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억 FA선수가 되다-34화 (34/204)

34화. 수습

* * *

희대의 삽질. 비공인 배트를 사용해서 사이클링 히트가 취소되었다가 다시 2루타를 쳐서 인정받는 사건이 묻혔다.

최소 1주일은 여기저기 놀림감이 되어야 할 사건이 랩터스 구단주가 야구 커뮤니티 사이트인 야구파크에 입장문이라는 글을 하나 게재하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입장문]

해킹 아닙니다. 랩터스 구단주 맞습니다.

술 안 먹었고, 단장이 일을 못 해 직접 개입하고 보고합니다.

최근 최강훈 트레이드와 관련해서 세간의 억측이 많아 그것부터 해명합니다.

랩터스 단장이 욕을 먹고 있는데 여러분은 지금 욕을 잘못하고 계십니다. 선수를 팔려고 하고 있기에 욕하지 말고 일을 더럽게 못 하는구나 하고 욕을 하셔야 합니다.

최강훈을 팔라고 구단주가 지시했고, 단장이 처리해야 하나 단장 딴에는 구단주를 지키기보다 유망주라고 지키겠다는 생각인지 일이 지지부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방금 제 손으로 직접 KBO 9개 구단에 트레이드 대상 명단을 뿌렸고 선착순으로 회신 오는 대로 즉각 협상할 계획입니다.

다음으로 랩터스가 최강훈을 왜 파냐는 의문이 있어 그에 대해 답해드립니다.

간단하게 약쟁이를 더 이상 데리고 있기 힘들어 결정했습니다.

최강훈은 금지된 약물을 지속적으로 복용하는 선수입니다.

ADHD 치료라는 처방을 받아 합법적인 인가하에 복용하고 있으나 금지 대상이 아닌 다른 약물이 있음에도 굳이 금지 약물을 택해서 복용하는 걸 클린한 랩터스를 원하는 구단주의 입장에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랩터스를 사랑하는 구단주는 구단이 스스로 자생하기를 바라며 인내했습니다. 그러나 최강훈이 최근 TRT 요법을 쓰겠다고 구단에 허락을 구하고 도핑위원회에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격투기 선수들이 쓴다는 건 알았지만 야구 선수가 TRT를 사용한단 얘기는 머리털 나고 처음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23살짜리 운동선수가 남성 호르몬이 모자라서 TRT 요법을 쓴다는 건 명백한 사기요, 치팅입니다.

선천적으로 그렇게 타고났다느니 의사 처방이니 믿을 수도 없고 믿기도 싫습니다.

(*항상 클린한 랩터스 야구를 보신 분들을 위해 TRT를 설명하자면 스테로이드를 풀로 빨아 재끼다가 몸에서 더 이상 자연적인 남성 호르몬이 나오지 않아 균형을 맞춰 주기 위해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최소한 내가 만든 랩터스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약쟁이를 데리고 있기 싫습니다.

어떻게 만든 랩터스인데, 이걸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느 팀이 됐든 카드만 맞으면 랩터스가 조금 많이 손해 보더라도 팔아버릴 겁니다.

이상 세간의 소문에 대해서 입장을 표하며, 언제나처럼 반박은 가능하나 부모님 안부를 물으시는 행위와 팀 비하, 선수 비하는 고발입니다.

구단주가 직접 작성한 장문의 입장문. 그것도 보도 자료가 아닌 야구 커뮤니티 사이트에 게재된 글 하나로 랩터스 직원들의 퇴근이 막혔다.

경기 다 끝나고 하이라이트 프로그램까지 다 끝난 시간임에도 비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밤 12시, 구단 앞에 텐트가 들어서면서 팬 클럽을 중심으로 규탄 집회가 열렸다.

새벽 세 시. 평소와는 다른 한적한 교외에서 오래된 커플의 심야 데이트가 시작된다.

“미치려면 곱게 미쳐!”

“단장이 말을 예의 있게 해야지, 너무 거칠잖아.”

“말로 하니까 정신 못 차리지? 어쩔 거야! 어쩔 거냐고!”

“어쩌긴 뭘 어째. 내가 판 다 깔아 줬으니까, 이제 단장이 해야지!”

앞에 있는 여자가 살기를 풀풀 풍기고 있음에도 사고치고 잘했다고 꼬리 흔드는 강아지마냥 실실 웃고 있는 남자.

사람 없는 교외 24시간 카페의 알바가 한기를 느끼고 옷깃을 여며 본다.

“최강훈이 고소한대.”

“고소? 내가 뭘 했다고 고소? 내가 없는 소리한 것도 아니고. 하라고 해.”

“몰라! 명예 훼손으로 고소한다잖아! 문제는 랩터스도 같이 고소한다잖아. 어쩔 거야! 어쩔 거냐고!”

