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대단원 <마지막 회>2017.04.16.
프로펠러가 가파르게 속력을 상승시키더니 순식간에 상륙했다.
영원은 멀어지는 땅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주양을 건너봤다.
‘너 나 원망 안 할 자신 있어?’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가 물었다.
원망이라. 그건 서로를 떠나 잘 살 수 있냐는 물음만큼이나 바보 같은 질문이 아닌가.
‘원망을 어떻게 안 해?’영원이 꾸짖자 주양이 옅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럼 왜 따라 왔어?’‘살다보면 손해 보는 것도 있고, 더 희생하는 것도 있는 거지. 결혼이 원래 그런 거지.’ 그러나 영원은 그의 품에 안겨 이거 하나만은 확실히 답할 수 있었다.
‘세상 전부가 네게 돌을 던져도, 나만은…… 네 옆을 지킬 거야. 너와 돌을 같이 맞을 거야.’그녀 탓에 주양은 많은 죄를 지었다.
이제껏 그가 나를 지켜주었으니 이제는 내 차례였다. 인생이 아름다운 건 우리가 시한부인생을 살기 때문이고, 행복해질 꿈만으로도 인생은 부족하지 않은가.
영원이 주양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죄었다.
잠깐이지만 영원이 달려와 붙잡지 않았더라면 영영 이별할 수도 있기 때문일까.
그의 몸이 어린아이처럼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바보였다.
*
한신파이낸셜 사옥 로비에 차가 여러 대가 줄지어 섰다.
취재열기가 뜨거웠다. 오늘 회견에 초대받지 못한 여러 매체 기자들이 입구에 장사진을 이뤘다.
이봐! 머리 가리잖아! 어어, 새치기하지 마!
바리게이트에 막힌 기자들이 그 앞에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앞다투어 취재하려 들었다.
그들이 카메라에 담으려는 사람은 젊은 여자였다.
한 달 전. 세상을 들썩이게 한 실종 사건의 신부이자, 최악의 스캔들의 여주인공.
세간의 관심과 집중을 엄청나게 받는 그녀가 오늘 기자회견을 갖는다.
새신부가 되자마자 대형 스캔들의 히로인이 된 여자는 기이할 정도로 얼굴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람 찾는 데 도가 튼 가십지 기술자들도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몇 번 인터넷을 쑤시면 아주 예전에 미니홈피에 올리고 잊은 흔적들이 남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고교 졸업사진은커녕, 소소하게는 주변인들과 찍힌 사진조차 말끔했다.
억측과 괴이한 소문만 나돌았다.
언니를 몰아내고 언니의 남자와 결혼한 그녀에게 적개심을 갖던 언론도 점차 ‘why?’라는 호기심이 증폭됐다.
진주양은 오너 일가의 차기 후계자감이라는 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 메리트로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던 인물이었다.
100미터 멀리에서 봐도 돌아볼 외모는 매력적이었다.
바람직한 평판은 그를 기존의 낡고 관습적인 족벌세습을 타파해줄 세련된 부르주아로 설정했고, 베일에 싸인 그의 모든 것들은 그의 신비감을 더했다.
언론의 짝사랑이라고 할 만큼 그의 프라이버시는 공개돼지 않았다.
수레바퀴가 소리가 요란한 것에 비해 털 게 없는, 흠잡을 데가 없는, 그런 그가 결혼한 여자다.
리스크를 감내하면서까지 결혼을 감행한 진주양의 의지가 여자에 대한 궁금증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어떤 이는 그녀가 미인 이상의 무언가를 지닌 엄청난 마녀라고 했고, 어떤 이는 그녀가 종교적으로 진주양에게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정상적인 정신이 박힌 한 남자를 굴종시킬 수 없을 테니까. 그 진주양을.
여러 대 중 중앙에 있던 차로 모두의 숨죽인 시선이 쏠렸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가 차에서 내렸다.
파앗- 파앗- 플래시가 정신없이 몰아쳤다.
중계차까지 대동대 생중계로 그녀의 모습이 전파를 탔다.
