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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신데렐라-83화 (에필로그) (83/83)

83화. 에필로그2017.04.20.

영원은 가만히 여자의 설명을 경청했다.

비싼 돈을 주고 초빙한 전문가답게 장황한 설명들이 이어졌다.

“해외가 아닌 국내를 염두에 두신다면 성북구 쪽에 있는 하엘국제유치원도 있습니다. 유치원에 입학하면 국제초중고교가 연계돼서 매번 졸업하는 번거로움도 적구요. 만약에 영식님이 5년 후 입학 시기를 맞춘다면, 우성그룹 장남의 손녀와 동문이 되시게 됩니다.” 영원이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다 주양과 눈이 마주쳤다.

화등잔만 해졌던 눈이 무안함을 감추고 반달로 굽어졌다. 주양을 향해.

영원에겐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잔뜩 있었다.

오늘도 역시 그랬다. 이제 아기일 뿐인데.

벌써부터 어느 유치원에 보내고 초등학교, 대학교까지 플랜이 짜여졌다.

여자는 진학 전문가였다. 상류층 자녀들의 진학 설계를 담당하는 교육 전문가라던가.

아직 태어난 지 일주일밖에 안 된 아이였다.

벌써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왜 알아봐야 하는 거지?

미간을 좁히는데 주양이 테이블로 손을 뻗었다.

늘어진 유수의 유치원, 초등학교 광고 카탈로그들 중 하나를 집는다. 전문가가 눈빛을 반짝였다.

“역시, 안목이 남다르시네요. 사장님께서도 어린 시절에 해외 명문교육을 받으셨다죠?”그가 집은 카탈로그는 영국 왕자들이 입학했다는 사립학교였다.

“부모가 다닌 모교를 자식이 잇길 바라는 건 당연하죠.”주양은 조금도 대꾸 없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전문가가 멋대로 떠들대고 있는 거다.

영원에겐 주양의 마음이 읽혔다.

책자를 들여다본 지 반시간이 지나고서야 풀려났다.

주양은 곧장 회사로 갔다.

이사에서 사장으로 얼마 전에 승진을 한 뒤부터 더 바빠졌다.

“사모님.”도우미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멍 때리고 서 있는 건 아랫사람들 보이기에 안 좋았다.

한가로운 휴식시간이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정원에 접이식 테이블이 놓였다. 테이블보가 펼쳐지고 곧이어 도우미들이 티세트를 차려놓았다.

영원은 사교의 필수코스인 티타임을 흉내냈다. 문득 깃털만 한 무게의 근심이 내려앉았다.

‘사장님께서도 어린 시절에 해외 명문교육을 받으셨다죠?’주양이 해외 학교 책자를 집었을 때 내심 걱정됐다.

예상치 못하게 교육열이 뛰어난 아버지라서 아이를 벌써부터 바깥으로 내돌릴 작정일까?

그의 엄격한 완벽주의 성향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터다. 자기보다 못난 자식을 견딜 수 없을지도.

영원은 떨떠름해졌다.

부모의 유전자가 반반이라면 분명 내 피도 섞였을 텐데, 뇌세포 쪽 유전자가 모두 바보만 물려받았으면 어쩌지?

주양이 똑똑한 것은 전문가가 말한 해외 어쩌구 하는 교육을 받아서일까.

선생이 곁에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보통 그 시절, 재벌가라 해도 어린 자식을 해외로 보내는 부모는 없었죠.”퍼뜩, 깨어나며 고개를 들었다.

늙은 남자 집사가 찻잔을 그녀 앞에 놓아주며 말했다.

집 안에서 그의 직책은 집사고, 직급은 전무였다. 진 회장이 병원으로 완전히 들어가고 늙은 남자 집사는 영원을 보필하게 됐다.

영원은 그를 편하게 선생이라고 불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해외로 가는 경우는 있어도, 유치원부터, 해외로 떠나보내는 경우는 또래 중에 사장님이 유일했습니다.”한창 투정을 부려야 할 시기에 주양은 해외로 보내졌다. 선생은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걱정 마세요. 아이를 보내지 않을 겁니다.”누구보다 자신이 그 외로움을 잘 알 테니까.

