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콜업
- 7번 타자 박동수 초구 타격!
- 유격수 이영승 기가 막히게 잡아냅니다. 1루 송구!
- 1루 접전. 박동수! 박동수 1루에서 아웃! 1루수 로메로와 충돌하면서 넘어졌습니다. 공수 교대!
- 박동수 선수, 일어나지 못하는데요. 큰 부상이 아니어야 할 텐데요. 걱정이 됩니다.
- 랩터스, 지금 박동수 선수가 빠지면 큰일입니다. 임선엽 선수도 햄스트링이 좋지 않은 상황이거든요. 박동수가 빠지면 외야 수비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 아… 결국 교체되네요. 랩터스 중견수 박동수가 빠지고 황경철이 들어갑니다.
랩터스와 썬더스의 경기 7회 말. 랩터스의 공격이 끝나고 랩터스 단장실에서 용의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 * *
“박동수 3주 아웃입니다. 외야수를 불러올려야 합니다.”
“야수도 야순데 투수도 올려야 합니다. 계투진이 한계에요.”
“야수가 빠지면 야수를 올려야지, 지금 무슨 계투 얘기를 해요!”
“보면 몰라! 우리 선발 5이닝 먹어주는 게 이시윤이 하나다! 나머지 4일은 선발이 나오는지 오프너가 나오는지도 모를 판이야! 이번 주 벌써 마무리 박요훈이가 3연투다. 이대로는 여름도 못 넘겨!”
“투수 올리면요! 센터는 누가 볼 건데요? 5푼 치는 안영진을 타순에 올릴까요? 아니면 조영근 보다도 수비 범위가 좁은 황경철을 센터에 세울까요?”
“안영진이 세워! 5푼이랑 1할이랑 차이도 없어. 안영진이 센터 보면 되잖아”
“코치님! 타선에 안영진까지 들어가면 점수 안 나요. 자료 안보이세요? 안영진이 들어가는 순간 기대 득점이 2점이에요. 지금 우리 팀 타선 기대 득점이 2점이 된다고요!”
“어쩌라고! 박요훈이고 김이문이고 다 한계야. 오죽하면 연투 안 되는 성준현이까지 연투를 시키겠냐! 불펜 여름까지 가지도 못하고 퍼져!”
랩터스의 전력 분석 회의.
입으로 욕만 안 했지, 투수 파트와 야수 파트는 눈으로 쌍욕을 박아댄다.
전형적인 성적 나쁜 팀의 회의 모습이다.
“감독님 결정은요?”
눈을 감고 코치들이 싸우는 걸 듣고 있던 단장이 감독을 호출한다.
단장의 호출에도 감독이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한다. 처음 한 달은 선수들 갈아 넣으며 성적을 유지했지만 나이 많은 선수들이 퍼지기 시작하자 젊은 선수들도 덩달아 부상이 발생했다.
투수 파트와 야수 파트에서 동시에 터져 나오는 악재들.
감독의 머리가 복잡해져만 간다.
“2군 좀 다녀오겠습니다. 휴식일에 2군 선수들 확인하고 결정하겠습니다.”
* * *
“저게 야구 선수냐?”
“스윙을 하겠다는 거야, 번트를 대겠다는 거야?”
“저러고 치던데요. 버스터 장인이에요.”
“아, 이 무식한 놈. 버스터가 뭐야, 버스터가. 조선 시대 살다온 것도 아니고. 슬래쉬! 페이크 번트 앤 슬래쉬!”
“그거나 그거나요.”
내가 타격 훈련에만 들어가면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다.
나는 살아남으려고 갈고 닦은 타격 폼인데 입만 살아가지고…….
어차피 장타 욕심 따위는 없으니 준비 자세부터 배트를 높이 들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준비 자세에 배트가 높지 않으니 기습 번트를 대기가 쉬워졌다.
더불어 내 발도 빠르니 종종 기습 번트를 성공해 내야 안타를 만들어 냈다.
