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신경전
타자가 투수를 바라봤을 때 등줄기에 싸한 기분이 올라오면 거의 100%다. 저 투수 놈. 포수를 바라보고 공을 던질 것 같지가 않다.
내 타격 자세가 배터 박스에서 반 발짝쯤 떨어져서 서 있는 게 정상이지만 어쩐지 몸이 알아서 자꾸 뒤로 밀려난다.
“타임!”
자세가 흐트러져 타임을 불렀다.
“타임”
심판이 타임을 받아줌과 동시에 듣기 거북한 말이 들린다.
“이 XX. 야구 X같이 하네. 어린놈의 XX가 몇 타석이나 들어 왔다고 타임이야.”
‘뭐지? 타임 했다고 지랄하는 거야? 꼰대질도 적당히 해야지. 타임 불렀다고 욕하는 건 어느 동네 야구 하는 법이야?’
들은 척도 안 하고 타석에 다시 들어갔다.
“랩터스 XX들, 애들 교육을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어이. 홈런 하나 치니까 스타라도 된 거 같아? 슈퍼스타쯤 되니까 홈런 타구도 바라보고 하는 거지? 너 어디 나왔어? 어디서 야구를 그따위로 배워온 거야?”
포수가 공 잡을 생각은 안 하고 타자를 바라보며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어이가 없네. 보자 보자 하니까 사람을 가마니로 보는 것도 아니고, 뭐 하자는 짓이야?’
“심판님. 상대 선수한테 욕해도 됩니까? 선배면 후배한테 막 욕해도 되는 겁니까?”
주심이 귀찮다는 듯 포수와 투수에게 주의를 준다.
“포수, 욕하지 마. 그리고 타자도 타석에 들어와. 둘 사이 문제 있으면 알아서들 경기 끝나고 풀어.”
‘저기요. 내가 일방적으로 욕먹은 건데 이게 끝이에요? 뭐 이래요!’
내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주심을 바라보았지만 타석에서 트래쉬 토크 따위에 크게 관심 없는 주심이 투수에게 경기 속행을 주문한다.
주심의 지시를 받은 투수가 질질 늘어지는 경기에 한이라도 맺힌 듯 잽싸게 다리부터 들어 올린다.
하나, 둘.
저 자존심 강한 놈이 신인한테 홈런 맞았다고 변화구를 던질 리도 없고 분명 직구라고 확인을 가지고 속으로 타이밍을 센다.
투수의 손이 뒤로 돌아 탑 포지션에 공을 놓으려는 순간, 투수와 눈이 맞았다.
차라리 바라보지 않으면 안 봤지, 지금 공 놓는 타이밍에 타자랑 눈이 마주칠 수가 없는데 저놈과 정면으로 눈이 맞았다.
‘젠장.’
공이 떠나기도 전에 타격 자세를 풀고 몸을 뒤로 뺐다.
타자가 몸을 빼고 있는 데도 투수의 공이 추적 장치라도 달린 듯 타자를 따라붙는다.
공은 주저앉은 타자의 헬멧 위를 지나서 포수 글러브에 박힌다.
“볼.”
주심의 볼 선언이 있고 포수가 벌떡 일어나 투수에게 공을 돌려준다.
“미트 보고 던져, 미트 보고. 조금 빠졌잖아!”
‘뭐라고? 조금 빠졌다고? 장난하냐?’
“심판님! 이거 위협구 아닙니까?”
죽음의 공포를 느껴 심판에게 어필을 하자 귀찮은 모습의 심판이 포수에게 한마디 한다.
“손에서 빠진 건 알겠는데 주의하자. 위험했잖아.”
“예, 조심하겠습니다. 공 좀 바꿔주십시오. 미끄러운 것 같습니다.”
심판에게 한소리들은 포수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 공을 교환 받는다.
‘장난? 지금 나랑 장난 하냐?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니야?’
“플레이.”
나 혼자 열 내고 있는데 주심이 다시 경기 속행을 지시한다.
화가 끓어올라 머리를 뚫고 풀풀 피어오른다.
첫 번째 던진 공에 손에서 빠지는 바람에 헤드샷을 놓친 투수의 기분이 더욱 사나워졌다.
신경질적으로 로진을 손에 덕지덕지 바르고는 포수와 눈을 맞춘다.
포수의 사인이 나갔는지 의심스럽게 보자마자 투구 폼을 잡는 투수. 이거 100%데.
이런 느낌이 들 때는 여지없다. 타석에서 한 발은 떨어져 있는데도 등을 향해 날아오는 직구. 몸을 돌려 살이 많은 쪽으로 맞아 보려 하지만 지방이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몸이니……. 겁나 아프다.
“으아악!”
“히트 바이 피치, 타자 1루.”