영원은 읽다 만 육아책으로 고개를 내렸다. 때마침 페이지는 아이의 인격형성에 관한 주요내용을 다뤘다.

‘유아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적인 요소와 함께 아이의 인격을 둘러싼 많은 변수들이 유아기 환경 때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때 부모와 애착관계에 실패를 하게 되면 이후 성인이 되어 대인관계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

티타임은 짧게 끝났다. 갑작스런 호우였다.

영원을 먼저 들여보내고 늙은 집사는 꼼꼼하게 고용인들이 청소를 끝낸 집 안 구석구석을 훑고 다녔다.

“사모님이 집안에 들어오신 지 얼마 안 되어 몸에 익지 않으셨습니다. 격의 없이 대해주신다고 만만히 보는 분들이 있어요. 청소며 자재 관리며, 소홀함 없이 조심하도록 합시다.”흰 면장갑을 낀 손으로 난간이며 창틀을 쓸었다.

엄하게 다시 지시하고는 돌아서는데 창밖에 여전히 비가 내렸다.

쏴아아아아-

처마에 들이치는 빗소리가 그의 의식을 붙잡아당겼다.

이 집 작은 주인의 어릴 적이었다. 주양은 기억하지 못하는 시기부터 외국에서 살았다.

대리모를 국내에 두기엔 눈이 많았다.

외국에서 태어났으니 외국에서 사는 건 당연했다.

초등학교 입학도 매한가지였다.

어린 주인은 한국을 잘 몰랐다.

학교 방학은 꼭 한국에서 진 회장과 보냈다. 그것이 진 회장의 철칙이었다.

딱히 애정이라기보단, 한국말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가족이 너무 떨어져 있으면 남보다 못하게 된다는 걸 친형제들을 보며 느꼈을 터였다.

어린 주인이 한국 본가에 도착하면 중년의 집사는 마중을 나갔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던 봄이었다. 여름이었던가.

커다란 검은 우산이 아이를 가렸다.

‘도련님.’작은 속삭임.

‘도련님.’집사의 부름에 어린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어린 주인을 위해 집사는 다정한 웃음으로 맞이하려고 활짝 웃었다.

하지만 마주쳐온 어린 주인의 얼굴에 그 웃음은 곧 허물어졌다.

주양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7살, 한줌 허리밖에 오지 않던 어린아이의 눈빛, 이었다.

……분명.

저를 빤히 들여다보던 그 눈빛은, 자신 같은 늙은 노인이나 진 회장에게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공허가 깃들어 있었다.

어이하여 작은 주인에게서 아이다움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인가.

가슴이 미어졌다.

집사는 무릎을 꿇어 어린 주인과 눈을 마주쳤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렇지 않게 웃어보였다.

‘집으로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성악설, 성선설, 성무선악설.

인간의 본성에 선과 악이 있으며, 없을 수도 있다.

성격의 모양이 만들어지는 시기는 뱃속에서 태어나고 3개월 후부터.

그러나 갓난아기마다 우는 횟수, 예민한 정도에 차이가 있는 걸 보면 성격은 그 이전부터 타고나는 걸 수도 있다.

아기에게 태교는 중요하다. 엄마의 생각이 아기에게로 고스란히 전가된다.

엄마의 긍정적인 마음가짐은 아기의 인격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부정적인 마음 역시, 아기에게 전해진다.

그런 의미로 말하지면 주양은 뱃속에서부터 사랑 받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

주양이 사옥 사장실을 빠져나오자 비서들이 허리 숙여 배웅했다.

양 비서가 주말 스케줄을 보고했다.

“새로운 가족이 태어나서 여기저기서 축하메시지가 많이 옵니다. 친인척들에게 축하장을 보낼 때 사진을 같이 동봉할 참입니다. 가족사진은, 당분간 해외 일정이 잡혀 있으니, 주말이기도 하고 내일 안에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주양은 무표정할 뿐이었다. 낮에 진 회장의 병문안을 갔다가 원장과 대화를 나눴다.

