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억 FA선수가 되다-20화 (20/204)
  • 20화. 가을 야구

    2025년 KBO 정규 리그가 끝났다.

    역대 유례없는 치열한 공방전. 1위부터 6위까지의 경기 차가 단 8경기. 심지어 마지막 5위와 6위의 경기 차는 반 경기 차였다.

    지난 시즌 우승 팀인 디펜딩 챔피언 랩터스가 시즌 내내 고전을 면치 못하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 반게임 차 5등을 지켜내면서 막차로 가을 야구에 진출하였다.

    와일드카드 결정전. 창원에서 폭스와 1패를 안고 두 경기를 해야 한다. 한 경기도 질 수 없는 랩터스. 시즌 막판까지 모든 전력을 쏟아부었지만, 또다시 없는 전력을 끌어모아 다 쏟아부어야 한다.

    시즌이 끝나자마자 하루 쉬고 들어가는 와일드카드 결정전. 감독이 방문을 걸어 잠그고 포스트 시즌 구상에 날밤을 새운다.

    * * *

    창원까지 내려오는 데는 성공했다.

    1군에 다시 올라와서 첫 경기에 인생 경기를 펼치면서 수훈선수 인터뷰까지 한 원더보이였지만. 남은 40경기를 하면서 기록한 최종성적은 44타수 9안타 홈런 2개 타율 2할 4리.

    타격 성적으로 보면 돌아오기 전이나 그다지 차이가 없다.

    아니지, 그래도 홈런을 두 개나 쳤으니 홈런 타자라고 위안을 해야 하나……. 그래 봐야. 워낙 맞지 않으니 출루율도 장타율도 바닥인데.

    그나마 중간중간 대주자로 나가면서 도루를 8개나 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나마 도루라도 했으니 대주자 롤로 포스트 시즌 엔트리에라도 올라왔지.

    모르겠다. 난 그냥 대수비나 잘하고 대주자나 잘하면 되지 뭐. 나머지는 겨울에 고민해 보자.

    창원에서 열리는 와일드카드 1차전. 한창 경기 전 연습을 하고 있는데 선발 라인업이 발표되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감독이 발표한 라인업을 보고는 발이 얼어붙었다.

    9번 타자 중견수 김소전.

    ‘감독이 노망이 났나. 이 큰 경기에 나를 왜 선발 라인업에 넣고 있어?’

    * * *

    - 폭스와 랩터스의 와일드카드 1차전이 창원에서 시작됩니다. 폭스의 선발 투수는 시즌 13승의 올리버, 랩터스의 선발 투수는 송호일이 나섭니다.

    - 선발 투수의 무게로만 보면 폭스로 기웁니다만, 가을 야구는 몰라요. 가을 야구에는 미치는 선수가 나오는 팀이 이기는 거거든요. 최근 3년간 우승을 한 랩터스의 가을 DNA를 무시할 수 없어요. 오늘 경기 기대가 됩니다.

    “김소전. 너만 믿고 던진다.”

    “야, 야. 애 쫀다. 너무 놀리지 마.”

    “얘가요? 너 오늘 지면 다 네 책임이야? 쫄아도 안 돼.”

    “애 그만 놀려. 벌써 표정 안 좋잖아.”

    “어이, 나 화나면 무서운 사람이야. 외야에 공 떨어질 때마다 빠따 100개. OK?”

    그걸 말이라고……. 우리나라 대표 플라이볼 투수인 송호일이 외야로 날아가는 공 놓치면 빠따 100개라고 엄포를 놓는다.

    오늘 좌익수와 우익수에 수비 범위가 리그 최하급인 조영근과 강정상이 들어오는데 수비를 무슨 수로 하라고……. 해도 해도 너무하네.

    - 1회 초 공격. 공 5개로 마무리됩니다. 오늘 랩터스 선수들 성급합니다.

    - 그럴 수밖에 없어 보여요. 올리버 선수, 오늘 공이 좋습니다. 랩터스 선수들 하는 게 맞아요. 이런 공은 기다리지 말고 때려 내는 게 좋아요. 결과가 안 좋아서 그렇지 접근은 좋았어요.

