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81화 (81/83)
  • 81화. 대단원 <4>2017.04.13.

    철썩 - 철썩 -

    파도 소리가 둔중하게 귀를 울렸다.

    여자는 벤치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영원에게 파묻는 눈빛에는 분노도, 경멸감도 없었다. 희미한 회한만 감돌았다.

    “인생을 살다 보면 어느 순간 기로에 맞닥뜨리게 돼. 한 점 부끄럼 없이 살 것인가. 적당히 나쁜 짓도 하면서 타협하는 삶을 살 것인가.”“…….”“네가 식장에서 도망친 것은 사랑 때문이었지. 그 잘난 양심을 지키겠다고.”영원은 주양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떠났다.

    남의 것을 빼앗고 착취하는 삶 따위.

    계모나 신해수 같은 뻔뻔한 인생을 살지 않겠다고.

    “착한 역만 하고 싶다면, 한신의 안주인 자리. 포기해야 해.”여자는 한여름에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세련된 투피스에 배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진주목걸이를 걸치고서.

    신부수업을 받을 때, 제일 어려웠던 것은 오너 일가의 친인척 명단을 샅샅이 외우는 일이었다.

    이름과 사진, 그들의 취미, 취향, 그들이 어떤 사업을 하고 누구와 앙숙인지. 어떤 말을 조심해야 하고,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영원이 기억하는 한 그녀는 분명 진두영의 아내이자, 주양의 숙모였다.

    영원은 대외적으로 실종당한 입장이었다.

    매향을 찾았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숙모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뜨개질 하던 손이 순간 멎었다.

    어딘가 숙연해진 그녀가 담담히 말했다.

    “그 애, 못 올 거야. 아니, 백 프로 못 와. 내가 대신 온 이유야.”마치 작별을 고하는 듯한 말투여서 영원은 혼란스러워졌다.

    “그 애, 널 좋아했어. 그 마음은 진심이었을 거야. 다만,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뿐이야.”동생을 버렸던 자신을. 그렇게 쉽게 놓아버린 자신을.

    “……왜.”왜 돌아오지 못한다는 거야. 숙모가 답했다.

    “실패했으니까.”영원의 표정이 형언할 수 없이 이상해졌다.

    “졌으니까.”“죽었……단 거야?”멍하니 바라보자 숙모가 한숨지었다.

    “새끼 밴 여자한테 험한 말 하고 싶지 않아. 그냥 얌전히 밀항해줬으면 좋았을걸.”그랬다면 이런 꼴도 안 봐도 됐을 거고, 남은 자들을 심판할 수 있었을 텐데.

    “네 친구는 사건을 키울 생각이었어. 강호운이 어떻게 그날 타이밍 좋게 널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해? 네가 내 남편한테 협박당하는 거 알면서 눈 감았어. 너의 실종은 예고된 범행이야. 네가 실종된 사이 신해수를 전면에 등장시켜, 진주양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세상에 까발릴 계획이었지.”영원은 흠칫했다. 숙모는 신랄하게 웃었다.

    “왜. 좀 덜 슬퍼져?”매향은 영원을 이용했다. 진심으로 행복을 빌었건만,

    친구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인생이 다 그런 거지. 내가 배신하지 않으면 남이 내 뒤통수 후려갈기고 코 베는 세상인데.”숙모는 뜨개질을 지속했다.

    납치범은 혼수상태고, 신부는 돌아왔다.

    사건은 흐지부지 힘을 잃었다.

    매향은 운을 다했고, 신해수와 강호운의 사고 역시 숙모에게는 뜻밖이었다.

    그녀의 계획에 남은 건 지금, 영원뿐이다.

    그때 비서가 대화를 끊고 다가왔다.

    “사모님. 편집국장입니다.”숙모가 전화를 받았다.

    어쩌구저쩌구, 긴 변명 끝에 기사가 데스크에서 반류됐다는 내용이었다.

    태평양일보 사주 딸인 그녀가 낼 수 없는 기사는 없다.

    태평양일보 사주가 불허한 기사라면 몰라도.

    “아버지께서 개입됐군요.”아니나 다를까.

    수화기 너머에서 면목 없는 긴 침묵이 흘렀다.

    한신은 최대의 광고주였다.

    한신뿐이 아니다. 한신이 입김을 불어 다른 기업들도 도미노처럼 광고를 뺀다면.

    숙모는 서글프게 전화를 끊었다.

    “회사가 벌집이 됐는데 이거 계속하면, 나 천하에 불효막심한 년 되는 거지?”“사옥으로 국세청 세무조사 들어왔답니다. 법원에선 사모님께 출국금지 신청까지 내렸다고. 수배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벌였다.

    집안을 위험하게 몰아넣으면서까지. 그땐, 눈에 아무것도 뵈지 않았다.