처음 보도된 모습은 단정하게 빗어 내린 긴 생머리에 가녀린 몸이었다. 챙모자로 가려져 있지만 상당한 미인이라는 것엔 이의가 없었다.
그녀가 입은 이름도 낯선 해외 브랜드의 원피스, 손에 든 백, 얼굴을 가린 스카프와 헤어스타일까지, 몇 시간 뒤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실시간 검색어를 차지할 것이 분명했다.
취재진들이 여자를 에워쌌다.
“한 달 만에 칩거를 끝내셨습니다. 심정이 어떠십니까?”“오늘 기자회견에서 어떤 말씀을 하실 예정입니까?”“회견에서 다 말씀드릴 겁니다.”직원들이 카메라를 막으며 영원을 재빨리 안으로 데려갔다.
사옥 3층 홀은 이미 주요 방송사 언론인들이 차지했다.
기자회견장이 마련된 홀의 곁방에서 영원은 메이크업을 받았다. 흰 머리가 성성한 법무팀의 사장급 변호사가 그녀를 안내하며 마지막까지 원고를 체크했다.
그 시각 시시각각 기사들이 올라왔다.
<언니의 자리를 빼앗고 결혼한 동생의 변명이 대체 얼마나 우릴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인가?>
<진정성 있는 내용이 아니라면 기자회견은 그저 쇼가 될 뿐이다!>
무차별적 폭언들이 쏟아졌다.
마침내 영원이 회견장을 등장하자 주위가 엄숙해졌다.
영원은 떨리는 마음으로 법무팀에서 정리해준 전문을 찬찬히 읽었다.
전문가들이 검수한 내용은 오롯이 영원에게 유리하게 작성되어 있었다.
영원이 복수를 위해 해수를 정신병원에 감금했던 것,
그리고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고자 했던 매향이 납치범으로 둔갑되어 죽은 것 등등,
그런 진실은 다 가려진 채.
영원에게 불리한 내용은 교묘히 다 빼버렸다.
경찰차로 끌려가기 직전 숙모가 영원에게 물었다.
‘그래서, 마음씨 착한 너는 어떤 선택을 할 거지?’‘……선택이냐니?’숙모는 의미심장하게 볼 뿐이었다.
한신의 안주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거다. 적당히 나쁜 짓도 하면서 타협하는 삶을 산다는 것.
한신이란 대기업 총수가 될 남자의 안주인 자리, 애초에 착한 역과는 거리가 멀지 않나.
결국 착하게 살고 싶다는 것은 주양을 포기하라는 선고였다.
‘인생을 살다 보면 어느 순간 기로에 맞닥뜨리게 돼. 한 점 부끄럼 없이 살 것인가. 적당히 나쁜 짓도 하면서 타협하는 삶을 살 것인가.’‘착한 역만 하고 싶다면, 네 사랑. 포기해야 해.’영원이 돌아보았다. 무대와 연결된 홀 안쪽 방에서 주양이 영원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빛을 깊게 보낸 그가 안심하고 해도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백 번 연습했었다. 영원은 이제 아무렇지 않게 이런 것을 읊어야 하는 삶에 들어왔다.
S가 자신 때문에 죽던 날, 그녀는 자기 권리를 포기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그때와 같은 기로에 섰다.
이번엔 나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집안사람 모두가 영원에게 감추려 했다. 매향이 자신의 의지로 죽은 게 아니라는 것쯤은 그녀도 짐작할 수 있었다.
똑바로가 아니다.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내가 그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으면서 타협 본 것은, 인정하는 일이었다.
그 부끄러움조차 나 자신의 일부분임을 인정하고 나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나는 주양의 곁에서 평생 살고 싶고, 행복도 하고 싶고, 이름도 되찾고 싶다.
내 욕망을 감추고 애매하게 착한 척하는 짓 따위 이제 하지 않기로 했다.
오지도 않은 미래는 생각하지 않으련다.