    - 마운드에 랩터스 선발 투수 송호일이 올라왔습니다. 송호일, 이번 시즌 기록이 좋지는 않습니다. 7승 8패. 평균 자책점 6.13입니다.

    - 이번 시즌 구위가 좀 안 좋아졌죠? 이번 시즌 플라이 볼 비중이 굉장히 높아요. 장타가 많이 나오면서 성적이 안 좋아졌어요. 랩터스 시즌 막판에 총력전을 펼치느라 1, 2, 3선발을 다 소모한 게 악재에요. 송호일 선수가 잘해 줘야 합니다.

    광활한 외야. 그 가운데 가장 넓은 범위를 소화해야 하는 중견수. 이 중요한 경기에 신인을 집어넣은 감독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경기에 나온 이상 무조건. 무조건 잘해야 한다. 무조건.

    상대 선발 투수가 1회를 깔끔하게 끝내버리는 걸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는지 우리 선발 투수는 첫 타자부터 볼넷을 내주면서 경기를 시작한다.

    ‘선배님. 아까 빠따 100대는 선배님이 맞으셔야겠어요.’

    - 선두 타자 볼넷. 폭스가 출루에 성공합니다.

    - 송호일 선수,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어요. 큰 경기일수록 생각을 단순하게 하고 쉽게 쉽게 가야 하거든요. 어렵게 가면 힘듭니다.

    주자 1루. 랩터스의 내야가 더블 플레이를 준비하며 주자를 압박한다.

    랩터스의 의도를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리드를 넓혀 가는 주자. 주자를 상대하는 배터리의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 투수, 1루 견제. 세잎. 세잎이네요. 견제가 많습니다. 주자와의 신경전이 치열합니다.

    - 지금은 1루 주자가 잘하고 있어요. 이 정도로 흔들면 상대 팀 배터리가 괴롭거든요. 잘하네요!

    쓸데없이 길어진다. 투수가 주자를 잡아놓는 건 짧고 강하게 하고 타자와의 승부를 해줘야 하는데 투수가 완전히 말렸다.

    - 주자 뛰었습니다. 2루 송구. 2루 송구. 2루수 머리 위를 넘어갑니다. 주자 3루로 달립니다.

    포수가 몸쪽에 낮게 미트를 가져다 댔다. 직구는 아닌 것 같고 변화구인 듯한데. 1루 주자의 움직임은 무조건 뛸 듯하다.

    수비 위치는 정위치이긴 한데… 아무래도 장타는 없다. 내려간다. 슬금슬금 내려간다.

    투수가 슬라이드 스텝을 시작하자마자 주자가 뛴다. 투수의 커브가 원바운드로 포수에게 들어가고 타자는 헛스윙을 해준다.

    타이밍상 주자는 2루에 무조건 살았다.

    마음만 급한 포수가 2루에 공을 집어 던진다.

    ‘멍청하기는 늦었으면 던지질 말아야지, 이런…….’

    공이 원바운드로 튀고 포수가 블로킹하면서 일어나는 순간 느낌이 왔다. 2루 베이스 뒤로 빠르게 달려들면서 백업을 가보는데 멍청한 포수가 2루도 아니고 중견수인 나에게 냅다 집어 던진다.

    깨끗한 중견수 앞 송구. 앞으로 달려들면서 그대로 공을 건져 올린다.

    시간이 없다. 왼발 앞에서 공을 잡고 몸을 일으키면서 스텝을 밟고, 밟으면서 글러브의 공을 튕겨서 오른손으로 넘긴다.

    보통은 투스텝으로 끌고 가도 모자란 걸, 원스텝에 억지로 끝내 본다.

    3루 베이스를 향해 앞 손을 뻗어 정확히 타깃을 잡는다. 내야에서 던질 때와는 다르게 허리를 비틀면서 팔을 지면과 수직으로 들어 올린다.

    앞 손을 강하게 당겨주면서 몸의 비트는 힘을 손끝으로 올려 그대로 때려준다.

