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80화 (80/83)
  • 80화. 대단원 <3>2017.04.09.

    매향은 파르라니 잘려서 고개를 숙였다.

    주양은 일어났다. 바깥에서 알아서 의전을 해왔다.

    검사가 와서 외투를 입혀준다. 주양이 보호를 받으며 나가려다 벙 찐 매향을 돌아보았다.

    매향이 입을 달싹였다.

    그는 다 알고 있었던 거다. 신부가 어디 있는지까지도.

    “알았으면서 왜.”“…….”“굳이 휘둘릴 필요가 없지 않았나.” “…….”“그냥 신부를 구출했어도 됐을 텐데.”그는 왜 모르는 척했을까. 그때 문득 매향은 깨달았다. 주양과 눈이 마주쳤다. 어두운 눈이었다.

    ‘일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엮이게 됐다.

    청와대, 한신그룹, 태평양 일보까지. 정부와 기업과, 언론이 이해관계로 얽힌 일이었다.

    매향만을 잡는다고 끝나지 않는다.

    한꺼번에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직접 그의 손을 움직이는 방법도 있지만 의욕만으론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장기적으로 결코 현명하지 못했다.

    이중모에게 좋은 일만 해주는 꼴이 되는 것은 물론, 다시 약점만 붙잡힐 뿐이다.

    그는 진로를 틀었다. 이중모의 칼을 빌려서 처리한다.

    하지만 이중모는 속에 구렁이 아홉 마리는 키우는 인물로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주양은 바람을 잡았다. 자수였다.

    사태를 궁지에 몰아넣고 이중모를 끌어들이기로.

    실질적으로 이중모에게 매향이 위협적인 적처럼 보이게 해야 했다.

    주양이 매향 앞에 섰다. 고개 숙여 귀에 속삭였다.

    “병법에 이런 말이 있어. 차도살인. 남의 칼로 죽여라.”매향이 고개를 들었다. 주양의 눈이 형광등 불빛에 비쳤다.

    매향의 떨리는 눈에 대고 주양이 말했다.

    “넌 이 검찰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내 손이 아닌 저들 손에 죽게 될 거야.”두 장정이 매향의 양쪽에 버티고 섰다.

    매향이 끌려 나갔다. 조사실 바깥에는 윗선에서 내려온 듯한 이중모의 하수인들이 있었다.

    이거 놔! 매향은 남자들을 뿌리쳤다. 수사관의 셔츠에서 만년필을 빼내 주양에게 달려들었다.

    “죽어버려!”그녀가 만년필로 주양을 찔렀다.

    날카로운 펜촉이 어깨를 부욱, 찢고 지나갔다.

    피가 튀었다. 씨, 씨발! 저년 막아! 매향이 사람들에 의해 끌어내려졌다.

    “네게도 죄가 있어! 침묵한 죄! 넌 내 동생의 죽음을 덮은 공범이야. 넌……!”주양이 시뻘건 피 철철 흘리며 그대로 매향의 하관을 덥석 틀어쥐듯 잡아 낚아 올렸다.

    “재벌이라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 선의를 베풀어야 한다는 건 착각이야. 실례고.” “…….”“일면식 없는 네 동생을 도와야 할 이유는 또 뭐였지?”“퉤!”매향이 손을 뿌리치고 면전이 침을 뱉었다. 주양이 뺨을 문질렀다.

    그는 감정의 동요는커녕 오히려 더 살아났다.

    매향에게 똑똑히 일러주었다.

    “누가 그러던데. 그 이유가 무엇이 됐건, 한 번 살인을 하면 다른 이의 동정심을 구할 수 없다고. 한 번 살인자는 두 번째에도 살인자라고.”“…….”“신이 있다면, 나 인간은, 죽어서 지옥불구덩이로 떨어지겠지.”“…….”“하지만 용서는 빌지 않을 거야. 별로 죽은 자들한테 미안하지 않거든.”매향의 시선이 끈질기게 주양을 놓지 않았다. 주양이 계속 말했다.

