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억 FA선수가 되다-9화 (9/204)
  • 9화. 데뷔 타석

    * * *

    랩터스의 신인 선수가 나름 꾸준히 경기에 출장한다.

    대주자, 대수비로 한정되어 나가고 있긴 하지만 우선 경기에 나간다는 게 중요하다. 1군 엔트리, 경기 출장. 한 번 한 번이 매우 소중하다.

    - 9회 초 수비. 유격수에 김소전 선수 들어갑니다. 9회 초 공격에 박재호 선수가 몸에 맞아서 교체된 것으로 보입니다. 김소전 선수는 지금까지 외야와 1루수로 나왔거든요. 이번엔 유격수로 나왔습니다.

    - 양상도 감독이 수비는 지금도 리그 탑급이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오늘 유격수로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기대가 되네요.

    - 그러고 보면 김소전 선수, 아직까지 타석에 한 번도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혹시 이 부분도 감독님과 이야기하신 게 있습니까?

    - 양상도 감독이 선수 평가에 냉정하신 분이거든요. 감독님 워딩 그대로 전하면 ‘본인이랑 전혀 안 맞는 타격을 하고 있다’라고 합니다. 실제 경기 전 타격 훈련을 봐도 프로 레벨에는 좀 부족해 보입니다.

    어떤 놈들이 내 욕을 하나, 갑자기 왜 귀가 간지럽지?

    중견수 3경기, 1루수 2경기, 도합 8이닝 동안 수비를 나왔지만 진짜 내야 수비는 처음 들어오니 살짝 긴장감이 올라온다.

    나이 먹고는 가뜩이나 송구도 안 좋은데 반응 속도도 떨어져서 주로 1루만 봤는데. 유격수라……. 새롭다.

    스코어 2 대 5. 선발 투수가 7이닝을 던지고 승리조가 1이닝을 막아 주고 마무리가 올라온 경기.

    3점 차, 가장 편안한 세이브 상황. 기본에 충실하게 편안하게 끝내야 하는 경기다.

    9회 초 워호스의 선두 타자가 초구.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에 성공한다. 제구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마무리 박요훈이 영점을 못 잡는 투수는 아닌데…….

    주자가 1루에 나갔지만 랩터스는 적극적으로 더블 플레이를 노리는 수비가 아닌 아웃카운트를 차곡차곡 늘리겠다는 정상 수비를 유지한다.

    3점 차인데 괜히 주자 쌓을 필요도 없지. 3루 수비도 탄탄하니 조금 깊게 자리를 잡아보자.

    나 혼자 짱구를 돌리지만 허무한 스트레이트 볼넷. 주자가 순식간에 두 명으로 불어난다.

    투수 코치가 마운드에 올라오는 동안 2루로 걸어들어온 선배한테 인사를 꾸벅하면서 친목을 도모한다.

    “안녕하십니까.”

    “어, 그래. 네가 야구를 X같이 한다는 김소전이구나.”

    아… 다들 나만 보면 왜 저런 반응이지? 내가 뭘 어쨌다고……. 진짜…….

    “아닙니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리가 들리면 너 잘하고 있다는 거야. 자주 보겠네. 살살하자, 살살.”

    살살은 무슨.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말고 살살하라고. 최강훈이가 너 잘 부탁한다더라. 그놈이 그런 얘기 잘 하는 놈이 아닌데. 조심해라.”

    응? 조심하라고? 잘 부탁한다면서 조심하라고?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김소전! 집중해!”

    3루에서 고함이 울려 퍼진다.

    투수 코치 언제 내려갔어? 최강훈… 최강훈……. 그놈이 이 타이밍에 왜 나오지?

    투수 코치가 내려가고 정리된 마운드. 3루 쪽 원정 관중석에서 우렁찬 응원가가 울려 퍼진다.

    오늘따라 제구가 영 꽝인 마무리가 신중하게 투수와의 사인을 교환한다. 한참 동안 사인을 교환한 투수가 심호흡을 크게 한다.

    등 뒤에 주자 둘을 놓고 벌이는 승부. 제구가 불안한 투수가 정교한 제구를 포기하고 가운데 밀어 넣는다.

    한가운데 깨끗하게 들어오는 직구. 존을 바짝 좁히고 있던 타자가 있는 힘껏 배트를 돌린다.

    훨훨 날아가는 타구가 담장을 넘어간다. 스코어 5 대 5. 1루 쪽 랩터스 응원석엔 적막만이 흐른다.

    시즌 두 번째 블론을 저지른 마무리가 정신 못 차리고 스트레이트 볼넷을 하나 더 내준 뒤 마운드를 내려오자 줄줄이 나온 추격조가 2점을 더 주고 9회 초가 끝났다.

    팀의 뒷심이 부족한 게 계속 마음에 걸리네…….

    9회 말 공격. 잠깐, 이러면 나도 타석에 나가야 하는데?

    - 9회에 역전을 허용한 랩터스의 마지막 공격. 선두타자 9번 민수경 선수부터 시작됩니다.

    민수경이 타석에 들어선 가운데 배트를 들고 웨이팅 서클에 들어갔다.