지금, 현재 내 곁에 있는 사람, 그들과 함께하는 행복을 위해……
자신이 계모에게 학대를 당했고, 모든 걸 빼앗기고, 거지 같은 삶을 헤쳐 나와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
이 모든 것이 무작정 거짓만은 아니니까,
다만, 전체의 진실에서 내게 불리한 몇 가지만 뺀 진실이라도 해도.
“지금부터 제가 할 이야기는…….”입은 연 순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그녀에게로 포화처럼 빗발쳤다.
그리고 20년을 돌아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처음으로 세상을 향하여 발로했다.
“모두 사실에 근거합니다.”
*
<충격적 진실! 언니의 남자를 빼앗은 스캔들은 지옥에 갇혀 있던 한 여자의 생존을 건 극적 탈출기였다!>
<계모의 학대, 그리고 박탈당한 인권>
<현대판 신데렐라!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7살부터 집안일을 했다는 고백!>
종편 뉴스 패널들이 침을 튀기며 성토했다.
“이건 심각한 아동학대의 문제입니다! 명백한 인격살인 행위입니다.”“단순히 자매의 치정극으로 자극적인 기사에게 몰두하려 한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그러해야 했던 사정엔 한 인간의 인권유린 있었습니다!”“우리는 ‘신데렐라’ 하면 왕자를 만나 신분상승한 운 좋은 여자 얘기를 먼저 떠올리죠. 하지만 그 이면 깔린 아동학대에 대해선 생각하지 못합니다. 신데렐라는 명백한 아동학대를 다룬 동화입니다.” “한 아이가 등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 아이에게, 학교나 선생님, 더 나아가 이 사회에서 조금만이라도 관심을 가졌다면, 신영원 같은 사건은 없었을 겁니다. 그 아이는 자신의 권리를 박탈당한 채 20년을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도 무수히 많은 아이들이 제 부모에게 학대를 당한 채 방치되고 있습니다. 더러는 죽은 뒤에야 학대 사실이 밝혀지는 안타까운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신영원도 그 죽은 아이들 중 하나일 수도 있었습니다.”스튜디오가 숙연해졌다.
“살아 남아준 그녀에게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문제가 눈을 돌린 사이, 그녀는 혼자서 그 지옥 같은 좁은 방에서 필사적 전쟁을 치렀을 테니까요.” 아동학대에 대해 비중 있게 다루면서 가운데 앉은 사회가 소식을 정했다.
“현재 신영원이란 여성의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는데요. 제2의 신영원이 나오지 않도록 <신영원법>을 제정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야에서 커지고 있습니다.”그러면서 이어 화면에 계모와 그 딸이 화재 당일, 현장재현을 하는 모습이 담겼다.
구치소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수갑을 찬 두 여자에게 기자들이 취재 녹음기를 들이댔다.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무슨 생각으로 그런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까!”“20년입니다. 한집에서 아이를 계속 보면서 죄책감은 느끼지 못했습니까?”취재진 뒤에서 구경하던 동네사람들이 최혜란과 딸에게 돌을 던졌다.
“저런 년은 주리를 틀어 사형시켜야 해!” “얼굴 왜 가려! 얼굴 공개해!”주먹만 한 돌이 최혜란의 이마를 쳤다.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터졌다. 영원의 비밀이 알려지고 신해수의 죽음 전말까지 밝혀졌다.
경찰이 신부를 찾는 동안 현기영이 최혜란 모녀를 백운당 지하실에서 찾아냈다.
신해수 살해범으로 첫째 딸 신성원이 잡혔다. 우발적이었지만 담배 불씨가 화재의 원인인 이상 신성원에게 혐의가 갔다.
화재로 인한 질식사. 자물쇠로 컨테이너를 잠근 것까지 신성원이 일체를 자백했다.
최혜란도 자신의 야망을 위해 딸을 정신병원에 집어넣은 패륜적인 사건, 비정한 어미로 대서특필 됐다.
기사는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모든 걸 빼앗기고 부정당한 신영원의 동정론으로 호도됐다.
한 메이저 출판사는 그녀에 일생을 다룬 에세이를 출간할 거라고 발표했다.
책은 출간되자마자 연이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고, 한신의 며느리는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했다.
