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76화 (76/83)

76화. 12시의 신데렐라 <1>2017.03.26.

영원은 눈을 감았다.

안구 너머로 그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보지도 않고 완성할 수 있다.

주양의 얼굴.

똑바로 그녀를 고정시켜버리는 눈빛,

정교한 이목구비,

때로 탐욕스럽게 그녀를 데우다가도 기분이 좋을 때면 아주 가끔 매끄럽게 휘는 입술,

바닥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냉정함.

그러나 모든 한순간도 따뜻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믿기지 않았다.

어째서 자신에게 저런 남자를 허락해주었을까?

그를 떠올리면 뺨 위를 눈물이 적신다.

반대로 다른 물음이 던져졌다.

‘어째서 저 남자에게 나 같은 여자가 허락되었는가.’ 볼품없는. 불공정한 결혼.

거울 옆으로 매향이 다가왔다. 그녀가 악의 없는 순수한 칭찬을 했다.

“너무 예뻐. 영원아.”주양과 눈이 마주쳤다.

그도 조금 기쁜 기색이었다.

매향도, 양 비서도, 주양도 그때만큼 모두 진심이었다.

모두, 다 잊고 그 순간을 감동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영원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이 위선적으로 보였다.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순간, 그녀의 머리에 면사포가 씌워졌다.

얼굴이 가려졌다.

그 아름다움은 완성과 함께 가려야만 하는 운명이었으니까.

그녀는 가짜 신부니까.

면사포가 얼굴에 내려지자마자 눈물이 흘렀다.

“고마워.”그녀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고마워가 아니었다.

미안해…… 미안해……

…….

“나를 여자로, 신부로 만들어줘서 고마…….”미안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신부였다.

*

명심해,

시계 종이 자정을 알리는 순간,

마법은 사라지고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영화 <신데렐라> 中

*

-결혼 1개월 전, 영원

삭둑- 꽃꽂이용 가위가 생화 끝을 잘랐다.

가정 방문 클래스가 끝난 후였다.

차를 내온 노 집사에게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해수가 병원에 입원을 했으니 가봐야 않겠냐고.

그렇게 말했을 뿐인데. 돌연 테이블이 흔들렸다.

노 집사가 급하게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저를…… 용서해주세요.”단단한 눈초리가 노 집사의 정수리를 쬐었다.

영원은 하던 걸 내려놓았다.

누구를 용서하고, 복종 받는 데 낯설었다.

노 집사의 행동은 난센스였다.

“알다시피 해수가 병원에 장기입원 중이잖아. 병수발 들어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의견을 물었을 뿐인데. 어째서, 용서를 비는 거지……?”“아가씨, 저를 내치지 마세요.”“노 집사한테 유감 같은 거 없어.”어르는 목소리가 퍽 다정하다.

“우리, 그렇게 친한 사이 아니었잖아.”덧붙여진 말에 노 집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아, 아가씨가 모르시는 게 있어요. 저는 이 집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알고 있습니다. 해수 아가씨에 대한 거예요.”영원이 무시하고 할 일을 하자 노 집사가 빠르게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해수 아가씨는, 석녀십니다. 아기를 갖지 못하는 몸입니다.”시대가 변했다지만 여자에게 있어 외모는 여전히 가져서 나쁠 것 없는 무기다.

외모가 받혀주는 여자에겐 수많은 유혹이 따랐다.

쉽게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놔두고 고생을 자처하는 여자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런 세상에서 신해수는 특별했다.

그 예쁜 외모를 가지고도 남자들에게 기대어 살지 않으려 했던 신해수는 과연, 백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제대로 정신 박힌 멋진 여자였기 때문에.

영원은 손에 든 생화 한 송이를 봤다.

향기를 맡았다. 향기 없는 꽃…….

최혜란은 그것도 모르고 재벌가에 딸을 시집보낼 꿈을 꿨었다.

영원은 우습다는 듯 말했다.

