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후유증
관중들이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선명하게 들린다.
처음 듣는 것도 아닌데 들을 때마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다시 한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솟구쳐 오른다.
아직 경기 끝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날아와라. 내가 전부 다 잡아주겠다!
무사 1, 2루에서 1사 1, 2루로 바뀐 엘리펀트가 우타자를 빼고 좌타자를 대타로 낸다.
방금 큰 타구를 맞았음에도 수비 코치는 여전히 전진 수비를 주문하고 있고 좌타자가 나왔음에도 우익수 안영진은 자꾸 좌익수 쪽으로 붙으라고 손짓을 한다.
좌타잔데……. 좌타자가 끌어당기면 아무래도 우익수 방면 타구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내가 야구를 열심히 한 게 군대 갔다 와서부터라 그전까지 선수들은 유명한 선수들이나 데이터를 알지, 저런 미미한 선수들까지는 기억도 안 나는데……. 그래도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
몸은 좌익수 쪽에 가 있지만 마음은 자꾸 우익수로 향한다. 본능이다.
엘리펀트도 총력전을 벌이느라 지난 공격에 4번을 빼고 대주자를 냈던지라 9회 마지막 승부를 위해 좌타가 대타로 나왔고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가 연습 스윙부터 한 방 치겠다는 냄새를 풀풀 풍긴다.
큰 산을 넘은 투수가 남은 아웃카운트 두 개를 잡으러 씩씩하게 직구를 찔러넣고,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스윙을 휘두르는 타자.
개판이고만…….
긴장에 짓눌린 투수는 제구 따위 갖다버리고 그저 힘으로 윽박지르기만 하고, 정교한 컨택이 부족한 타자는 눈 감고 크게 휘두르기만 한다.
전적으로 타자가 배트에 공을 맞출 수 있냐 없냐의 싸움.
이런 건 결과를 아무도 모른다.
볼카운트 1-2에서 또다시 직구로 윽박지르는 투수. 한복판에 살짝 몰린 공이 타자의 배트에 스쳤다.
공 밑을 때린 타구가 내야와 외야 사이에 떴다. 순식간에 3명의 수비수가 버뮤다의 삼각 지대로 몰려든다.
XX. 아까부터 느낌이 사나웠어. 멀다, 멀어.
스피드라면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만한 외야수 둘이 미친 듯이 달려든다. 공을 뒤로 보고 쫓아가던 유격수가 더 이상 달려들기를 포기하고 중견수를 가리키며 콜을 한다.
“센터! 센터!”
유격수의 콜이 없어도 달려들었을 거지만 콜까지 들은 이상 무조건 내 거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전력 질주다.
- 높이 뜬 타구. 애매한 위치로 떨어집니다~
신은 날 버리지 않았다. 텍사스성으로 떨어지는 타구가 생각보다 조금 더 뻗어온다. 고급 기술을 보여줄 시간이다.
낙구 위치를 파악하고 왼발을 앞으로 밀면서 슬라이딩. 속도 거리 완벽하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안 다치는 수비는 리그 최강…이……. XX…….
- 안영진, 공을 잡았다 놓칩니다. 김소전 선수와 충돌. 공 뒤로 빠집니다. 두 선수 못 일어나는 가운데 엘리펀트 주자들, 홈으로 달립니다.
공을 보고 있는데 하늘에서 검은 물체가 날아들었다. 내 공을 하늘에서 가로챈 검은 물체는 떨어질 건 계산에 넣지 않았는지, 슬라이딩해 들어가는 내 위로 떨어졌다.
“으악!”
“윽…….”
내 위로 떨어진 미친놈을 걷어내고 공을 찾아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안 그래도 아까 2루에서 머리에 태그 당한 것도 어질어질했는데 이번엔 저놈 무릎에 찍힌 듯싶다.
“뒤로. 뒤로.”
저만치 뒤로 흐르는 공. 잡으러 가려는데 위에서 덮친 놈도 일어나려다 나를 잡아끈다.
“비켜!”
둘이서 일어나려고 두 번을 뒹구는 사이 백업하러 달려온 유격수가 간신히 공을 집어 든다.
- 박재호, 유격수 박재호가 공을 잡았습니다. 2루 주자 홈. 1루 주자도 3루를 통과. 홈까지. 타자 주자도 2루. 2루에 들어갑니다. 역전! 엘리펀츠 9회 초 재역전에 성공합니다!
허탈하다. 어떻게 만들어낸 점수였는데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삽질로 점수를 내줄 수가 있어. 속에서 뜨거운 김이 펄펄 끓어오른다.
“너 나 무시하냐! 백업하랬지!”
“유격수 콜이었잖아요!”
“저기 있는 콜이 들려? 들리겠냐고! 그럼 네가 콜을 해야지!”
“선배도 콜 안 했잖아요!”
“외야에서 내가 먼저라고! 수비 나가면 내가 1옵션이야!”
