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억 FA선수가 되다-14화 (14/204)

14화. 해소

“무슨 짓입니까! 프로가 몸이 생명인데 그것도 모르십니까!”

아픈 어깨를 부여잡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부들거리는 주먹을 꽉 쥐고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상대를 바라보았지만 내 앞의 저놈은 미동도 않는다.

“여태 본 것 중에 가장 큰소리가 나네. 좋아, 좋으니까 그 팔 이리 내. 내가 그 어깨 확실히 고쳐줄 테니까.”

“미친 거 아닙니까! 내 어깨라고요!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압니다. 이미 인대 늘어났어요. 지금까지 어떻게 관리한 몸인데 뭐 하는 짓입니까!”

고등학교 때 어깨를 다치고 난 뒤 정말 애지중지 내 몸을 아꼈다. 수술하고 재활을 하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절대 무리하지 않으면서 단계를 지켜 나갔고, 고3 때 프로 지명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경기에 나가야 했을 때도 내가 하던 운동 방식을 모조리 바꿔가면서 지켜온 몸이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난 못 배워먹은 놈이 내 몸을 갈가리 찢어버리려고 들다니. 더 이상 봐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뭐 하는 짓인지는 서로 잘 알고 있는 거 같으니 어린애처럼 소리 지르는 건 그만하고 이리와. 아니면 20도를 더 꺾어버릴 테니까.”

더 듣고 있을 필요가 없다. 이건 처음부터 잘못된 거다. 애초에 상담한다는 XX가 운동만 시킬 때부터 알았어야 했다.

끓어오르는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등을 돌렸다. 그리고 문을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그 문 열면 다음 주에 드래곤스로 트레이드되는 거야. 그건 알고 가.”

트레이드라는 말에 잠깐 발이 멈췄다.

구단에서 날 안 좋아하긴 하지만 구단 지원이 워낙 좋아 개인 돈 하나도 안 쓰고 생활이 가능한 랩터스에서 오래 선수 생활을 하고 싶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순간 망설임이 올라왔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내가 언제부터 구단에 대한 충성심이 있었다고. 팔려 다니는 거 힘든 것도 한두 번이지, 몇 번 해보면 사실 그 팀이 그 팀이고, 팀 핵심 선수도 아닌 백업들은 어디든 마음 편한 데가 최고다.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아버지가 이러라고 배 타신 게 아닐 텐데?”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야구 선수가 불타오르는 모습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죽이겠다는 표정으로 다가오는 상대를 보면서도 여유 있는 모습의 상담사가 한마디를 더 던진다.

“비겁한 자식.”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 정도까지 분노한 적이 없었다. 아무 생각이 없이 그대로 달려들었다.

“이 XXX야!”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주먹. 눈앞의 XXX가 쥐새끼마냥 도망 다니기만 한다.

“이봐, 이봐. 아직도 이러네. 그렇게 끝까지 숨기고 있어서야 내가 맞겠어? 더 빨리 휘두를 수 있잖아. 어머니가 2군 백업 선수나 하라고 뒷바라지한 게 아니실 텐데?”

죽어라, XXX야!

정말 죽여버리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우리 가족에 대해 뭘 안다고 아버지랑 어머니를 끌고 들어와!

있는 힘을 다해 뻗은 주먹에 느낌이 왔다. 날 우롱하는 XXX 얼굴에 닿은 주먹. 사람을 때려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신경이 곤두서면서 몸이 얼어붙었다.

얼어붙은 나를 바라보며 주먹을 맞은 산적이 씩 하고 웃는다.

꽝!

한 대 맞은 산적이 웃으며 날린 카운터펀치에 발랑 넘어져 하늘을 보았다.

나쁜 XX. 하늘의 조명 때문인지 눈물이 흐른다.

“어휴. 생각보다 세네. 네가 정신 차리고 제대로 돌렸으면 쓰러져 있는 건 나였을 거다. 하하하. 너 야구 하기 싫으면 나랑 복싱을 해보는 건 어때? 그 몸에 이 정도면 힘은 타고났네.”

이거 나 놀리는 거지? 다시 시작해도 놀림거리. 그저 열심히 또 열심히 한 것뿐인데도 놀림거리. 인생 참 거지 같다.

“울어? 지금이 울 때야? 다시 덤벼봐야지. 드루와. 이러니까 전력 분석팀 애들이 팔아버릴 생각을 하지. 드루와. 드루와.”

“야, 이 XXX야!”

억울함 반. 쪽팔림 반. 7번을 일어나서 덤볐고 8번을 쓰러졌다.

“휴, 힘드네. 이봐. 근성도 있고 독기도 있는데 이러는 이유가 뭐야? 아니지. 이만큼 하는데도 마지막 남은 봉인은 왜 안 푸는 거야? 진짜 다칠까 봐 안 푸는 거야?”