그때부터였다. 주양이 얼굴이 안 좋았다.

‘어린아이가 벌써부터 미래가 기대가 돼요. 사모님 미모가 어디 보통 미모입니까? 여자 여럿 울리겠습니다. 눈매와 코는 뚜렷하고……, 영락없이 사장님을 탁했습니다.’주양은 입을 다물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생각을 지우고 승강기에 올랐다.

집으로 돌아왔다.

시무룩한 표정의 영원이 쪼르르 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넥타이를 풀던 주양이 귀여운 듯 시선을 던져주었다.

그녀가 기다려다는 듯 고충을 토로했다.

“왜 아이는 정해진 시간에만 봐야 해? 내 아이인데?”유모들이 여럿 붙어 아이를 잘 챙겼다.

부부의 방에선 절대 아이를 재울 수 없고, 이 집안을 총괄하던 칠십 살 먹은 남자 집사는 무척 깐깐했다.

절대 자신의 영역에선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주양은 힘들어하는 영원에게 말했다.

“별로 아이에게 정을 갖지 않는 게 좋아. 전체 애정에 백이 있다면, 그중 30퍼센트만……. 그리고 나머지는 너를 위해 쓰도록 해.”영원은 그런 주양을 보았다.

“그런 건…… 마음을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지 않나.”주양은 멈칫했다. 영원이 빤히 보며 말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건, 내 저 애를 이만큼만 사랑해야지. 한다고 되는 게 아니지 않나.”싱긋 웃고 영원이 방을 나갔다. 주양은 멍해졌다.

그때도 방학이었다. 집 안에 모르던 놈이 하나 들어와서 아들 행세를 하고 있었다. 진두영이었다.

진두영은 중학생이나 된 주제에 재벌가의 생활에 적응을 못해 눈물이 많았다.

똑같은 피를 타고난 똑같은 사내아이인데 진두영은 어린애 같다고 여겨졌다. 감정표현이 풍부했다.

진두영에겐 엄마가 있었다. 진 회장의 잠자리를 봐주는 여자였다.

집안사람들은 그녀가 단순 직원을 넘어서 진 회장의 허락 받지 못한 아이를 혼자 기른다는 걸 이미 알았다.

그녀는 주양에게 굉장히 잘했다. 여자가 왜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나중에야 알게 됐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미워하는 원수에게 아부를 할 수 있답니다.’ 집사는 언제나 주양이 알지 못하는 것들이 미리 알아채고 말해주었다.

자기 아들을 잘 봐달라는 부탁이었을 것이다. 아들이 소외되지 않게.

주양은 가계구도로 한참이나 아래인 조카지만, 첩의 자식과 적자의 차이를 무시할 순 없었다.

권력의 구도는 태어나는 순서로 정해지는 게 아니니까.

‘원수에게 아부를 하게 만드는 자식은, 여러모로 귀찮은 존재네.’주양의 말에 껄껄 집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답니다.’‘왜지.’‘헌신. 그것은 자식을 가진 부모만의 특권이니까요.’ 늦은 시간, 거실 한 켠에 있는 바에서 양주 마시는데 아기 울음소리가 났다.

주양은 가만히 귀 기울였다. 유모 방 불이 켜지고, 아기를 달래는 듯한 소리.

주양이 가만히 소리에 집중했다. 늙은 집사가 다가와 술을 따랐다.

“한 번 보러 가시죠.”“술을 마셨습니다. 다음으로 하죠.”“입만 맞대지 않으면 상관없습니다.”집사가 멀끔히 웃음을 품었다.

“아기 얼굴을, 한 번도 보지 않으셨죠?”아이가 태어난 지 일주일이 됐다. 한 번도, 아이를 보지 않았다.

귀가는 항상 늦은 저녁이었기 때문에 회사 일을 핑계로 아이를 보지 않는 건 쉬웠다.

