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억 FA선수가 되다-12화 (12/204)
  • 12화. 산적의 등장

    * * *

    2군 숙소에 다시 들어와 짐을 풀었다.

    최신 시설의 1인실 숙소. 24시간 운동에만 집중할 수도 있고 배가 고프면 언제든지 즐길 수 있는 라운지까지, 어지간한 5성 호텔보다 호화로운 2군 숙소. 이런 미친 시설을 직접 겪어본 건 처음이지만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다.

    올라갈 거다. 반드시 빠른 시간 안에 올라가고 말 거다.

    “이게 말이 되냐? 홈런 치고 그날로 2군 보내는 경우가 어딨냐? 너 감독님한테 욕이라도 한 거야?”

    내가 2군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에 옆방의 이수영이 버선발로 뛰어왔다.

    기특한 자식. 내가 널 잘못 키우지 않았구나.

    “내가 못하니까 내려왔지.”

    “신인이 1군에서 홈런을 쳤는데 못한다고? 1군에 아직까지 홈런 못 친 선배들이 얼마나 많은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거 뽀록으로 넘어갔어. 바람 불어서 넘어간 거야. 오버하지 마.”

    “우리 동기 중에 처음 1군 올라갔는데 부당하게 쫓겨오면 억울하잖아. 내가 다 터뜨릴 꼬얌.”

    터트리긴 뭘……. 지 앞가림도 못 하는 게.

    “됐고. 그건 왜 가져 왔냐? 내 방에서 스윙 훈련이라도 하게?”

    수영이가 가져온 비닐도 안 뜯은 배트 세 자루를 보면서 물었다.

    “아, 이거. 너 내려오고 강훈 선배가 콜업되면서 주더라. 지가 콜업되면서 네가 미끄러졌다고, 너한테 미안하대. 그러면서 지가 개별 주문한 배튼데 이걸로 연습하면 자기 기 받아서 성적 난다면서 주더라. 그냥 불 질러버릴까 하다가, 나 준 것도 아니고 너 준 거라 가져왔어. 보기만 해도 재수 없는데 갖다 버릴까?”

    버리긴 왜 버려? 이거 비싼 건데. 최강훈이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그러더니 좋은 거 쓰는구나.

    “그거 미제라 자루당 50은 하는 거다. 버리긴 왜 버리냐. 알차게 쓰고 부러지면 장작으로 써야지.”

    “뭐 그렇게 비싸? 구단에서 50짜리 배트도 바꿔주나? 그거 하나 나 줘봐. 50짜리로 치면 홈런 뻥뻥 나오나 써봐야겠다. 아니다. 너 영어 좀 하냐? 나도 이번에 미국에 주문해 볼까?”

    나랑 얘기하다 말고 갑자기 행복한 미소를 짓는 수영이. 이놈 요즘 힘들었나, 뭔 헛소리를.

    “그거 주문해서 만드는 배트라고. 구단에서 주는 배트 티켓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야. 우리 연봉 얼마나 된다고 50짜리 배트를 쓰냐. 그거나 국산이나 크게 차이도 없어.”

    행복감에 젖어 초승달 모양의 눈이 됐던 수영이가 정색을 하고 나를 바라본다.

    “너. 배트 티켓 고등학교 후배들 안 줬어?”

    “뭔 소리야? 우리 집 가난하다. 고등학교 후배들 챙길 만큼 계약금 많이 받지 않았다.”

    “왜? 그거 팔아먹게? 와, 김소전 인성 빻았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기껏해야 계약금 5천에 연봉 3천 받는 2군 선수에게 2군 선수용으로 나오는 배트 티켓 후배들 안 줬다고 욕하는 건 너무한 거지. 나 쓰기도 빡빡해! 인성은 네놈이 빻은 거 아니냐?

    “넌 티켓 다 후배들 줬냐? 좋겠다, 부자라서.”

    내가 재수 없는 눈빛을 하고 수영이를 쏘아보자 이제 숫제 침까지 튀겨가며 나를 갈군다.

