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미치는 선수
8회 초, 투 아웃 주자 1루.
1루 주자가 부산스럽기 짝이 없다.
투수가 주자를 바라보지도 않았는데 귀루를 하지 않나. 괜히 1루에서 폴짝폴짝 뛰면서 스파이크를 털지 않나. 지켜보는 사람도 정신 사나울 만큼 오두방정을 다 떨고 있다.
- 주자 1루에서의 움직임이 많습니다.
- 지금은 주자 신경 쓸 상황이 아니거든요. 투수, 타자에 집중해야 합니다.
타자와의 싸움에만 집중하려 했던 투수가 결국 1루에서 발광을 하는 주자에게 마음을 뺏기고 만다.
투구판에서 발을 풀고 1루 베이스를 노려보는 투수. 리드를 잡았다 풀었다 하던 주자가 투수가 투구판에서 발을 푸는 순간 1루로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며 귀루를 한다.
1루 쪽 폭스 응원석에서 야유가 쏟아진다.
‘안 그래도 마산 아재들 무서웠는데, 가을 야구에는 더 무섭네. 좀……. 자중해야 하나…….’
벨트에 묻은 흙을 툭툭 털며 일어나는데 1루 베이스 코치가 내 귀를 잡아당긴다.
“중심은 1루에 두고 리드는 길게 잡는 거야. 짧은 안타에도 3루 간다고 생각하고 준비해.”
“예.”
‘짧은 안타에 3루가 아니라 기회만 되면 홈까지 들어갈 거니까 기대하세요.’
마산, 창원, 진해가 합쳐졌으니 마산 아재들도 이제 좀 바뀌지 않았을까? 이제는 최소한 죽이지는 않겠지 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다잡고 투수를 노려보았다.
투수를 노려보면서 계속해서 뒷발을 차는 주자. 투수의 심기가 초 단위로 불편해지고 참다못한 포수가 마운드를 올라간다.
‘아… 기 빨리네……. 밥 벌어 먹고살기 어렵다.’
포수가 마운드에 올라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듣는지 마는지 투수가 1루 주자만 죽일 듯이 노려본다. 투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자는 베이스 위에서 스트레칭에 열중이다.
‘무서워요, 선배님. 아주 잡아먹겠네.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뒷감당이 안 될 듯하니……. 그래, 몸 푸는 척이라도 해야지. 핫둘, 핫둘.’
다시 재개되는 경기. 주자의 리드가 다시 길어진다.
‘중심을 뒤에 두고. 스타트를 하는 척……. 나 간다. 간다. 간다. 이런… 쒯…….’
스타트 끊는 척 연기만 한다는 게 진짜로 첫발을 밟아 버리고 말았다.
‘이런……. 초딩도 안 할 실수를… 에라. 그냥 뛰자!’
첫발을 떼는 순간 등을 돌리던 투수와 눈이 마주친 주자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2루로 달려나간다.
당황한 투수. 1루 주자의 스타트를 보고는 1루로 공을 뿌린다.
- 주자 걸렸어요. 투수 견제에 걸렸습니다. 윤서전, 1루에 공을 던집니다. 아, 1루에서 공 빠집니다.
에라, 모르겠다. 2루 베이스만 보고 달려나가는데 3루 주루 코치가 손을 계속 돌린다. 뭐야? 왜! 그냥 달려?
2루 베이스로 들어오는 유격수. 표정을 보아하니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빠졌구나.’
유격수 얼굴을 보고 빠졌다고 확신을 갖는 순간. 관중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볼 것도 없다. 그대로 달린다.
2루를 밟고 3루까지 내달린다. 3루에서 막아 세우는 주루 코치.
‘헉, 헉. 힘들… 어. 이게 뭐야?’
3루를 밟고 살짝 오버런을 하면서 속도를 줄였다.
그제야 보이는 경기 상황. 투수가 1루로 던진 걸 놓친 1루수와 뒤늦게 백업을 하러 간 2루수가 펜스를 맞고 튀어나온 공을 잡아채는 게 보였다.