    “너와 나의 차이점은, ……난, 내 죄를 아주 뻔뻔하게 인식하면서 또다시 죄를 짓는다는 거고, 너는, 네 죄를 대단한 명분으로 포장한다는 데 죄가 있어.”“…….”“알면서 죄짓는 새끼가 나쁜 걸까. 남을 죽인 주제에, 이러쿵저러쿵, 변명하는 새끼가 더 나쁜 걸까.”신랄한 비판에 매향이 움찔했다.

    매향 역시 사람을 죽였다. 그들은 다를 게 없는 똑같은 입장이었다. 주양이 스산히 웃었다.

    “상대적인 거 아냐?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인간은 각자 신념을 갖고 자신의 것을 지키지. 하지만 곧 그게 정의는 아냐.”“…….”“정의로운 척하지 마. 너 역시, 자신의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신영원의 고통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나.”매향은 동생의 죽음에 분개했을 뿐, 정의로운 건 아니었다.

    매향도 영원이 학대를 당하며, 고통 받는다는 걸 알면서 모르는 체해왔다.

    동생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영원을 쥐어짜 최혜란을 향한 복수심도 부추겼다.

    동생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영원이…… 진두영에게 협박받는다는 것도 알았으면서……

    동생이 지운 죄책감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던지기 위해…… 철처히 객관화 했다.

    주양이 동생에게 그랬듯이, 매향도 영원을 모르는 척했다.

    매향은 주양의 거센 힘에 틀어 잡혀 멱살이 덜렁거렸다.

    주양이 처음으로 화를 내보였다.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힘겨워 보였다.

    “너도 로맨스 해. 나도 로맨스 할 테니.”주양이 섬뜩하게 선전포고했다.

    매향의 주양을 향한 복수가, 현재,

    매향을 향해 있는 주양의 분노와 무엇이 다른가.

    *

    <속보입니다. 한 한신그룹 진주양 씨 사건이 협박에 의한 거짓 자백임이 밝혀졌습니다. 지난 5월. 서울지방경찰서 형사과 1팀은 결혼식장에서 신부 신씨가 괴한에게 납치를 당해 대대적으로 수사를 해왔던 걸로 밝혔습니다. 납치범들은 현금 20억 요구했고 경찰이 그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공범 강 씨가 사고로 중태에 빠졌는데요. 경찰이 공개수사로 사건을 전환하려 하자, 신부를 억류하고 있던 다른 공범 유씨가 수사의 초점을 흐리기 위해 저와 같은 일을 신랑에게 시켰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신랑 진씨는 협박범의 지시에 따라 무리하게 수사를 중단했고, 수사 종결 후에도 협박범에서 시달려 왔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변호인은 심신상실이 불러온 허위자백임을 피력하며 고의성을 부인했습니다. ……진주양 씨는 사실상 무혐의로 풀려날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 뉴스입니다.>

    <한신그룹 신부 실종 사건의 진범이 잡혔습니다. 백운당에서 일하던 접대녀 유씨가 백운당 사장의 내연남 강씨와 모의하여 신부 납치에 가담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접대녀 유씨가 검찰 대질신문 도중 신랑에게 상해를 입히고 도주하다 잡혔습니다. 유씨가 직접 범행을 주도한 교사범인지, 조력자인지의 여부를 검찰은 집중조사 중에 있습니다.>

    <……방금 들어온 소식 입니다. 심문을 받던 유씨가 서울중앙지검 청사 4층 화장실에서 목을 매달고 숨졌습니다. 심리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고 관계자는 밟혔습니다. 뚜렷한 납치 정황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범인이 사망하여 수사는 난항에 빠지게 됐습니다. 현재 검찰의 허술한 피의자 관리에 비판이 일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수사를 담당 지휘했던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 현기영 과장의 브리핑 영상입니다.>

    “아.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 유씨의 차명계좌로 거액의 돈이 몇 차례 입금된 정황을 잡았습니다. 외부에서 돈이 흘러들어간 흔적이 있고, 단독범행이라기엔 준비가 철저했던 점, 경찰의 전방위적인 수사망을 교묘히 빠져나갔던 것을 미루어, 유씨에게 또 다른 조력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 유씨 역시 하수인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게 현재 검경찰의 입장입니다.”한 기자가 타이핑을 멈추고 물었다.

