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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FA선수가 되다-35화 (35/204)
  • 35화. 한밤의 소동

    “야? 너? 초면에 팬한테 반말해도 돼요?”

    어이가 없어 앞에 있는 상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여자치고는 꽤 큰 키에 갓 고등학교나 졸업했을 만한 나이. 나름 꾸민다고 화장에 신경을 쓴 듯한데, 내 취향도 아니고 전혀 예뻐 보이지도 않는다.

    “팬이고 뭐고, 너 말 함부로 하지 마. 강훈 선배가 약을 했다고 말하기 전에 선수가 운동을 얼마나 하는지 보고 얘기해. 어디서 기사 몇 줄 읽고 헛소리하지 마라.”

    저것이랑 손도 마주치기 싫어 사인을 마친 공을 편의점 진열장에 올려놓고 등을 돌렸다.

    “아~ 김소전도 약했다는 거네. 같이 했네. 했어.”

    돌렸던 등을 다시 한번 돌려 미친X을 바라봤다. 그리고 절대 못 알아듣지 못하도록 똑똑히 이야기를 해줬다.

    “난 약 같은 거, 먹어본 적도 없고 어디 가서 욕먹을 짓 한 적도 없다. 제발 부탁인데 선수들한테 이런 X소리는 하지 마. 네가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평생을 처절하게 해온 야구다. 내 평생을 지워버릴 만큼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눈과 눈을 맞대고 내 진심을 담아 확실히 이야기를 해줬다. 이걸 못 알아들으면 사람이 아니다.

    “별것도 아닌 거로 엄청 화를 내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 맞지? 했네. 확실하네. 난 촉이……. 켁… 켁…….”

    처음 등을 돌렸을 때 그냥 편의점을 나갔어야 했다. 처음 그렇게 하지 못한 게 커지고 커져서 팬이라는 여자의 멱살을 잡고 확 끌어당겼다.

    눈을 눈앞까지 끌어다 놓고 다시 한번 똑똑히 이야기를 해줬다.

    “미쳤으면 곱게 미쳐. 열심히 사는 사람 괴롭히면 너도 똑같이 당한다.”

    내 할 말을 다 하고 잡은 멱살을 풀어주며 툭 밀었다. 살짝 밀었음에도 뒤로 나가떨어진 여자가 주저앉은 채 있을 수 없는 말을 내뱉는다.

    “전일신문 인턴기자, 이루다예요. 이대로 기사 쓸 건데 괜찮겠지요?”

    웃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미친X한테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쯤 편의점으로 들어온 보안요원들이 나를 덮쳐왔다.

    * * *

    내일 경기 준비도 못 하고 인천 숙소의 로비 커피숍에서 죄인이 된 선수가 안절부절못하자 옆에 있는 든든한 누나가 등을 토닥여 준다.

    “소전아, 괜찮아. 허리 펴. 잘못하게 없는데 왜 그러고 있어.”

    선수의 사고 소식에 서울에서 인천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여홍지 운영팀장이 자기보다 두 배는 큰 선수를 토닥이며 진정시킨다.

    “여홍지 팀장님. 그런 게 아니지. 지금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지 않아? 우리 이루다 기자가 운동 선수한테 패대기를 당했는데 사과부터 해야지.”

    나에게 홍시 누나가 있다면 저쪽엔 박필모 기자가 피해자를 대변하러 나와 있다. 시작이 어떻게 됐건 내가 밀친 건 사실이니… 휴, 방법이 없다.

    “사과? 우리가 사과를 받아야지 사과를 왜 해요? 허위 사실로 협박한 게 누군데?”

    “여 팀장.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지. 곰 같은 운동선수가 여기자 멱살을 잡고 집어 던진 사건이야. 내가 이렇게 나와서 얘기 들어주고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지.”

    둘 간의 눈싸움이 치열하다. 서로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한발도 물러서지 않는 싸움. 숨이 턱턱 막혀 온다.

    “증거 있어요? 멱살 잡고 집어던진 증거 있으면 줘보세요.”

    “CCTV에도 찍혔고…….”

    “거기 사각지대던데?”

    “그거 아니더라도 이루다 기자 녹취본에도 나가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김소전 선수가 밀었는지, 지가 혼자 쇼한 건지 어떻게 알아요?”

    “뭐? 쇼? 지금 언론이랑 장난하자는 거야? 여 팀장,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 이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네.”

    다시 한번 허공에서 맞붙는 두 눈빛. 어느 한쪽도 포기할 생각이 없다.

    “됐어. 운영팀장이 나온다길래 사과부터 할 줄 알았더니, 안 되겠네. 단장이고 운영팀장이고 어린 계집애들이 자리 차지하고 있으니 선수 관리가 안 되지. 내일 기사 잘 봐. 언론이 얼마나 무서운지 똑똑히 보여줄게.”