그러다 보니 나만 나오면 수비수들이 앞으로 당겨졌고 그럴 때면 난 그걸 노리고 번트 동작에서 바로 타격으로 바꿔 내야수 뒤로 타구를 날렸다.
다시 뒤로 물러나는 수비수. 그러면 다시 기습 번트.
기본 자세에서 때리는 것보다 수비를 흔들고 상황에 맞춰 대응하는 게 확률이 높다는 걸 깨달은 순간 번트 자세로 타격을 시작하는 나만의 타격 폼을 완성했다.
“깡! 깡! 깡!”
어차피 강한 힘을 싣지 못할 타구. 구석구석 날카로운 타구를 내야 여기저기로 찌르고 들어간다.
몸을 이용한 타격을 하지 못해 하체의 힘을 전달하지 못할 뿐 컨택과 손목 힘은 살아 있으니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하긴. 애초에 그것도 없었으면 프로 지명도 못 받았겠지…….
* * *
“쟤라고? 김 감독이 추천하는 선수가?”
“네, 저 친구가 가장 싹수 있는 선수입니다.”
2군 감독이 추천하는 신인 선수의 괴상망측한 타격 폼을 보는 1군 감독이 날카로운 눈빛을 고정시킨다.
“엉망인데.”
“네, 엉망이죠.”
“손목이 좋아.”
“손목은 좋은데 쓸 줄을 모르죠.”
“오래 걸리겠어.”
“저도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의외로 빨리 될지도 모릅니다. 저놈 노력파에 천재 끼가 있어요. 저보다 나을 수도 있습니다.”
선수를 바라보던 1군 감독이 2군 감독에게 몸을 돌린다.
“천하의 김민중이 자기보다 낫다는 선수가 있다고? 허허.”
“천재와 바보는 한 끗 차이니까요.”
타격 7관왕 출신의 랩터스 레전드가 확신을 가지고 선수를 평가했다.
* * *
“김소전! 외야로 나가!”
“네? 외야요?”
“외야 글러브 있어? 없으면 하나 빌려오고.”
“있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이 팀은 전생에 나랑 무슨 원한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아… 아닌데 내가 딱히 랩터스전에 성적이 좋았던 적도 없는데…….
그럼. 그냥 팀이랑 나랑 궁합이 안 맞는 거로 하자.
내야수로 입단한 1년 차 신인한테 두 달 만에 외야로 나가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사건인가.
나처럼 타격이 안되는 선수는 죽어도 내야에서 죽어야 눈곱만큼이라도 연봉 더 받는데……. 외야라니…….
내야 수비 연습을 더 빡세게 해야 했나? 이유가 뭐야!
“김소전! 외야도 내야처럼 받을 수 있는지 보자! 오늘은 기대해도 좋다!”
미… 저… 미친 수비 코치가 외야까지 쫓아와서 펑고 배트를 휘두른다.
코치가 한 명도 아닌데 왜 나는 자꾸 저 아저씨만 만나는 거야……. 살려줘…….
‘촤르륵……. 촤르륵…….’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랩터스가 왜 수비를 잘하는지 점점 더 확실히 알겠다. 저 미친 수비 코치. 무슨 기계처럼 펑고를 쏘아 낸다. 그것도 정확하게 내 한계 지점에 맞춰서 공을 쏘아 올린다.
달리고 또 달리고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달리고 몸을 날렸다.
오랜만에 하는 외야 수비라 처음엔 좀 어색했지만 공 20개가 넘어가면서부터 복잡한 생각이 없어지고 본능에 따라 몸을 움직이니 수비가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호흡이 가빠져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기 직전. 어쩐 일인지 수비 코치가 펑고를 멈췄다.
배트를 잠깐 멈춘 수비 코치가 중앙석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잠깐……. 저기 누구지? 하나는 2군 감독이고 그 옆은…….
1군 감독? 양상도 감독이 시즌 중에 여기 왜 와있어?