“닥쳐.”“2차 성징이 왔어도 열여덟 살까지 생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한두 번 했나. 이미 스무 살이 왔을 때 생리가 완전히 끊겼습니다. “하지 마.”“저는, 최 사장님까지 속이며 해수 아가씨께 매달 닭 피를 구해다……, 아!”꽃을 정통으로 안면에 맞고 노 집사가 넘어갔다. 영원이 험악하게 짓씹어 말했다.

“나한테, 함부로 충성하지 마.”그 숱한 세월, 단 한 번도 굽힘 없던 노인이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자발적인 복종을 한다. 대세를 빠르게 읽는다는 방증이었다.

신해수는 끝났다.

한때 그 애를 질투했다.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 계집도, 결국 자기가 타고난 굴레를 어쩌지 못해 타협을 본 많은 계집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래. 그 계집도.

그리고 영원은 그 계집을 연기하고 있다.

그런 계집을…… 닮고 싶어…….

노 집사가 덜덜 떨며 치맛단을 부여잡았다.

“해수 아가씨는, 여성으로서 누구에게나 부러움 받았지만 정작 자신은 여자로서 살지 못했던 분입니다.”“…….”“그러니. 아가씨께서 불쌍히 여겨, 가엾이 여겨주시면.”차갑게 노 집사의 팔을 쳐냈다.

영원이 거실을 떠났다.

백화점 명품관을 올라가면 가장 먼저 직원들이 마중 나왔다.

숍 매니저들이 서로 다투어 영원을 받들었다.

부탁한 것도 아닌데 여왕 대접을 받았다.

권력의 무서움은 휘두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알아서 복종해주는데 있는 것이 아닐까.

하루 8시간 그렇게 한 달을 꼬박 서서 일해 170만 원 정도를 받는 그들에게 영원은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백화점 VIP 룸에서 차를 마시면 여직원들 이야기가 자연히 귀에 들려왔다.

“한신그룹 예비 며느리래.”“태생부터가 다른 거지. 딱 보면 고생 없이 자란 티 나잖아.”“끼리끼리 결혼한다더니. 보나마자 저 여자도 어느 그룹 금수저쯤 되겠지?”“백운당 둘째 딸이라던가? 음악 전공이래.”그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한때 자신이 그들과 다르지 않았음을.

그들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는 것.

차를 마시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나이 지긋한 상류층 사모와 눈이 마주쳤다. 직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사모가 영원을 빤히 보았다. 유심히 살피는 기색에 조심성이 묻었다.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영원은 본능적으로 챙 모자로 쥐었다. 얼른 얼굴을 가렸다.

시야가 어지러이 흔들렸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쳐댔다.

정체가 발각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불길처럼 그녀를 휩쌌다.

백운당에 왔던 손님 중 하나일까.

그렇다면 해수를 알 수도…….

혹여나 사모가 말을 걸기라도 하면, 그땐,

끝장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주변을 살폈을 때 사모는 온데간데없고, 자신만 남겨져 있었다.

처량 맞은 쥐 꼴로 떠는 볼품없는 웬 여자가.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영원이 불현듯 물었다.

“사람들이 타인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 사람의 인격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과 신고 있는 구두겠지?”“…….”“그런 의미에서 나는, 몇 점일까……?”매향이 운전하다 말고 백미러로 영원을 곁눈질했다.

“어떻게 답해주기를 원해? 수행비서로서, 친구로서?”“객관적인 입장으로.”매향이 영원을 훑었다.

영원이 해수로 연기하며 산 지 수개월.

영원은 미친 듯이 노력했다.

부족해 보이지 않게,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밴 하녀 근성이 남아 남들에게 비웃음을 살까 봐.

주양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게.

항상 자신의 몸가짐, 걸음걸이, 손짓 발짓 하나에도 우려했다.

매향은 안쓰럽게 영원을 보다가 답했다.

“지금의 넌 완벽해. 누가 봐도 재벌가 예비 며느리야.”영원은 손에 낀 반지와 팔찌, 목걸이를 매만졌다.