이 모든 것이 영원의 성공적인 데뷔를 위한 한신그룹의 기획이었음을,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선 알음알음 퍼졌다.
*
가습기가 새하얀 물보라를 분무했다.
영원은 병실에 쳐진 블라인드 올렸다. 햇살이 금세 방을 채웠다.
영원이 뒤돌아 베드에 누운 호운을 응시했다. 중태에 빠졌던 호운이 의식을 찾은 지 이 주일째였다.
영원은 매일같이 호운의 병문안을 왔다.
아직 의사소통은 불가능하지만 의사는 희망적이라 했다. 그는 완전히 회복하진 못하고 아직은 하루 반나절을 잠으로 보냈다.
물수건으로 호운의 손을 닦아주는데 바깥에서 작은 인기척과 함께 조심스런 움직임이 어른거렸다.
흠흠. 부르기 전에 먼저 헛기침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사모님.” 수행원이 허락받은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렸다.
병원에서 주양을 만나기로 했다. 영원은 호운에게 다정하게 작별 인사를 했다.
“오늘은 이만 가야 할 거 같아. 초음파 검사만 받는 줄 알 텐데 원장이 또 여기 온 거 알면 난리 날 거야. 아이가 잘못되면 자기가 옷을 벗어야 한대.”호운은 이 병원에서 가장 좋은 특실을 썼다. 의료진이 상주하고 있으니 오지 말라는 병원장의 강력한 의지였다.
주양은 별로 영원이 호운에게 신경 쓰는 것에 터치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무심하게 관망하다 사고가 터지면 그때 목을 쳤다.
병원장은 영원이 태아 검사를 받으러 달마다 오면 곁에 서서 쩔쩔맸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그때야말로 문책을 받을 때였다.
경호원들을 끌고 병원 복도를 나오는데, 마주 오던 한 나이 지긋한 중년 여인이 영원에게 접근했다. 경호원들이 막으려고 했다.
영원이 그만하라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중년 여인이 영원의 손을 붙잡으며 반가워했다. 책을 읽었다면서 그녀가 끝에 이런 말을 남겼다.
“살아남아줘서 고마워요.”영원은 멍해졌다. 비참한 삶이었다. ‘권리’조차 없는 하찮은 삶이었다. 누구도 그녀의 존재에 관심 갖지 않았다.
그런 그녀한테 살아 남아줘서 고맙다니.
그녀가 살아남은 것이 남에게 고마운 일인가. 가슴이 이상해졌다.
살아남기 위해 한 노력들이 결코 허튼 일이 아니었다. 그것을 인정해주는 말이라고 영원은 혼자서 해석했다.
그것은 혼자의 힘이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영원은 병원 정원으로 나왔다.
햇살 속을 걷다가 구두를 흘렸다. 허리를 숙이는데 5m 밖 벤치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섰다.
독서를 하던 중이었는지 그는 책을 덮고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걸어왔다.
내 인생에 그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직도 나는 그 진창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영원보다 먼저 떨어진 구두를 주웠다. 구두를 신겨주며 그가 넌지시 떠봤다.
“늑대가 왜 양을 사랑하는지 알아?” “맛있어서?”“같이 있으면 자기도 양이 될 수 있을 것 같거든.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한 유일한 선행이야. 네가.”주양이 무릎을 땅에 대고 아래서 위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프러포즈처럼.
“우리 다시 결혼할까.”댕…… 데엥 …… 댕…… 어디선가 12시의 시계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시계는 그날에서 멈춰버렸습니다.
나는 두 번 다시 내 본래 이름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뻗어온 손이 영원의 턱을 가볍게 쥐었다.
영원은 허리를 편하게 그에게로 내렸다. 끌어당겨져 코끝끼리 대어졌다.
지지 않고 그의 입술을 위에 대담하게 저의 입술을 포개며 영원이 속삭였다.
“이름으로 불러줘.”희미하게 그가 미소 짓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내 이름을 불러준 순간,
멈췄던 시계가 12시 1분을 향해 움직였습니다.
“해수. 신해수”
나의 시간은 오늘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