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억 FA선수가 되다-16화 (16/204)
  • 16화. 선두 타자

    - 랩터스와 재규어스의 시즌 14차전 경기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오늘부터 확대 엔트리가 적용돼서 양 팀의 등록 선수가 많습니다.

    - 그렇죠. 팀당 5명씩 늘어나게 되는데요. 랩터스의 김소전 선수가 관심이 가네요.

    - 5월에 단 10경기를 나오고는 2군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때 말이 좀 있었습니다. 신인 선수가 5타수 3안타, 그중에 홈런이 한 개 있었습니다만 감독의 마음엔 차지 않았습니다.

    - 그랬죠. 양상도 감독이 1군에서 상대와 싸울 준비가 안 됐다면서 2군으로 내렸는데요. 과연 얼마나 준비가 돼서 돌아왔는지 기대가 됩니다.

    - 5강을 놓고 벌이는 주말 3연전 첫 경기. 오늘 1번 타자로 나서게 되는 김소전 선수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함께하시죠.

    1번… 1번……. 1번 타자라니……. 선발 출전도 감지덕지한데 1번 타자라니.

    프로 와서 스타팅으로 1번에 서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데 1번……. 가뜩이나 2군에서 한 경기도 안 뛰고 올라왔는데 바로 스타팅에 1번.

    감독이고 분석팀이고 죄다 정상이 아니야.

    “1번 타자~ 나도 못 들어가 본 1번에 들어가는 대타자님이 오셨네.”

    경기에 집중하기도 바쁜데, 얼굴 보기도 싫은 놈이 다가와 아는 척을 한다.

    “선배님. 감독님이 잘 봐주셔서 라인업에 들어갔나 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강훈이 아무리 꼴도 보기 싫다지만 그래도 선배고 오늘 나는 1번 유격수, 저놈은 9번 중견수로 나오는 만큼 서로 붙어 있게 되는 시간이 많은데 친한 척은 해놔야지.

    후배가 정중히 이야기를 하자 화려한 선글라스를 끼고 야간 경기임에도 얼굴에 새하얗게 선크림을 바른 선배가 훅 다가와 귀에다 속삭이다.

    “나대지 마라. 내가 지켜본다.”

    이걸 반응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저놈은 왜 나만 보면 저러는 거야.

    나를 벙찌게 만든 오늘의 중견수의 팔이 내 어깨 위로 올라온다. 너무 당황스러워 이놈을 바라보니 환한 웃음으로 관중석을 향해 내 사진을 찍으라며 손짓을 한다.

    방금까지 내 귀에 헛소리를 지껄이더니 관중들한테 착한 선배 코스프레를 한다고? 나 너랑 같은 화면에 들어가기도 싫으니까 좀 꺼져라. 이 사이코패스 관심 종자 XX야.

    경기장이 정리되고 양 팀 모두 경기 준비에 들어간다. 경기 브리핑은 이미 다 했고 마지막으로 감독이 힘들어도 끝까지 집중력을 가지고 경기에 임하라고 당부를 한다.

    이제 경기장 밖에서 해줄 건 없다. 지금부터는 경기장 안에서 결과를 내야 한다.

    “어이, 김소전. 침은 왜 흘려?”

    “츄릅……. 아, 아닙니다.”

    “뭐 해? 시타해야지.”

    신인 배우가 오늘의 시구자로 마운드에 올라오는데 아무 생각 없이 넋 놓고 보고만 있었더니 포수가 한마디 한다.

    분명 사람의 형상을 하고 올라오는데 타석에서 가까이 바라보니 등 뒤에 빛이 감돈다.

    타석에 어찌어찌 배트를 들고 서 있긴 하지만 내가 불경스럽게 신에게 배트를 내밀 수 있는가.

    땅에 패대기쳐서 떼굴떼굴 굴러오는 공. 배트를 내밀지도 못하고 바라만 봤다.

    “어이, 뭐 하냐? 시타 첨 해봐? 배트를 휘둘러야지.”

    아무 생각이 없다. 그냥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아무 생각이 없다.

    포수가 뭐라거나 말거나 아무 생각이 없다.

    “플레이볼~”

    아직도 신을 눈앞에서 본 신성함이 가득한데 마운드에 내 영원한 사냥감 고병석이 올라왔다.

    - 오늘 선발 재규어스의 고병석입니다. 이번 시즌 9승 6패. 평균 자책점 4.24입니다. 팀의 에이스로는 조금 아쉬운 성적입니다.

    - 시즌 초반에 헤매는 바람에 성적이 좋지 않았어요. 시즌 초반 랩터스와 8 대 0으로 이기는 경기에서 신인 선수에게 홈런을 맞으면서부터 경기가 뒤집혔거든요. 그 경기 이후 한동안 자기 페이스를 못 찾았던 게 컸어요.