어질어질하다. 평생 야구만 하면서 벤치클리어링이 날 때도 도망만 다녔지 직접 붙어본 적이 없는데, 흠씬 두들겨 맞으니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그걸 원하실까? 어머니가 그걸 원하실까? 아니면 해보고도 안 될까 봐 도망 다니는 겁쟁이인 거야?”

맞은 게 아파서 그런가 눈물이 또 흐른다.

XXX. 악마 XX. 아무것도 모르는 XX.

“그만하시죠. 충분합니다. 어차피 트레이드되면 다시는 볼일 없을 테니 신경 끄세요. 기분 더럽네요.”

멋지게 일어나서 나가야 하는데 일어날 기운이 없네. 휴… 잠깐, 아주 잠깐만 누웠다 일어나자.

“가긴 어딜 가? 내가 기껏 눈곱만큼 더 힘쓰게 만들었는데 어딜 가려고? 어머님이 원하시지 않는다니까.”

저 XXX. 네가 뭘 안다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XXX 앞으로 다가갔다.

“그만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싫으면 나만 가지고 얘기하세요. 가족은 그냥 둬요!”

내 진심이 담긴 목소리를 들어 처먹지 않는 XXX가 내 멱살을 잡는다.

“내가 어머니 만났거든. 어머니가 자기는 괜찮으니까 소전이 야구만 잘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시던데? 너 야구 잘하냐? 어머니가 원하는 거 그거 하나라는데 너 야구 잘하냐고. 진짜 야구 잘하려고 하는 거 맞냐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먹이 먼저 나갔다.

턱!

나도 모르게 나간 주먹을 저 XXX는 어찌 알고 잡아낸다.

“허. 성격 있네.”

“으아악!”

사람을 때리려고 날린 주먹이 솥뚜껑만 한 손에 잡혀 찌그러지고 있다. 아파. 아프다고!

“지금도 약하잖아. 더 빨리 휘두를 수 있지 않아? 무의식중에 날린 것 같은 데도 몸이 알아서 반응을 하네. 대단하다. 기껏해야 2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몸에 새겨넣은 게 무의식중에도 작동을 하다니. 내가 배움이 부족하다.”

저 XXX가 뭔 소리를 지껄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손이 부서질 것 같은 게 먼저다.

“으……. 놔주시죠. 아픕니다.”

“어이구. 사람 때릴 때는 보이는 거 없더니, 지 아프니까 놔달라네. 허허.”

웃으면서 손아귀에 힘을 더 준다. XXX야. 아프다고 아파!

“으… 으……. 그만, 그만하겠으니 놔주세요.”

그제야 주먹이 자유를 얻었다. 어깨도 무리했는데 손은 괜찮은 건지…….

욱신거리는 오른손을 만져보는데 웃음소리가 들린다.

“하하하. 멍청하지만 않으면 최고인데. 하하하.”

멍청……. 저 XX 줘 패버리고 싶지만 쌈박질로는 못 이길 것 같고. 좌절감만 가득하다.

“왜? 억울해? 나한테 당하니까 억울해?”

저 깐족. 저 입을 찢어버리고 싶다.

“억울합니다. 이제 그만 놀리시죠. 재미없습니다.”

재수 없는 깐죽이가 억울함 한 가득인 패배자를 향해 빈정거림을 멈추지 않는다.

“억울하긴. 내가 이래 보여도 레슬링 상비군에 프로 복싱 3전을 한사람이야. 이런 나한테 처맞고 억울하면 안 되지. 내가 미안하잖아.”

그게 미안한 표정이냐?

“그만 놀리라고 했습니다. 자꾸 이러면 참지 않습니다.”

내 선언을 개똥으로도 안 듣는 깐죽이가 계속해서 빈정거린다.

“에이, 야구 선수가 쌈박질 못 하는 게 뭐가 억울해서 그래. 난 그건 다 괜찮다고 봐. 그런데 말이지. 야구 선수가 야구 못 하는 건 어떻게 생각해? 그것도 잘할 수 있는 XX가 노력도 안 하고 못하면 재능 없는 애들이 억울하지 않을까? 재능 없어도 죽어라 노력하는 애들한테 너무 하는 거 아니냐는 거야!”

오늘 눈물샘이 고장 났는지 눈물이 자꾸 떨어진다.

지금까지 살면서 욕을 얼마나 먹었는데 아직도 마음이 덜 단단한가 보다.

“해도 안 되는 기분 아세요? 나도 남들처럼 쉬고 싶고 놀고 싶은데 그거 참아 가면서 운동하는 기분 아세요? 재능? 다치기 전엔 재능이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없는 집에서 다쳐 보셨어요? 재능 있다는 코치 말에 속아서 병원비 대겠다고 원양어선 타는 아빠 보신 적 있어요?”

