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대단원 <1>2017.04.02.
-실종 47일째
영원은 눈을 떴다.
10평이나 되는 큰 방이었다. 이곳 저택의 규모를 짐작케 했다.
발을 내디딘 바닥이 따뜻했다. 관리인이 있는 걸까.
매향이 그녀를 이곳에 데려다 놓고 간 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열흘 가까이 된 것 같았다.
매향 대신 그녀를 찾아온 건 여의사였다.
그간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절박유산의 위험이 있다며 여의사가 매일같이 왕진을 왔다.
침대에서 절대로 걸어 나오지 못하게 했다.
‘꼼짝도 하지 마세요. 그렇게 방치됐으면서 아이가 유산되지 않은 건, 하늘이 도운 줄 알아요. 정말 위험합니다.’그렇게 며칠이 흐르자 건강이 조금 회복됐다.
영원은 문고리를 돌렸다. 단단하게 걸어 잠겨 있던 문고리 걸쇠가 풀렸다.
처음 방 밖으로 나왔다.
낯선 저택을 둘러보다가 바깥으로 나오자 파도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해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해안에 지어진 집, 그리고 벤치.
그곳에 앉아 있는 여자.
매향보다 가녀리고 몸집이 작은 여자였다.
누굴까.
기척을 느꼈는지 상대가 먼저 돌아봤다.
아는 얼굴이었다.
진두영의 아내.
주양의 숙모가 거기에 앉아 있었다.
*
매향은 자신의 집을 정리했다. 벽에 붙어 있던 스크랩 기사들까지 하나씩 떼었다. 대게 여종업원 죽음에 관련된 사람들의 기사였다.
최혜란, 대산물산 김 회장, 이중모. 그리고 진주양.
최혜란과 대산 김 회장의 얼굴엔 X자 표시가 돼 있다.
이중모와 주양만 아직 깨끗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매향은 매직을 들어 주양의 얼굴에 X자를 그렸다.
그녀는 모든 증거를 인멸시키고 서류들을 챙겼다.
검찰청으로 향했다.
오늘 검찰에서 살인을 자백한 주양을 기소하는 날이었다.
자신은 그의 변호사로 참석하게 될 것이다.
긴 긴 싸움 끝에 드디어 진주양까지 왔다.
오직 ‘한 사람’에게 닿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 닿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진주양은 본론이 아니었다.
최종 보스에게 가기 위해, 최혜란, 김 회장처럼 치워야 할 마지막 중간 보스일 뿐이다.
매향은 주양을 독대했던 며칠 전을 회상했다.
.
.
.
한강고수부지. 차 안.
“강호운을 뒤에서 조종한 배후를 알아냈습니다.”“…….”“진짜 납치를 사주한 배후 말입니다.”매향의 말에 주양이 흥미로운 눈빛을 띠었다.
“누굽니까. 그게.”“진두영은 신부 납치의 배후가 아니었습니다. 숙모님이셨습니다.”예상했던 대로 주양은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이미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주양은 숙모가 범인인 것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진두영과 숙모 둘 중에서 저울질하다가 어느 순간, 숙모로 짐작하게 됐을 거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태평양 일보를 치지 않았다.
‘신부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나설 수 없다 이건가.’신부의 목숨과도 직결된 일이었다.
영원은 쭉 강호운과 함께였고, 매향이 데리고 온 것도 이제 사흘 정도.
진주양이 영원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찾아야 하는 숙모의 내부자도 있었다.
그들이 찾는 내부자, 배신자는 바로 매향이었다.
우연한 계기로 얽혔다.
숙모라는 여자는 진두영과 이혼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매향은 남편을 향한 복수, 그 지점을 건드렸다.
숙모와 납치 계획을 꾸몄다.
그러나 자신은 철저히 흔적을 지웠다.
동생의 복수를 위해 주양에게 아직 더 옆에 붙어 있어야 했다.
때마침, 우연히 주양과 양 비서와의 대화를 엿듣게 됐다.
그들은 배신자를 속아내기 위해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얼마 후, 매향에게 지시가 떨어졌다.
진두영 쪽에 이중첩자로 건너가 배신자 노릇하라는 것.
숙모를 의심하면서 진두영에게 붙으라니. 그녀를 시험하는 것이다.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만약 그녀가 숙모가 보낸 사람이라면 배후를 감춰주기 위해서 진두영에게 누명을 씌웠을 테니까.
“숙모님께서 꽤 준비를 철저하게 하신 모양입니다. 그럴 만도 하죠. 보통 불륜을 저지른 남편 탓보다, 불륜녀 머리채를 뜯는 게 여자들 심리 아닙니까.” 어차피 그 여자와도 서로 원하는 것을 위해 손잡은 전략적 관계였다.