그리고 마음이 급해진 2루수가 홈을 향해 던지는데, 저거 공 날아가는 방향이 이상하다.
‘달린다.’
- 주자 3루. 앗, 주자 다시 달립니다. 주자 홈으로… 홈으로. 홈에 아무도 없습니다! 득점! 랩터스가 1 대 0으로 앞서나갑니다.
- 이거 아니거든요. 폭스 이한승 선수 지금 던질 필요가 없었어요. 이 중요한 경기에 이런 플레이가 나오네요.
마음 급한 2루수가 안 던져도 될 공을 홈에다 던진다는 게 그만 빠졌다. 포수가 받을 수도 없을 만큼 어이없이 빠져버린 공. 그사이 주자가 홈을 파고들어 득점을 만들어냈다.
“잘했어!”
“잘했어! 잘했어!”
“너 이 자식. 잘했으니까 좀 맞자!”
“우워워! 이 복덩이 자식. 죽어라!”
1루에서 홈까지 전력 질주를 하고 들어오느라 숨쉬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선배들이 미친 듯이 때린다.
잘했는데 왜 때리는 건지, 지금껏 야구 하면서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아파. 아프다고.
1루 견제 에러부터 시작해서 홈 송구 에러까지, 사사구 하나 에러 두 개로 안타 하나 없이 8회에 선취점을 내준 폭스가 투수를 교체한다.
투수가 교체되는 동안 물을 마시면서 두들겨 맞은 몸뚱이를 풀어주고 있는데 덕아웃 끝에서 알 수 없는 한기가 느껴진다.
기분 탓인가. 뭔진 모르겠고 이제 수비만 잘하자. 아자.
가을 야구는 평소와 다르다는 게 느껴진다. 한 점을 지고 있는데도 승리조가 계속해서 올라오는 폭스. 억지로 한 점을 짜낸 랩터스의 타선이 다시 침묵하며 이닝이 끝난다.
“우익수 최강훈.”
8회 말, 수비 우익수 강정상이 빠지고 최강훈이 들어간다.
오늘 타자 놈들 꼬락서니를 보니 빠따로 승부 보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는지 감독이 수비 보강에 나선다.
‘이럴 거면 좌익수도 빼주지. 그래도 4번 조영근은 9회에 한 타석 더 믿어보려고 그러는 건가…….’
글러브를 챙기고 외야로 나가는데 대수비로 들어가는 최강훈이 말을 건다.
“큰 경기에 흥분해서 깝치지 말고 나 보고 수비 라인 조절해. 우중간은 내가 다 커버할 테니까 조영근 쪽으로 가서 붙어 있어. 걸리적거리면 뒈진다.”
이 XX. 말을 해도 진짜…….
조영근이 네 친구냐? 속으로야 나도 조영근 XXX 하지만 그래도 너보다 15년은 더 된 선수한테 선배라든가 형이라든가 붙여야지. 에효.
“예, 제가 코치님 수비 위치 확인하고 신호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선배님하고 같이 움직이겠습니다.”
외야로 뛰어가던 우익수가 발걸음을 늦추고 내게 훅 다가온다.
“아, 꼴통 XX 말 못 알아 처먹네. 수비 코치가 아니라 나를 보라고 XX야. 내가 라인 지정해 줄 테니까 나보고 위치 잡으라고. 나대지 말고.”
‘이 또라이 XX는 어찌 해결을 해야 한단 말인가. 수비 위치를 왜 우익수가 조절을 해. 내가 눈뜬 봉사도 아니고, 진짜 이 또라이 XX.’
“예, 보고 확인하겠습니다.”
내가 그러겠노라 대답을 하고 나서야 우익수가 자기 자리로 멀어지기 시작한다.
나 혼자 야구 하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저거 데리고 야구 하려니 머리가 지끈지끈하네.
8회부터 올라온 랩터스의 마무리.
선두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지만 불안불안하다. 오늘 공 뜨는데…….
