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억 FA선수가 되다-36화 (36/204)
  • 36화. 스토커

    - 헛스윙. 2구 흘러나가는 공에 크게 배트를 돌려보는 김소전.

    - 성급하죠. 많이 빠지는 공인데 욕심이 지나쳐요. 야구 급하게 하는 거 아니거든요. 공 차분하게 봐야 합니다.

    공을 바라본다고 보는데 계속 머리 뒤가 따갑다. 이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계속 신경이 쓰인다.

    분명 저 여우 같은 것 때문일 것이다.

    - 삼진. 하워드 김소전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면서 기분 좋게 경기를 시작합니다.

    - 오늘 슬라이더가 각이 좋네요. 저 바깥쪽 공을 참아내지 못하면 랩터스 타자들 힘들겠어요.

    꼴사나운 삼진을 당하고 덕아웃으로 바로 몸을 돌렸다.

    여전히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는 기분. 고개를 돌려 기자석을 바라보니 역시나 그 여우가 나를 보며 혀를 날름 내민다.

    애도 아니고 저게 뭐 하는 짓인지……. 덕아웃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빨리 한다.

    - 치열한 경기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7 대 8 뒤지는 랩터스의 8회 초 공격이 시작됩니다. 타석에 3타수 무안타의 김소전. 오늘 타격감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 타자가 매번 잘 칠 수는 없어요. 이럴 때 빨리 감을 되찾을 수 있냐가 신인급 선수와 베테랑과의 차이죠.

    왜인지 타석에 나올 때마다 저 여우가 눈에 거슬린다. 공에 집중하려 해도 자꾸 신경이 기자실로 쏠린다.

    - 루킹 삼진. 오늘 김소전 삼진 3개를 당합니다.

    - 김소전 선수, 오늘 컨디션이 상당히 안 좋네요. 집중력이 떨어져 보여요. 최근 언론의 과도한 관심 때문인지 평소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왜지……. 왜 자꾸 저 여우가 날 부르는 것 같을까…….

    - 경기 끝. 드래곤스가 7 대 8, 한 점 차 승부를 지켜내며 스윕을 막았습니다.

    내 앞에 걸린 찬스에서 한 번만 쳤더라도… 아니, 내가 출루만 했더라도 결과는 달랐을 텐데…….

    경기 후 루틴대로 샤워하면서 복기를 하다 오늘 경기 패배의 진짜 원인을 찾아냈다.

    ‘으… 그 여우, 여우만 안 만났어도 한 번은 나갔을 텐데…….’

    광주 원정을 위해 버스를 타러 가는 길. 지는 경기를 끝까지 봐준 팬들이 출구 앞부터 각종 구단 상품을 들고 선수단을 기다린다.

    여기서 극명하게 갈리는 인기 순위.

    팀의 주축 선수들은 한 걸음에 사인 하나, 두 걸음에 선물 상자를 손에 쥔다. 오늘 최강훈이 없어서 그렇지, 최강훈급 외모는 뒤에 매니저가 따라붙어서 팬들의 조공 물품을 쌓아 올린다.

    그리고 나 같은 신예 존잘 인기남은…….

    “김소전 선수, 우리 애 사인해 주세요!”

    “엄마, 나 싫어. 라정안 사인받을 거야!”

    “줄 봐! 언제 기다려! 늦어. 아니면 엄마 간다?”

    “싫어! 싫어! 김소전 못생겨서 싫어!”

    “엄마가 예쁜 말만 쓰랬지! 못생긴 사람 앞에서 못생겼다고 하면 착한 일이에요, 나쁜 일이에요?”

    “몰라! 싫어! 나 야구 안 봐! 이제부터 야구 싫어할 거야!”

    우리 랩린이들이 부끄럼이 많아 내 앞에서 사인 받기를 어려워한다. 하긴 나도 어릴 때 프로 선수들 보면 막 연예인 같고 그랬지. 다 이해한다, 랩린아.

    “김소전 선수, 사인해 줘요.”

    선배들이 팬들에게 잡힌 틈을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기쁜 마음에 뒤를 돌아보자마자 얼굴이 알아서 굳는다.