    “부자는 개뿔. 우리 아빠 동네 꽃집 하는데 무슨 그런 개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야 배트 분질러 먹으면 매니저 형이 무제한으로 다 바꿔주는데 모교 가서 생색내라고 준 배트 쿠폰을 꼭 팔아먹어야겠냐? 신인 선수 상견례 때, 구단 얼굴 먹칠하지 말고 꼭 후배들한테 나눠주라고 한 걸 기억했다, 이러는 놈들이 있어요. 에휴.”

    뭐, 뭔 소리야. 배트를 그냥 바꿔준다고? 내가 1년에 몇 개를 써먹을 줄 알고 바꿔줘?

    “그게 뭔 소리야? 트레이드되고 쿠폰을 30장이나 주길래 여긴 1년 치 한 번에 주나 보다 했는데, 배트를 무제한으로 바꿔준다고?”

    나를 이상한 놈 바라보듯 쳐다보는 수영이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서… 설마 몰랐냐? 누가 너한테 설명해 준 적 없어? 진짜구나. 소닉스만 해도 진짜 배트 교환 안 해주는구나.”

    이… 이놈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첫날 구단에서 다 얘기해 줬는데. 트레이드되면서 아무도 얘기 안 해줬어? 운동하는 데 아무 불편 없이 해주겠다면서 필요한 장비 있으면 아무거나 다 요청하라고 했잖아.”

    나를 불쌍하게 바라보는 수영이. 네가 얘기 안 해주고는 왜 나를 그딴 눈으로 바라봐!

    “운동용 물품이면 우리 스폰서 물건 아니어도 구해 달라면 다 구해 주잖아. 박정환 선배는 하다못해 파울컵도 주문 제작해 줬다는데……. 몰랐어?”

    뭐… 랩터스가 돈이 썩어난단 얘기는 들었지만 운동 물품이면 뭐든 다 지원해 준다고? 얘들은 무슨 자선 사업가야?

    “진짜 다 돼? 아무거나 다 된다고? 배트도 글러브도 다 준다고? 정말이야?”

    고개를 갸웃거리던 수영이가 고민스러운 얼굴로 대답을 한다.

    “음, 다는 아니고. 글러브 정도는 비싼 것도 해줄걸? 강훈 선배가 명품 콜라보 신발 신청했는데 그건 안 해줬다는 얘기는 들었어. 운동화 한정판은 해주면서 그건 안 해주더라고. 명품은 안 해주나 봐.”

    미, 미친……. 명품을 신청하는 미친놈이나, 운동화 한정판을 구해다 주는 미친놈이나……. 여긴…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다.

    * * *

    1군에서 쫓겨온 신인 선수가 실망한 모습 없이 1군으로 올라가기 전 모습 그대로 훈련에 집중한다.

    아침밥을 챙겨 먹고 홀로 몸을 풀고는 투수조가 런닝 훈련을 하기 전 경기장 주변을 뛰면서 예열을 마친다.

    아무도 없는 그라운드에 등장해 혼자 시작하는 주루 연습. 1루에서 정성스럽게 리드 거리를 맞추며 끝도 없는 스타트 연습을 이어가자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홀로 운동하는 선수를 멀리서 2군 감독과 산적같이 생긴 아저씨가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저 선순가요?”

    “저 선수예요. 저 키만 큰 종이 인형. 저 선수가 김소전입니다.”

    “굉장히 진중하네요. 선수들 훈련하는 거 여러 번 봤지만 인상 깊네요. 항상 저러나요?”

    “여태까지 운동하면서 봤던 선수 중에서 성실함으로만 따지면 1, 2등을 다툴 만합니다. 특히나 저 선수가 19살 1년 차인 걸 감안하면 말이 안 나옵니다. 의욕도 의지도 출중한데 자기 절제도 무시무시합니다. 그게 저 선수 가장 큰 장점이자 치명적 약점입니다.”