“중견수가 먼저지, 코너가 왜 먼저에요? 유격수 콜도 있고 제가 중견수였다고요!”
“너 지금 선배 가르치냐?”
“그런 게 아니잖아요.”
“경기 안 끝났어! 집중해!”
유격수 박재호의 고함을 듣고 나서야 외야의 설전이 끝났다. XX. 기분 더럽네.
박재호의 바람과는 다르게 한 번 넘어간 경기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15 대 14로 경기가 마무리되었다.
데뷔전부터 진 것도 억울한데 경기가 끝나자마자 수비 코치에게 끌려갔다. 우익수 멍청이와 함께…….
“너희 뭐 하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뭐. 할 말은 없다. 외야에서 콜 플레이 미스로 공을 놓쳤으니…….
“안영진이, 거기서 왜 들어왔어?”
“수비 들어갈 때부터 좌중간은 제가 잡기로 했습니다. 얘기 된 사항입니다.”
“김소전. 그럼 넌 왜 들어갔어?”
“유격수 콜이 있었습니다.”
“안영진. 콜 있었다는데?”
“못 들었습니다.”
“김소전 콜 안 했어?”
“전력 질주 중이었습니다. 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앞에 두 멍청이를 앞에 둔 수비 코치의 눈에 살기가 올라온다.
“내가 유치원 선생님이지? 내가 할 일이 없어서 너희 기초부터 떠먹여 줘야 하는 거지? 너희가 중학생이야, 고등학생이야! 프로가 외야에서 콜을 못해서 경기를 날려! 정신이 있는 놈들이야, 없는 놈들이야! 넌 짐 싸서 2군 가고, 안영진이 넌… 넌……. 하. 어째야 하냐…….”
“죄송합니다.”
뭐야? 난 2군 가라면서 쟤는 왜? 기분 더럽네.
“뭐야. 넌 왜 대답이 없어!”
어처구니없는 수비 코치의 지적에 벙쪄 있는데 옆에 있는 안영진이 쿡 찌른다.
“죄, 죄송합니다.”
뭔지도 모르고 무조건 죄송하다고 얘기하자 눈을 부라리던 수비 코치가 한숨을 푹 쉬고는 입을 연다.
“내가 너희 지켜볼 거야. 기본! 기본부터 지키면서 하란 말이야. 한번 지켜보겠어.”
코치가 지켜보겠다는 말을 하고 사라지고 나자 안영진이 편하게 말을 꺼낸다.
“괜찮아. 박 코치님 지켜보겠다는 거 그냥 꼬리말 같은 거야. 신경 쓰지 마.”
“네…….”
“아까 내가 콜 했어야 하는데, 미안하다.”
응? 갑자기 이런다고?
“아닙니다. 저도 콜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팀에서 항상 1옵션이라 신인을 배려 못 했다. 너도 이제 알았으니까 다음부턴 주변 보면서 플레이해. 신인 때 열심히 하려는 거 아는데, 그러다 다친다. 오늘도 둘 다 안 다쳤으니 다행이지. 프로가 몸이 재산인데 조심하자.”
자기도 앞뒤 안 보고 달려들었으면서.
그래도… 말이라도 고맙네.
“예, 선배님.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아… 잠깐. 그런데 나 2군 가는 거야? 안 가는 거야?
* * *
- 선배 오늘 큰일 날 뻔했다면서요? 괜찮아요?
“괜찮긴. 도가니 나갈 뻔했다. 왜? 나 빠지면 너도 올라오게?”
- 그럴까요? 짐 싸도 되겠습니까?
“좀 아니요, 이런 말 안 배웠냐? 학교에서 뭘 배운 거야?”
- 에이, 선배. 우리 학교가 야구 말고 뭐 가르쳐준 거 있었나요. 다 선배한테 배운 겁니다.
“난 너 같은 싸가지 키운 적 없다.”
안영진과 같은 학교를 나온 2군 유망주 최강훈이 선배의 건강을 염려해 오랜만에 안부 전화를 걸었다.
- 에이, 왜 그래요. 후배가 선배 다쳤을까 봐 걱정해서 전화까지 했는데 너무 매몰차지 않습니까?
“그걸 네가 할 얘기는 아니지 않냐? 내 부상 소식이 궁금하다면 단순 타박상. 뛰는 데 아무 문제 없다고 알고 있으면 된다.”
- 와. 꽤 세게 부딪힌 거 같은데 멀쩡하시네요. 리플레이 보니까 그놈이 선배 못 일어나게 잡던데. 괜찮으신가 봐요?
최강훈의 말 한마디에 전화를 받던 안영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적당히 해라. 내가 경고했지. 괜히 선수들 이간질할 생각하지 말고 운동이나 열심히 해.”
- 이간질이라니요. 제가 입이 좀 싸서 그렇지, 없는 소리 하진 않잖아요.
“헛소리할 거면 전화 끊어라. 후배라고 남겨둔 마지막 인연까지 끊길라.”