8회 말 원 아웃에서 큰 타구가 나왔다. 좌익수 쪽으로 길게 뻗어 가는 공. 수비 범위도 좁고 발도 느린 랩터스의 4번 타자 중견수 조영근이 죽을 둥 살 둥 따라붙으며 간신히 아웃카운트를 만들어 낸다.
오늘 안 좋은데. 투수 안 좋다.
8회 말, 투 아웃. 폭스의 7번 타자 김인경이 타석에 들어서고 랩터스의 수비 코치가 외야 라인을 뒤로 물릴 것을 지시한다.
김인경이 홈런 타자는 아니지만 지금 투수 공이 계속 높게 날린다. 어차피 2사 주자도 없는데 장타를 막아내는 게 좋은 선택이다.
수비 코치를 확인하고 정위치에서 슬슬슬슬 뒤로 이동 중에 왼쪽에서 헛소리가 들려온다.
“그만 가! 그만 들어오라고! 저 XX, 똑딱이야. 들어와!”
미친놈이 틀림없다. 김인경이 홈런이 없어 똑딱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간간이 외야 키를 넘기는 갭 파워는 충분히 있는 선순데 라인을 당기라니.
그러다 2루타라도 하나 맞으면 바로 동점 주자가 스코어링 포지션에 들어가는 건데. 저 야알못 XX.
저 멍청한 놈의 헛소리를 뒤로하고 슬슬슬슬 움직이자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멍청이가 내가 반응을 하지 않자 오히려 우중간 앞쪽까지 내려오면서 자리를 잡는다.
이 무슨 되지도 않는 수비 포메이션이냐……. 멍청아, 좀……. 수비 코치가 허수아비도 아니고 말 좀 들어 처먹어라.
- 7번 김인경. 타석에 들어섭니다. 오늘 안타 하나가 있습니다.
- 지금은 출루도 중요하지만 큰 거 한 방 나오면 흐름을 바꿀 수 있거든요. 김인경 선수 집중해야 합니다.
투수의 높은 볼을 침착하게 지켜보는 타자. 구속은 여전하지만 공이 안정되지 못하고 날리는 걸 꾹 참아가면서 바라본다.
- 투 볼. 박요훈 선수 볼 카운트가 몰립니다.
- 전체적으로 공이 높아요. 공을 좀 눌러줄 필요가 있어요.
날린다. 공이 날린다. 아무래도 불안하다. 차라리 내보내고 다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 김인경 쳤습니다. 높이 떠서 날아가는 공. 우익수. 우익수. 우익수. 잡아냅니다. 우익수 최강훈 대단한 플레이가 나왔습니다.
- 약간 먹힌 타구가 우익수 뒤로 넘어가는 타구였거든요. 최강훈 선수 25미터에서 30미터는 뛰어갔어요. 수비수 완전히 넘어가는 타구였다고 봤는데 잘 따라붙었네요. 오늘 랩터스 외야수들 집중력이 대단합니다.
내가 저럴 줄 알았다.
높은 공 맘먹고 기다리던 타자가 억지로 카운트 잡겠다고 들어온 직구를 풀 스윙으로 때려냈다.
다만, 알고 때려도 미친 구속을 이겨내기가 힘들었던 타자의 배트가 살짝 밀렸고 우익수 쪽으로 높게 떠서 날아갔다.
수비 코치 말 듣고 뒤에 있었으면 편하게 잡을 타구. 아니, 정위치에만 있었어도 타구 보면서 쉽게 처리할 타구를 전진 수비해 들어와 있던 우익수가 타구를 뒤로 보고 전력 질주해 간신히 잡아내었다.
그나마도 첫발을 잘못 떼는 바람에 간신히, 진짜 간신히 잡아내었다.
‘타구가 저렇게 높이 떠서 슬슬 날아오는데 라면 수비 한다고 욕먹을 타구를 호수프레로 둔갑시키고 좋아할 때냐? 이 한심한 놈아.’
