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2군행
3회에 8 대 0이던 경기를 야금야금 따라붙는 랩터스. 3회 말에 터진 신인 선수의 솔로 홈런이 당긴 불꽃이 랩터스 화약고에 옮겨붙기 시작한다.
- 7번 해리스 오늘 멀티히트를 기록합니다. 그간의 부진을 완전히 씻어버리는 모습인데요.
- 이런 게 랩터스가 기대하던 모습이거든요. 연속해서 배트 중심에 정확히 맞추면서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날리고 있어요. 양상도 감독, 마음이 한결 놓이겠습니다.
8점을 다 따라붙은 랩터스가 8회 말 선두 타자가 출루하면서 역전의 기회를 노린다.
- 아, 볼넷. 여기서 볼넷이 나옵니다.
- 지금은 승부를 했어야 해요. 재규어스, 이런 경기를 놓치면 상위권으로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무사 주자 1, 2루. 첫 선발 경기에 3타수 2안타를 때려낸 김소전이 타석에 들어섰다.
- 주자 있는 상황에서 오늘 타격감이 좋은 김소전 선수가 등장했습니다. 첫 타석 홈런, 두 번째 타석 2루타를 때려냈는데요. 이번 타석도 기대가 됩니다.
처음과 두 번째 타석에서는 내가 꽉 잡고 있는 고병석이 상대라 안타를 때려냈지만 뒤이어 나오는 불펜들에게는 딱히 자신감이 안 생긴다.
3루 코치의 분주한 손놀림. 요란하기만 하지 그냥 때리라는 히팅 사인이 나왔다.
다 잡았던 경기를 순순히 내줄 수 없는 재규어스도 승리조가 마운드를 지키는 상황에 그냥 때리기만 하는 건 확률이 낮다. 무사 주자 1, 2루. 이 상황에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하나다.
- 김소전 번트. 착실하게 공을 3루로 굴립니다. 주자 한 루씩 진루. 타자 주자 1루에서 아웃.
- 랩터스 아쉬운 작전이 나왔어요. 김소전 선수 오늘 타격감이 좋거든요. 강공으로 가보는 건 어땠을까 아쉽습니다.
성공적인 번트를 대고 덕아웃으로 들어오는 길. 타격코치와 눈이 마주쳤는데 표정이 심상치 않다.
“김소전! 이리와 봐.”
덕아웃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 타격 코치보다 감독의 호출이 빨랐다.
“사인 못 봤어?”
나를 부르고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라운드만 바라보며 사인 미스 여부를 묻는다.
“히팅 사인 봤습니다.”
“그런데 왜 안쳤어?”
“무사에 주자 두 명인데 번트 대비 안 하고 있어서 대보았습니다.”
“그게 다야? 다른 이유는 없어?”
“윤서전 선배, 저랑 상성이 안 맞습니다. 어설프게 덤벼서 병살 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서워서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쳤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알았다. 들어가.”
8회 말, 두 점을 추가하면서 기어이 역전에 성공한 랩터스. 경기를 끝낼 9회 초 수비에 들어간다.
- 랩터스, 선수 교체가 있네요. 중견수에 김소전 선수 빠지고 안영진 선수가 들어갑니다. 오늘 컨디션 조절 차 휴식을 취하다 9회 초 대수비로 들어옵니다.
- 양상도 감독, 아무래도 안영진 선수의 수비 안정감이 더 좋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정신이 멍하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나 백업 아니었어? 그것도 땜빵에 땜빵 백업. 나한테 뭘 바라?
경기 중 감독과의 짧은 면담이 있고 나서 수석 코치와 매니저가 차례로 다가와서 2군행을 통보했다.
오늘 홈런 하나, 2루타 하나를 친 타자를 2군으로 보내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냐고 항변해 보았지만 감독의 뜻이라는 말만 듣고는 경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매니저 차를 타고 2군 훈련장으로 향했다.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쏟아진다. 이번 생은 달라 보였는데. 시작부터 1군도 올라가고 홈런도 치고 이번 생은 달라 보였는데…….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기약 없는 2군 생활이 다시 시작된다.
* * *
8 대 10으로 끝난 경기가 정리되기도 전에 감독을 찾아 단장이 뛰어 왔다.
“감독님! 이게 무슨 짓이에요! 선수 이동을 감독님 마음대로 결정하는 게 어딨어요!”
오늘 경기를 승리로 이끈 감독이 별일 아니라는 듯 단장을 바라본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너무 어린 선수를 급하게 올렸습니다. 싸울 준비가 안 돼 있는 선수를 쓸 수는 없습니다. 2군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을 필요가 있어요.”
여유 넘치는 감독과는 다르게 단장의 목소리는 한층 높아진다.