    그녀가 멍청하게 서 있는 영원에게 일갈했다.

    “방황은 끝났어. 집에 돌아가도 좋아.”숙모는 미련 없다는 태도로 일어섰다.

    영원이 재빨리 달려가 그녀를 붙잡았다.

    숙모가 매섭게 영원을 쏘아봤다.

    “경찰이 곧 들이닥칠 거야. 네 남편이 이겼어. 이제 너도 어리광은 그만 피워.”“방금, 그거 무슨 소리야.”“…….”“죽다니.”숙모가 영원을 봤다.

    “말 다 안 끝났어. 아직 해명이 필요해. 또 죽어? 해수가, 호운이? 매향은?”“…….” “다 죽었는데, 어째서…… 당신은 살아, 있는…… 거야.”그 눈에 숙모를 향한 원망이 가득했다.

    미워하는 눈초리였다.

    힘없고 나약한 사람들은 다 죽고 최종적으로 뒤에서 지휘한 장본인은 살아 있다니.

    그들이 죽은 건 어쩔 수 없다. 그래. 짐작은 했다.

    호운이 돌아오지 못했을 때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직감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억울한 죽음이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적어도 그 과정에 불합리함이 있지는 않았는지, 영원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해명해.”숙모가 냉랭하게 팔을 쳐냈다.

    “그 사람의 아이를 넷이나 낳아줬지. 아들을 낳고 싶었어. 임신중독이라 위험하다는데도 난 포기할 수가 없었어. 그리고 아들을 낳아줬어. 뱃살이 고무줄처럼 늘어졌고 나는 더 이상 싱그러웠던 그 나이로 돌아갈 수 없는데. 그 사람은 나보다 젊고 예쁜 아가씨한테 마음을 빼앗겼지.”아들을 낳아줬지만 남편의 마음은 이미 떠났고 그는 내심 그게 자신의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렇다고 그녀 손으로 유전자 검사 결과를 내밀기엔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남편과 냉전을 치르는 동안, 공식적으로 한신 진 회장에겐 둘째 손자는 없었다.

    오직 진주양만이 적통을 이어받은 진 회장의 손자로 인정받았다.

    치가 떨렸다. 한신가에.

    “어째서 살아 있냐고? 살아남은 내가 그들 몫까지 죄를 다 받고 있는 건 안 보여?”영원이 이를 앙다물었다.

    신부를 납치한 뒤 살해했다고, 남편을 살인범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 계획을 실행하는 마음이 어땠을 것 같아. 숙모, 아니 한 여자가 울고 있었다.

    “난 내 남편을 벌주지도 못했고, 원하던 복수도 못 이뤘어. 널 눈앞에 두고 구구절절 사연이나 읊고 있어. 나는 이제 감옥에 가게 될 텐데 내 딸들은 무슨 죄지? 난 그 아이들을 사랑해. 하지만 그는 아들만 원했지.”영원은 시선을 내렸다. 어느새 뺨이 축축해졌다.

    손길이 다가와 눈물을 닦아주었다.

    숙모가 영원의 뺨을 감쌌다.

    “너는 젊고 예뻐. 그 자체로도 축복이지.” “…….”“그에 비해 난, ……길 가다가 돌아봐주기엔…… 더 이상…… 싱그럽지 못하지.”영원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시야가 뿌옜다.

    “젊음도, 사랑도, 네가 가진 게 나보다 더 많으니, 그러니, 나를 불쌍히 여겨주지 않을래?”“…….”“넌 착하고 좋은 아이니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죽이려면 죽일 수도 있었다. 여자는 영원을 먼저 찾아내 치료까지 해주었다. 덕분에 아이는 무사했다.

    원망하고픈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렇게라도 남 탓을 하지 않으면 내가 괴로울 테니까.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자신이 아닌가 하여.

    곧이어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숙모의 팔에 쇠고랑이 채워졌다. 연행되어 가던 숙모가 잠시 멈춰 섰다.

    영원을 돌아봤다. 주양을 기다리는 영원을.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더군. 네가 아닌, 병원으로.” 그 말에 영원은 심장이 조였다.

    “오지 않을 거야. 그 애.”자신의 목을 찌르면서 용서를 구한 남자였다.

    자신은 다정해질 수 없으니 그녀에게 포기하라고 하던 남자였다.

    끝까지 놔주지 않겠다고 한 남자였다.

    그랬던 그가……

    그녀를 포기했다.

    숙모를 태운 경찰차가 저택을 빠져나간 뒤, 낯선 형사가 먼저 영원을 알아봤다.

    어쩐지 형사는 감회에 젖은 얼굴이었다. 그는 감동해서 영원을 불렀다.

    “신…… 영원 씨?”그가 무언가 생각이 바뀌었는지 다시금 이름을 바꿔 불렀다.

