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억 FA선수가 되다-6화 (6/204)
  • 6화. 첫날

    * * *

    1군의 공기는 그 느낌부터 다르다.

    다른 팀들보다 월등한 시설을 자랑하는 랩터스 2군에서 올라와 이제는 낡디낡은 잠실야구장에 들어왔지만 1군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큼하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2군에서 올라온 신인 김소전입니다.”

    “자, 다들 박수. 우리를 구해 줄 특급 신인이 오셨다!”

    락커에 들어가 90도로 인사를 하는 신인 선수를 주장 라정안이 받아주었다.

    성의 없는 박수 소리. 팀 분위기가 처지니 락커룸 분위기도 딱히 밝지 않다.

    “선수님들, 새싹이 왔으면 소리도 좀 질러주고 하세요. 나만 목 아프게 하지 마시고!”

    주장이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작게나마 축하한다는 말이 들린다.

    “치료받으실 분들은 치료받으러 가시고 특타 가실 분들은 먼저 특타 가세요. 나는 이 친구 데리고 인터뷰하나 하고 갈게요. 신입, 따라와.”

    “예, 선배님.”

    랩터스 원래 벤치 분위기가 좋은 팀 아니었어? 왜 이리 처져 있지?

    락커를 나와 인터뷰하러 경기장으로 나가는 길에 주장이 말을 건다.

    “신입. 수비를 그렇게 잘한다며?”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는 다 하잖아. 잘해야지. 타격은 그렇게 못한다며?”

    우씨……. 내가 타격을 못 하긴 하지만 면전에서……. 진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는 다 한다니까? 잘해야지.”

    잘하고 싶다. 나도 잘하고 싶다고.

    “너 여기 왜 올라온 줄 알아?”

    “네. 외야에 박동수 선배 빈자리 3주간 백업하러 올라왔습니다.”

    라정안이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

    “너 프로지?”

    “네?”

    “너 프로 선수냐고?”

    “네. 프로 선수인데요.”

    “팀에서 널 어찌 쓰는지랑 상관없이 1군에 올라왔으면 내려갈 생각을 하는 게 아니다. 바짓가랑이를 붙들어서 없는 자리라도 만들어 버티는 게 프로야. 절대 잊으면 안 돼. 다음은 없어. 기회가 왔을 때 잡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프로에서 14년을 뛰었는데 이제 8년 뛴 선수에게 이런 소리나 듣다니.

    요즘 내가 신인이라고 거기에 매몰되어 안일했다.

    난 지금 프로 선수다. 그것도 1군 프로 선수.

    열심히가 아니라 없는 실력도 만들어서 보여줘야 할 1군 선수다.

    “잘하겠습니다.”

    “잘해야지. 못하는 신인한테 자리 뺏길 만한 선배는 랩터스에 없다.”

    라정안 성격 더럽다고 소문이 자자 했는데 이런 면이 있네. 선배, 선배도 다른 사람에겐 차가운데 내 후배에겐 따뜻한 그런 건가요? 그러면 나 살짝 설렐 수도 있는데…….

    “뭐야? 눈빛이 왜 그래? 빨리 가자, 늦었어. 너 때문에 특타도 못하겠다.”

    “예, 갑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 *

    “김소전 선수 소개 부탁드립니다.”

    “신인 내야수 김소전입니다. 잘하겠습니다.”

    구단 유튜브 채널 인터뷰라고 했는데 무슨 열댓 명이 날 둘러싼다. 거기다 리포터… 예쁘네……. 헤헤.

    “이번 시즌 신인 중 처음 1군 등록되셨는데 소감은요?”

    “불러주셔서 감사하고 2군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평범한 대답을 기대했었는지 리포터가 당황해 큐카드를 놓쳐 떨어트린다. 땅에 떨어진 큐카드를 주우러 허리를 숙인 리포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리포터의 상체에 시선이 따라가다 리포터 뒤로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눈동자가 보였다.

    누구지? 살기가 등등한데?

    웨이브를 타며 큐카드를 집어 올린 리포터가 인터뷰를 이어 나간다.

    “신인의 패기가 돋보이네요. 김소전 선수 등번호가 75번으로 결정이 되었어요. 익명의 제보자에 따르면 구단주님을 존경해서 구단주님 생년인 75로 정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맞나요?”