그동안 하지 않던 지난 시간의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그간의 기억이 머릿속에 가득 떠오른다.

“아빠 잡아먹고도 모자라 우리 엄마, 공장에서 2교대로 일해요. 무릎이 나가서 걷지 못하는데 투석 받으면서 지금도 공장 다닌다고요. 이런 집에서 야구 하는 애가 얼마나 더 열심히 해야 하죠?”

방울방울 떨어지던 물방울이 흐르기 시작한다. 눈물이 흐르는 것처럼 한 번 터진 속 얘기가 끊이지 않고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온다.

“야구… 야구요……. 지긋지긋해요. 그래도 해야 해요. 이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이거 말고는 나한테 계약금 5천을 줄 데도 연봉으로 3천을 줄 사람이 없다고요. 나 수술한다고 빚진 거, 아빠 보험금이랑 내 계약금으로 겨우 깠습니다.”

아빠의 지난 얼굴이 지나가자 엄마의 얼굴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지금도 일하는 엄마의 얼굴이.

“이제 엄마 수술비 까야 해요. 엄마 수술비 다 갚고 나서 우리 두 식구 먹고살면서 엄마랑 살 집이라도 하나 사려면 안 다치고 버텨서 10년은 야구 해야 한다고요.”

말을 하면 할수록 더 속에서 뜨거운 게 올라온다. XXX야. 네가 뭘 알아!

“다쳐보셨어요? 다쳐서 간신히 수술했는데 재활도 못 하고 경기 뛰어 보셨어요? 돈 많고 먹고살 거 있는 애들이 야구를 좋아서 하고, 재미로 하는 거지. 우리 같은 애들은 운동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엄마의 얼굴이 지나가자 지긋지긋했던 내 얼굴이 떠오른다.

“야구란 건 말이죠. 재능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집밥보다 학교 급식이 맛있어서 학교에서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어서 하는 거고요. 친구들 학원 가서 놀 친구가 없어서 학교에 붙어 있고 싶어서 하는 게 야구예요. 아세요!”

소리를 좀 지르니 좀 살 것 같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다치면 안 돼요. 알고 있었는데 다쳐보니까 더 알겠더라고요. 다치면 절대 다치면 안 돼요. 멀쩡한 몸으로 한 경기, 한 타석이라도 더 나가고 출전 수당 1원이라도 더 받아야 합니다.”

그랬어. 내가 그렇게 살았어. 내가 하루하루를 정말 최선을 다해 처절하게 살았어.

“트레이드 시키셔도 돼요. 당장 여기서 경기도 못 나가는데 랩터스 시설이 아무리 좋으면 뭐 해요. 괜찮습니다. 드래곤스 가서 한 경기라도 더 나가면 충분해요. 괜찮습니다.”

후련하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이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속에 있던 얘기 다 던져버리고 나니 좀 후련해졌다.

좀 창피하긴 하지만 앞으로 볼 사람도 아닌데 괜찮겠지.

일어나자. 일어나서 저 문을 열고 나가 다시 보통의 나로 돌아가자.

“그냥 사기꾼인 줄 알았더니 제대로 꼴통이네.”

칫, 충분하잖아. 이제 그만 도발해. 더 이상 볼일도 없는데 막말을 내뱉는 XXX가 갑자기 웃옷을 훌렁 벗어버린다.

“레슬링 대학생 대회 4강에서 어깨 인대 끊어져서 수술. 다음 해 국가 대표 선발전 팔꿈치 수술. 다음 해 그레코에서 자유형으로 바꾸고 대학생 대회 8강에서 발목골절, 2년 쉬고 어깨 탈골로 탈락. 다음 해 간신히 국가 대표 상비군. 다시 허리 부상. 그 상태로 4년 더 하고 도저히 걸어 다닐 수가 없어서 은퇴. 레슬링 코치만 8년 하면서 꾸역꾸역 재활하고 주짓수 대회 우승. 그 와중에 프로 복싱 데뷔해서 3승 했다.”

“자랑해요? 운동 잘했다고?”

“돈이 없어서 아프면 안 된다고? 미국에서 다쳐 봤냐? 여기선 다치면 의료 보험이라도 되지, 미국에서 대학생이 어깨에 칼 대면 눕기만 해도 억 단위야. 그 와중에 재활하면 얼마가 필요한 줄 아냐? 죽을 만큼 열심히 한다고? 눈이 있으면 나가서 봐봐! 프로 온 애들 중에 열심히 안 하는 애들이 어디 있어! 다 열심히 해! 열심히 하는 방법이 다른 거지! 다 열심히 한다고! 프로는 잘해야 돼.”

“잘하고 싶다고! 잘하고 싶어도 없는 것들은 할 수가 없다고!”