    “숨겨진 배후가 더 있다는 말씀이십니까?”“그렇습니다.”“한신그룹과 경쟁 혹은 원한 관계일까요?” “그것은 수사를 더 진행해봐야 알겠습니다.” “그럼 진주양 씨의 약취 감금 혐의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약취 감금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하지만 감금이 아니라기엔 의문점이 많이 남는데요. 실제로 죽은 신해수 씨가 동생 신영원 씨의 이름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만약 찔리는 것이 없었다면, 어째서 이름을 바꿔 결혼식을 하고 병원에 입원시킨 거죠?”“일단, 경찰은 납치된 신부를 찾는 데 주력할 방침입니다. 신부의 생사가 달린 문제고, 수사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그러자 우르르 기자들이 달라붙었다.

    “대답을 회피하시는 건가요?”“한신그룹에서 외압이 있었습니까?”“납치범이 갑작스레 사망한 것에 국정원이 개입되었다는 의심스런 눈초리가 있습니다!”  현기영은 수세에 몰렸다.

    기자들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말장난에 납득하지 못했다.

    그때 대회의실에 경찰 관계가자 들어와 현기영의 문답 종이를 바꿔주었다.

    현기영이 눈짓으로 뭐야? 하고 묻자 한신그룹에서 보낸 보도자료라고 답했다.

    A4 종이엔 아주 짤막한 한 문장이 타이핑되어 있었다.

    기자들이 궁금해야 할 내용이었다.

    현기영은 적힌 내용 그대로 읽었다.

    “지금 물으신 질문에 관해서는, 신부를 찾은 뒤, 차후, 한신그룹 차원에서 따로 기자회견을 열어 소명할 것입니다.”현기영이 단상에서 내려오자마자 기자들이 들고 일어섰다.

    잠시만요! 좀 더 말씀해주세요!

    *

    그 시간 검찰청 앞.

    “저기다! 나온다!”진을 치고 기다리던 기자들이 일제히 한 곳을 향해 달려갔다.

    주양이 들것에 실려 나오자 카메라 플래시가 정신없이 터졌다.

    기자들이 실려 가는 주양을 미친 듯이 찍었다.

    하얀 시트가 피로 난자돼 있었다. 다량의 피가 흘렀다.

    기자들이 놀란 얼굴로 길목을 가로막았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미안합니다! 비켜주세요!” “이 모든 게 신부님 실종과 관련된 거라던데. 현재 심경 한마디 부탁합니다!”“환자가 출혈이 심합니다! 흉기에 찔려 위중한 상태입니다.” 흉기에 찔려? 기자들이 기삿감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진주양, 칼에 찔림. 현재 위중한 상태. 중태에 빠질 수도.

    만년필이 흉기로, 흉기가 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플래시가 주양의 얼굴을 마구 찍었다.

    호흡기에 의존하는 주양의 파리한 안색,

    대질신문 도중 협박범에게 상채를 입고 병원에 후송되는 한신의 후계자.

    내일 아침 대서특필될 사진이었다.

    이미 한신 쪽에서 신문사에 헤드라인까지 뽑아 전달된 상태였다.

    <신부를 잃고 슬픔에 잠긴 비운의 왕자.>

    후송차량이 닫혔다. 기자들이 멀어졌다. 구급차 안이 조용해졌다.

    양 비서가 주양에게 말했다.

    “이사님, 일어나셔도 됩니다.”주양이 눈을 떴다. 밤샘조사를 마치고 흉기에 찔렸다고 생각할 수 없는 차분함이었다.

    “기사는.”“인터뷰 영상도 완전히 확보됐겠다, 취재 앵커 입도 단단히 막아놨습니다. 경찰이 숙모님이 계시는 곳을 추적하고 있습니다.”주양이 드레스셔츠 단추를 풀었다.

    기자들에게 떠벌린 것처럼은 아니었지만 어깨가 10센티 가량 찢겨나갔다.

    상처를 봉합한 부위를 붕대로 감아놨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양 비서가 준비한 새 옷으로 갈아입으며 주양이 말했다.