    - 그 경기를 위원님과 같이 중계했던 게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그날 홈런을 쳤던 신인 선수가 오늘 1번 타자로 나섰습니다. 랩터스의 1번 타자 김소전부터 경기가 시작됩니다.

    심판의 플레이볼 소리와 함께 눈앞에 있던 여신의 잔상이 모두 사라졌다. 찬란하게 빛나던 마운드의 은총이 사라지고 나타난 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먹잇감. 고병석이다.

    “오늘도 홈런 하나 때려라. 살살 던져줄게.”

    “감사합니다.”

    재규어스의 포수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인다.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렇지, 살살 던져준다는 X소리를 믿을 만큼 내가 순진해 보이냐?

    타자와 포수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에 신인에게 복수심을 불태우는 투수가 크게 와인드업을 시작한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너는 잘 안다. 1회 첫 구는 무조건 직구. 그날 첫 공으로 자기의 컨디션을 확인하는 고병석이 초구에 베스트를 던질 것이다.

    하나, 둘…….

    투수의 와인드업에 맞춰서 속으로 숫자를 센다. 타이밍은 무조건 직구에 맞추고 손에서 떠나는 타이밍에 걷어 올릴 준비를 한다.

    - 초구. 김소전. 크다, 크다! 중견수, 좌익수. 따라가기를 포기합니다. 대전 재규어스파크 관중석 상단에 떨어지는 홈런! 랩터스 1 대 0. 김소전 선수의 1회 초 초구에 선두 타자 홈런으로 앞서갑니다.

    - 큰 홈런이 나왔어요. 받쳐놓고 때렸거든요. 2군에서 무슨 마법을 부린 걸까요? 김소전 선수, 전형적으로 배트를 짧게 잡는 교타자라고 봤거든요. 2군에서 담금질을 하고 올라오니 전혀 다른 선수가 됐습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서 엄청난 파워를 보여주네요. 놀랍습니다.

    던지기 직전 투수와 눈이 마주쳤다. 어린 신인을 기로 찍어 누르는 눈빛. 보통의 신인 선수라면 저 정도 기세에 눌렸겠지만 너 은퇴할 때 누구보다 슬퍼했을 정도로 나랑 상성이 맞는 게 너다. 어디 쥐새끼가 고양이님한테 눈을 부라려!

    셋 타이밍에 여지없이 들어오는 직구. 아무리 내가 백스윙을 키우고 임팩트할 때까지 어프로치 각도를 바꿨어도 결국 타격 메커니즘이라는 게 자기 신체 범위를 이용해서 만들어 내는 것.

    저놈은 내가 크게 치든 작게 치든 무조건 내 궤도에 걸려들게 되어 있다.

    훈련할 때야 발 내리는 위치, 손목 비치는 순간까지 기억해 가면서 배트를 돌렸지만 지금은 실전. 실전에 필요한 건 머리를 비우고 자신감을 가진 채 공보고 공치면 되는 것이다.

    저 공은 무조건 와서 맞는다. 저 공은 무조건 와서 맞는다. 여신님이 내려주신 은총이 내게 깃들 것이다.

    여신님의 은총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휘두르니 배트에 공이 와서 맞아줬다.

    870g짜리 배트가 142g짜리 공과 만났는데 손목이 울리지도 않고 가벼운 떨림만 남긴다.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는 흰 공. 여태까지 비실비실 담장을 기스 내면서 넘어가는 홈런을 보기나 했지, 정규시합에서 장외로 나갈 듯한 타구를 처음 바라보니 그 황홀경에 취해 가만 서서 공이 다 넘어가기를 바라만 보았다.

    “야! 안 뛰냐? 이 또라이 XX. 야구를 어디서 배워 먹었어?”

    포수의 큰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주위를 살폈다.

    내 뒤에 와서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포수와 나를 노려보며 마운드에서 걸어 내려오는 투수. 알아들을 수 없는 야유를 퍼붓는 관중들.

    나도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죄송합니다. 내가 치고도 놀라서 그랬어요. 놀라서.

    포수에게 욕을 들어먹고야 1루를 향해 뛰어나갔다. 1루를 지나는 순간 1루수와 1루 베이스 코치 간에 말싸움이 좀 있는 것 같아 보이긴 했지만 우선은 잽싸게 돌아 홈을 밟고는 덕아웃으로 뛰어들었다.

    “와. 올라오자마자 홈런이네.”

    “이렇게 잘하면서 왜 여태 숨어 있었어?”

    “잘하는 놈은 맞자. 아주 칭찬해. 그러니까 더 맞자.”