진주양의 손바닥 같은 대한민국에서 혼자서 신부를 감추는 건 무리였다.
돈과 권력이 있는 한패가 필요했다.
이대로 그 여자한테 다 뒤집어씌우고 빠져나갈까?
진주양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게 걸렸다.
주양이 짧게 입술을 달싹였다.
“위치는?”매향은 긴장감 속에 답했다.
“위치는…….”허름한 지하방에서 영원의 죽어가던 모습이 눈앞을 가렸다.
‘왜 내 얘기 말 안 했어? 진주양 모르던데. 암것도.’ 알고 있다, 영원이 왜 자신을 감춰주었는지.
진주양은 판단력을 빠르고 마인드맵처럼 넓게 퍼트리는 남자였다.
여종업원의 죽음은 분명 진주양도 간접적이지만 관련이 있었다.
잠재적 배신자를 근처에 놔둘 리 없다.
‘너도 언제까지 복수에 얽매여 살 순 없잖아.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겠어……? 고통도, 분노도.’영원은 매향이 행복해지기를 바랐던 거다. 과거를 잊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를.
주먹이 쥐어졌다.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딴 것.
버젓이 동생을 죽인 놈들이 살아 있는데.
영원이 미웠다. 많이 원망스러웠다.
영원은 이런 자신을 싫게 만들었다.
매향은 죄책감을 누르고 답했다.
“아직 신부님이 계신 곳까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거짓말이 목에 가시처럼 걸리는가. 목이 메었다.
매향은 얼른 이슈를 돌렸다.
“내부자 말입니다.”“…….”“이런 말씀 드리기 그렇지만, 양 비서가 수상합니다.”매향이 백에서 꺼낸 초음파 사진을 내밀었다.
“양 비서 개인 소지품 함에서 발견했습니다. 양 비서는 여자관계가 깨끗합니다. 임산부의 초음파 사진이라니. 시기적절하지 않습니까?”“양 비서가 숙모와 공모라도 했다는 말입니까.”“보시죠. 강호운 씨가 이사님께 남긴 초음파 사진과 동일한 것입니다.” 두 개는 비교할 필요 없이 동일했다.
양 비서의 소지품에서 나왔다는 것은 사실 매향이 간직하고 있던 것이었다.
아무도 영원의 임신 사실을 몰랐을 때 갑작스럽게 영원이 쓰러졌다.
호운에게 연락을 받고 의료보험 없이 진료 가능한 의사를 매수해야 했다.
혹시 협박용으로 쓰일까, 하나를 더 받아놨는데 이렇게 쓰일 줄이야.
매향이 주양의 눈치를 살폈다.
양 비서는 내내 걸림돌이 됐다.
적어도 뭔가 확실하게 나오기 전까지 진주양이 양 비서를 멀리하겠지.
하지만 도리어 독이 되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됐다.
문제는 주양의 양 비서에 대한 신뢰도였다.
오히려 고자질하는 것처럼 보여 매향이 미운 털 박히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은 몸 사리기보단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다.
주양은 침묵했다. 갈등하는 끝에 그가 말했다.
“이중모 쪽에서 아마 이슈를 환기시키기 위해, 신부 문건을 이용할 것 같아요. 가짜 신부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은 우리 셋밖에 없죠.”주양, 매향, 양 비서.
이중모는 민노총에서 친인척 비리 기자회견을 환기시킬 다른 큰 사건이 필요했다.
아마 이렇게 주양을 살인 쪽으로 주양을 몰아가다가, 신부 납치 사건을 매스컴에 흘릴 거다.
그리고 가짜 신부의 내막도 하나씩 단계적으로 터트리겠지.
그사이 이중모 자신의 친인척 비리는 흐지부지될 것이다.
“내가 신해수를 정신병원에 감금하고, 살인했다는 식으로 몰아갈 텐데, 대책이 있습니까?” “일단, 검찰의 요구대로 허위자백을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당장 이중모를 틀어쥘 건수가 없으니.”“이중모의 약점이라…….”“무죄 방면될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이 계신 곳은 제가 찾고 있으니까. 양 비서도 예의 주시하겠습니다.”보고는 끝났다. 매향은 곧장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더 할 말이 남은 모습에 주양의 눈초리가 매향에게 가 닿았다.
지금이었다. 지금……. 매향은 꾹 참고 있던 말을 했다.
