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억 FA선수가 되다-10화 (10/204)
  • 10화. 선발 출장

    * * *

    광주에서 루징을 기록하고 올라온 랩터스 선수들이 월요일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이른 아침부터 구단 주요 인사들이 초췌한 얼굴로 회의실에 모였다.

    “그래서요?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단장의 날카로운 질문에 회의 소집을 요청한 전력 분석팀이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답을 했다.

    “모르겠습니다.”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요? 뭐라도 결과가 있어야지, 사람들 불러 놓고 무작정 모른다니요.”

    “그간의 경과부터 설명 드리겠습니다.”

    전력 분석팀이 그동안 분석한 단 한 선수의 엽기적인 데이터를 늘어놓고 분석 결과를 발표한다.

    “김소전 선수,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우승 후 슬랩 부상으로 수술하였고 3학년 1학기에는 투수에서 야수로 외야수 전향을 하였습니다. 재활이 안 끝난 상황에서 출전한 대회에서 1번 타자 중견수로 팀을 우승시키고, 2학기 때 유격수로 나섰으나 예선 탈락하였습니다.”

    “자꾸 전국 대회 우승 얘기가 나오는데, 그거 단기 토너먼트에 국가 대표 다 빠진 대회에서 우승한 거 아닙니까? 애초에 국가 대표 뽑히지도 못한 선수였어요.”

    전력 분석팀의 선수 설명을 듣던 투수 코치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딴지를 걸어본다.

    “맞습니다. 김소전의 백두고가 우승할 때 보면 상대 팀들이 죄다 정상 전력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김소전 선수가 국가대표에 안 뽑힌 것도 맞고요. 그런데 안 뽑힌 이유를 살펴보면…….”

    “됐고. 안 뽑힐 만했으니까 안 뽑혔겠지. 본론으로 갑시다.”

    투수 코치가 계속 심드렁한 표정으로 전력 분석팀을 갈군다.

    “그……. 네……. 제한적이지만 고등학교 때 데이터, 그리고 2군에서 체크한 데이터, 마지막으로 1군에서 체크한 데이터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봤을 때…….”

    “그러니까 투수시키자는 거 아니야?”

    “꼭 투수로 컨버전을 해야 한다는 건 아니고 그만한 자질은 가지고 있다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회의장에 적막감이 감돈다. 데이터를 뽑는 전력 분석팀 말고는 아무도 이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강 과장. 내가 강 과장을 이해 안 하려고 하는 게 아니야. 나도 강 과장만큼은 아니지만 공부하고 있다고.”

    “정 코치님께서 세이버 매트릭스에 정통하신 건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숫자로 아무리 진실을 가리려고 해도 말이지, 현장에서 보는 눈을 속일 수는 없어. 숫자가 다가 아니라고. 김소전이 타격과 송구? 그래, 내가 투수 파트니까 타격은 얘기 안 할게. 송구만 봐도 못 고쳐.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투수 코치의 단언에 전력 분석팀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뜻을 표한다.

    “코치님. 저도 야구장밥 먹는 사람인데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숫자가 거짓말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저희가 병원 기록, 재활 일지 다 확인했습니다. 2군 검사 결과가 말이 안 돼서 저희가 따로 전신 스캔만 두 번을 더했습니다.”

    말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분석 자료를 추가로 더 돌린다.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됩니다. 이 선수는 타고났어요.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본인이 태업하고 있는 겁니다.”

    1년 차 신인 야수가 내외야를 오가며 땜빵을 하고 있는데 태업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봐, 강 과장. 그런 얘기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자네 경기장 안 와봤나? 김소전 훈련하는 거 보고 얘기를 해. 그거 너무 무책임한 말인 거 모르나?”

    자기 새끼가 태업을 한다는 말을 들은 감독이 직접 나서서 선을 긋는다.

    매일매일 같은 루틴으로 얼리 워크부터 마무리 특타까지 소화하는 선수를 바라보는 감독으로서는 참을 수가 없는 말이다.

    “김소전 선수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지금 생활 태도를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이 선수, 본인 능력에 한참 못 미치게 한계를 정하고 절대 그 선을 넘어가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감독의 눈빛을 마주 보는 전력팀 과장이 확신에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로 말을 이어 간다.

    “선수에게 물어봐도 그게 자기 최선이라고만 할 뿐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회의를 요청드린 겁니다. 이 정도로 선수가 저희에게 비협조적이면 저희는 선수 성장 프로그램을 작성할 수가 없습니다.”

    회의를 지켜보는 단장이 애꿎은 입술을 깨문다.

    메이저리그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만한 선수 발굴과 육성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자부한 랩터스에서 저런 재능을 찾지 못한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데 선수 관리까지 못하겠다는 소리가 나오자 머리가 복잡해진다.