    “신해수 씨……?”이젠 그 이름만 들려도…… 눈에서 눈물이 났다.

    장 경감이 정중히 모자를 벗었다.

    “찾아다녔습니다.”장 경감이 주섬주섬 가슴팍에서 꺼낸 것을 영원에게 내밀었다.

    “여권과 비행기 티켓입니다. 해외에 거주할 집을 마련해 뒀습니다. 아이와 살기 적당할 거라고. 어쨌건 지금 당장 대한민국을 떠나야 합니다.”영원이 물끄러미 여권과 티켓을 보다 물었다.

    “많이 아픈가? 오지 못할 만큼?”“아뇨. 팔에 조금 경상을 입은 것 말곤. 아…….”장 경감이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반응을 이해한 영원은 담담히 여권을 받아 챙겼다. 장 경감이 다급하게 영원을 잡았다.

    “아, 나도 모르겠어요. 왜 갑자기 그 인간이 삐딱선 타는지.”“…….”“그치면 모두가 신부가 죽었다고 말했어요. 여기 있는 경찰들이 보세요. 이 많은 인력이 다 당신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누구 힘이라고 생각합니까?”  망막을 찌르는 머리카락 사이로, 새파랗게 빛나는 눈빛이 영원에게 답을 구했다. 응혈 같은 것이 고인 분노였다.

    “진주양 씨가 유일하게 당신이 살아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죠.” 영원이 뜸을 들이다 한참만에야 말을 끄집어냈다.

    “이해해. 질릴 만도 하지. 나 같아도 이런 무책임한 여자는, 버리고 싶을 거야.”기대와 희망이 모두 물거품이 됐다. 어긋난 연인.

    장 경감의 표정이 묘해졌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이런저런 얘기 할 시간 따윈 주어지지 않았다.

    미끄러져 들어온 차량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기사가 영원을 부축해 차로 모셨다.

    여체는 그대로 장 경감을 비껴갔다.

    영원은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차에 태워진 후, 간호사가 그녀를 살폈다.

    체온을 재 정상체온임을 확인하고 다시 팔에 압박붕대를 감아 혈압을 측정했다.

    곧장 공항으로 직행할 거라고 했다.

    티켓은 편도였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다시는.

    ‘너는 행복해질 권리가 있어.’‘네 행복은 속죄한, 뒤, 야……. 네가 행복해지는 길은…… 그 애의 원한을 풀어준 후에나, 가능해. 그전까진…… 넌, 멋대로 그렇게……! 행복해져선 안 돼.’희망은 원치 않음과 별개로 작동했다.

    나로 인해 죽은, 혹은 대신하여 죽은 이들. 그들의 죽음에 나의 잘못이 있었다. 그러니까 알고 있다.

    자신이 평탄하게 행복을 누려선 안 된다는 것.

    “사모님?”간호사가 곁에서 불렀지만 눈시울을 타고 흐른 것이 뜨겁게 살점을 적셨다.

    알고 있는데도.

    수십 번, 수백 번 인정할 수 없고, 참을 수도 없고,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은. 마음 한구석에 궁색한 변명거리들이 들어찼다.

    어째서. 어째서 나는 그래야 하지. 내가 부탁한 것도 아니잖아. 내가 의도한 죽음이 아니었어. 영원이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신호에 걸려 정지해 있던 찰나였다. 차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사모님! 뒤에서 불렀지만 거대한 소음에 묻혔다.

    머리맡에 헬기가 떴다. 헬기는 영원을 지나 별장이 있는 곳으로 갔다. 해안도로를 정신없이 내달렸다.

    무엇도 그녀를 멈출 수 없었다.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더군. 네가 아닌, 병원으로.’바닷바람이 안면을 갈겼다. 숙모의 음성까지 한데 섞여 혼잡스러워졌다.

    ‘오지 않을 거야. 그 애.’숨이 턱밑까지 추격했다. 거짓말, 거짓말. 헉, 헉,

    그 시각, 먼저 도착한 헬기가 대지에 착륙했다.

    구두가 풀밭을 짓이기고 땅을 딛고 섰다.

    목에서부터 길게 내려온 보호대가 다친 한쪽 팔을 감싸고 있었다.

    주양은 무미건조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깨에 걸친 슈트 상의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저택은 황량하고 쓸쓸했다.

    ‘전해줬습니다. 갔어요, 정말. 이대로 보낼 겁니까?’통화 상으로 전해 들은 장 경감의 목소리 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버림받았다고 여기고 있어요. 자기가 버려졌다고 생각한다고요!

    주양이 유려하게 잘 빠진 디자인의 담배를 입술 끝에 물었다.

    심지에 불을 붙이고 고개를 젖혔다.

    한참을 서 있는데 사람 형상이 정문 쪽에서 어른거렸다. 잔뜩 흐트러져진 영원이 주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틀 무렵 새벽의 빛 번짐이었다.