“한신에 훨씬 쟁쟁한 선배들이 계신 거 압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저보다 잘 꿰뚫고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제가 변호사라는 걸 이용하세요. 이사님의 변호를 맡고 싶습니다. 제게, 팀을 꾸려주십시오.”그런 매향을 주양이 주의 깊게 봤다.
믿을 만한 인재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가 고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고지가 앞이었다. 변호사의 자격으로, 진주양에게 유죄판결을 끌어낼 것이다.
신부가 자신을 떠나고, 믿고 있던 심복인 양 비서가 납치 사건의 공범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진주양이 사람이라면 외로움과 위태로움에 기댈 누군가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매향 자신이 되어야 했다.
진주양은 자신이 뱀의 아가리로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내게 자신의 모든 걸 맡기리라.
매향은 비열하게 웃었다.
*
매향이 떠난 후, 기사가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주양은 54층으로 가자고 했다.
집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서 소란이 일었다.
보안 담당자와 짧은 통화를 끝내자마자 장 경감이 펜트하우스로 들이닥쳤다.
“터무니없이 자수라니! 대체 제정신입니까?” 장 경감이 숨을 헐떡였다. 낮에 속보를 보고 바로 달려오는 길이었다.
“나를 경찰에 신고하지 못해서 안달 났던 사람은 그쪽 아니었나?”주양의 말에 장 경감이 어버버 했다.
물론, 한때 그렇긴 했지만. 그래도.
주양을 다그치려던 장 경감의 시선이 테이블에 놓인 신문에 갔다.
<위기의 한신그룹. 이 치정 스캔들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신문 1면 커다란 헤드라인이 그를 사로잡았다.
내일 자 발표될 태평양 일보 신문 기사였다.
거기엔 울면서 남편의 부정을 고백 아내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지금 현 한신그룹 사태. 납치감금에 관한 내막.
신부가 결혼식 직전까지 진두영에게 협박당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바로 진두영 아내의 입을 통해서.
현재, 모든 신문사는 엠바고 걸린 상태였다.
기자들이 정신병원에서 죽은 여자를 신영원으로 알고 있었다.
그 언니인 신해수라는 걸 알아내고 신부 실종까지 파고들어 모든 억측과 루머가 쏟아내는 건 시간문제였다.
가장 먼저 주양이 검찰 출두한 사실을 앞장서 터트린 것은 태평양 일보였다.
한신그룹이 줄 후폭풍이 무섭지 않은 신문사가 어딘가 했더니.
사돈네 회사였다.
모든 정황들을 짜깁기한 끝에 장 경감은 하나의 답을 내렸다.
“진두영은 몸통이 아니야.”“…….”“그 뒤에 숨어 있는 다른 누군가.”주양의 뒷모습을 보며 장 경감이 다가갔다.
“사실 그럴 만한 동기는 제일 많지만 이제껏 누구의 의심도 사지 못했던 인물. 선량한 얼굴로, 모두가 진두영을 범인으로 의심할 수 있게 단초를 제공한 인물.”“…….”“진두영의 아내.”“…….”“당신의 숙모.” 장 경감이 숙모의 얼굴이 찍힌 신문을 내밀었다.
주양은 예리하게 정면을 주시했다.
실부가 실종되고 진두영과 식사했던 그날, 숙모는 문 밖에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장 경감이 끼어들었다.
“당신 숙모는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 겁니까?”“나에 대한 원한, 남편에 대한 복수심이었겠죠.”힘겹게 아들을 낳았으나, 남편이 다른 여자한테 정신 팔렸다.
그 바람에 일을 그르쳐 회장의 눈 밖에 나고, 주양은 남편이 마음을 빼앗겼던 그 여자를 아내로 들인다니.
꺼림칙하고 불편할 수밖에.
장 경감은 숙모라는 여자의 이미지를 대충 떠올려봤다.
고생 없이 자란 부잣집 딸답게 여자들 모임 좋아하고, 허영이 있었다.
경찰 진술 때도 전혀 의심받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배후라니? 그 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여자는 아닌 것 같아 보였는데?
매향.
유선민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했다면 가능하다.
숙모는 자금을 대주는 역할이었다.
남편이 미쳐버린 신영원이 멀리 떠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마침 신영원은 결혼식장에서 제 발로 나갔다.
강호운에게 접근해서 둘이 밀항할 수 있게 자금을 대줬던 거겠지.
신영원이 이 땅에서 사라지면 남편을 신부 납치범으로 몰아갈 생각이었을까?
‘정신병원에서 신해수를 탈출시킨 것도 그런 이유였어!’신해수는 신영원이 그날 실종된 신부라는 걸 증명해줄 유일한 증인이니까.
그러나 일이 꼬여버린 걸까?