    이건 무슨 참신한 멍멍이 소리지? 남는 번호가 그거라고 해서 받은 건데?

    “구단주님이 몇 년생인지는 모르겠고 단장님 생일이 7월 5일이라 75번으로 정했습니다.”

    이 말이 그렇게 잘못된 말인지 이때는 몰랐다. 단장님 생일 때문에 75번으로 정했다는 말에 조명 판에 조명이 나가고 카메라 화이트 밸런스가 나갔다.

    방금까지 살기 어린 눈빛이 분명 하나였는데 순식간에 10여 개로 늘어버린 상황. 도망가고 싶다. 도망가야 한다.

    분명 신인 선수 기 살려 주려는 인터뷰였는데 왜인지 모르게 어린 선수 멘탈을 탈탈 털어버리고 나서야 랩터스 TV가 철수하였다. 아무리 내가 싫어도 그렇지 내가 존못의 구단주하고 비슷하다고 할 수가 있는 거야!

    인터뷰를 끝마치느라 느지막이 경기장에 나가자 이미 한참 경기 전 훈련 중인 선수들. 다들 자기 일에 바빠 나 같은 건 신경도 안 쓴다.

    내 루틴을 다 하기도 한참 모자란 시간. 서둘러 스트레칭부터 시작해 본다.

    “신입, 이리와.”

    구석에서 한참 스트레칭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1군 수비 코치가 나를 부른다.

    “예, 코치님.”

    “몸 다 풀었어?”

    “예, 적당히 풀었습니다.”

    내 루틴대로라면 한참을 더 풀어야 하지만 그래도 운동할 만큼은 풀렸으니 최소한의 준비는 끝났다.

    “내일부터는 조 짜줄 테니까 그렇게 하고, 오늘은 3루에 가서 몇 개만 받아보고 들어가자. 라정안이 뒤에 들어가.”

    내야? 나 외야 백업이라더니.

    내야 훈련이라……. 3루에 내야수 몇이 쪼르르 줄을 섰다. 몸만 풀라는 듯 적당히 날아오는 내야 펑고. 역시 1군 선수들이라 글러브질이 안정돼 있다.

    “좋아~ 다음.”

    “…….”

    “좋아~ 다음.”

    선수들이 하나하나 빠져나가고 내 앞에 주장 라정안의 차례가 왔다.

    “캡틴~ 캡틴은 멋있게 하자~”

    “피곤해요~ 살살해요.”

    라정안이 피곤하다는데도 강한 숏바운드가 날아든다.

    달려들면서 글러브로 잡아채고는 1루로 송구해 버리는 라정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크하게 뒤돌아선다.

    “신입! 1루 잡을 수 있나 보자!”

    공을 던지는 수비 코치의 기세가 사뭇 사납다. 왜 다들 나한테만 이래.

    수비 코치가 배트를 강하게 끌어당긴다. 볼 것도 없다. 오른쪽으로 스타트를 끊는다.

    3루 라인선상으로 흐르는 타구. 크게 두 걸음을 떼고 역동작으로 잡아내었다. 잡는 탄력을 이용해 그대로 공중에서 몸을 돌렸지만 너무 멀다. 그대로 착지.

    “어이~ 잘 잡고 왜 안 던져? 타자 살려줄 거야!”

    “무립니다. 안 던지는 게 낫습니다.”

    “뭐?”

    갓 1군 들어온 햇병아리가 코치의 말을 무시하고 1루 송구를 포기하자 주변의 시선이 한 번에 쏠린다.

    “그래? 알겠어. 경기 끝나고 보자. 다음.”

    그 후로 몇 개의 펑고를 더 받았지만 쉬운 정면 타구만 날아올 뿐, 더 이상의 시선을 끌 만한 공은 날아오지 않았다.

    다만 1루수 정현기의 투정만 있었을 뿐.

    “신입. 왜 자꾸 원바운드로 던져? 강습일 땐 시간도 충분하잖아. 원바운드 말고 포물선 그려도 좋으니까 다이렉트로 던져.”

    “예, 선배님. 경기 중엔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 맞다. 느려도 좀 크게 포물선을 그리는 다이렉트 송구가 바닥에 튀는 변수가 없는 원바운드 송구보다 더 좋다.