중앙석과 대화를 마친 수비 코치가 얼굴 한가득 웃음을 짓는다. 저건 흡사… 조커…….
눈이 하트가 돼서 나를 바라보는 수비 코치가 그라운드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다.
“김소전! 봉인 해제다! 죽도록 훈련해 보자!”
주, 죽도록? 나 지금도 죽기 일보 직전이라고! 그만. 그만 좀 해!
봉인 해제라는 말이 나왔을 때 야구를 그만둬야 했었다. 이 미친놈들은 적당히라는 말을 사전에서 지워버린 게 틀림없다.
센터를 가운데 놓고 좌우 30미터씩. 도합 60미터를 흔들어 가며 펑고가 날아온다.
죽을힘을 다해 뛰어가서 몸을 날려야 간신히 낚아챌 수 있는 타구. 이제는 오기가 생겨 공만 보고 달려들었다.
오기가 생긴 건 선수만이 아니었다. 한 번 하면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수비 코치가 좌우도 모자라 앞뒤로 흔들어 대기 시작한다.
좌우 앞뒤 랜덤으로 날아드는 타구. 배트 각을 확인하고 타구 음을 듣는 순간 판단하지 못하면 잡을 수 없는 타구들이 쏟아진다.
“깡!”
펑고 배트에 맞은 타구가 스윗 스팟에 잘 맞아도 너무 잘 맞았다. 높은 탄도 각도로 순식간에 내야를 넘어 높이 떠오른 타구가 쭉쭉 뻗어 나간다.
외야플라이를 치겠다는 펑고가 아니었으면 라인드라이브로 넘어갈 만한 타구가 연습 구장 센터 펜스를 향해 날아든다.
저 미친놈, 무슨 펑고에 진심을 담고 친다. 나를 잡아 죽이겠다는 생각인지 방금 전에 살짝 앞에 떨궈놓고는 센터 깊은 플라이를 쳐댄다.
내가 지금까지 잡은 게 억울해서라도 저거 잡아낸다.
맞는 순간 타구도 안보고 뒤로 뛰었다. 어차피 최소 워닝트랙이다.
잔디 끝이 보이는 순간 뒤를 돌아보니 높이 치솟아 올랐던 타구가 펜스를 향해 맹렬히 돌진한다.
이거… 이거……. 생각보다 많이 뻗네…….
순간적으로 판단을 해야 한다. 펜스에 붙어 다이렉트 캐치를 시도할 것인가. 아니면 한 발 뒤로 물러 펜스 플레이를 시도할 것인가.
높이 뜬 궤도의 타구. 판단이 쉽지가 않다.
조금씩 조금씩 떨어지는 타구. 높이 떴던 만큼 떨어지는 각도도 날카롭게 떨어진다. 이거… 잡을 수 있겠는데?
직선으로 뛰어가던 방향을 살짝 옆으로 틀어 타구를 사선으로 바라본다.
펜스를 앞에 두고 급격히 힘을 잃어 가는 타구가 가파르게 떨어져 내려온다.
발은 이미 잔디를 지나 워닝트랙의 붉은 흙을 밟고 있고 눈은 타구의 낙구 지점을 정확히 파악했다.
펜스 위로 살짝 넘어가는 공. 그 공을 따라 펜스를 밟고 뛰어올랐다. 손끝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이야호~’
가슴속 깊은 곳에서 뿌듯한 성취감이 올라온다.
순간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를 질렀다…가 현타가 왔다.
이거… 그냥 펑고 훈련인데……. 실전이 아니고 단순 훈련인데…….
하… 세상 쓸데없는 짓을…….
훈련에 몸 생각하면서 살살해야지. 무슨 일을 내겠다고 위험하게 펜스를 타고 넘어, 이 멍청한 소전아!
멍청… 진짜 멍청한 건 이게 아니었다.