    - 3루. 3루에서. 아웃! 3루에서 아웃이 됐습니다. 폭스에서 비디오 판독을 요청합니다.

    - 대단한 플레이가 나왔어요. 2루에서 빠지면서 무조건 3루는 간다고 봤거든요. 이걸 잡아내네요.

    - 느린 화면 한번 보시죠. 포수의 송구가 높았습니다. 2루수 머리 위로 넘어갔습니다. 이걸 뒤에서 뛰어들어 오는 중견수가 잡아챕니다.

    - 중견수가 멀었거든요. 멀었는데 굉장히 빨리 백업을 들어 왔어요. 폭스의 이한승 1루 주자도 중견수 위치 보고 뛴 거예요. 자, 보시면 2루에 슬라이딩을 하죠. 공 빠지는 걸 보고 뛴단 말이에요. 중견수가 멀어 보이거든요.

    - 이런 플레이가 나옵니다.

    - 판독이 끝났나요. 판독 결과 원심 유지. 주자 아웃! 주자 아웃이 됩니다.

    - 초반 흐름에 굉장히 큰 플레이라고 봐요. 무사 주자 3루가 1사 주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거든요. 이런 게 투수에게 주는 심리적인 안정감이 굉장히 크단 말이에요. 이번 경기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플레이 중요한 장면이네요.

    ‘예쓰. 생각보다 좋다.’

    아웃을 잡아낸 것도 기쁘지만 그것보다 더 고무적인 게 내가 전력투구를 했다는 데 있다. 전력투구.

    나중에 비디오 돌려 봐야 알겠지만 내가 고등학교 때 투수하면서 던지던 그 느낌. 그 느낌이 그대로 전달됐다.

    몸을 횡으로 비틀어서 팔을 12시로 끌어올려 던지던 나만의 동작.

    주변 사람들이 다친다고 다들 만류할 때도 끝끝내 우겨서 완성한 내 투구 폼. 진짜로 다치고 나서는 그렇게 던져본 적이 없는데 1회부터 마음이 급하다 보니 내 몸 어딘가 깊이깊이 숨어 있던 기억이 올라왔나 보다.

    아웃카운트 하나 잡은 것하고는 비교가 안 되게 가슴이 뛴다.

    내 어깨 진짜로 돌아왔구나…….

    중견수의 도움을 받은 투수가 정신을 차리고 특유의 쉽게 쉽게 맞춰 가는 공으로 이닝을 지워 낸다.

    불안했던 랩터스의 선발 투수도 안정되니 알 수 없는 투수전으로 빠져버린 경기. 팽팽하게 당겨진 실 같은 경기가 숨을 졸라온다.

    - 7회까지 양 팀 점수 없습니다. 8회, 올리버 선수가 다시 마운드에 오릅니다. 오늘 빗맞은 안타 세 개만 내줬을 뿐 거의 완벽한 경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공 개수가 좀 많습니다.

    - 벌써 100개가 넘었죠. 공 개수는 좀 많습니다만 아직 공 끝에 힘은 있어요. 랩터스 타선도 하위 타선이다 보니 조금 더 끌어가려는 거 같은데 결과를 봐야 알겠네요.

    점수를 내주지도, 점수를 내지도 못하는 경기. 7번부터 시작하는 랩터스의 8회 초가 순식간에 투 아웃이 된다.

    - 우익수 플라이 아웃. 타구가 뻗지 못하고 우익수 글러브에 들어갑니다.

    - 먹혔죠. 아직 올리버 선수 공에 힘이 있어요. 투구 수가 110개가 넘어가는데 대단합니다.

    - 타석에 9번 김소전 들어옵니다. 오늘 2타수 무안타 삼진 하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 오늘 수비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타석에서는 안 풀리죠. 맞기만 하면 타구의 질을 좋아 보이는데 좀처럼 컨택이 안 되고 있어요. 선수 스스로 고민이 필요합니다.