    그건 아는데 접전에선 어차피 원바운드나 투바운드 송구를 해야 할 거고, 오늘 처음 잠실야구장 밟아보는데 바운드 튀는 거 확인은 해야 할 거 아니겠습니까?

    연습이 끝나고 후보 선수로 로스터에 이름을 올린 신인 선수가 평화롭게 경기를 관람한다.

    그동안 2군에서 연습만 하느라 실전 경기를 못 봤는데 오늘 아주 핸드볼 같고 재미있다.

    1회부터 랩터스의 선발 투수가 4점을 주면서 털렸다. 그러자 2회 말 3점을 추격하고 3회 초 랩터스의 선발 투수가 2점 홈런을 맞으며 강판당한다.

    3회 말 바로 3점을 따라붙는 랩터스. 3회까지 양 팀 투수 6명이 등장한다.

    투수도 투순데 양 팀의 야수들도 정신을 못 차리기는 매한가지다. 랩터스가 내야수, 외야수 할 거 없이 에러를 저지르는 가운데 상대 팀인 엘리펀트는 보크와 히트 바이 피치볼을 섞어 가며 스스로 자멸한다.

    서로 지겠다고 으르렁거리는 경기. 간만에 보니까 혈압 오르고 참 좋네.

    8회 초 엘리펀트가 2점을 따내며 13 대 12로 역전에 성공한다. 화요일 경기부터 투수를 다 쏟아부은 랩터스에 패배의 기운이 맴돈다.

    8회 말. 선두 타자 조영근이 우중간 펜스를 직격하는 2루타를 뽑아낸다. 아직은 지지 않았다고 선언하는 듯한 4번 타자의 위용. 동점을 위해 랩터스 벤치에서 2루에 대주자를 낸다.

    동점을 위한 대주자. 남은 투수라고는 오늘 나랑 같이 올라온 패전용 2군 투수 하나뿐인데 뭘 믿고 대주자를…….

    감독님, 마음에 여유가 너무 없으신 거 같은데…….

    2루에 내야수 임선엽을 대주자로 놓고 5번 강정상이 타석에 들어선다.

    다잡은 경기를 놓칠 수 없는 엘리펀트도 투수를 바꿔가며 승부를 포기하지 않는다.

    바뀐 투수의 초구를 노린 강정상이 우익수 앞에 안타를 만들어 낸다. 죽기 살기로 질주하는 주자. 송구가 약간 빗나간 틈을 타 주자의 발이 먼저 홈플레이트를 지나간다.

    13 대 13 동점. 무사 주자 1루. 이러면 이 경기 다시 시작이다.

    “러너 교체. 김소전.”

    응? 지금? 나? 오늘은 나더러 경기장 분위기만 느끼라더니 갑자기 나가라고? 나 완전 마음 놓고 관중 모드 하고 있었는데?

    부랴부랴 모자 쓰고 장갑도 챙기고 1루로 뛰어나간다.

    조용해진 경기장.

    그러겠지. 여기 내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 * *

    - 무사 주자 1루. 역전 주자 나가 있는 상황에서 주자를 교체합니다. 주자 김소전 선수네요. 오늘 등록된 신인 선수입니다.

    - 김소전 선수는 생소하실 수 있는데, 소닉스 6지명에 뽑힌 선수로 개막전 2 대 2 트레이드를 통해 랩터스로 옮긴 선수죠.

    - 2군 경기도 나오지 않아 자료가 전혀 없습니다. 어떤 선순지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 고교 야구 많이 보셨던 팬들이시라면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백두고등학교에서 2학년 때 3경기 연속 완봉을 따내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끈 선수였습니다.

    - 지금은 주자로 나와 있는데요?

    - 어깨에 슬랩 부상 이후 타자로 전환했습니다. 타자로 전향한 지 1년이 좀 지난 지라 타격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빠른 발로 프로 지명이 된 선수입니다. 하지만 이 선수 빠른 발만 있는 게 아닙니다.

    - 김 위원님이 김소전 선수에 대해서 더 아시는 게 있으신가요?

    - 제가 스카우터로 일할 때 유심히 지켜보던 선수였습니다. 이 선수, 워낙 뛰어난 운동 능력 때문에 피지컬적인 부분만 주목을 받던 선수였습니다만, 저는 이 선수 재능을 다른 곳에서 찾았었습니다.