    타격 연습을 안 한 것도 아닌데 오랜만에 들어가는 타석이라 생각하니 몸에 긴장감이 확 끼친다.

    편안하게… 편안하게……. 후. 후.

    역전을 당했다고 포기하지 않는 민수경이 끈질긴 승부를 펼치며 우익수 앞에 안타를 만들어내고 1루 출루에 성공한다.

    9회 말, 7 대 5에 무사 주자 1루. 신인 선수 김소전이 역사적인 첫 타석에 들어선다.

    - 김소전 선수 데뷔 첫 타석입니다. 수비와 주루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김소전 선수의 타격이 기대가 됩니다.

    역전을 당하고 집에 가려고 엉덩이를 떼던 관중들이 민수경의 안타에 다시 엉덩이를 반쯤 내려 붙였다.

    기회를 잡은 응원단장이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돈질의 랩터스’ 응원가를 개사해서 김소전을 위해 노래를 부른다.

    “우리는 돈질로 선수를 지르지~”

    “우리는 돈질로 승리를 지르지~”

    “우리는 돈질로 소전을 지르지~”

    “우리는 돈질로 우승을 지르지~”

    이거 존못의 박스로 불리는 구단주가 공식적으로 금지곡으로 정한 노랜데 응원단장이 경기장을 떠나는 팬들을 끌어 앉히기 위해 중간에 단어 하나만 바꿔 부르는 무리수를 저질렀다.

    안 그래도 비싼 투수 둘 팔아서 선풍기하고 종이 인형 백업을 데려왔다고 팬들의 심기가 불편한데 이 노래까지 틀어버리니 관중석이 불타오른다.

    “존못은 돈질로 안티를 모으지~”

    “박스는 돈질로 먹튀를 지르지~”

    “존못은 돈질로 악플을 모으지~”

    “박스는 돈질로 소송을 지르지~”

    이 노래를 유튜브에서나 봤지 경기장에선 처음 들었다.

    듣고 보니 웅장한데 이게 나한테 하는 얘기인 걸 알고 들으니 빡 치고 기분이 더럽다.

    2점 차 무사 주자 1루. 타석에 들어선 신인 타자가 번트 자세를 취한다.

    지들끼리 신나 응원가를 부르다 합죽이가 된 관중석. 경기장이 고요해진다.

    - 김소전 선수, 번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2점 차에 번트. 랩터스의 의도가 궁금합니다.

    - 지금 2점 차거든요. 아웃카운트를 아껴야 하는데 양상도 감독이 왜 이런 작전을 냈을까요?

    3루에서 히팅 사인이 나오거나 말거나 번트 자세를 취하는 타자. 3루수가 찜찜해 하면서도 잔디 위로 전진해서 들어온다.

    두 번째 데뷔하고 처음으로 만나는 투수의 공. 프로 선수 가오가 있지, 초구는 휘둘러야지.

    신인 선수의 번트 모션을 보고 투수가 대주겠다는 생각으로 가운데 찔러넣는다. 한 점 차도 아니고 두 점 차인데 2루와 아웃카운트 교환에 전혀 망설임이 없다.

    145쯤 되는 직구가 살짝 낮게 깔려온다. 이런 공은 번트 대기가 더 어렵지만 난 지금 이걸 때릴 생각이다.

    주자가 타격을 끝까지 지켜보는 가운데 타자가 번트 모션을 풀고 짧은 스윙으로 공을 건드린다.

    3루 라인을 벗어나는 파울.

    아……. 실전이 워낙 오랜만이라 타이밍이 늦네. 이건 쳤어야 하는데.

    내가 못 쳐서 자책을 하고 있는 사이, 신인 선수의 페이크 번트에 뚜껑이 열린 투수가 마운드에서 레이저를 쏘아낸다.

    왜? 맞히기라도 하시게?

    볼카운트 0-1에서 다시 번트 모션을 취하는 타자. 투수가 이번엔 눈앞으로 150짜리 돌덩이를 집어 던진다.

    너흰 몰랐겠지만 지난 생에 내가 번트 깎는 장인이었거든요. 이런 거 못 대면 내가 14년이나 이 바닥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 거 같아요?

    1루와 투수 사이에 또르르 굴러가는 타구. 투수가 공을 잡았지만 2루에는 많이 늦었고 1루에 던져 보려고 하지만 절묘한 위치에 떨어진 타구가 타자 주자를 살렸다.

    헉헉, 죽을 뻔했네. 조금 더 길게 당겼어야 했는데. 확실히 실전 감각이 떨어져서 그런지 조금 짧았다. 경기 출장이 중요하다. 자주 나와야 해, 자주.

    - 랩터스 절묘한 번트로 주자를 두 명으로 늘려놓습니다.

    - 보내기 번트 사인이 나왔는지 세이프티 번트 사인이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김소전 선수, 번트 정말 잘 댔습니다. 1루수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댔어요. 좋은 플레이였습니다.