    “우리 앞으로 안 보기로 한 거 아니었습니까?”

    “전 자주 봐야 할 거 같은데요.”

    늘씬한 키에 화려한 외모를 가진 젊은 여자와 대화를 시작하자 주변이 일순간에 조용해진다.

    “뭐야……. 김소전한테 여자가 있었어?”

    “잠깐만……. 김소전이 차는 거 같은데?”

    “그게 말이 돼? 여자가 훨씬 예쁜데? 너무 예쁘잖아.”

    “조용히 해봐. 안 들려.”

    주변의 반응과 상관없이 짜증이 확 밀려온다.

    “그만하시죠. 서로 좋은 감정도 아닌데 그만합시다.”

    “난 못하겠는데.”

    보통의 일반인이라면 운동선수가 노려보면 기가 죽기 마련인데 전혀 꿇리지 않고 받아치는 여우. 예쁘지도 않은 게 쓸데없이 도도하다.

    “어젯밤 얘기 다 끝난 거 아닙니까. 경기장에서 하루 종일 질척거리더니 끝나고 나서까지 뭐 하시는 겁니까?”

    “그래~ 어젯밤엔 그리 당당하더니 내 생각을 하긴 했나 보네. 나 너 때문에 인생 말아먹을 뻔했는데 사과는 해야 하지 않아?”

    예전엔 진짜 몰랐다. 세상에 이런 미친X들이 많은 줄 정말 몰랐다.

    “와… 어젯밤에 김소전이랑 뭔 일이 있었나 봐.”

    “조용히 하라고. 남자랑 여자가 만나서 여자가 인생 말아먹을 뻔했다잖아.”

    “XX. 여자가 저렇게 예쁜데. 김소전이 진짜 차는 거야?”

    “몰라, XX야. 우리가 모르는 뭔가 다른 매력이 있겠지.”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 무시하는 게 답이다. 몸을 돌려 버스로 향했다.

    “야! 나쁜 XX야! 연락해라! 내 번호다!”

    등 뒤에서 날아오는 야구공. 내 뛰어난 반사 신경으로 놓치지 않고 받아내고는 미친 여우에게 주의를 주었다.

    “공 함부로 던지지 마세요. 위험합니다. 당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위험하니까 함부로 던지지 마세요. 휴… 그리고… 왜 자꾸 반말이야! 우리가 서로 반말할 사이좋은 사이가 아니잖아!”

    소리를 빽 질러주고는 버스에 올랐다. 그러고는 바로 택시 타고 갈 것을 하고는 후회했다.

    “김소전 뭐냐?”

    “너 여자 만나?”

    “못생긴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며칠 됐어? 왜 싸우는 거야? 형한테 얘기해 봐. 형이 연애는 전문이야.”

    “결혼은 안 된다. 연애만 해. 결혼은 안 돼.”

    “형들한테 소개시켜 줘야지. 친구들 다 데리고 와. 형이 맛있는 거 사줄게.”

    마음 같아서는 대국민 기자 회견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어젯밤 홍시 누나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이대로 묻으라고 해서 대충 얼버무려 버렸다.

    “그냥 팬이에요.”

    “어제저녁에 사인 한번 해줬습니다.”

    “여자 친구라니요! 그런 거 아닙니다.”

    “번호도 몰라요. 그러니까 여기에 번호를 적어서 주죠.”

    그러고 보니 얘가 야구공에 자기 번호를 적어줬네. 야구공도 버려야겠구나.

    “우와~ 김소전 능력 있네. 여자한테 번호를 먼저 받고. 대단하다. 하긴 나도 그런 적이 있었는데…….”

    라떼는…….

    라떼는…….

    “아, 그때 말이야……. 라떼는…….”

    미친 여우 덕분에 광주로 내려가는 길 내내 옆에 탄 선배의 파란만장한 과거 연애사를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 * *

    주말 광주 3연전. 팀이 전체적으로 컨디션이 조금 떨어진 가운데 1승 2패를 하며 루징 시리즈를 가져간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인천에서 마지막 경기 컨디션이 확 죽어버린 내가 조금이나마 컨디션을 끌어 올렸다는 거.