8회 말, 머리 위로 넘어가는 공을 간신히 잡아낸 우익수가 공을 잡고는 그대로 펜스까지 뛰어가 부딪힌다.
펜스까지 거리도 상당했는데 엄청 빨리 뛰는 바람에 속도를 못 줄인 척 그대로 달려가 부딪힌다.
그제야 글러브에서 공을 꺼낸 우익수. 카메라를 보고 한 번 씨익 웃어주고는 관중석으로 공을 던져준다.
결과가 좋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 법. 무실점으로 8회를 틀어막은 덕아웃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다.
“잘했어.”
“최강훈이 잘 잡았어.”
“얼굴값 하는데~ 얼~”
분명 저들도 중간 과정을 알고 있을 텐데… 에효…….
이기면 장땡이지 뭐. 야구는 그냥 이기는 게 최고다.
9회 초, 순식간에 공격을 마친 랩터스가 9회 말 마지막 수비에 들어간다.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랩터스의 마무리.
선두 타자에게 좌중간 큰 타구를 얻어맞는다.
- 좌중간 펜스를 직접 맞춥니다. 타자 주자 1루 돌아서. 2루… 포기합니다.
- 잘 쳤죠. 잘 쳤고 중견수의 펜스 플레이도 좋았습니다. 펜스 맞고 떨어지는 타구를 2루까지 잘 연결했어요.
식겁했다. 이거 그나마 펜스 맞고 공이 예쁘게 떨어졌으니 망정이지 그대로 2루타 얻어맞을 뻔했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백업 들어 왔던 우익수가 헛소리를 하고는 돌아간다.
“그걸 못 잡냐? 오늘 같은 날은 열심해 해야 할 거 아니야!”
‘미친놈아. 나 지금 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무사 주자 1루. 폭스의 보내기 번트. 원 아웃. 다음 타자의 1루 땅볼에 주자가 3루에 가면서 2사 주자 3루.
야구 오래 했지만 할 때마다 어렵다.
오늘 마무리가 영 메롱한 상황에 무조건 이대로 끝내야 하는 랩터스. 경기장의 긴장감이 차츰 높아진다.
딱!
공이 또다시 우익수 쪽으로 날아간다. 타이밍이 안 맞아 조금 밀린 타구가 1루 선상을 따라 높게 떠서 날아간다.
정위치에만 있어도 이지 하게 잡아낼 타구. 쓸데없이 중견수 쪽으로 치우쳐 들어 왔던 우익수가 또다시 파울라인을 향해 전력 질주를 시작한다.
- 우익수 따라갑니다. 우익수, 우익수. 다이빙캐치. 잡아냅니다. 경기 끝. 우익수 최강훈 선수의 멋진 다이빙캐치로 와일드카드 1차전을 승리로 가져가는 랩터스입니다.
헐……. 저놈. 그걸 그래도 잡긴 잡네.
멍청해서 그렇지 운동 능력이 진짜 나쁘지는 않구나. 못 잡는다고 봤는데, 그래도 그걸 따라붙어서 잡아내다니.
- 오늘의 수훈 선수 최강훈 선수를 만나보겠습니다.
“…….”
- 오늘 마지막 멋진 수비 장면이 연속해서 두 개가 나왔거든요. 한 말씀 해주시죠.
“팀 승리를 위해서 무조건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중견수에 있던 소전이가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그쪽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는데 라인 쪽으로 치우친 타구들이 나와서 조금 애먹었습니다. 하지만 팬 여러분들을 생각하니 좋은 결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김소전 선수하고 수비 위치가 겹치는 부분이 있는데요. 팀 내에서는 어떠신가요?
“서로 다 열심히 하는 선수들이고, 아무래도 소전이가 코너 수비가 약하다 보니까 제가 코너로 나가고 있는데 소전이가 경험이 더 쌓이고 제가 센터로 들어가면 팀이 더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가 코너 수비가 약하다고? 이젠 내 어깨가 너보다 백 배는 더 좋은 거 같은데? 됐다. 팀이 이겼으면 된 거지. 다 필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