여자의 투정을 들은 남자가 그윽한 눈빛을 하고는 부드럽게 달래준다.

“나만 믿어. 내가 더 좋은 선수로 바꿔줄게.”

“하지 마! 아무것도 하지 마! 다른 팀들한테 유망주들 잔뜩 달랬다며! 중심 선수를 받아와도 못할 판에, 아무것도 하지 마!”

새벽에 와서 소리 지르는 진상 손님 때문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알바의 인상이 구겨진다.

* * *

어제 경기 대승을 했음에도 팀 분위기가 개판이다.

연습이 시작됐는데도 감독은 서울 가서 내려오지 않고 있고 기자들은 랩터스 유니폼 비슷한 것만 보여도 마이크부터 들이밀고 질문을 쏟아낸다.

몸 사려야 한다. 지금은 조용히 몸 사리고 있을 때다.

- 랩터스와 드래곤스의 주중 3연전 중 두 번째 경기가 시작됩니다. 오늘 경기 시작 전 소개해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 그렇죠. 랩터스에서 충격적인 이야기가 나왔어요.

- 그 얘기부터 해주시죠. 랩터스 구단주 측에서 최강훈 선수를 트레이드하겠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 나쁜 사람이에요!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아무리 구단주라고 해도 팀이 개인만의 것이 아니거든요. 야구를 하는 선수들, 야구를 보는 팬들을 모두 무시하는 언사에요. 선수협에서도 규탄 성명이 나왔어요. 있을 수 없는 일이 나왔어요.

- 다른 부분보다 최강훈 선수의 약물 의혹이 나왔습니다. 실제로 금지 약물을 사용했다는 건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이에 관해 설명해 주시죠.

- 일단 최강훈 선수가 허가를 받고 약물을 사용한 건 사실이에요. 본인도 오늘 언론을 통해 밝혔어요. 그런데 이게 비난받을 일인가요? 아니거든요. 본인의 선천적인 장애를 극복하고 지금 최고의 야구 선수가 되려는 순간이거든요. 이걸 응원해도 모자랄 판에 구단주라는 사람이 비난했어요. 은퇴 선수 협의회에서도 구단에 공식적인 답변을 요구했거든요. 이건 아니에요.

경기 시간이 코앞인데 감독이 안 돌아온다. 하는 수 없이 수석 코치가 지휘를 하게 된 상황. 초조하게 손톱만 물어뜯던 수석 코치가 선수단을 불러 모은다.

“다들 알다시피 강훈이 때문에 감독님이 자리를 좀 비우셨다. 강훈이 문제는 감독님 돌아오신 후에 얘기하고 우리는 오늘 경기를 잘해야 한다. 동요하지 말고 자기 몫만 하자.”

처음으로 1군 경기를 시작부터 진행하게 된 수석 코치가 떨리는 목소리로 선수들에게 동요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수석 코치의 부탁과는 다르게 선수단의 분위기가 침울하다.

- 경기 시작합니다. 랩터스의 1번. 김소전 선수, 어제 이어 오늘도 1번 타자 중견수로 출발합니다.

- 최강훈 선수, 어제 이어 오늘도 결장이죠. 어제 컨디션 좋았던 김소전 선수의 컨디션도 걱정입니다.

어제 이어 오늘도 1번. 어제 배트에 공 맞는 거 보니 지금 내 컨디션은 상당히 좋다. 그렇다면… 이번 3연전에서 성적을 끌어올린다.

- 4구, 안타.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깨끗한 안타. 랩터스, 1회 초 선두 타자가 출루하며 기분 좋은 출발을 하고 있습니다.

- 랩터스 선수단, 그중에서도 최강훈 선수와 직접 비교가 되고 있던 김소전 선수의 컨디션이 걱정됐었는데 다행이네요. 아직까지는 괜찮아 보여요.

안타깝다. 타이밍을 늦춰서 친다고 쳤는데도 타이밍이 조금 빨랐다. 이런 공은 담장 밖으로 넘겼어야 하는데. 아쉽다.

그래도 타이밍이 안 맞았는데 저런 타구가 나오는 거 보니 역시 내 컨디션이 좋다. 그렇다면 점수를 많이 뽑아서 타석에 많이 나와야 한다.

오늘은 적극적이 되어야겠구나.

- 2번 타자 라정안 타석에 들어섭니다. 라정안, 작전 수행 능력이 좋은 선수입니다.

- 그렇죠. 김소전 선수가 많이 뛰지는 않지만, 굉장히 베이스 런닝을 잘하는데, 드래곤스는 괴롭겠어요.

1루 베이스를 밟고 3루 주루 코치를 바라보지만 특별한 작전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 맘대로다.

- 초구. 1루 주자 김소전, 2루에 들어갑니다. 포수 던지지도 못했습니다.