이번엔 수화기 반대쪽에서 진지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선배. 솔직히 선배나 저나 자리 잡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건 좀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동안 개고생한 우리는 버려두고 어디 근본도 없는 놈이 자리를 잡는 게 말이 됩니까?
“자리는 무슨. 그냥 빈자리 잠깐 채우러 온 거잖아.”
- 그 자리 제자리였습니다. 콜업 1순위 저였다고요. 지금 선배가 센터 들어가니까 그 자리가 선배 자리 같죠? 그 자리 확실히 지킬 수 있어요? 당장 제가 올라가도 선배보다 잘할 거 같은데. 아니에요?
후배의 도발에 안영진이 발끈한다.
“그딴 개소리는 1군 올라와서 지껄이세요. 내 2군 성적은 확인해 봤냐? 이게 후배라고 놔뒀더니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려 하고 있어.”
- 선배, 머리가 있으면 잘 들어요. 그 XX 내야수예요. 외야수가 아니라 내야수요. 내야가 외야 수비를 저렇게 한다고요. 3주 후에 박동수 선배 들어오면 외야 한 명 2군 내려와야죠? 선배 자신 있어요? 쟤 들어가면 야수 엔트리 하나 빼서 투수 더 쓸 수 있는데? 선배가 쟤보다 나은 게 뭐가 있어요? 저 XX 약점이 타격인데 선배도 타격은 답 없잖아요.
참다못한 안영진이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 선배, 같이 삽시다. 도우며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저도 제자리 뺏어 간 놈한테 빚 갚아야 하고, 선배도 자리 지키려면 저놈 담가야 하고요.
“내가 경고하는데, 헛짓거리할 생각이면 그만둬. 그딴 생각할 시간에 연습을 해라. 연락하지 마라.”
전화를 끊은 안영진이 베개를 집어 던진다.
* * *
“선배님. 안영진 선배 쉽게 안 넘어오네요.”
“됐다. 이 정도면 돼.”
안영진과 통화를 마친 최강훈이 똘마니 박정환에게 자기의 계획을 알린다.
“마음에 씨를 뿌리는 거야. 지금은 아무 생각 안 들겠지만 김소전이 몇 경기만 더 수비 나가면 조급해진다. 안영진 지금 타격 밸런스 다 무너졌어. 남은 게 수비밖에 없는 놈이 자기보다 훨씬 어린애가 옆에서 날라다니면 멘탈이 무너지는 거야. 우리는 그때 작업 걸면 된다.”
“대단하십니다, 선배님.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필하겠습니다.”
“그래. 넌 야구만 잘해. 나머지는 이 선배가 꽃길 깔아 놓을 테니까 따라와.”
선배가 자기의 큰 계획에 탄복하는 후배를 보며 비릿한 웃음을 짓는다.
* * *
오랜만에 야간 경기를 하고 찌뿌둥한 몸을 풀고 있는데, 멀리서 범생이 셋이 나를 만나러 왔다.
“김소전 선수, 같이 가시죠. 할 일이 많습니다.”
“누, 누구시죠? 구단 티는 입으셨는데… 누구신지?”
“전력 분석팀입니다. 가서 얘기하시죠.”
전설의 랩터스 전력 분석팀. 그들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소문으로만 들었지 야구장 옆 빌딩 지하에 이런 공간을 만들어 놨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해 봤다. 이게 연습장이야, 실험실이야?
“김소전 선수. 신인 선수들은 스프링 캠프 때 분석을 마치는데 입단이 늦으셔서 이제야 뵙네요. 전력 분석팀 강모경 과장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여긴 어디죠?”
“랩터스 전력 분석센터입니다. 2군에서 보셨겠지만 이쪽은 좀 더 정밀한 조율이 필요할 때 사용하는 공간입니다. 1군용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글쎄요… 제가 2군에서도 구르기만 했지 딱히 뭘 체크 받은 게 없는데요.”
“2군 데이터를 살펴보는데 단편적인 데이터들이라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아서요. 감독님께 경기 전까지는 보내드리겠다고 말씀드렸으니 편하게 체크 받고 돌아가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시작할까요?”
시작? 뭘 하려고? 신체 검사 같은 건가?
“자, 다시 한번 합니다.”
“헉, 헉……. 오늘… 몇 개… 몇 개 더 해야 해요? 헉, 헉…….”
“집중하세요. 이제 셔틀런하고 단거리 남았어요.”
“헉, 헉……. 이제 체력이 없어서 더 못할 거 같은데요.”
“그거 감안해서 확인할 거니까 집중하세요.”
“차, 차라리 펑고를 더 받으면 안 될까요? 헉… 헉… 헉…….”
“정말요? 그건 2군 데이터로 끝내려고 했는데. 다음 휴식일에 할까요? 선수가 먼저 말해 주시니까 감사하네요.”
미, 미친놈들아. 살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