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굴러들어 온 모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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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군 훈련장에서 며칠 굴려지니 시야가 좀 넓어졌다.
회귀하기 전에는 랩터스에서 뛰어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 팀도 완벽하지만은 않구나…….
프로 야구엔 10개 팀이 있다. 그중에 전설의 5년 연속 꼴지의 대기록을 세웠던 팀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서울 대한 랩터스다.
한 지붕에 같이 사는 소닉스가 꾸준히 한국 시리즈에 올라가는 동안 끝도 없이 바닥을 뚫고 내려가던 팀, 랩터스.
그런 랩터스에 변화가 찾아온 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일반 팬이 단장을 하고 나서부터다.
박스를 쓰고 나타난 단장이 팀의 A부터 Z까지 다 뜯어고쳤고, 바닥을 기던 팀이 어느 순간 3연속 우승을 하는 강팀이 되었다.
3연속 우승을 하고 박스를 벗은 단장은 모회사인 대한 그룹의 3세였고 팀을 강팀의 반열에 올리고는 홀연히 은퇴.
그리고는 파격적으로 갓 30살의 젊은 여자에게 단장을 맡기고는 구단주가 되었다.
여기까지가 일반에게 알려진 아름다운 재벌 3세의 이야기.
내가 2군에 와서 실제로 본 랩터스는… 무너지기 직전이다.
지난 5년간 강팀이 되어 버린 랩터스는 페이롤이라고 불리는 선수단의 연봉 총액이 다른 팀의 1.5배는 많다.
페이롤이 KBO 규정치보다 훨씬 높아 막대한 사치세를 부과받고 있는 랩터스는 구단 방침으로 고액 FA 영입을 금지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팀에 100억짜리 FA부터 연평균 20억을 상회하는 FA가 즐비하다.
그 말은 이 팀의 우승은… 돈으로 산 우승이다.
돈질로 우승을 했으나 화려한 잔치는 끝났다. 아름다운 시간이 지나가자 저 고액 FA 선수들은 나이를 먹었고, 더 이상 전성기의 퍼포먼스가 나오지 않는다. 퍼포먼스만 나오지 않는 게 아니라 낡고 병들어 경기 출장 수도 줄어들었다.
애초에 뎁스가 얇았던 팀에 고액 FA만 잔뜩 끌어모아 만든 우승. 주전을 대체할 선수도 부족하고 페이롤이 높아 좋은 선수를 데려올 수도 없고 엎친 데 덮친 격.
구단이 선수를 외부에서 데려올 수 없으면 신인을 잘 뽑아서 키우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된다. 매년 10명의 신인 선수가 구단에 들어오고 그 선수들이 커서 구단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어야 한다.
문제는……. 그동안 랩터스는 성적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KBO 페이롤 규정으로 1순위 지명권을 박탈당한 것도 모자라 3년 연속 1등을 하는 바람에 3년째 지명 순위가 맨 마지막이다.
그 결과, 그해 나온 신인 중 20번째로 잘하는 선수가 랩터에 1번으로 뽑힌다는 이야기.
말이 좋아 1픽이지, 하위 팀 3순위와 다를 바 없다.
매년 각 팀이 1번 픽을 얼마나 고심해서 뽑고 정성을 다해 키우나를 생각하면 랩터스의 새싹들은 자질 자체가 부족하다.
나는 지금 그런 팀의 새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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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군 감독 처음 맡으셨는데 못 도와 드려서 죄송합니다.”
“별말씀을요. 팀 성적 안 나오면 단장님이 고생이지요.”
1군 선수들이 시범 경기를 치르는 동안 2군 훈련장에서 단장과 신임 2군 감독이 만났다.
“지금 로스터로는 한 시즌 1군 로스터 못 돌아갑니다. 2군에서 포지션별로 대체 선수급은 되는 백업을 만들어 주세요”
“하하하, 단장님. KBO에서 대체 선수급이면 하위권 팀에선 주전입니다. 길게 보고 농사지으시라던 분이 이러시면 곤란해요”
대체 선수. 말 그대로 포지션에 구멍이 났을 때 2군에서 불러올릴 백업 선수를 말하는 용어다.
야구장의 모든 기록을 데이터화하는 현대 야구에서 이런 백업 선수들만 가지고 경기를 운영했을 때 기대되는 승리를 계산하고 그걸 토대로 선수의 가치를 계산한 기록이 있으니.
바로 WAR(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이라는 기록이다.
이 용어가 메이저리그라면 그럴듯하게 적용이 되지만 한국에서는 딱 들어맞지 않는다.