    그래서 최소한 루킹 삼진 같은 헛짓거리는 안 하게 되었다는 거에 의미를 찾는다.

    서울로 올라와 하루를 쉬고 홈 6연전을 준비한다. 겉으로는 배 나오고 쉬엄쉬엄 운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프로 야구 선수들이지만 시즌을 시작하고 매일같이 진행되는 시합 앞에서 누구나 다 지치고 힘들어진다.

    이미 시즌이 시작한 지 두 달이 넘어 석 달이 돼가는 시점. 지금부터는 슬슬 체력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김소전, 오늘은 3루다. 메이슨이 등이 당겨서 수비 못 하시겠단다. 정안이가 1루 들어갈 거고, 오늘 중심 타선 상대로 시프트 강하게 걸리니까 수비 위치 미리 잘 파악해 놔라.”

    “예, 코치님.”

    우리 외국인 타자님……. 분명 수비 되는 1루수라고 하셨는데 절반은 지명 타자로 나오시는 거 같다.

    그렇게 지명 타자 슬롯을 빼먹으니 나이 많은 선배들 체력 관리가 안 되고, 그러다 보니 멀티 백업이 되는 내가 여기저기 땜질 다녀야 하고……. 악순환의 반복이다.

    이러다 내가 먼저 퍼질 수 있으니 나라도 체력 유지가 먼저다.

    - 잠실에서 타이탄스와 랩터스 간의 주중 3연전이 펼쳐집니다. 시즌 첫 루징 시리즈를 기록한 랩터스와 하위권 탈출에 사활을 건 타이탄스와의 경기입니다.

    - 최근 구단주의 무리수로 인해서 팀 분위가 어수선한 랩터스가 힘든 시간을 어떻게 버티는지가 관건이에요.

    작년보다는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별로인 외국인 선수들. 타자도 수비 못 한다고 드러눕는데 투수도 한 명은 저 꼴이다.

    - 제이콥. 볼넷, 볼넷입니다. 주자 만루. 투 아웃에 주자가 가득 찹니다.

    - 지금 보면 말이죠. 삼진-볼넷-삼진-볼넷-볼넷이거든요. 이러면 팀이 할 게 없어요. 투수가 던진 공을 타자가 쳐서 인플레이가 되어야 상황이 발생을 하든 수비를 하든 뭔가를 할 거란 말이죠. 그런데 제이콥 선수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하고 있단 말이에요. 삼진을 잡는 거 보면 구위는 좋아요. 좋은데 제구가 저 정도로 안 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보세요. 김민중 감독, 괴로워하고 있잖아요.

    덥다. 하… 덥다…….

    아직 여름 시작도 안 했는데 덥다. 아무것도 안 하고 서 있기만 하는데도 덥다.

    - 3루 파울 라인 바깥으로 높이 뜬 공. 3루수 쫓아갑니다. 3루수 김소전, 잡았습니다. 이닝 종료. 랩터스의 길었던 1회 초 수비가 끝났습니다. 잠시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수비수가 아무것도 할 게 없는 경기. 3루에 멍하니 서서 VR 기기에 친구 추가되어 있는 구단주님이 보내 주기로 한 새 예술 영화를 상상하다 딱 하는 타구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늘 높이 솟구친 타구. 속으로 경기 중 딴생각을 한 나를 질책하는 마음 반, 가만히 있으면 나갈 공을 건드려준 타자에게 고마운 마음 반을 가지고 타구를 쫓았다.

    3루 쪽 그물 가까이로 날아오는 공. 펜스와 나의 거리를 확인하면서 천천히 그리고 안전하게 포구 위치를 잡는다.

    턱!

    높은 데서 떨어지는 공을 안전하게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뒤에서 들리는 아웃 콜. 아웃 콜을 듣고야 마음이 편해지고 그제야 그물 밖 관중이 눈에 들어온다.

    ‘너 또 왜 왔냐?’

    3루 원정 응원석 맨 앞자리에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보고 있는 여우. 저 꼬리 9개는 달려 있을 것 같은 여우가 내 안정적인 수비를 보고도 웃지 않고 매섭게 쏘아본다.