    조수아 단장이 정말 하기 싫었던 방법. 그 방법을 써야 하나, 고심의 시간이 길어진다.

    * * *

    “휴식일인데도 일찍 나왔네? 너 그러다 금방 지친다. 프로는 길게 가야 해.”

    “예, 선배님. 새겨듣겠습니다.”

    프로 14년 동안 정말 특별한 일이 없으면 단 한 번도 내 루틴을 어긴 적이 없었다. 더하면 더했지, 운동을 쉬어본 적이 없다.

    쉬는 날이건 정규 시즌이 끝났건 아침에 일어나 가볍게 속을 채우고 웨이트장으로 가 스트레칭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게 내 14년을 부상 없이 버틴 가장 큰 영업 비밀이다. 매일매일 꼼꼼히 정성스럽게 몸을 재정비하는 것. 가장 싸고 쉬운 방법이다.

    주변에 끙끙대는 소리를 들어가며 스트레칭에 열을 올린다. 젊은 몸이라서 그런가 늘리면 늘릴수록 쭉쭉 늘어나는 게 내 몸이지만 예뻐해 줄 만하다.

    역시 난 얼굴만 상타 치는 게 아니었어…….

    거울을 보며 우월한 기럭지에 감탄을 하고 있는데 거울을 통해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감독님 오셨습니까.”

    안 그래도 선배들 사이에서 운동하려니 눈치도 좀 보이고 그러는데 감독님까지 오시고 그래. 쉬는 날까지 좀 불편하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그래도 감독이 왔는데 인사를 해야 했기에 선배들 인사할 때 쪼르르 달려가 인사를 했다.

    편한 운동복을 입고 온 감독이 기특하게 바라보며 관심을 표한다.

    “이 시간엔 재활하는 선수들이 오는 시간인데 열심히구나. 훈련할 때 불편한 건 없고?”

    불편한 건… 너님이 오신 거요.

    “없습니다.”

    신인 선수가 씩씩하게 대답을 하자 감독이 더욱 애정 넘치는 표정을 짓는다.

    “고놈. 말도 참 예쁘게 하네. 오늘 내가 운동하는 거 한번 봐줄까? 허허. 내가 아무나 봐주지 않아. 허허.”

    왜, 왜 그러시죠……. 저 혼자서도 잘할 수 있는데…….

    “헉… 헉……. 헉…….”

    “이놈 더 할 수 있어! 하나. 마지막 하나만 더하자!”

    “헉… 헉. 감독, 감독님. 세트 끝났습니다. 끝… 끝이에요.”

    “중량이 가벼워. 힘이 남잖아. 이러면 운동해 봐야 소용없어.”

    “아닙니다. 휴, 휴……. 자극은 충분합니다. 그리고 지구력 향상과 관절을 위해서 저중량을 오래 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놈. 내가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 지금 당장 무게 두 배로 늘려도 지금 횟수 할 수 있지? 일부러 안 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 누굴 속여.”

    무게를 두 배? 이 사람이 노망이 나셨나 뭔 소리야?

    “감독님.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것저것 다해 보고 찾은 최선입니다.”

    “1년 차가 무슨 이것저것 다해 봤다고. 내가 트레이너 시켜서 훈련 스케줄 다시 짜줄 테니까 보고 얘기하자. 어디서 배웠길래 운동을 하다 말어. 쯧쯧.”

    저, 저기요. 제가 이 짓을 프로에서만 14년 했거든요?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안다고요!

    그나저나, 오늘은 운동량 초과다. 인사를 괜히 해가지고…….

    * * *

    - 잠실에서 펼쳐지는 서울 랩터스와 대전 재규어스의 시즌 7차전 경기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오늘 랩터스 엔트리에 변화가 있습니다.

    - 랩터스가 5위로 떨어지자 양상도 감독이 타선에 변화를 주었어요. 9번을 치던 민수경을 1번으로 올리고 박재호와 라정안을 한 타순씩 내렸거든요. 그러면서 3번을 치고 있던 해리스 선수를 7번으로 내렸어요. 이게 어떤 결과를 내줄지 궁금하네요.

    - 오늘 9번 타자에 중견수로 김소전 선수가 선발 출전합니다. 시즌 첫 선발입니다.

    - 안영진 선수 타격감이 워낙 안 좋아서 양상도 감독이 김소전 선수를 실험하네요. 수비는 검증이 되고 있는데 타석에선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되네요.

    얼마 만에 나가는 선발 출전인가. 경기 시작부터 전광판에 새겨진 내 이름을 보니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컨디션도 좋으니 오늘 내가 어떤 선순지 보여주마.

    1회 초. 재규어스의 공격.

    정신이 없다. 중견수가 외야수 중에 공을 가장 많이 만지는 자리라고는 하지만 내가 내야수도 아니고 뭔 공이 이리 미친 듯이 날아와.