‘심판 놈아. 지금 그게 중요하냐. 저 XX 일부러 던졌잖아. 두 번이나 일부러 던졌잖아. 퇴장시키라고! 아, 겁나 아프네.’
옆구리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구르는데 포수가 바짝 붙으며 사과를 한다.
“어.이.구. 미.안.하.다. 오.늘. 공.이. 많.이. 미.끄.럽.다.”
‘뭐? 미끄러워? 일부러 맞춰놓고 뭐? 미끄러?’
사과를 한 포수가 마스크까지 벗고 가깝게 다가와서 귀에다 속삭인다.
“쥐새끼, 그걸 피하네. 다음에도 싸가지가 이러면 뚝배기 깨진다. 조심해라.”
화를 내고 싶은데 맞은 옆구리가 너무 아프다. 버럭 하지도 못하고 뒹굴고 있는데 트레이너가 와서 마법의 스프레이를 뿌려주자 정신이 좀 든다.
“괜찮아? 일어날 수 있겠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트레이너가 내 옆구리를 살피더니 부축해서 일으켜 세운다.
“좀 움직여 봐. 괜찮아?”
“괜찮아요. 시합 뛸 수 있습니다.”
폭행당한 사람이 낑낑대면서 힘을 쓰고 있는데 투수랑 포수는 신경도 쓰지 않고 몸 식지 않게 지들끼리 공을 주고받는다.
‘참자, 참자, 참자. 참아야지. 복수는 야구로 해야지. 참자.’
- 지금 공에 맞았습니다. 공이 빠졌을까요?
- 지금 공 두 개가 몸쪽으로 들어왔거든요. 고병석 선수 제구가 이 정도는 아닙니다. 이건 문제가 있어요.
- 1회 홈런 상황에서 김소전 선수가 타구를 좀 바라보는 동작이 있었습니다만 그게 문제가 될 수도 있겠습니까?
- 아무래도 문제가 좀 되겠지만 그렇다고 사구는 안됩니다. 그런 문제는 시합 끝나고 고참들끼리 풀어야지, 이런 식은 곤란해요. 부상의 위험이 있어요.
시큰거리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1루까지 걸어나가 투수를 바라봤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KBO 규약에 투수가 타자를 맞추면 모자를 벗어 사과한다고 써 있다는데 저 투수 놈, 나한테 사과할 기미가 보이지도 않는다.
리그 5등과 6등이 반 경기 차에서 만난 경기.
신인 선수가 공에 맞아 쓰러지자 랩터스 덕아웃 분위기가 험악해졌지만 2번 타자로 나와 있는 주장, 라정안이 단호하게 선수들이 뛰쳐나오려는 걸 돌려보냈다.
2사 주자 1루. 타석에는 주장 라정안. 일촉즉발의 경기장에 찬바람이 쌩쌩 불어 닥친다.
“어이구, 홈런 타자면 선배한테 인사도 안 하냐?”
“안녕하십니까.”
얻어맞은 것도 서러운데 재규어스의 1루수가 언제 봤다고 갈군다.
“장수찬, 적당히 해라. 경기 끝나고 뒤집어 줄 테니까 기대해.”
“아이고, 코치님. 애들 싸움에 왜 끼어듭니까?”
“애들 싸움? 너희 야구 이따위로 할 거야?”
“코치님. 아까 얘 타구 감상하는 거 안 보셨어요? 이 정도면 참은 겁니다.”
“감상? 그게 감상이야? 얘가 홈런 처음 쳐서 그런 거 아니야! 얘가 너희를 놀리길 했냐, 무시하길 했냐. 선배들이 소갈딱지가 이래서야 어따 쓰냐?”
“코치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야구 이렇게 가르치시면 안 돼요.”
“야! 네가 나 야구 가르치냐? 너 야구 몇 년 했어!”
난 아직도 옆구리가 욱신거리는데 당사자도 아닌 사람들끼리 목소리가 커진다.
“둘 다 쫓아버리기 전에 그만들 하세요.”
보다 못한 심판이 한마디 하고 나서야 둘의 말싸움이 멈췄다.
‘이제야 좀 조용하네.’
2사지만 일단 주자로 나왔으니 점수를 낼 수 있게 눈치를 살핀다.
여전히 얼얼한 옆구리를 문지르며 길게 잡는 리드. 때리고도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 투수가 연신 견제구를 던져댄다.
투수의 견제구가 연거푸 3개가 날아옴에도 미동도 하지 않는 타자와 리드를 줄이지 않는 주자. 투수의 신경이 유리 긁듯 날카로워진다.
길어지는 포수와의 사인. 한참 동안 고개를 흔들던 투수가 간신히 투구 동작에 들어간다.
‘이때다. 뛰자. 왼손 투수를 잡아먹을 때는 눈을 보면 된다. 저 눈, 견제는 없다.’