    “아.이.고. 무.서.워.라. 박 기자님. 랩터스에 총질하시게요? 우리 랩터스 앞에 뭐 붙는지 몰라서 그러시는 건 아니죠? 저 ‘대한’ 랩터스 직원인데. 모르셨어요? ‘대한’ 랩터스?”

    아래 직원들끼리 소소한 얘기를 나누다가 전면에 그룹의 이름이 등장하자 대화의 분위기가 바뀐다. 이제는 사과의 문제가 아니다. 개별 회사의 자존심이 걸린다.

    “대기업이 언론을 찍어누르시겠다? 해봐. 나도 전일신문이야. 유료 신문 1위! 인터넷 신문 1위! 종편 1위! 여기저기서 기사 나오게 해줄게. 이 기자 일어나. 병원 가서 진단서부터 끊어. 기자 정신이 뭔지 확실히 가르쳐줄게.”

    화를 내면서 일어나는 박 기자를 앞에 두고 여 팀장이 태연히 스피커폰의 통화 버튼을 누른다.

    - 홍시야~ 이 늦은 밤에 왜 전화했어? 우리 홍시는 일찍 자야지. 너 그러다 조수아처럼 피부 금방 상한다. 일 쉬엄쉬엄하고 일찍 일찍 자.

    목소리만 들어도 느글거리는 인물. 구단 최고 존엄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흘러나온다.

    “흐… 흑……. 구단주님. 저… 저……. 흑흑…….”

    - 홍, 홍시야! 왜 울어? 누구야? 누가 그랬어? 또 조수아한테 혼났어? 내가 이것을 당장! 아니다. 어디야. 내가 해결해 줄게. 조수아 다리몽둥이를 그냥…….

    “흑흑……. 그게 아니고요……. 전일신문에서 홍지가 잘못했다고……. 흐… 흑……. 홍지가 잘못했다고 기사를 쓴대요……. 거기 인턴 기자가 허락도 안 받고 김소전 선수랑 몰래 인터뷰하다가 자기 혼자 넘어지고선 우리한테 뒤집어씌워요……. 흑흑… 저 너무 속상해요……. 흑흑…….”

    - 어떤 XX가 우리 홍지를 속상하게 했어! 어디? 전일신문? 전일신문 어떤 XX야! 아니다. 내가 거기 주필… 아니, 주필도 아니고 방 회장님께 바로 전화한다. 대한 그룹 없으면 광고 절반도 못 채울 놈들이 허락도 안 받고 그룹을 건드려? 홍시야 5분만 기다려. 내가 확실히 해결해 줄게.

    눈앞에서 웃는 얼굴로 메소드 연기를 펼친 운영팀장이 박 기자를 바라보면서 묻는다.

    “구단주님이 5분 걸린다는데, 5분만 기다렸다 가시죠. 전일신문 광고 절반이 날아갈지도 모르는데.”

    “너… 너…….”

    분노한 얼굴로 랩터스의 운영팀장을 바라보던 박 기자의 핸드폰이 정확히 5분 만에 울렸다.

    스피커폰이 아닌데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 XX야! 너 랩터스 전담이지?! 너 지금 뭔 짓을 하고 있어!

    “부장님. 그게 제 말 좀 들어…….”

    - 듣긴 뭘 들어! 마누라까지 있는 XX가 거기 여자 팀장을 왜 건드려? 이 미친 XX야! 당장 들어와!

    “부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건드리긴 뭘 건드려요! 그런 게 아니고…….”

    - 이 꼴통 XX야. 여자에 미쳐도 정도가 있어야지, 담당팀 팀장을… 징계 열릴 거니까 각오하고 들어와!

    “부장님! 무슨 소리세요! 건드리긴 뭘 건드리고, 징계는 무슨 징계에요! 증거 있어요! 날조라고요! 날조!”

    - 날조는 무슨! 여자의 눈물이 증거라잖아! 아, XX. 여가부 장관 쪽에서 전화 들어오잖아! XXX야. 이것도 너 때문이면 너 사표 써 가지고 와!

    일방적으로 끊기는 전화. 말도 못 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박 기자에게 여홍지 팀장이 생긋거리며 거래를 제안한다.

    “이제 말씀이 좀 통할 거 같은데, 피차 실수한 건 묻고 건설적인 얘기 좀 하시죠.”

    당사자들은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는데 대리인들끼리 마음에도 없는 사과의 말이 오갔다.

    “어쨌든 죄송하게 됐어요. 그쪽 실수로 넘어졌어도 우리 선수랑 대화하다 넘어졌으니 도의적으로 죄송하네요.”

    “우리도 인터뷰하다 워딩이 세게 나가서 미안합니다.”

    사과가 끝나자 운영팀장이 작은 선물을 내민다.