메이저는 마이너리그 풀이 어마어마하게 커서 어느 팀이든 그럭저럭 1인분은 해줄 선수를 언제든 뽑아 올릴 수가 있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쓸 만한 선수 자체가 부족한 KBO 리그에서는 대체 선수급도 안 되는 선수가 주전을 하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고 포수같이 특수한 포지션은 WAR가 대체 선수급만 돼도 FA에서 대박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런데 단장이 지금 망가진 팜에서 대체 선수급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으니 신임 2군 감독이 당황하는 것도 당연하다.
“지난 시즌 우승 팀인데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잖아요. 트레이드라도 하고 싶은데 구단주란 사람이 희대의 퍼주기 트레이드를 해놔서 적당한 카드 맞추기도 어려워요. 감독님이 무슨 수를 써서든 만들어 주셔야 해요.”
반달 같은 눈을 뜨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부탁을 하는 단장 때문에 2군 감독의 눈도 반달이 된다.
반달이 된 두 눈으로 단장을 바라보다 집에 있는 와이프 생각이 났는지 2군 감독이 눈을 번쩍 뜨고는 정신을 차린다.
“단장님, 그 트레이드 말인데요.”
“트레이드 얘기라면 하지도 마세요. 그 생각만 하면 구단주를 찢어버리고 싶어요.”
방금까지 반달은 어디 가고 이글거리는 불꽃을 내뿜는 파이리를 보고 2군 감독이 흠칫 겁을 집어먹었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이야기를 이어 간다.
“그게 꼭 잘못된 트레이드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감독님! 감독님까지 왜 그래요! 2군이라 1군 경기 안 보세요? 우리 팀에서 나간 선수들, 시즌 시작도 안 했는데 구속이 145가 넘어가고 있어요. 거기다 패전조 하던 선수는 선발 컨버전 한다는 소리도 있고요!”
감독의 한마디로 단장의 입에 불이 붙는다.
“그런데 우리 팀으로 온 이승명! 이승명이는 어째요? 작년에 홈런 20개 뽀록이에요, 뽀록! 저딴 스윙 메커니즘으로는 떨어지는 공을 칠 수가 없어요! 작년처럼 공이 와서 맞아주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요!”
단장의 불꽃 공격에 2군 감독이 눈을 내리깔고 조신하게 양손을 모았다.
한참을 씩씩거리며 공격을 퍼붓던 단장이 화를 누그러트리고 앞에 있는 순한 곰에게 의견을 묻는다.
“아직도 할.말.있.어.요?”
“그건… 아닌데요……. 저… 먼길 오셨으니 선수들 훈련하는 거나 보시죠. 저기! 신인들 훈련하는 거 여기서 잘 보이네요. 하… 덥다.”
강력한 카리스마에 잔뜩 쫄아버린 감독이 뭐라 설명도 못 하고 선수들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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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나왔네. 안 피곤하냐? 난 몸이 쑤셔서 죽겠다.”
“나도 죽겠다. 살다 살다 이런 무식한 웨이트는 처음이다.”
능력도 없는 선수가 14년을 프로에서 버틴 비결이라 봐야 특별한 게 없다.
언제나 어디서나 준비 완료.
프로 야구 한 시즌을 하다 보면 갑자기 엔트리에 구멍이 나기 마련이고 그때 바로 경기 투입이 가능하게 몸을 유지하는 게 백업 선수의 기본자세다.
그러기 위해서 매일같이 누구보다 먼저 나와 꼼꼼히 몸을 풀고 장비를 손질해 놓는다.
그게 몇 개 없는 내 영업 비밀이다.
매일같이 계속되는 체력 훈련이 진물이 날 때쯤 구단에서 슬슬 야구 기술도 체크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내야 펑고. 신인뿐만 아니라 저년차 선수들까지 다 몰아넣고 하는 훈련.
고참들 없이 어린애들끼리만 있는 시간이니… 겁난다.
“우와, 수비하는 거 봤냐? 3년 차는 다르긴 다르다.”
글쎄다. 화려해 보이는데 저건 잔발 뛰다가 타이밍 못 맞춘 건데? 그걸 운동 능력으로 커버하는데, 저러면 오래 못 가.
“발 봐. 우와, 발이 안 보여. 어디로 날아오든 첫발 바로 뛰겠다. 우와……. 아… 안타깝네. 다 잡았는데 불규칙이 저기서 나네.”
저놈 입을 막아버리고 싶다.
눈이 있으면 봐야지. 살짝 튀긴 했지만 자기 중심 앞에서 공이 튀는데 글러브가 늦으면 몸으로라도 막아야지, 저걸 놓치면 1군 감독 뒷목 잡는다.
“어이! 거기 신인들! 심심해서 떠드는 거야? 드루와, 드루와. 얼마나 잘하나 보자! 거기 키 큰놈! 너부터 들어와!”
X됐다. 초장부터 이렇게 찍히면 내내 고달픈데.
내야 펑고 얼마나 받을 줄 알고 초반부터 찍혔어……. 슬프다.