    같이 마주 보고 눈으로 욕을 해준 후 1루 측 홈 팀 덕아웃으로 뛰어 들어간다.

    어휴, 퉤퉤. 재수 없을라. 내일은 소금이라도 가져와야겠다.

    - 랩터스 1회 말 공격. 1번 타자 김소전 선수 타석에 들어섭니다.

    - 김소전 선수는 전통적인 스타일의 1번은 아니죠. 컨택보다는 장타력에 강점이 있는 선수입니다만 최강훈 선수가 빠진 팀의 입장에서는 고육지책으로 김소전 선수를 1번 타자로 쓰고 있어요.

    - 거기에는 발이 빠른 것도 한몫하겠죠?

    - 그렇죠. 도루가 많지는 않지만 어린 선수답지 않게 주루 플레이가 굉장히 뛰어납니다. 도루를 많이 하지 않는 건 불만스럽긴 합니다만 마음먹고 달리면 타이틀도 따낼 수 있을 만한 스피드를 가졌어요.

    찜찜하다, 찜찜해. 잡을 때까지는 기분이 좋았는데 못 볼 걸 보고 난 후부터 기분이 영 안 좋다.

    이럴 땐 상담 샘이 얘기해 준 대로 마음을 비우고 머리를 맑게 하고 단전에서부터 기운을 끌어올려서 좋은 생각만 하게 하고…….

    좋은 생각… 좋은……. 구단주님이 오늘 보내 준다고 한 좋은 영상……. 아…….

    구단주 형을 위에서 오늘 열심히 하자!

    - 김소전! 잡아당긴 타구. 우중간 잠실야구장 가장 깊은 곳으로 떨어집니다. 김소전 2루 밟고, 3루로. 3루, 공 3루로. 3루타! 랩터스, 1회 말 공격을 김소전 선수의 3루타로 시작을 합니다.

    - 바깥쪽 높은 공을 잘 잡아당겼어요. 처음엔 넘어가나 생각이 들었는데 펜스 상단을 맞았죠. 지난 광주 원정에서 컨디션이 살짝 떨어지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런 우려를 싹 날려버리는 좋은 타구를 쳐 냈습니다. 볼수록 좋은 선수네요.

    구단주 형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배트를 돌리니 공이 와서 맞아 주었다. 아마도 선물을 받고 나서 돌렸으면 넘어갔을 타구가 아직 실물이 들어오지 않아서인지 아쉽게 펜스 상단을 맞고 떨어진다.

    맞는 순간 큰 타구라는 걸 직감했지만 넘어갈지는 애매해서 첫발부터 강하게 뛰기 시작한 발을 점점 더 빠르게 놀렸다. 타이탄스 외야수가 어버버하며 공을 한 번에 못 집어 올리는 걸 보고는 그대로 3루까지 내달렸다.

    3루수가 공이 오는 것처럼 자세를 잡고 있는데 글러브와 눈 시선의 위치가 다르다. 넌 연기력이 부족하다. 이런 사기, 나도 수없이 쳐봤다. 이 공 절대 3루에 정확히 들어오지 않는다.

    주루 코치의 슬라이딩 사인을 보고 발부터 들어가는 훅 슬라이딩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발부터 들이밀면서 눈은 수비수의 글러브를 쫓는다.

    내 발이 베이스에 먼저 들어가기도 했지만 3루수도 베이스를 포기하고 옆으로 움직여 빗나간 송구를 잡아낸다.

    아쉽다. 빠졌으면 홈까지 노려보는 건데. 그래도 첫 타석에 3루타가 어디냐.

    감독님이 예전에 말씀하셨다. 하루에 안타 하나 치고 몇 경기만 몰아치면 금방 3할이라고. 현재 타율 2할 9푼. 간다. 3할, 나도 3할 타자 해본다.

    탄력을 살려 일어나면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하늘로 주먹을 치켜들었다. 딱히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

    그런 내 눈앞에 저… 저……. 날 계속 따라다니는 여우가 여전히 팔짱을 끼고 기분 나쁘게 바라본다.

    그래, 어디 노려봐라!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끌어내릴 수 있으면 끌어내려 봐라. 이제는 더 이상 순순히 끌려다니지 않을 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