신영원이 뜻하지 않게 임신을 했고, 강호운은 혼수상태가 되었고,
신해수는 죽었다.
지금, 신영원은 숙모가 데리고 있을 것이다.
단순 납치로는 남편에게 중죄를 물을 수 없다.
어차피 신해수는 죽었고, 공식적인 신부도 그녀였으니까.
강호운에게 시켜 신부가 납치 끝에 살해당한 것처럼 둔갑시켰던 위인이었다. 컨테이너 안에서.
남편을 납치살인으로 몰 계획을 하고 있다면?
영원한 증거인멸을 위해 진짜 신부인 신영원을 다시 죽일 수도 있다.
주양은 등을 보였다. 주양은 사태의 심각성과 다르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장 경감은 답답했다.
“유선민과 숙모가 계략을 짠 거라면, 범인이 나왔는데 왜 이러고 있는 겁니까.” 주양이 54층 야경을 응시하며 장 경감에게 물었다.
“뭐가 보입니까.”또 그 소리다.
“저게 뭐 같습니까.”장경감이 그 아래를 보았다. 빽빽한 도심.
깨알 같은 크기의 자동차와 사람들이 한데 뒤얽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얽힌 이 사건처럼.
주양이 쪽지를 주었다. 그건 어느 집 주소였다.
“이건…….”“나는 가지 못할 것 같아요. 내가 검찰 조사를 받는 동안, 당신이 그녀를 찾아줘요.”“……!”신부가 있는 장소였다.
그는 신부의 위치를
…… 이미 알고 있었다.
*
장영범이 떠난 뒤 주양은 서재에 섰다.
유리창에 서서 금빛 대교를 봤다.
야경과 검은 물결이 죽음보다 더 깊은 냄새를 풍겼다.
낮에 검사 강규웅과 있던 일이 떠올랐다.
먼저 안달이 나서 물은 건 강규웅이었다.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나야 위에서 시킨 대로, 정석대로 수사하지만 당신은 뭔데.’자수를 한 주양의 의도를 읽을 수 없던 것이다.
‘검찰에서 치기 전에 미리 선수 친 거다, 정상참작을 위한 노림수다, 난 그딴 거 안 믿어요. 대체 꿍꿍이가 뭡니까?’꿍꿍이. 물론 꿍꿍이가 있다.
하지만 일개 부장검사하고 노닥거릴 내용은 아니고.
주양은 서재 전경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책상 서랍을 열었다. 휴대폰 한 개, 그리고 피 묻은 초음파 사진이 나왔다.
낮에 매향에게 받은 초음파 사진과 비교했다.
두 사진은 한날한시에 나온 것임을 증명하듯 아기집의 형태, 시각과 날짜가 모두 일치했다.
주양은 그걸 응시하다 다시 서랍으로 손을 뻗었다.
사진과 같이 있던 차명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1번 단축키를 눌렀다. 곧바로 전화기는 어딘가로 연결이 됐다.
휴대폰에는 딱 하나의 번호만 저장돼 있었다.
다섯 번의 신호음 끝에,
달칵.
“…….”수화기엔 침묵만 감돌았다.
상대가 전화를 받지만 답변은 안 돌아온다.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않는 침묵 속에 먼저 예의를 차린 건 이중모였다.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진 말게. 자네야 벌금 좀 때려 박고, 도의적인 책임에서 아랫것들 물갈이 하는 수준에서 끝내면 되지만, 난, 취임하자마자 친인척 비리 터지면, 남은 5년, 그걸로 발목 잡혀 질질 끌려 다니겠지. 레임덕을 앞당길 수도 있는 빌미를, 걍 놔둘 순 없지 않나. 내 체면 좀 살려줘.”“…….”“민노총 간부가 잠적하는 바람에 골치가 아파졌어. 시간 좀 끌다가 해외에 있는 가족들 붙잡고 겁박 좀 해주면, 자진해서 나오겠지. 그때면 국민적 관심도 사라질 테고, 자네는 내가 어떻게든 법무부 움직여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 나게 해줄 거야. 이미 시나리오 다 뽑아놨어. 편안히 휴가 간다고 생각하고 쉬다 오기만 해.”주양은 비웃음이 샜다. 그 말을 믿을 줄 알고.
이중모는 한신과 절대 인연을 끊을 수 없다.
돈이란 게 그렇지 않나. 정치인은 돈을 벌지 않는다.
돈은 기업가가 벌고 정치인은 후원을 받는다.
주양이 실형을 살게 되면 한신엔 오너 일가의 공백을 채울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게 된다.