“아프면 팀이 너 버릴 것 같지? 안 그래. 정말 잘하잖아? 기다려. 진짜가 된다는 믿음만 있잖아? 10년이라도 기다려. 그 믿음이 1%만 되도 순서가 바뀌는 거야.”

앞에 있는 상처투성이의 곰이 기세를 잃지 않고 몰아붙인다.

“팀은 네가 최고가 된다고 믿고 있는데, 자기가 못 믿으면 무슨 수를 써야 하냐? 너 이대로 그저 그런 선수로 3천 받으나 껍질 깨다 부서져서 10년 골골대면서 가능성을 보여주는 거나 다를 게 뭐냐?”

몰아치던 곰이 숨을 한번 고른다.

“다 실패해서 운동 못하게 됐다고 치자. 너 정도 성실함을 꾸준히 보여만 주면 팀에서 매니저를 시키든 코치를 시키든 절대 버리지 않아.”

화를 내던 곰이 이젠 어르기 시작한다.

“너 정말 야구 안 좋아해? 야구 안 좋아하는 애가, 초딩 때부터 게임에 빠져 있던 애가 야구부 들어가면서부터 매일 스윙을 천 개씩 돌리고 섀도 피칭을 천 개씩 한다고? 고등학교 때 쓴 야구 일기를 후배들이 교과서로 보고 있는데, 이게 먹고살려고 야구를 한 애라고?”

치사한 XX. 그딴 건 어떻게 알아 가지고.

“어머니 걱정하고 먹고살 거 걱정하는 건 이해하는데, 널 속이지는 말자. 너 중3 때 쓴 일기에 왼팔로 던져도 커쇼보다 잘 던지겠다고 써놓은 자신감을 어디다 팔아먹은 거냐?”

더 눈물이 나올 것도 없는데 저 곰이 자꾸 나를 괴롭힌다.

“너 무조건 후회한다. 너만 아니고 어머니도 가슴에 못이 박힌다. 야구가 좋아서 하는 아들내미, 어머니 때문에 못 한 거 알면 나중에 그거 감당할 수 있겠냐?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약속한다. 랩터스에서 야구 하면 너 야구 못할 정도로 다치는 상황은 안 만들어진다. 여기 분석팀이 그건 확실히 컨트롤할 수 있는 애들이야.”

내 퀭한 눈을 바라보며 곰이 확신에 차서 말을 계속한다.

“야구 하다 적당히 부상을 달고는 살겠지만 그 이상으로 무리를 시키지는 않아. 그리고 너 랩터스에서 뛰는 동안은 어머니 아프신 거 걱정 안 하게 내가 얘기해 놓으마. 내가 해달라고 하면 위에서도 그 정도는 해준다. 그것도 약속하마. 대신에.”

대신에?

“너도 팀에서 요구하는 만큼은 최선을 다해라. 아니지 그것보다 더 잘해. 너도 알고 있잖아. 너 안 아파. 재활을 병원에서 안 했을 뿐이지, 혼자서 병원보다 더 꼼꼼하게 재활해서 수술하기 전이랑 크게 차이도 없잖아.”

곰이 눈으로 나를 잡아먹을 듯 다가서며 말 하나하나에 힘을 싣는다.

“애매하게 하지 말고 잘하자. 내가 믿을 만한 사람들은 죄다 너 성공한다고 하고 있어. 너만 너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면 돼. 너의 성공에 의심하지 말고 한번 해보자.”

최선. 성공.

난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프로에서 14년을 버텼으면 성공한 거 아니었나?

내가 정말 최선을 다 안 했었나? 고등학교 때 나는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운동을 했었던 거지?

기억이 나지도 않는 오래전 얘기다. 내 머릿속의 기억은 빛바랜 아빠 사진과 언제나 아픈 엄마. 그리고 엄마의 미안하다는 말. 미안…….

XX. 엄마는 왜 나만 보면 미안할까. 아빠 없이 계속 운동한 것도 나고 돈을 못 버는 것도 난데.

바꿔봐야겠다. 지난번엔 멀쩡한 몸뚱어리로 엄마를 미안하게 했으니, 이번엔 이 몸뚱어리 갈아 넣으면 엄마가 안 미안해하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멀뚱하니 서서 눈물만 흘리는 내게 곰이 또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야구 하기 싫으면 관두고. 오늘 보니까 너 맷집 좋더라. 내 펀치에 맞고 병원 안 간 애가 별로 없는데, 너 쓸 만해. 팔다리도 길고 발도 빠르고 아주 딱이야. 자네 야구 관두고 나랑 복싱하지 않을 텐가?”

미친놈아. 다치기 싫어서 야구도 살살한다는 애한테 복싱을 하자는 게 제정신이야!

아니다. 내가 복싱을 제대로 배워서 저 곰을 때려눕혀 봐야겠다. 그러려면 랩터스에서 좀 더 머물러야겠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