    주양의 표정에 변화가 일었다. 밑바닥을 드러내던 텅 빈 눈동자가 일순 깨어났다. 파동의 선명함이 동공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영원은 힘 풀린 다리를 움직였다.

    막 걸음마를 뗀 새끼동물처럼,

    한 발 한 발 그에게 걸어갔다.

    ‘이해해. 질릴 만도 하지. 나 같아도 이런 무책임한 여자는, 버리고 싶을 거야.’죽어가던 순간에도 살려고 발버둥 쳤다.

    행복하기를 언제나 기도했고, 이렇듯 희망을 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거짓말이다.

    그가 올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쉽게 나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고, 칙칙한 불행만 끌고 다니는 나지만, 세상에 정말 행복과 불행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내게도 겪은 불행만큼 행복이 남아 있단 소리 아닌가.

    거센 바람을 뚫고 오는 그녀를 그가 지켜봤다.

    주양에게까지 남은 거리. 다섯 발자국.

    그를 떠났던 그 거리만큼.

    절실했기에 여기까지 오기가 힘들었다.

    제 발로 그에게 돌아오기까지…… 47일.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주양을 똑바로 향했다.

    네 발, 세 발,

    두 발……

    거기서 한 발자국을 앞두고 있었다.

    “미안. 좀 늦었지.”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차지했다.

    “많이 기다렸어?”그는 대답이 없었다. 무서웠지만 꾹 참았다.

    “복수하는 거야? 내가 망신 줬다고.”“…….”“나 협박당했어. 진두영한테. 그래서 도망친 거야. 너가 싫어서가 아니었어.”“알아.”“안……다고?” 근데 보내려고 했어? 하는 원망에 그가 답했다.

    “널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어졌어.”“갑자기?”“결혼 준비하던 내내.”“그래서 이제 와 버리겠다고?”“버린 거 아냐.”“버린 거야. 나 같은 거 아무도 주워가지 않아. 네가 데려가서 사람 구실 한 거야. 근데 또 버렸어.”영원의 닭똥 같은 눈물이 턱 끝에서 뚝, 뚝, 끊어졌다.

    방귀 낀 놈이 성낸다고 먼저 도망친 주제에 화가 치밀었다.

    주양이니까 할 수 있었다. 다른 누구도 그녀의 투정 따위 들어주지 않는다.

    “너 견딜 수 있겠어?” 주양이 소리 죽여 우는 영원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물었다.

    영원은 우겨댔다.

    “내 행복이야. 왜 네가 멋대로 판단해.”영원은 20년을 속박당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 건 사는 것이 아닌 ‘견디는’ 것이었다.

    로열패밀리의 삶이 그러하듯, 규칙과 위선에 어느 정도 자유를 타협 봐야 했다. 면역이 된 주양은 이 견디는 삶에 익숙했다.

    하지만 영원은…….

    계모의 속박 아래서 삶과 주양의 아래서 삶이 똑같다면, 그녀의 탈출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의 곁에서 그녀가 온전히 바라던 완벽한 자유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두 개 다 원했다. 영원의 행복과 더불어 자신의 행복.

    그녀를 놓아주고 싶지 않다는 건 순전히 그의 욕심이다.

    그것은 주양의 행복이지 영원의 행복은 아니지 않나.

    그녀가 그의 곁에서 불행하다면 무슨 소용일까.

    “……언젠가부터 네 행복이, 내 행복이니까.”끝내 영원은 그의 품에 안겼다.

    바위처럼 묵직하게 자리하는 고백에 눈앞이 참담해졌다.

    숨이 할딱거렸다. 그가 으스러질 듯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놔주지 않겠다는 듯 팔을 감아 몸을 죄었다.

    이 남자는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해서 그녀를 울리는 걸까. 그녀를 울리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니었다. 주양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행복하게 하는 것도.

    눈물이 더 멈추질 않았다.

    그때 콕피트에서 신호가 왔다.

    오후에 내려진 태풍주의보 때문에 빨리 출발해야 한다고,

    해안선에 있던 먹구름이 지척에 드리워졌다.

    떨구고 갈세라 영원이 재빨리 주양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나도 데려가.”주양이 영원을 의구심 어린 눈길로 볼 뿐이었다.

    영원은 단호하게 결심을 피력했다.

    “네가 사는 세상으로, 날, 데려가줘.”헬기 프로펠러가 돌아갔다. 주양이 기묘한 떨림이 스친 표정을 했다.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어.

    괜찮아.

    더 이상 도망치거나, 휘둘리지 않을 거다.

    약해 빠진 신세타령은 집어치울 거다. 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됐어.”주양이 먼저 헬기에 올라탔다. 그가 위에서 손을 내밀었다.

    영원은 그 손을 기꺼이 마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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