    1회부터 재규어스의 타선이 터졌다. 타선을 한 바퀴 돌고도 끝나지 않는 공격. 랩터스의 선발 투수가 6점을 주고도 막지 못해 마운드를 내려가고 나서야 이닝이 끝났다.

    1회부터 터져버린 경기. 선수들의 의욕이 꺾였다.

    지난 시즌 우승 팀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침울한 분위기가 덕아웃을 감싼다.

    이런 분위기에 너무 익숙하다. 이러다 보통 팀이 암흑기에 빠져들 텐데…….

    1회부터 털린 경기는 계속해서 끌려만 다닌다.

    8 대 0. 3회 초 재규어스의 공격이 끝났을 때 점수는 8점 차로 벌어졌다. 6이닝이나 남았는데 벌써 경기가 재미없어졌다.

    3회 말 2사 주자 없는 상황에 랩터스의 신인 선수가 타석에 나오자 응원단장이 목이 터져라 이름을 부른다. 응원단장이 선수를 울부짖으나 말거나 관중들은 치킨만 뜯을 뿐 야구장에 눈길도 주지 않는다. 한쪽은 야구, 한쪽은 먹방. 분명 같은 공간인데 서로 다른 시간이 흐른다.

    “투수 구위가 좋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치고 나가. 지금 못 친다고 뭐라 할 사람 없으니까 부담 없이 휘두르고 와.”

    “예, 코치님.”

    선발로 첫 출전하는 어린 타자에게 타격 코치가 부담감을 줄여주려고 격려를 해준다.

    코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타자가 올라간 입꼬리를 숨기지 못하고 타석에 들어선다.

    14년 통산 2할 4푼. 홈런 9개. 별 볼 일 없는 타격 기록. 대부분의 경우 내야를 못 넘기고 땅볼만 쳐대는 선수였지만 언제나 그랬던 건 아니다.

    사람이라는 게 누구나 자기한테 맞는 옷이 있고 안 맞는 옷이 있다.

    나 같은 경우에 대부분의 옷이 내 멋진 기럭지를 커버하지 못하고 혐짤을 만들어 내기는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탱크탑에 망사스타킹같이 나랑 딱 맞는 옷이 있기도… 아니, 이게 아니고.

    어쨌든, 내가 대부분의 투수와 상성이 좋지 않지만 극히 일부, 극히 일부의 투수들에 한해서 내 스윙 궤도와 투수의 투구 궤적이 일치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저 선수. 재규어스의 에이스 고병석을 상대로는 내가 배리 본즈다.

    - 김소전 선수 타석에 들어섭니다. 타석에서 번트 자세를 취하는데요. 2사 주자 없거든요. 이 자세 논란이 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 안 그래도 제가 양상도 감독에게 물어봤거든요. 김소전 선수 준비 자세가 원래 저렇답니다. 저 자세가 본인이 가장 편안해 한다고 합니다.

    - 독특하네요. 저자세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 극단적으로 짧게 끊어치겠다는 자세거든요. 안 그래도 고등학교 때 타격 폼도 확인해 봤었는데요.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타격 폼은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선택했다고 하는데 코칭 스테프 측에서 교정을 해줬어야 한다고 봅니다. 애초에 어린 선수가 저런 자세를 취하면 안 돼요.

    어디 안티팬이라도 생겼나. 내가 타석에만 나오면 자꾸 귀가 간지럽다.

    타석에 들어서서 투수를 바라보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표정 관리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짓다 보니 포수가 갈구기 시작한다.

    “어린 눔의 시키가 쪼개냐?”

    “헤헤. 대투수님 공을 보려니 가슴이 벅차서요.”

    쪼그려 앉아 있느라 힘들어 보이는 포수님을 향해 너스레를 한번 떨어주자 기분이 좋아진 포수가 깜짝 공약을 내건다.

    “그렇지. 우리 병석이 공이 좀 좋아. 스코어도 벌어지고 했으니 기분이다. 가운데 살살 하나 넣어줄 테니까 잘 쳐봐.”

    “감사합니다, 선배님.”

    승부만 해줘도 감사할 텐데 가운데 살살이라니. 포수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포수의 사인을 확인한 투수가 나를 귀여운 강아지 보듯 바라본다.

    크게 팔을 들어 올리면서 시작되는 와인드업.

    교과서에 나올 만한 투구 폼은 이거라는 걸 알려 주듯 멋들어지게 투구를 이어 나간다.

    하나, 둘, 셋.

    나랑 워낙에 상성이 좋은 투수라 타격감이 안 좋을 때면 고병석에게 홈런 쳤던 기억을 100만 번은 더 떠올리곤 했다.

    깨끗한 투구 폼. 앞발 키킹이 시작되면서 하나, 둘, 셋을 세고 배트에 시동을 건다.