“오늘 보시죠. 사장님.”주양은 바에 손을 올려놓은 채 가만히 있었다. 낮에 보고 온 진 회장의 얼굴이 스쳤다.

진 회장의 얼굴과 더불어 과거의 말들이 돌아왔다. 손끝에 잔떨림이 일었다.

‘두고 볼수록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될 거다.’‘사랑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피어오를 거야.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나를 사랑하는 걸까. 나를 앞으로도 사랑해줄까. 사랑이 식으면……, 그땐.’진 회장이 속살댔다.

‘그는 과연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존재인가.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의 아버지로서는 적합한 자격이 있는가.’‘바로? 내가 너를 키워오며 느꼈던 불안감 말이다.’진 회장 병환의 상태를 알면서 원장에게 시간을 끌라고 명령한 것이 주양이었다.

치매를 악화시키게 했다. 아무렇지 않았다.

1년 전, 영원이 납치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진 회장의 말엔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

기왕이면 아이도 무사하면 완벽하겠지만 잘못돼도 영원의 건강만 보장이 된다면, 별로 아이 같은 거 원하지도 않았으니까. 다정한 남편과 거리가 멀었다.

주기적으로 초음파 검사를 받으러 갈 때도 그는 영원과 함께 하지 못했다. 무심함을 가장한 회피였다.

되도록 아기를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의 무의식 속에 두려움이 있었다.

아이가 두려웠다. 두려운 것은 그 자신이었다. 스스로의 마음이 짐작되지 않았다.

그는 취향이 확고했고, 한 번 아닌 건 아니었다.

영원을 받아들인 것은 인생에 몇 번 없는 예외에 속했고 그의 인생에 전환점을 맞이했다.

과연, 인생의 전환점이 두 번 다시 올 수 있을까?

집사가 번민하는 주양을 강하게 일깨웠다.

“사장님.”“아이에게,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어떡하죠.”집사가 숨을 멈췄다.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주양을 담는 동공에 안타까움이 자리한다.

“그런 건 확인하지 않고는 알 수 없습니다.”주양이 바에서 떨어졌다. 가려는 그의 등에 대고 집사가 붙잡듯 말했다.

“하지만, 걱정하시는 거 아닙니까?”주양이 조금 놀라서 보았다.

“사랑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것은,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 아닙니까.”집사가 웃어 보였다.

“사랑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

밤새 뒤채는 아이를 달래느라 녹초가 된 유모가 아기 방 한 켠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기만 생생하게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었다.

캄캄한 밤이었지만 훤한 달빛에 불에 의지하지 않고 모든 게 잘 보였다. 주양은 아기 침대로 향했다.

“…….”아기는 아주 작고 연약했다. 간단히 부러질 것 같기도 하지만 사내아이답게 힘이 있어 보였다.

그가 손가락을 뻗어 아이의 이마를 매만졌다.

시야가 아직 트이지 않은 아기가 감각에 의존해 움찔거렸다.

이마에서 내려온 손길이 코에 닿아 뺨을 건드렸다.

영락없이 사장님을 탁했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떠올리며 아기의 손을 들췄다.

엄지손가락만 한 손에 붙은 다섯 손가락이 정교했다.

그때였다. 아기가 힘주어 그의 손가락을 쥐었다.

‘그런 건 확인하지 않고는 알 수 없습니다.’따뜻한 체온과, 강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힘이었다.

순간 그의 입매에 옅은 웃음이 그려졌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어떡하죠.’그는 확인했고, 알게 되었다.

*

다음 날, 사진사가 왔다.

바깥을 외출할 수 없어 저택의 응접실에서 사진을 찍기로 했다.

영원이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자리에 앉았다. 주양이 의자 뒤에 서 있었다.

사진을 찍는다고 하는 순간, 영원이 어깨에 올려진 주양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체온으로 하나로 이어졌다.

사진이 찍혔다.

누가 봐도 평범한 가족사진이었다.

아빠, 엄마, 아이.

그들은 가족이었다.

- 에필로그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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