    - 어떤 부분이 위원님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

    - 경기 운영 능력과 눈이 아주 좋습니다. 경기를 크게 보면서 몇 수 앞에서 상대를 압박하고, 상대의… 쿠세라고 하죠? 상대의 미묘한 버릇을 귀신같이 찾아내서 물고 늘어집니다. 투수를 계속했으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투수가 됐을 선수입니다.

    - 바로… 저런 부분을 말씀하신 거겠죠?

    * * *

    무사 주자 1루. 8회 무사 2루에 승리를 지키기 위해 올라왔다 안타를 맞고 블론을 저질러버린 마무리가 차갑게 타오른다.

    겉으로는 무표정하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지만 공이 터져라 쥔 손이 투수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6번 타자 우타자 정현기가 타석에 들어섰다. 최근 성적이 한없이 땅을 파고들어 가는 발 느린 타자와의 승부. 정교한 컨트롤을 가지고 있는 조은식이 아웃카운트 하나만을 노리진 않을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예의 바른 신인 선수가 상대 팀 1루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신인이가? 잘생겼…는 건 아니고……. 아야, 피곤 타. 연장 가면 뭐 하겠노. 내 안 잡아둘 테니까 저만치 나가 있어라.”

    ‘뭐지? 잘생겼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괜히 승부욕 생기네.’

    도끼눈을 뜨고 엘리펀트의 1루수를 째려보는데 1루 코치가 귀에 대고 속삭인다.

    “상대는 견제가 좋으니까 리드는 하되, 중심은 1루에 두고 지켜보자. 작전은 내가 알려줄 테니 3루 코치는 보는 척만 해.”

    ‘뭐. 시키는 대로 하겠지만 1루수 김해영 선배가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요. 옆에서 작전 내면 바로 눈치챌 걸요.’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서 사인을 교환한다. 자세를 가다듬고 셋포지션에 들어가 1루를 바라본다.

    셋포지션에 들어가며 주자는 리드를 시작하고 1루수가 뒤로 빠져나간다.

    경기가 지속되면서 엉망진창이 돼버린 경기장. 주자가 총알처럼 뛰쳐나가기 위해서는 발이 확실히 고정되어야 하는데 물러진 그라운드에 만족할 만한 땅을 찾기가 어렵다.

    1루에서 꼼지락거리는 주자를 보는 투수의 눈빛에서 편안함이 느껴진다. 누가 봐도 초보 같은 움직임. 좌투수가 1루를 바라보며 사나운 눈빛을 쏘아내자 주자가 슬금슬금 1루 쪽으로 발을 옮긴다.

    ‘누가 여기 땅을 이렇게 파놓았어? 도무지 발 디딜 데가 없네. 여기서 반 발짝 더 나가면 귀루가 힘드니 반발을 뒤로 물려야겠다. 그래. 여기가 좀 더 낫네.’

    투수가 겁먹고 리드를 반 발 줄인 주자에 대한 신경을 거두고 다시 한번 포수를 바라보고는 마음의 결정을 한다. 마지막으로 너 뛰지 말라는 당부를 하려는 듯 습관처럼 주자를 바라보고 투구 동작에 들어간다.

    마음에 드는 디딤발을 만든 주자가 기분 좋게 투수를 바라본다. 어설픈 주자를 마지막으로 체크하는 투수의 눈에서 앞으로 던지겠다는 확신이 느껴진다.

    ‘어? 이건 느낌이 오는데? 난 오늘 뛸 생각이 없었는데 알고도 안 뛸 수는 없잖아.’

    투수와 마지막으로 뜨거운 눈을 맞춘 주자가 그대로 스타트를 시작한다. 투구 동작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출발해 버린 주자. 주자를 한 번 보고 정면을 바라본 투수가 그제야 앞발을 치켜올린다.

    “1루! 1루!”

    1루주 자의 스타트를 보고 벌떡 일어난 포수가 1루를 가리킨다. 슬라이드 스텝을 시작한 투수가 포수의 손을 보고 엉겁결에 1루로 공을 집어 던지려다 멈췄다.

    “피처 보크!”

    다시 시작한 내 공식 경기 첫 기록은 피처 보크에 의한 2루 진루가 되었다.

    내, 내 도루……. 도루가 하나면 연봉이 얼만데……. 내 도루 내놓아라, 투수 XX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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