휴……. 심장이 벌렁거리네. 조기성 선배님, 투수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1루 송구가 무슨 160은 넘어 보이는데.

    그래도 우리 주장님을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하나, 둘…….

    - 김소전, 아랑곳하지 않고 리드를 넓혀 나갑니다.

    - 김소전 선수, 주루 플레이를 굉장히 영리하게 하는 선수였는데 오늘은 무슨 야수처럼 경기에 임하네요. 제가 주자라면 저 정도로 리드 못합니다. 김소전, 야수의 심장을 가지고 있어요.

    - 3구~ 또다시 피치 아웃. 1루. 1루에서……. 세잎. 타이탄스 비디오 판독을 신청합니다.

    - 볼까요. 느린 그림… 아! 안 닿은 것 같은데요. 각도에 따라… 글쎄요. 태그가… 됐나요? 안 된 것 같기도 하고…….

    - 세잎. 원심 유지됩니다.

    미친 짓도 한두 번이지 살 떨려서 못하겠다. 이 XX들아. 앞으로 던져라, 앞으로. 왜 자꾸 나한테 던져……. 현정인 선배… 잘못했어요…….

    - 투수 현정인, 볼카운트 3볼로 몰렸습니다.

    - 이거 김소전 선수가 만들어 낸 볼카운트에요. 이젠 던질 수밖에 없는데요.

    - 주자 또다시 리드를 길게 가져갑니다.

    포수 엉덩이가 높다. 이건 잡으면 무조건 2루로 쏘겠다는 자세. 스타트만 끊었다가 뒤로… 이런…….

    - 라정안 쳤습니다.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1루 주자 2루, 타자 주자 1루까지. 무사 주자 1, 2루. 오늘은 랩터스가 타이탄스의 홈 구장에서 반격에 나섭니다.

    아우 씨, 스타트 좋았는데. 그냥 달렸으면 3루 갈 수 있었는데. 주장! 치려면 좀 더 멀리 치지 똑딱질이 뭡니까! 좀 잘합시다!

    방향 전환 두 번 했더니 머리가 다 어지럽네… 우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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