    150에 가까운 빠른 공을 타자가 홈플레이트 앞에 세워놓고 위로 퍼 올린다.

    공을 때린 타자보다 공을 던진 투수의 얼굴이 먼저 일그러진다.

    잠실야구장 우측 펜스를 향해 날아가는 공. 잠실야구장의 가장 짧은 우측 펜스를 살짝 넘어갔다.

    - 김소전. 쳤습니다. 어디까지, 어디까지… 담장! 담장! 넘어갑니다. 김소전! 첫 타석에 자신의 첫 홈런을 뽑아냅니다.

    - 잘 맞기도 했는데 바람까지 도와주네요. 어린 선수가 잘 쳤습니다.

    맞는 순간 잘 맞은 건 알았다. 최소 2루타. 2루까지 빨리 가보고 할 수 있으면 더 가자는 심정으로 때리자마자 전력 질주를 시작했다.

    1루를 밟으려는데 들리는 환호성. 1루 베이스 코치가 달리는 내 엉덩이를 있는 힘껏 때려준다.

    - 느린 화면 다시 보시죠. 테이크 백이라고 하죠. 장전하는 동작 없이 배트를 바로 돌렸는데 홈런이 나왔습니다.

    - 지금 보시면 임팩트 순간에 손목을 사용해서 들어 올리거든요. 사실상 홈런을 손목 힘만으로 만들어 냈다고 볼 수도 있어요. 19살 어린 선수가 19년 차 같은 기술을 선보였어요.

    - 그렇습니다. 마지막에 살짝 드는 듯한 동작이 있습니다.

    - 타격 자세로만 보면 단점이 많은 자세입니다. 힘을 모으는 동작도 없고 공을 때리고 난 후에 배트를 끝까지 밀어주는 동작도 부족합니다만 공을 맞히고 힘을 전달하는 능력은 굉장하네요.

    - 어린 선수니까 발전할 수 있겠습니다.

    - 수비만 좋은 줄 알았는데 좋은 컨택 능력을 갖추고 있네요. 랩터스에 좋은 선수가 나타났습니다.

    지난 생에 첫 홈런은 군대에 다녀온 이후에야 나왔는데. 1년에 한 개도 칠까 말까 한 내가 1년 차에 게다가 아직 5월인데 첫 홈런이 나왔다.

    온몸에 짜릿한 전율을 느끼며 베이스를 질주했다. 그라운드를 멈춰놓고 이 시간을 즐겨야 하는데 터져 나오는 아드레날린을 이기지 못하고 전력으로 다이아몬드를 돌았다.

    눈앞에 나타난 홈플레이트. 홈플레이트를 밟으며 지난 생에 FA를 못해본 한을 풀기 위해 하늘에 네모난 돈다발을 그려 넣었다.

    홈플레이트를 밟고 나자 다시 흐르는 경기. 이 느낌 이번 생엔 10번만 가져 보고 싶다. 10번만.

    전광판에 새겨지는 숫자 8 대 1. 랩터스의 선취점을 뽑아낸 타자가 위풍당당 덕아웃에 들어오고 있지만 단 한 사람도 쳐다보지 않는다.

    내가 야구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훗.

    안 그래도 큰 점수 차에 처져 있던 덕아웃인데 이렇게 조용하면 안 될 일. 내가 먼저 선배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홈런! 홈런! 헤헤! 홈런! 홈런!”

    어? 이래도 모른 척해? 그럼 맞아야지.

    퍽퍽퍽.

    “홈런! 홈런!”

    퍽퍽퍽.

    “홈런! 홈런!”

    꼼짝도 안 하는 선배들에게 구타를 가하기 시작하자 그제야 선배들이 반응을 한다.

    “홈런 치고 때리는 놈은 네가 처음이다!”

    퍽퍽!

    “첫 홈런이면 모르는 척해야지!”

    퍽퍽!

    “축하해! 축하해!”

    퍽퍽!

    “아프잖아! 너도 죽어봐라!”

    퍽퍽퍽!

    “선배를 때려? 이놈이! 축하빵이다!”

    이, 이 XX들. 야구 선수야, 권투 선수야? 손이 뭐 이렇게 매워!

    “서, 선배님……. 살려주세요. 아, 악……. 뼈, 뼈. 아… 악!”

    “넌 다 뼈야. 때릴 때가 뼈밖에 없어. 퍽퍽!”

    “으아악. 살려주세요!”

    KBO에서 공식적으로 용인되는 구타와 함께 처져 있던 덕아웃 분위기가 확 살아난다.

    어두웠던 선수들의 표정이 밝아지고 선수들의 눈에 후배에게 질 수 없다는 투쟁심이 올라온다.

    모두가 해보자는 의욕을 끌어 올리고 있을 때 랩터스의 젊은 선수 하나가 조용히 락커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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