진두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제 입맛대로 움직여주지도 않고, 다루기도 힘든 주양은 잘라내고, 조금 어설픈 진두영을 한신 오너에 앉혀 퇴임 후에도 재단 운영을 운운하며 한신을 자기 식대로 주무르려고.
5년짜리 대통령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것이지.
주양이 회의적으로 답했다.
“누울 자리도 보고 뻗어야 하죠. 기업인 뒤가 구린 거야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저야, 몰매 한 번 맞고 끝날 일이지만, 각하의 안위가 우려돼서.”“내가?”“강 검사가 말해서 저도 오늘 알았습니다. 대산 김 회장을 처리한 게 각하가 아니더군요?”느닷없는 죽은 김 회장 이야기에 이중모가 발끈했다.
“이봐, 이봐. 지금 무슨 소리야? 수세에 몰리니까 어떻게든 나도 도매금으로 엮으려고 수작 부리는 거 같은데…….”“우려가 돼서 하는 얘기입니다. 저는 김 회장을 죽이지 않았거든요.”갑작스런 진실게임이 이중모를 혼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이중모가 새까만 정적 끝에 되물었다.
“자네가 죽이지…… 않았다고?”죽일 이유가 없지. 주양은 슬며시 웃음기를 띄웠다.
김 회장은 이중모를 틀어쥘 목줄이었다.
김 회장을 죽이면 이중모는 더 이상 주양에게 속박당할 것 없이 활개를 칠 텐데.
굳이 주양이 나서서 김 회장을 없앨 이유가 없지 않나.
손에 피를 묻히면서까지.
“저는 오히려 각하 쪽에서 김 회장에게 손을 댄 줄 알았는데. 반응을 보아하니, 아닌가 보군요?”
주양이 능청스럽게 목소리 끝을 올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상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자, 자네가 아니라고?”“각하도 아니고요.”“자네도 아니고, 진두영도 아니고. 그럼……, 그럼 누가 김 회장을 죽였다는 거야?”“…….”“이 친구야!”“5년 전, 죽은 여종업원에게 혈육이 있더군요.”이중모가 벙어리가 됐다.
주양은 커다란 중역의자에 몸을 실었다.
허리를 한껏 펴며 느긋이 본론을 시작했다.
“성 씨가 달라 설마 했습니다. 의도적으로 접근한 게 아닌가 싶어요. 기밀을 빼돌려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 것도 그렇고.”검찰에 신부의 비밀을 투서한 장본인은 진두영이 아니었다.
진두영은 그런 척했을 뿐이고, 주양도 그렇게 믿는 척 연기했다.
‘범인’은 진두영과 숙모의 뒤에 숨은 아주 신중한 인물이었다.
이중모에게서 한신그룹이란 거대 자본을 끊어내려고 하고 있다.
주양과 이중모를 이간질시키려는 수가 뻔히 보였다.
결국에 이 모든 계획은 이중모의 날개를 꺾어놓고, 이중모를 칠 과정의 하나일 뿐이었다.
다급해진 이중모가 산만해진 정신을 수습했다.
“나한테 복수를 하려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거야? 한신 전략실 기밀을 빼돌릴 정도라면, 자네 측근이라는 소리밖에 더 있어?”“뒤에서 우릴 갖고 장난질을 쳤던 모양이에요.”“그러니까 대체 누구?! 양 비서?”“유선민. 아니. 김 총리가 총애하던 매향이라면 아실까.”“매향이라면…….”“지금은 한신 법무팀 소속, 제 담당 변호인입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매향은 변호인이 되게 해달라고 요구해왔고,
주양은 그것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 의미를 알아들은 이중모가 침을 삼켰다.
주양이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각하. 각하께서 공격당하지 않는 건 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라는 벽이, 막아주고 있기 때문이죠.” 주양이 한 자 한 자 명료하게 밝혔다.
이중모는 침묵했다.
“근데, 지금, 혼자 살아서 도망치겠다고 자기를 지켜주던 성벽을 허물면.”섬뜩한 입놀림이 늙은 정치인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었다.
“뱀의 아가리로 돌진하는 꼴이 아닌가.”낮게 웃음 짓는 주양의 목젖이 울렸다.
모든 건 수 싸움이었다.
시장원리대로 실권자에게 정보력과 권력이 따라붙는 게 당연한 논리.
정치라는 것은 이래서 더럽고 치사했다.
아군과 적군이 구분이 안 되는 각축장.
가변적인 변수들이 항상 밑바탕에 흐르는 흙탕물.
주양이 공을 던졌으니 이중모가 응답할 차례였다.
*
그로부터 3일 뒤, 주양은 살인을 자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