    저 느끼하게 생긴 놈. 정정당당하게 직구로 승부해야지 비겁하게 나만 나오면 너클커브와 체인지업만 던진다.

    남들은 떨어지는 공 잘만 때려내던데 왜 내 배트는 공이 떨어지기만 하면 안 맞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방법이 없다. 우선은 지금 이 타석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나가는 게 먼저다.

    빡센 표정으로 공을 110개나 던진 투수가 내가 타석에 들어서자 표정이 풀린다.

    누가 봐도 호구 잡은 모습. 분하지만… 참아야지. 사실인데…….

    초구부터 스핀을 잔뜩 먹은 커브가 날카롭게 떨어진다. 커브라는 걸 알고 덤벼드는데도 맞지 않는 방망이.

    연습할 땐 그렇게 잘 맞던 커브가 도무지 실전에서는 맞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은 가능성은 단 하나다.

    ‘방망이. 방망이가 싸구려라 안 맞는 거야. 내년엔 나도 맞춤 배트 신청한다.’

    숨도 안 쉬고 들어오는 두 번째 커브.

    머리를 당기고 어깨를 벽으로 만들고 중심을 뒤에 두고 그대로 후려갈긴다.

    완벽한 모습의 풀 스윙.

    “스트라이크~”

    ‘XX. 왜 안 맞냐고, 왜!’

    화가 나서 투수를 노려보니 세상 편한 얼굴에 인자한 미소까지 띠고 있는 느끼하게 생긴 놈. 너… 너. 내가 너 가만 안 둬!

    폭스의 느끼하게 생긴 놈이 던지는 113번째 공.

    공을 끝까지 보고 때리기 위해서 공 놓는 포인트에 시선을 고정하는데 손가락이 살짝 이상하다. 커브 그립은 커브 그립 같은데 뭐지?

    펄럭.

    - 맞았나요? 맞았나요? 맞았습니다. 몸에 맞는 공. 랩터스, 8회 말 투 아웃에 출루에 성공합니다.

    - 지금 보시면 옷자락 끝이 살짝 흔들리거든요. 맞은 거예요. 타자가 잘했네요.

    ‘XX. 공이 나한테 날아온다.’

    떨어지는 공을 피하려고 팔을 높이 들었는데 유니폼 소매를 훑고 지나가는 공. 데드볼이다. 데드볼.

    급한 마음에 팔을 흔들면서 심판의 눈앞으로 다가갔다.

    내 겨드랑이가 심판의 코에 닿으려는 순간 심판이 소리를 지른다.

    “히트 바이 피치 볼!”

    앗싸. 그대로 삼진 각이었는데 살아 나갔다. 돌아서 가더라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때리고 나가나 맞아서 나가나 1루 가기만 하면 장땡이지 뭐.

    “안녕하십니까.”

    위풍당당 1루에 나가 아무 생각 없이 인사를 하고 보니 아… 이 팀 1루수는 용병이지…….

    “안녕! 야구를 X같이 한다는 XX구나.”

    ‘뭐야! 이 XXX! 양키 XX가 왜 한국말을 하고 XX이야!’

    양키한테 욕먹고 분노 조절 장애가 발생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상대의 사각턱을 보고는 급히 차분해졌다.

    키도 내가 더 크고 리치도 내가 더 긴 것 같지만… 왜인지 모르게 사람이 다소곳해진다.

    ‘화내면 안 되지. 야구 선수가 야구로 얘기해야지, 주먹질하면 안 된다. 주먹질 좋아하면 이천의 산적같이 되는 거다. 안 된다.’

    9번 타자를 맞히고 교체되는 투수를 기다리면서 혼자만의 명상법을 사용해 마음을 진정시키니 그제야 꽉 찬 경기장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14년을 뛰면서 한 번도 가을에 야구 해본 적이 없구나…….

    항상 하위권 팀을 전전하다 가끔 가을 야구에 진출해도 엔트리 탈락. 그게 항상 내 위치였지…….

    언제 다시 올라와 볼지 모르는 가을 야구.

    ‘칫. 오늘은 좀 열심히 해보고 싶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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