슬픈 눈망울을 하고 펑고 받으러 그라운드에 들어가자 나를 바라보는 코치가 소리를 지른다.
“신인이 패기 있게 들어와야지! 그래서 1군 올라가겠어?! 패기 있게 받아봐! 간다!”
미친놈. 아직 자세도 안 잡았는데 이따위로 공을 날리고 지랄이야!
배트에 맞는 순간 3루 쪽으로 스타트를 끊었다. 스핀을 먹으면서 애매하게 멀어지는 타구. 그래도 타구 속도가 늦으니 끝까지 따라붙는다.
공이 지나가는 타이밍에 맞춰 몸을 날렸다. 글러브 끝에 걸리는 느낌이 났다.
“오~”
“나이스~”
“굿~”
주변에 환호 소리가 들리지만 내 머릿속에는 어제 하루 종일 기름 먹인 글러브가 까진 것만 눈에 보인다.
이래서 싸구려 쓰면 안 되는데……. 연봉 받으면 글러브부터 바꾼다.
“후루꾼지 아닌지, 하나 더 보자. 간다!”
저……. 저……. XXX. 이번엔 반대쪽이네. XX, 숨 고를 시간은 주고 하라고!
“헉… 헉……. 쿨럭… 헉… 헉…….”
“수고했다. 오늘 공이 가서 붙네, 붙어. 이럴 때 훈련해야 실력이 느는 거야! 여기 다 마치고 넌 나랑 한 번 더 하자! 내가 더 칼같이 보내줄게!”
미, 미친놈……. 나 죽는다고…….
내가 잘 모르는 생소한 2군 코치가 단체 훈련 시간에 나를 상대로 펑고만 50개를 날렸다.
그것도 평범한 타구 하나도 없이 내가 받을 수 있는 끝과 끝을 좌우로 조금씩 늘려가며 날렸다.
첫날부터 찍힐 수 없으니 죽을힘을 다해 달라붙었다. 마지막에는 체력이 달려 놓치는 게 몇 개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달라붙었다.
그리고 하나 깨달은 게 있었다.
나 풋워크나 미트질은 그대로인데 반응 속도가 좋아졌다.
안 그래도 수비하고 주루로 1군에 붙어 있었는데… 이거 잘하면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 * *
“쟤 어때요?”
멀리서 지켜보는 단장에게 2군 감독이 선수 하나를 물어본다.
“103번이요?”
등번호만 있고 이름도 안 적혀 있는 유니폼. 분명 흰색 유니폼인데 흙이 많이 묻어 흰색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네, 103번이요. 어떠세요?”
“내년에 내보내려고 했더니 아주 맹탕은 아니네요.”
말은 관심 없는 척 퉁명스럽게 하지만 단장의 눈은 선수 몸놀림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핀다.
“움직임만 보면 당장 주전은 무리여도 두 번째나 세 번째 백업은 충분합니다.”
“체력이 없어요. 잡는 것만 잘해서는 무리에요. 어깨 회복 안 되면 1루가 한계에요. 우리 팀 구성상 우익수도 송구가 나쁘니 컷트맨인 2루수도 어깨가 강해야 해요. 쓸데가 없습니다.”
103번이 삼유 간을 빠질 듯한 공을 낚아채는 걸 본 단장이 주먹을 불끈 쥐면서도 입으로는 딴소리를 내뱉었다.
“아직 신인이에요.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신인입니다. 체력도 부족하고 어깨가 안 좋은 거 감안해도 1군에 세울 만한 수비입니다.”
괜히 딴청 부리는 단장에게 감독이 슬그머니 어린 선수를 두둔한다.
“그것보다도 저 선수 하루하루를 준비하는 게 신인 같지가 않습니다. 10년은 된 베테랑, 그런 베테랑 중에서도 정말 성실한 베테랑들만큼 꼼꼼합니다. 매일 같은 시간 식사를 하고 누구보다 일찍 나와서 몸을 풀어요. 그날의 훈련 스케줄을 확인하고 미리 나와서 준비합니다.”
그리고는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공을 좇는 선수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19살짜리가 저런 발놀림에 글러브질을 하는데 몸 관리까지 완벽합니다. 이런 스타일은 실패할 수가 없어요. 지금 우리 팜에 탑 프로스펙터는 저 선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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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 XXX!
여기 정말 뭐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트레이너고 수비 코치고, 저놈들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을 밀어붙여도 어찌 이렇게까지 밀어붙일 수 있단 말인가.
이미 내 밑바닥까지 다 끌어내서 보여 줬잖아! 더 끌어낼 것도 없다고!
“이야~ 넌 지금 내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냈어! 지금까지 내 펑고를 다 받은 선수는 세 명밖에 없었다. 거기~ 매니저~ 한 박스 더 가져와~”
악마 새끼야! 그만! 그만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