“너……. 너……. 김소전! 넌 내가 부숴버리겠어! 매니저! 박스 가져와! 두 박스 가져와! 이건 내 펑고를 무시한 거야! 전쟁이다! 싸우자, 김소전!”
나, 난 너랑 싸울 생각이 없다고! 살려줘! 악마야!
* * *
“내야수라며?”
“하하. 저도 외야에 세워본 게 처음입니다. 하하.”
1군 감독 옆의 2군 감독이 멋쩍게 웃음을 보인다.
“송구는?”
“외야에서 던지는 건 못 봤지만 내야 송구하는 거 보면… 기대는 하지 마시죠. 대신 상황에 맞게 정확히는 던집니다. 서드에서 깊은 타구는 투바운드, 정면은 원바운드로 보냅니다.”
기대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목소리에 자신감이 묻어난다. 2군 감독의 두루뭉술한 의견에 정확한 판단을 해야 하는 1군 감독이 디테일하게 파고든다.
“시간은?”
“서드에서 정면 기준 4초 내외로 보냅니다.”
“원바운드 4초? 그 정도면 다이렉트로 던질 수 있잖아?”
“아니요. 송구는 확실히 약합니다. 대신 글러브에서 공 뺄 때 시간을 줄이더라고요.”
“허허. 재능을 타고났네, 타고났어.”
그라운드를 바라보던 2군 감독이 1군 감독을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1군이 급하지만 않으면 옆에 끼고 천천히 키울 자원입니다.”
2군 감독의 마음을 아는 1군 감독이 타이르듯 말을 받는다.
“3주만 쓰지. 곱게 쓰고 돌려줄 테니 너무 책망 말게.”
* * *
“김소전 선수 경기 준비하고 나오세요. 잠실 갑니다.”
일어나자마자 빡빡이 짐에서 온몸에 배긴 알을 풀고 있는데 매니저가 다가와 무서운 소리를 늘어놓는다.
“네? 저요? 잠실은 왜죠? 설마… 또 트레이드라도 되는 건가요…….”
순간 머리를 빡빡 돌렸으나 지금 잠실에서 나를 부를 이유가 별로 없다. 2군에서도 반쪽이라고 소문난 선수를 왜…….
“엔트리 등록됐습니다. 짐 챙겨서 감독님께 인사드리고 나오세요. 2시까지 가야 해요.”
엔트리? 내가? 내가 왜? 나 요즘 완전 훈련용으로 준비하고 있어서 경기 뛸 상태가 아닌데?
아쒸. 그럴 거면 하루 전에라도 얘기를 좀 해주든가…….
복잡한 머리를 쥐어뜯으며 주섬주섬 개인 장비를 챙겨 트레이닝룸을 나서는데 재수 없는 얼굴이 나타났다.
“김소전! 엔트리 등록됐네. 축하한다!”
얼마 전 나랑 한차례 트러블이 있고 난 뒤 내가 피해 다녔던 3년 차 우리 팀 대표 외야 유망주인 최강훈이 내 콜업 소식을 어디서 듣고 와서 축하인사를 건넨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예의 바른 후배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건네자 넓은 도량을 가진 선배가 얼굴을 가까이 디밀고는 귀에다 속삭인다.
“내 자리 훔쳐 가니까 기분이 좋냐?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
뭐야, 이 사이코패스는?
“매니저님. 우리 소전이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고생하십시오.”
내 귀에 대고 스산한 목소리를 내던 3년 차 유망주가 매니저를 향해 밝게 웃으며 후배 부탁을 한다.
“우리 강훈이 역시, 인성 대박! 넌 꼭 성공할 거다. 형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확신한다! 이번에도 네가 올라갔어야 했는데……. 김소전 선수 늦어요. 빨리 챙기고 내려와요.”
난 당황스러워 매니저와 3년 차 쓰레기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쓰레기의 인성에 감복한 매니저와 천상의 연기를 선보이는 쓰레기.
야구가 아니라 살아남는 것도 쉽지 않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