1루 주자가 완벽한 타이밍에 스타트를 끊었음에도 좌타자가 몸을 뒤로 뒤집어 가며 타구를 끌어당긴다.
딱, 쾅!
도루 타이밍에 스타트를 끊었다가 딱 소리에 타자를 바라봤다.
기괴한 타격. 평소와는 완전히 다르게 스탠스를 오픈했다고 말하기도 뭐 할 만큼 아예 1루를 바라보고 선 타자가 타구를 1루 덕아웃으로 끌어당겼다.
날아오는 타구를 보고 숨어버린 재규어스 선수단. 갑작스럽게 날아든 타구에 물통을 직격한다.
“야! 일부러 그랬지?!”
“이 XX들, 야구 이따위로 할 거야?”
“XXX. XXXX!”
재규어스 덕아웃에서 걸쭉한 욕설이 터져 나온다.
덕아웃으로 날아간 타구를 보고는 허리를 90도로 숙여서 정중하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는 랩터스의 주장.
관중석에서도 욕설이 크게 터져 나오다 라정안의 90도 인사를 보고는 조금씩 잦아든다.
- 위험한 타구였습니다. 박일권 선수는 맞을 뻔했습니다.
- 안 좋습니다. 양 팀 다 흥분을 가라앉혀야 해요. 이러면 안 돼요.
- 라정안 선수 재규어스 덕아웃을 향해 잘못했다고 합니다. 관중석에도 사과를 합니다.
- 이거 일부러 그랬다는 거거든요. 양 팀 다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네요.
‘휴… 휴……. 스타트 완벽했는데 아휴. 숨차.’
다시 1루로 돌아와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도루 하나 하고 싶은데……. 쉽지 않네.’
“옆구리 터지지도 않았구만, 아픈 척이야. 걸리적거리니까 뛰지 마.”
‘왜 다들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주자가 2루 뛸 수 있으면 뛰는 거지. 고병석이 투구 폼은 너무나도 일정해서 내가 타이밍 잡기 딱 좋단 말이야.’
또다시 연속되는 견제구.
‘네가 아무리 내 손바닥에서 도망가려고 노력해 봐도 갈 데가 없다. 넌 내가 이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냥 순순히 2루 베이스 내놔라.’
연속되는 견제구 중에 투수의 발이 살짝 중심 뒤로 넘어갔다. 타이밍. 지금이닷!
- 김소전 뜁니다.
- 떨어지는 변화구 라정안 헛스윙. 공 2루로 롱텍~
- 주자. 아웃! 주자 아웃됩니다. 주자와 2루수 모두 못 일어나고 있는데요.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뛰는 순간 알았다. 이건 산다. 무조건 살았다.’
도루할 때 2루까지 11발에 들어간다. 11발 뛰고 몸을 날려 헤드퍼스트 슬라이딩. 완벽한 타이밍에 몸을 띄워 손을 앞으로 내밀었을 때 뭔가 잘못된 걸 알았다.
- 느린 화면 보시겠습니다.
- 김소전 선수 스타트 좋았거든요. 변화구 타이밍에 스타트 좋았어요.
- 여기가 문제가 되겠습니다. 2루수 이대성 선수 베이스틀 타고 앉아서 공을 기다립니다.
- 이거 위험해요. 주자를 향해 발을 들고 있거든요. 선수들이 신고 있는 스파이크가 날카로워요. 수비를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요.
2루에 다 들어갔을 무렵 공이 오지도 않았는데 2루수가 베이스를 점거했다. 그리고는 다리를 내 쪽으로 쭉 뻗어 내민다.
이미 몸을 공중에 띄운 상황.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다. 베이스라도 찍어보려고 손을 내밀어 보지만 베이스 대신 2루수의 허벅지만 닿는다.
“으윽!”
달려드는 속도를 못 이기고 2루수를 타고 넘는다. 넘어가다 정강이가 칼로 긁히는 기분이 든다. 2루를 타고 넘어 내야에 뒹굴면서 베이스를 오버했다.
주자와 2루수 모두 뒤로 나뒹군 가운데 백업 들어 온 유격수가 원바운드로 공을 잡아 나가떨어진 주자를 태그 한다. 주자 아웃. 공수 교대.
“야! 뭐 하자는 거야!”
랩터스 덕아웃에서 감독이 움직인다.
막아서는 주심. 주심을 뿌리치고 2루심에게 다가가면서 삿대질을 해댄다.
랩터스 감독과 심판들이 2루에 모여드는 동안 재규어스 선수들이 수비를 마치고 덕아웃으로 들어가버린다.
‘으……. 피, 피나는데……. 감독님… 비디오. 비디오 판독부터 신청하시라고요, 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