    “우리가 미안하니까 박 기자님이 선수랑 인터뷰할 시간 좀 드리죠. 아시죠? 지금 우리 선수들 인터뷰 금지 기간이에요. 정말 특별히 시간 내드리는 거예요.”

    운영팀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이 근질근질하던 이루다 인턴 기자가 질문은 시작한다.

    “구단주가 데려온 김소전 선수를 쓰기 위해 최강훈 선수 트레이드를 시도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옆에서 질문이 들어옴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운영팀장.

    “박 기자님, 요즘 전일 왜 그래요? 저 기자의 독단이에요? 아니면 우리 팀 찢어버리려고 작정을 하신 거예요?”

    “방금까지 분위기 좋았다가 왜 또 날이 섰어? 팬들이 궁금해하는 내용이잖아. 뭘 그렇게 예민해.”

    “최강훈은 외야 주전, 김소전은 내외야 멀티 백업. 사용처가 다른데 같이 취급하지 말아 주시고, 이런 질문 하면 나 일어나요?”

    다시 한번 옆에 있는 인턴 기자가 나서려고 하자 박 기자가 제지하면서 질문을 시작한다.

    “선수단 분위기는 어때? 아무래도 선수들 심란하지 않아? 최강훈이 자신감이 넘치는 말을 많이 했지만, 팬 서비스도 좋고 봉사 활동도 많이 하잖아. 팀에선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그래~ 최강훈이 그런 사정은 몰랐네. 그걸 혼자 극복하고 인내하면서 야구를 했다고~ 아~”

    “최강훈… 최강훈…….”

    노련한 박 기자가 핵심은 슬슬 피해 가면서 단독 인터뷰를 실을 만한 답변을 이끌어 낸다.

    서로의 선을 지키면서 할 말과 안 할 말을 구분하는 줄타기.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인턴 기자가 고구마를 100개는 먹은 듯 얼굴이 뚱해진다.

    “이쯤 하시죠. 이만하면 충분하시잖아요.”

    “그래~ 여 팀장, 고마워. 김소전 선수도 고맙고. 내가 기사 잘 써줄게.”

    “저는 그냥 관계자로. 아시죠? 다른 데서도 인터뷰하자고 하면 귀찮단 말이에요.”

    “그럼, 그럼. 대신에 김소전은 이름 나간다? 그건 이해해.”

    “지나가다 저 인턴 기자가 인터뷰 딴 걸로 하시죠.”

    “물론. 여홍지 팀장, 이렇게 화끈해요. 멋있어.”

    기사에 대해 최종 조율이 끝나가자 이루다 인턴 기자가 결국 참지 못하고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최강훈 선수하고 김소전 선수 사이가 안 좋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실력이 더 뛰어난 최강훈 선수를 김소전 선수가 질투했고 김소전 선수를 직접 데려온 구단주가 자리 만들어 주려고 최강훈을 트레이드한다는데 사실입니까?”

    여전히 저쪽으로는 눈길 한번 안 주는 운영팀장이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서며 앞에 있는 기자에게 통보한다.

    “한 번만 더 쟤 내 눈앞에 데려오면 담당 기자 바꾸자고 할 거예요. 고생하셨습니다. 다음에 봬요. 김소전, 가자. 내일 경기해야지.”

    난 누나의 말에 조건 반사로 벌떡 일어나 기자님들께 꾸벅 인사하고 누나의 뒤를 따라 나왔다.

    벌써 새벽 네 시.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나냐…….

    * * *

    - 랩터스와 드래곤스, 드래곤스와 랩터스의 주중 3차전 마지막 경기가 펼쳐질 드래곤스 필드입니다. 랩터스가 2승을 먼저 가져간 가운데, 드래곤스는 1선발 하워드 선수가 선발로 등판합니다.

    - 이번 시즌 드래곤스를 홀로 떠받드는 하워드 선수죠. 팀의 스윕 패를 막아야 합니다.

    오늘도 중견수에 1번 타자. 포지션이 고정되고 타순도 고정이 되니 루틴을 맞추기도 좋고 경기를 미리 준비하기도 좋고 마음의 여유도 생기고 좋다.

    만년 백업할 때는 몰랐던 평화로움. 너희는 이런 환경에서 야구 했었구나.

    경기가 시작되고 타석으로 나가면서 빈 스윙을 두어 번 해가며 마지막으로 몸에 쌓여있는 긴장감을 풀어낸다.

    타석에 들어서서 예의 바른 선수답게 심판님과 포수님께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제발 살살 좀 해라. 형, 어제 혼났다.”

    귓가에 포수가 뭐라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심판에게 인사를 하다 잠깐 뒤를 돌아봤을 때 기자석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 보였다.

    어젯밤 나를 잠 못 들게 한 그녀. 이루다.

    ‘홍시 누나가 너 경기장 오지 말라고 했는데 왜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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