- 타이밍을 완전히 뺏었어요. 투구 동작 들어가기도 전에 스타트를 했습니다. 최강훈 선수를 의식하나요? 굉장히 열심히 하고 있어요.

오늘 드래곤스의 선발 투수 심승보. 아직 다른 선수들은 잘 모르겠지만 모든 동작에 쿠세가 있다. 반 팔만 입는 심승보의 팔뚝만 봐도 직구와 변화구를 구종 별로 맞출 수 있다. 그리고 심승보는 절대 변화구 그립을 잡고 견제구를 던지지 않는다.

방금 전 나랑 눈이 연속으로 두 번 마주친 투수의 팔뚝 근육이 변화구의 근육으로 바뀌었고, 투수가 포수를 바라보고 한 번 숨 쉬었을 때 스타트를 시작했다.

심기가 불편해지신 투수가 쓸데없이 2루 견제가 많아진다. 1루 견제도 아니고 2루 견제. 1회에 긴박한 상황도 아닌데 쓸데없이 신경이 곤두선 투수. 본인이 자초했으니 조금 더 흔들어야 한다.

계속되는 견제에 뛸 의사가 없다는 표시를 확실히 하기 위해 베이스에 딱 붙어 있다. 어차피 유격수가 계속 등 뒤에서 어슬렁거리는지라 신경 쓰여서 뭐 하기도 그렇다.

그럼에도 두 개나 더 날아오는 견제구. 그 견제구들을 다 받아내고 나서야 타자에게 공을 던진다.

- 볼. 바깥쪽 높은 곳에 들어가는 빠른 볼. 랩터스의 움직임을 확인하려고 던진 공 같아 보입니다.

- 빠른 주자가 나가 있고 타자의 작전 수행 능력이 좋으니까 신경을 쓰는 것 같은데 좀 과하거든요. 순리대로 해야 해요.

초구가 던져졌음에도 두어 발 나갔을 뿐 움직임을 크게 가져가지 않았다. 저 예민한 놈을 속이려면 큰 움직임은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 2구, 주자 3루! 3루 뛰었습니다. 포수 또 3루에 던지지도 못했습니다.

- 타이밍을 완전히 뺏겼어요. 김소전 투수를 농락하고 있어요.

모르면 모를까, 알고도 안 뛰는 건 있을 수가 없지. 투수의 변화구 근육을 보고 3루까지 내달렸다. 넉넉한 세잎.

2번 타자의 희생 플라이에 홈으로 들어오니 덕아웃의 선배들의 구타가 시작된다.

어린놈의 원맨쇼로 선취점을 뽑아낸 랩터스. 어수선했던 덕아웃의 분위기가 슬슬 경기 모드로 바뀐다.

아무리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다들 야구를 직업으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 한 번 분위기가 잡히자 다들 경기에 집중한다.

- 1루 플라이 아웃. 경기 끝났습니다. 7 대 2. 7 대 2 랩터스가 위닝 시리즈를 확보합니다.

- 경기 시작 전 경기 외적으로 흔들릴 것으로 생각했던 랩터스가 예상과는 다르게 경기에 집중을 잘했습니다. 악재가 있어도 1위 팀의 저력을 보여준 경기였어요.

- 오늘의 수훈 선수는 홈런 두 개를 때려 낸 조영근 선수입니다.

첫 타석 안타 이후, 잘 맞은 타구들이 야수 정면으로 날아가면서 5타수 1안타. 오늘 컨디션도 좋은데 딸랑 안타 하나만 치고 끝나고 말았다.

분명 경기 전까지는 기분이 괜찮았는데… 급 슬퍼진다.

경기가 끝나고 숙소에서 혼자 명상을 해보는데 번민이 많아 쉽게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따뜻한 우유라도 한잔하면서 단전을 따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숙소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김소전 선수, 팬이에요. 사인 좀 부탁드려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조심히 편의점에 갔는데 팬이라는 여자가 난데없이 야구공을 내민다.

내가 지금껏 팬이 없어서 그렇지, 평소 가장 부러웠던 게 팬들 줄 세워서 사인해 주는 거였는데……. 공을 받아 들고 정성을 다해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소전 선수, 진짜 최강훈이랑 사이가 안 좋아요?”

사인을 한참하고 있는데 저 여자 갑자기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

“그런 거 없습니다.”

“포지션이 겹쳐서 소전 선수가 밀린다고 불만 있다면서요?”

“그런 거 없습니다.”

“정말요? 최강훈만 없으면 포지션 생기는데 안 미워요?”

“그런 거 없습니다.”

동그란 공에 사인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저것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늘어놓는다.

“그럼 약은요? 최강훈 약이라면서요? 그런데 김소전 선수도 운동 능력은 최상이잖아요? 같은 팀 메이튼데… 소전 선수도 최강훈이랑 같이 약 한 거 아니에요?”

“야! 너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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