“싸울 준비는 무슨 싸울 준비요! 질질 끌려가던 경기에서 홈런도 치고 2루타도 친 선수가 싸울 준비가 안 돼 있으면 라인업에 있는 다른 선수들은 무슨 짐짝들이에요! 감독님 이렇게 조급하게 구는 이유가 뭐예요?”
어린 단장의 한기 서린 공격에도 산전수전 다 겪어본 감독이 평온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간다.
“단장님. 선수단에 한계를 긋고 포기하는 놈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선수가 하나둘 끼기 시작하면 팀이 성적에 만족하고 그 자리에 머무는 법입니다. 팀이 이대로 정체되는 걸 원하신다면 그걸로 만족하는 감독을 불러오세요. 저는 팀을 이끌어서 공성을 하는 감독이지, 수성에 능한 감독이 아닙니다.”
감독이 거취를 걸고 배수진까지 치자 단장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기 시작한다.
“감독님! 지금 1년 차 핏덩이 때문에 이러셔야겠어요?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세요. 차라리 어디로 보내드릴게요. 이번 시즌 신인들 다 별 볼 일 없는데, 키울 만한 자원이잖아요. 제가 어찌 해드리면 되겠어요? 그놈을 어떻게 만들어 놓으면 만족하시겠어요?”
소리를 너무 질러 목이 갈라져 가는 단장에게 캔커피를 건네면서 감독이 본인의 속내를 드러낸다.
“보내다니요? 잡아서 키워야지요. 그놈 야구를 어디서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린애가 더 좋은 선수가 되겠다는 의지도 독기도 없어요. 그래서는 지금 실력을 유지하는 건 고사하고 얼마 못 가 사라집니다.”
감독이 여전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의 단장을 향해 계속 설명을 이어 간다.
“2군에서 자기가 왜 야구를 해야 하는지 깨우치고 와야 합니다. 이건 단장님이 아니라 누가 와도 도와줄 수 없는 거예요. 시간이 얼마 걸리든 그놈 스스로 깨치고 나와야 합니다.”
캔커피를 원샷 하고는 주먹을 꽉 쥐어 캔을 구겨버린 단장이 감독을 노려보며 약속을 한다.
“제가 책임지고 그놈에게 야구 해야 하는 의미를 심어놓겠어요. 그땐 감독님도 이런 식으로 선수를 색안경 끼고 보시면 안 됩니다! 선수에 편견을 가진 감독이랑 같이 일할 수는 없어요.”
찬바람이 쌩쌩 부는 단장을 바라보며 감독이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짓는다.
“단장님. 2군에서는 최강훈이를 올리려고 하는데 조치해 주세요. 그리고 기자들에게 김소전 2군으로 내려간 이유는 컨디션 조절…….”
“컨디션 조절은 무슨 컨디션 조절이에요! 1군에서 싸울 준비가 안 돼서 감독이 내려보냈다고 보도 자료 낼 테니까 내일 신문 보세요! 흥!”
단장이 보도 자료를 낸다는 소리에 내일 시합 전 기자들과의 만남을 어째야 하나 감독의 머리가 복잡해진다.
* * *
잠실야구장 앞 커피숍에 모자를 눌러쓴 남녀가 비밀리에 만남을 주선했다.
“단장님이 시즌 중에 웬일? 나한테는 구단 운영에 간섭하지 말라고 하고선… 왜 불렀어요?”
펑퍼짐한 벙거지임에도 모자가 작아 보이는 마술을 부리는 남자가 야구 모자 캡만으로도 얼굴 전체가 가려지는 여자에게 기분 나쁜 톤으로 말을 건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여자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도도하게 입을 뗀다.
“됐고. 도와줘요.”
“어이구, 단장님 입에서 도와달라는 말이 다 나오네. 구단주는 돈만 내놓고 입도 뻥끗하지 말라더니. 몇 달 됐다고 이리됐어요?”
계속되는 구단주의 빈정거림에 조수아 단장은 오른쪽 주먹을 꽉 쥐었지만 주변의 보는 눈을 의식하고는 곧바로 주먹을 풀었다.
“너님이 친 사고니 최소한의 사람 도리는 합시다. 김소전 자료, 따로 가지고 있죠? 내놔요.”
“어디까지?”
“전부다.”
“전부다? 개인 정보도 있는데? 이거까지 단장님이 알면 단장님도 현행법 위반이야.”
“뒷조사가 불법인 건 알고? 알았으니까 내놔요. 전부다.”
“흠…….”
단장의 요청에 구단주가 흔쾌히 수락하지 않고 애를 태운다.
“왜 그래요? 내 메일 주소 몰라요? 이제 치매도 왔어요? 내가 적어 줘요?”
“치매는 무슨. 내가 지금도 공무원들 뇌물 준 거 횟수 하고 액수까지 다 기억하고 다니는데 그런 소리를…….”