    잘하면 왜 맞아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1회에 배트 한 번 휙 돌리고 들어와 두들겨 맞으니 기분이 참 좋다.

    1회 초부터 선두 타자에게 뜬금포를 맞은 투수가 불타오른다. 뜨거워진 선발 투수가 체력 안배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1회부터 기합을 집어넣으면서 타자를 윽박지른다.

    리그 정상급 투수가 각 잡고 때려잡으니 타자들이 버텨 내기가 쉽지 않다. 변변한 커트조차 못 하고 줄줄이 물러 나온다.

    순식간에 바뀐 공수 교대. 이닝을 마치고 내려가야 하는 투수가 상대 팀 덕아웃, 정확히는 덕아웃에서 나오는 유격수를 계속해서 노려본다.

    들어가는 3루수가 달래서 데리고 가지 않았으면 그 자리에서 계속해서 서 있었을 듯한 투수가 사라지고 나서야 오늘의 유격수가 그라운드에 들어갔다.

    저 미친놈. 왜 자꾸 사람을 째려봐. 무섭게. 겁나 쫄았네.

    재규어스의 1회 말 공격. 마운드에 올라선 랩터스의 선발 투수는 이번 시즌 팀에서 유일하게 사람답게 던져주고 있는 이시윤이다.

    재규어스의 고병석은 적당한 제구와 무시무시한 구위로 상대 타자를 압도하는 스타일이라면, 랩터스의 이시윤은 들어가거나 말거나 제구와 나가 죽어라 구위로 상대가 타석에 들어서는 것 자체를 두렵게 만드는 일반적인 구위형 투수들과는 격이 다른 투구를 보여주는 랩터스 토종 1선발이다.

    심지어 관종 끼도 다분해 삼진 하나만 잡으면 관중석에 총질을……. 하여간 나도 몇 번 상대해 봤는데 이래저래 마음에 좀 안 드는 스타일이다.

    랩터스의 선발 투수가 선두 타자부터 윽박지르며 삼진을 잡아낸다. 앞에서만 봐선 미친놈 같고 무섭기만 했는데 뒤에서 보니 정신병자가 맞는 것 같다.

    투구하는 몸의 어느 한 부분 아껴주는 마음 없이 온몸의 근육을 찢어가며 던지는 투구, 등 뒤에서 근육을 보고 있는 내가 다 미안하다. 저러고 어떻게 9이닝을 던지는 거야?

    감탄을 하고 있는 사이 순식간에 끝나버린 수비 시간. 삼진, 삼진, 포스 파울플라이. 이시윤의 근육에 미안한 것도 잠깐. 아무것도 안 하고 들어가니 개꿀이네…….

    “나대지 말랬지. 2군이면 2군답게 견학이나 할 것이지 뽀록을 치고 그래. 눈치 없이.”

    뭐지? 이 미친놈은……. 그것보다 중견수가 언제 여기까지 뛰어 왔어……. 겁나 빠르네. 그런데 넌 왜 나한테 치근덕대냐. 설마… 취향이……. 에이…….

    나 남자 안 좋아한다.

    불타오른 투수들이 2회를 지워버리고 돌아온 3회.

    8번과 9번을 연속해서 삼진으로 잡아낸 재규어스의 선발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는 1번 타자를 기다린다.

    “어이, 하나 또 치고 와~”

    “김소전! 하나 더 치고 오면 내가 신발 사준다.”

    “형 연봉이 얼만데 신발이에요. 시계라도 하나 사줘요. 김소전 내가 시계 받아줄게 하나 치고 와.”

    “난 소개팅! 너 소개팅시켜 준다!”

    신인 타자가 타석에 등장하자 덕아웃에서 선배들이 응원해 준다.

    구단에서 필요한 건 다 사주는데 뭘 그렇게들 사주신다고. 물건은 됐고……. 소개팅? 그건… 아니다. 여자 만나면 돈 들어……. 사양……. 그래도 성의가 있는데… 밥만 먹어볼까…….

    혼자 머릿속에서 결혼식장까지 예약하면서 들어간 타석. 타자의 멍한 얼굴을 본 포수가 덕담을 던진다.

    “홈런 타자님, 또 오셨네. 선물 하나 더 줄 테니까 이번에도 잘 쳐 봐.”

    “감사합니다, 선배님.”

    잡념을 버리고 투수를 바라봤다. 선물을 주신다는데 잘 받아야지.

    타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투수……. 포수가 선물을 준다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선물을 주려는 모습은 아닌 듯하고……. 기분이 이상한데.

    투수가 포수와의 사인을 짧게 마치고는 정면을 보고는 투구 자세를 가다듬는다.

    저 투수 어째 시선이 포수를 보는 듯하지 않다. 저 시선……. 어쩐지 내 머리를 바라보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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