    “겉으로는 전혀 모르겠네요. 저 모습이 19살이라는 게 충격적이라는 것 말고는 모르겠습니다. 만나봐야지요. 제가 받은 자료를 보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기다려 주시는 거죠?”

    “저 정도면 안고 죽어야죠. 제가 잘리기 전까지는 데리고 있을 테니 고쳐만 주세요.”

    선수만 바라보던 산적이 자세를 고치고 2군 감독을 바라본다.

    “저는 고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고치는 건 감독님이 해주셔야지요. 저는 저 선수가 자기가 필요한 게 뭔지 감독님께 얘기할 수 있게 속에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게 도와줄 뿐이에요.”

    산적의 말을 들은 감독이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다.

    * * *

    타격 훈련이 시작될 시간, 훈련을 가려던 선수를 매니저가 어디론가 끌고 간다.

    “매니저님. 어디 가요?”

    “너 오늘부터 매일 두 시간씩 열외야. 자, 다 왔다. 들어가. 나 간다.”

    뭐, 뭐야. 여기는 랩터스 마인드 분석실? 이제 마음도 분석해? 내가 여기 트레이드되고 받은 검사 횟수가 살면서 받은 검사 횟수보다 10배는 많은 거 같은데……. 뭘 또 해야 하는 거야…….

    매니저를 뒤에 두고 평범하게 생긴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가장 먼저 숲에 온 듯 상쾌한 향기가 나를 맞이한다.

    그리고 방 안 가득, 아기자기한 피규어들과 소품들이 나에게 인사하듯 방긋방긋 웃어준다.

    신기하네. 분명 가만히 있는 물건들인데 하나하나가 다 표정이 있는 거 같네.

    “어서 와. 김소전 선수, 우리 초면이지?”

    사무실 구석에서 산적 같은 아저씨가 억지로 웃으며 다가와 내게 손을 내민다.

    대한 그룹에서 살인 병기를 키운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누구지? 최소 북한 침투 공작원쯤은 되는 느낌인데…….

    “랩터스 신인 선수 김소전입니다. 그런데… 누구신지…….”

    악수는 하긴 했지만 진심으로 당황한 내가 누군지 물어보는데 앞에 있는 산적이 여전히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대화를 이어간다.

    “이런 이런. 여기 사람들이 다들 바빠서 내 소개를 안 해줬나 보네. 랩터스 심리 상담사 주하선이야. 신인 선수들은 입단하고 다 면담했는데 김소전 선수는 늦게 들어와서 내가 챙기지 못했네. 미안해.”

    저… 안 미안해하셔도 될 것 같아요. 우리 자주 안 보는 게 제 정신 건강에 훨씬 도움이 될 듯한데요.

    “여기 왜 왔는지 알지?”

    모르는데요. 저 타격 훈련하기도 바쁜 시간에 왜 이러시죠?

    “제가 듣지를 못해서요. 다른 선수는 다 면담했는데 저만 못해서 부르신 건가요? 아니. 아까 매니저님이 저 매일 두 시간씩 열외라고 했는데……. 저 매일 두 시간씩 산적… 아니, 상담사님 봐야 하는 건가요?”

    운동도 못 하고 산적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눈가에 눈물이 고이려고 한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감독님…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산적이라는 말을 들은 상담사의 눈썹이 씰룩거렸지만 곧 다시 사람 안 좋은 웃는 얼굴을 하고는 앞으로의 계획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김소전 선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구단에서 월급 받는 월급쟁이잖아.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월급쟁이라고? 저기요, 선생님. 프로 야구 선수는 월급쟁이가 아니고 개인 사업자입니다만……. 아니… 이게 지금 중요한 건 아니고…….

    “구단에서 김소전 선수가 일부러 태업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왜 그러는지 선수를 샅샅이 파헤쳐달라더군. 그래서 어쩌겠어. 빤쓰만 남기고 털어드리겠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지.”