권력을 상징하는 것들.

흐릿한 허탈함이 영원의 뺨에 스쳤다.

아니. 나 역시 권력에 사로잡힌 노예일 뿐이다.

여직원들은 알까.

그들이 부러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던 여왕님이 사실은 빛나기 위해 짧은 다리로 버둥대는 미운오리라는 것을.

하루에도 몇 번씩, 제2의 사모, 제3의 사모의 등장에 전전긍긍하는 빛 좋은 개살구라는 것을.

하지만 해수였다면 달랐겠지.

고상한 연기로 애써 자신을 감출 필요도 없이. 해수라면……

‘진짜’ 해수였다면.

*

그가 퇴근하고 돌아오자마자 영원을 안았다.

숨의 폭이 격렬해졌다.

주양의 손바닥이 세게 그녀의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잇닿은 심장이 서로 과시하듯 쿵쾅거렸다.

그가 입술과 턱을 지나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숨 가쁘게 호흡했다. 파고든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과 엉켰다.

참을 수 없어 쥐자 그가 그녀의 팔목을 떼어 침대에 붙였다.

영원은 새벽이 눈이 떠졌다.

바닥에 흩어진 그의 옷가지를 챙기다 소매 부분을 살폈다.

딱딱하게 무언가 굳어져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핏……방울이었다.

바깥에서 묻히고 왔는지 한두 방울이 옮겨 붙어 있었다.

욕실로 가서 물에 소매를 헹궜다.

어느새 손이 제멋대로 떨리고 있었다.

빨고 또 빨았다.

창백해진 손끝이 유령 같다.

하지만 이미 깊숙이 스민 얼룩은 삶의 일부인 듯, 지워지지 않았다.

*

영원은 한적한 카페에 앉아 상대를 기다렸다.

약속시간보다 미리 나왔다.

상대는 얼마 안 되어 도착했다.

영원은 맞은편에 앉는 기척을 느꼈으면서도 무시했다.

창밖 가로수를 응시하다 목소리를 박아 넣었다.

“나, 그 사람하고 헤어지지 않을 거야.”진두영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예상한 반응이었는지 그는 싱겁게 고개를 까딱였다.

조롱이란 감정은 그토록 정직하다.

전혀 아쉬울 게 없다는 남자의 웃음이 그녀를 수세로 몰았다.

테이블 아래에 숨겨놓은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진두영에게 발각당한 것은 2주 전쯤이었다.

그날도 매향과 쇼핑을 나갔다. 영원은 보석을 살피고 있었다.

매향이 잠깐 전화를 받으러 자리를 비운 틈에 일이 일어났다.

옆에 어떤 남자 손님이 설 때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다.

‘예물로 할 만한 보석 세트 좀 볼 수 있을까요?’ 신경이 바짝 날 섰다. 익히 들어왔던 음성이었다.

나긋나긋하고, 적당히 배려가 깃들어 있는.

영원은 두영을 돌아봤다.

기나긴 정적이었다.

두영은 세트를 포장까지 해갔다. 점원에게 눈웃음을 쳤다.

‘곧 조카며느리가 들어오거든요.’견딜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녀 쪽에서 먼저 전화를 했다.

“그쪽이 뭐라고 협박하건, 나 이 결혼 못 깨. 그러니까 그렇게 알아.”영원이 가는 그때, 진두영이 발길을 붙잡았다.

“언제까지 갈 것 같은데?”전신이 뻣뻣해졌다.

“평생 네 동생인 척, 너는 그림자로 살아가야 하는데, 그럴 수 있어?”할 수 있어.

너만 아니면 할 수 있어!

“네 인생은 없고 사람들은 다 네 동생인 줄 알 텐데, 너는 그래도 상관없어?”상관없어,

내 인생이니까 상관하지 마.

제발 날 내버려둬!

비명이 안에서 질러졌다. 하지만 진두영이 한 자씩 힘주어 강조했다.