    “진두영이 몸져누웠겠군요. 자기 아내가 자신을 무너트리려 했을 줄이야.”“그래도 한 짓이 있으니 아내를 원망하지도 못할 겁니다. 뉘우침의 의미로 녹취록을 우리 쪽에 넘긴 것 아닙니까. 다만, 신부님의 안전이 걱정돼서. 숙모님과 같이 두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요?”“숙모는 천성이 악한 사람은 아닙니다. 진짜 위험한 것은 이중모입니다.” 납치를 사주하긴 했지만 여자보다 이중모한테서 격리되어 있는 편이 훨씬 안전했다.

    이중모는 이 사태를 이용하기 위해 뭔 짓이라도 할 사람이었다.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숙모의 집에 숨겨져 있는 것이 바깥으로 나오는 것보다 현명했다.

    “……이중모가 납치 사실 외에, 신부가 바뀌었다는 기사까지 내보냈습니다. 민노총 기자회견의 파장이 꽤 커서. 진보뉴스를 중심으로 지금 SNS로 다 퍼지고 있습니다. 여론이 안 좋습니다.”“이중모가 약속을 지킬 위인이 아니라는 건, 짐작했던 일입니다.”그렇게 필사적으로 막았는데. 그것만은.

    사람들은 평생 입방아를 찧을 것이다.

    언니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할 것이다.

    그들이 손가락질 당하는 동안 신해수는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남겠지.

    남자에게 버림받은 충격에 미쳐서 정신병원에 갇힌.

    양 비서가 귀띔했다.

    “다음 행선지를 어디로 할까요.”“…….”“지금쯤이면 장 경감이 수습하고도 남을 시간인데.”“…….”“신부님께 가시겠습니까? 병원으로 갈까요?”주양이 양 비서를 돌아봤다.

    병원과 영원. 둘 중 당연히 영원일 거라 여겼다.

    양 비서는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주양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사님?” 영원이 사라지고 그녀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여기까지 달려왔다. 그 뒤엔? 그녀를 찾은 뒤엔? 생각해보지 않았다.

    ‘두 개 다 가질 수 없어. 하나를 가지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해.’그가 갖고 싶은 것은 영원뿐이었다. ‘그의 곁’에서 ‘행복’한 영원.

    “두 개 다 원하면, 양심 없는 겁니까?”“진두영 사장의 말 따위, 괘념치 마십시오.”하지만 두 개가 공존할 수 없다면 끝에 가서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지 역시, 그의 숙제였다.

    주양은 품에 간직하고 있던 사진을 꺼냈다.

    구겨진 초음파 사진은 형체도 뭣도 없는 거지만.

    오래도록.

    아주 긴 긴 시간동안.

    들여다보았다.

    *

    -실종 47일째

    장 경감은 드러누운 채 망원경으로 별장의 동태를 살폈다.

    며칠째 감감무소식이었다.

    오늘도 어제처럼 여의사가 왔다 갔다. 여의사는 전공이 산부인과였다.

    ‘그렇다는 건 신영원이 저기 있는 건데.’ 숙모 쪽에서 영원을 해치려는 낌새는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장 경감은 현재 대기 상태였다.

    휴대폰을 만지작댔다. 인터넷이 시끄러웠다. 검색어에 온통 한신 진주양으로 도배가 됐다.

    가짜 신부 사실이 실시간 이슈로 퍼올라가졌다.

    현재 신부는 납치된 상태로 그 신부가 알려진 것과 다른 여자였다는 것,

    주양이 신부의 여동생과 결혼을 했다는 것이 골자였다.

    인터넷 상에서 네티즌들이 들끓었다.

    [신부가 언니가 아니라 동생이었다는 거야? 근데 언니 이름으로 동생이 결혼을 했다고? 뭔 개막장.][자매 싸움에서 언니가 진 거네. 그래서 쥐도 새도 모르게 정신병원에 갇힌 거야.][근데 납치됐다는 건 또 뭐야?][집안싸움이네.][무섭다, 무서워. 납치극도 다 쇼 아냐?]강력하게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그때, 무전이 울렸다.

    -기태입니다. 차가 들어서는데요?장 경감이 망원렌즈로 막 별장으로 진입하던 차 번호판을 확대했다.

    미행을 붙여놨던 숙모의 차가 확실했다. 드디어 뜬 것이다.

    장 경감은 얼른 수진과 기태에게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현기영에게 수사지원 요청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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