    뭐? 내가 태업을 한다고?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받아드릴 수가 없지. 내가 야구 하면서 단 하루도 쉬어 본 날이 없어. 그런데 뭐? 태업?

    “어이. 그렇게 화내지 말고. 본인이 태업이 아니면 그렇게 화낼 필요가 없잖아.”

    “상담사님! 화낼 필요가 없다니요! 저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서 제 한계까지 밀어붙이면서 운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태업이라니요! 이건 누가 절 음해하는 겁니다. 누굽니까? 누가 그런 소리를 합니까!”

    진짜로 화가 뻗쳐올라 몸까지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를 지르는 내담자에게 영업용 미소를 유지하는 상담사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평온하게 흑막의 정체를 알려준다.

    “단장님이. 랩터스 조수아 단장이 김소전 선수 사기꾼이래. 여기 보이지? 이거 김소전 선수 종합 보고서야.”

    그거 나도 알지. 나도 숱하게 봐왔던 거니까. 그런데 그거랑 이거랑 뭔 상관이야!

    “이거 던져 주면서 얘기하더라고. 보고서가 잘못됐는지 선수가 거짓말하는 건지 확인하라는데, 방법이 없잖아. 확인해 봐야지.”

    산적이 무섭게 웃는 얼굴을 내 앞으로 확 들이민다.

    “김소전 선수, 당신 사기꾼이야? 아니면 전력 분석팀 안경 낀 샌님들이 틀린 거야?”

    저 산적 XX. 사람 면전에 대고 사기꾼이라니. 우리 집이 없이 살았어도 다른 사람 해코지하면서 산 적이 없는 집안이다. 어디서 말을 그따위로 던져.

    “그거 좀 봐도 되겠습니까? 제가 확인 좀 해보겠습니다. 전력팀에서 제 뭘 보고 그따위 보고서를 썼는지 봐야겠습니다.”

    어린놈이 억울해서 곧 눈물이라도 떨굴 듯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요구하자 산적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외비라고 적힌 자료를 건넨다.

    “물론이지. 자기에 관한 내용인데 봐야지. 그런데 말이지, 봐도 소용없을 거야. 내가 봐도 자료만 보면 선수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게 보이거든. 소용없어.”

    받아든 책자 위에 눈물이 떨어진다. 내가 살아온 전체 인생이 부정당하는 기분이다. 왜! 야구를 못해서 그렇지, 누구보다 열심히 야구 한 나한테 왜! 너희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사기꾼이래.

    “아이고. 다 큰 선수가 무슨 눈물까지 떨구고 그래. 왜? 억울해? 억울해서 그래? 몰랐어? 김소전 선수 프로잖아. 프로가 되면 이렇게까지 분석 당하는 거 몰랐어? 더군다나 여기 랩터슨데?”

    알고 있다. 이미 선수들 다 수치화 계량화해서 분해하고 재조립해 가면서 분석하는 거 알고 있다. 그중에서도 랩터스의 전력 분석은 악마보다 더 치사하게 물어뜯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왜 너희 마음대로 판단하냐고!

    “선수가 들으면 화나겠지만 내가 랩터스 참 좋아하거든. 왜 좋아하는지 알아?”

    네가 좋아하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난 이미 구단에 태업하는 쓰레기로 찍혔는데.

    입을 꾹 다물고 보고서만 쥐어 잡는 선수에게 산적이 훅 다가와서 눈을 맞춘다.

    “얘들은 지들이 숫자로 결론을 내려도 무조건 그게 정답이라고 우기지 않아.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자기들이 못 본 뭔가가 있는지 끝까지 확인을 하려고 하지. 그래서 내가 김소전 선수를 만나야 하는 거야. 김소전 선수가 사기꾼인지 아닌지 확인을 해야 하니까.”

    끈적거리는 눈으로 내 전신을 스캔하는 산적.

    “그리고 아무리 봐도 난 김소전 선수가 사기꾼 같지는 않거든. 어때? 이제 나랑 만나야 하는 이유를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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