“자랑이다.”
“자랑이지, 그럼…….”
“헛소리 그만하고 자료 내놔요.”
“주는 건 문제가 아닌데…….”
“문제가 아니면 그냥 좀 줘요. 지금도 충분히 피곤하니까 서로 신경 긁는 짓은 삼갑시다.”
“신경은 지가 긁으면서…….”
“뭐라고요!”
조수아 단장이 기를 끌어올리자 잔뜩 쫄아버린 구단주가 태블릿을 꺼내 건넨다.
“보고 결정하지? 이거 잘못 건드리면 애 그대로 무너질지도 몰라.”
태블릿을 받아든 단장이 이리저리 돌려보다 한숨을 푹 내쉰다.
“취향이 촉수물이었어? 날짜가… 어제 나온 신작도 있네?”
“야, 너 뭘 보는 거야!”
사람 많은 커피숍에서 벌떡 일어난 남자가 여자가 들고 있는 태블릿을 뺏어서는 땀까지 흘려 가며 이리저리 만져댄다.
“이, 이거. 이거 보라고. 이게 김소전 파일이야.”
“거 좋은 건 같이 돌려보자니까 꼭 혼자보고 말이야.”
“무, 무슨 소리야. 나… 그, 그 뭐냐……. 그… 관절 로봇……. 그거. 그래, 그거 관련 영상 찾아본 거야……. 관절 로봇.”
앞에서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는 멍청이를 두고 조수아 단장이 김소전에 대한 자료에 빠져들었다.
한참 동안 태블릿을 뚫어지라 바라보다 눈가가 붉어진 단장이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관절의 구조를 설명하던 멍청이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거 사실인가요?”
“당연하지.”
“누가 조사한 거예요?”
“대한 그룹 비서실. 그리고 내가 따로 사설탐정들한테 교차 검증했지.”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얘 트레이드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아니, 나도 몰랐어. 진짜야. 난 얘 유소년 기록이랑 병원 기록 해킹한 자료, 그거 보고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지른 거야.”
병원 기록을 해킹했다는 말에 단장이 잠시 어질어질하는 듯했지만 이런 X소리가 한두 번도 아니고 금세 정신을 차린다.
“그럼 이런 사생활은 왜 캤어요? 전임 단장이 선수들 사생활 보호가 철칙이라고 입에 달고 살았는데, 왜 그랬어요!”
랩터스의 전임 단장이자 현직 구단주가 입이 댓발 나와서 혼자 중얼거리다 조수아 단장의 차가운 표정을 보고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낸다.
“보통은 선수를 이 정도로 파지 않는다고. 이게 다 단장님이 쟤 왜 뽑아 왔냐고 욕을 해서 이만큼 찾은 거야. 나도 어떻게든 얘 써먹을 방법은 찾아봐야 할 거 아니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목소리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구단주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던 단장이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사무적인 목소리를 낸다.
“대책은?”
“대책?”
“이 정도 준비했으면 대책을 생각했을 거 아니에요. 내놔요, 어서.”
“와. 이 사람 인성 보소. 강도도 이런 식으로는 안 하겠네. 단장님, 내가 이런 거 하라고 단장님 월급 주는 거예요. 몰라요? 내가 구단주, 단장님은 월급쟁이.”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대책이나 빨리 내놔봐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진짜로 현기증이 나는지 커피를 쭉 들이켜는 단장을 보면서 구단주가 한숨을 푹 내쉰다.
“이거 진짜……. 내가 하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진짜, 재주는 내가 부리고 단장님은 숟가락만 올리고. 못 해먹겠네.”
“너님이 했다고 소문내줄 테니까 빨리 방법을 나불대봐요.”
뻔뻔한 단장에게 더 이상 대항하기를 포기한 패잔병이 자기가 구상한 대책을 풀어놓는다.
“있는 자원을 활용해야지.”
“있는 자원?”
“…….”
“고작?”
“고작이라니! 그게 최선이야. 내가 못하는 건 외주. 이게 경영의 기본이라고.”
조수아 단장이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긴다. 앞에 있는 구단주가 음료를 다 먹다 못해 우걱우걱 얼음을 깨 먹는 소리가 들릴 때쯤 번쩍 눈을 뜬다.
“그런데 혹시 그 태블릿에 내 자료도 있어요?”
“응? 조수아 자료? 있긴 한데, 조수아 별로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잖아. 모태 솔로에 철벽녀라는 거 정도? 아 중2 때 교회 오빠한테 고백했다 차인 것 정도는 있지. 그때 손 편지 구하느라 힘들었다.”
한밤중 잠실의 한 커피숍 안에 손님들은 TV에서나 보던 얼음 싸대기를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