    무사 주자 1, 2루. 타석에는 중견수 안영진이 들어 왔다. 2점 차 동점 주자까지 나가 있는 상태. 타자가 장갑을 고쳐 끼고 마음을 다잡는다.

    방금 랩터스의 마무리가 털리는 걸 눈으로 본 워호스가 발 빠르게 투수를 교체한다.

    바뀐 투수와의 첫 만남. 타자가 초구부터 빠르게 승부를 가져간다.

    - 잘 맞은 타구 유격수, 유격수. 6-4-3. 6-4-3으로 이어지는 병살타. 무사 주자 1, 2루에서 2사 주자 3루로 바뀝니다.

    - 아쉽네요. 빠지는 볼이었거든요. 타자 성급했네요. 타이밍이 늦었어요. 안영진 선수 타격감이 좋지 않네요.

    돌아오려던 경기의 흐름이 끊겼음을 관중들이 먼저 알아챘다. 탄식이 쏟아지는 관중석. 병살을 치고 들어가는 타자가 고개를 숙이고 힘없이 덕아웃으로 향한다.

    들어가는 타자에 눈길도 안 주는 감독. 1루 주자도 눈치를 살피며 재빨리 덕아웃으로 숨어든다.

    다음 타자의 1루수 플라이로 경기가 끝나고 다들 말없이 숙소로 향했다.

    * * *

    광주의 랩터스 숙소. 어두컴컴한 주차장에 한 선수가 끝도 없이 배트를 돌린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기 힘든 주차장 구석. 얼굴에 구슬땀을 쏟아내고 있는 선수가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후……. 훅……. 자주 전화한다.”

    - 선배님. 또 혼자 헛힘 쓰세요?

    거침 숨을 몰아쉬던 안영진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차분히 전화를 이어 간다.

    “나는 재능이 없으니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연습해 봐야 하지 않겠냐? 천재 후배님.”

    - 선배님. 또 말씀드려요? 선배님은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연습해 봐야 안 돼요. 빠따에는 재능이 없으시다니까요.

    “아, 우리 후배님이 빠따에 재능이 있으셔서 그렇게 애들을 패셨구나.”

    - 패다니요. 무슨 그런 큰일 날 소리를 하세요. 전 선배님이 애들 기합 좀 잡으라고 해서 애들 관리한 겁니다. 선배님이 시키셨잖아요.

    “XXX야. 동기를 패는 XX가 뭘 잘했다고 계속 나불대?”

    - 선배님. 우리 이 얘기는 그만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옛날 일 계속 꺼내지 마시죠. 피차 피곤하실 텐데.

    다시 한번 물을 마신 안영진이 전화기를 통해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오늘은 왜? 내가 못 치니까 점점 내 자리가 보이냐?”

    - 그 자리는 뭐……. 주전들 다쳐나가서 얻어걸린 주전은 그다지 매력 있진 않습니다만 주신다면 거절하진 않겠습니다.

    “내가 계속 얘기하는데, 실력으로 올라와. 대충한다고 1군에 올라올 수 있는 게 아니야.”

    - 선배님. 그건 제가 알아서 할 겁니다. 그거 말고 우리 좀 건설적인 얘기를 하면 안 되겠습니까?

    “건설적인 얘기?”

    - 김소전이 선배님보다 나은 거 같던데요? 오늘 경기보고 확신했습니다. 그 XX가 선배보다 나아요.

    후배의 말을 받아주던 안영진이 들고 있던 물병을 집어 던진다.

    물병을 집어 던지고 한동안 거친 숨만 내뱉던 안영진이 계속 통화를 이어간다.

    “사람 건들지 말고 하고 싶은 얘기만 해.”

    - 제가 김소전 팬을 한 명 찾았습니다. 의사인데, 영양제 몇 개 보낸다더라고요. 선배가 좀 전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해외에서 들어온 약인데, 피로 회복에 그렇게 좋다더라고요.

    “너 내가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 선배님. 제가 무슨 짓을 했다고요. 후배 사랑하는 팬이 마음으로 보내는 선물, 좀 전달해 달라는 게 무슨 그런 큰일이라고 그렇게 곡해를 하세요.

    “이 XX가 보자 보자 하니까.”

    - 선배님. 별거 아닙니다. 그냥 피로 회복젭니다, 피로 회복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안영진에게 최강훈이 방아쇠를 당겼다.

    - 선배님. 보름 후에 도핑위원회에서 랩터스 전수 조사 들어옵니다. 그전에 아무거나 한 번만 먹이면 됩니다. 물에 타든 밥에 넣든 한 번이면 끝이에요. 조수아 알죠? 이런 거 칼 같은 거. 뭐 신인이니까 몰랐다고 그러면 다른 팀 트레이드는 가능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후배의 헛소리가 길어질수록 선배의 부들거리는 손에 힘이 점점 더 들어간다.

    - 선배님이나 저나 굴러들어온 놈이 우리 자리 뽑아내는 거 눈뜨고 볼 수는 없잖아요. 내일 정환이 통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밤이 늦었는데 훈련 그만하시고 들어가서 주무십시오. 끊겠습니다.

    주차장에서 거친 고함 소리가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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