“남인 척 행세하는 삶의 유통기한이 얼마나 갈 것 같은데.”“…….”“너도 모래 위에 쌓은 모래성이라는 걸 아니까, 고통스러운, 거잖아.” “내 고통은 상관없어.” “하지만 너 때문에 고통 받을 사람이 생긴다면 문제는 달라지지.”신랄한 지적이 가감 없이 영원에게로 날아들었다.

영원은 등을 보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세상에 터트리겠다고 협박이라도 하면, 돈으로 회유되지 않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땐 어떡할래. 네 남자 어떻게 될까.”“…….”“대 한신그룹의 위상이 땅에 떨어지겠지. 그 애의 사랑은 세상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겠지. 엽기적인 스캔들이 꼬리표처럼 그 애를 따라다닐 거다.” 알고 있었다. 주양이 어떤 짓을 하는지.

주양이 처리했을 이름 모를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너 하나를 위해 걔가 지금 얼마나 무리하고 있는데.” 그저…… 신해수, 그 이름 석 자를 되찾고자 했을 뿐이었다.

내가 원했던 것은 행복이었는데.

어느 틈엔가 나는 마음을 잃고 불안과 상실감으로 가득 채워졌다.

신영원이란 이름을 버리고 신해수가 된 것이 아니라,

신영원이란 이름조차 잃은 나는, 진짜 가짜가 되어 있었다.

가짜와 함께 주양은 같이 침몰해갔다.

그를 망쳐가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이 몸서리쳐졌다.

*

영원은 찻집을 나왔다.

분명 아무도 모르게 나온 건데.

매향이 찻길에 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멍하니 인도를 보자 매향이 말했다.

“일단 타.”얌전히 매향의 말에 따랐다.

차는 한참 동안 정차되어 침묵만 감돌았다.

진두영을 만난 것을 본 건 아니겠지?

먼저 해명하려는데 매향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

“커피가 그렇게 마시고 싶었어? 새벽이슬을 밟을 정도로?”“커피?”“나한테 시키지 그랬어. 네가 독단행동을 하면 내가 곤란해진다는 거 몰라?”아. 못 봤구나.

영원은 안도감이 찾아왔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냥, 너 일도 바쁜데. 알잖아. 나 변덕 죽 끓듯 하는 거.”다시 어색한 침묵.

매향이 혀 안에서 굴러다니던 말들 중 하나를 간신히 묻는다.

“왜…… 내 얘기 말 안 했어?”“…….”“진주양 모르던데. 암것도.” “…….“내가, 널 순수한 마음으로 도우는 줄 알고 있던데.”주양에게 매향과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았다. 비밀이랄 것도 없지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매향의 동생에 대한 일도 주양은 모른다.

“너도 언제까지 복수에 얽매여 살 순 없잖아.”영원의 말에 매향이 그녀를 돌아봤다.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겠어……? 고통도, 분노도.”누구보다 잘 아니까 말할 수 있었다.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을까.

반드시 그래야 했다.

그것을 위해 여기까지 달려 왔으니까.

매향은 속안에 감추고 있던 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

영원이 결혼식을 끝내면 매향의 복수는 끝이 난다.

최혜란에겐 충분한 벌을 주었다.

매향은 타국으로 떠날 계획이었다.

영원에게 밝힌 내용대로라면.

매향이 사이드 미러로 후방을 넘겨봤다.

찻집을 나서는 이는 진두영이었다.

매향은 진두영이 차를 타고 사라지는 것까지 확인했다.

영원이 진두영을 만났다는 것은 중요한 내용이었다.

문서상으로 영원은 현재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고, 공식적으로 신부는 신해수였다.

그런데 영원이 버젓이 진두영을 만났다는 것은,

진두영이 모든 걸 알았다는 뜻.

영원의 안색이 나쁜 것과 진두영을 만난 일이 서로 연관성이 없을 수 없다는 것.

매향을 수첩을 꺼냈다.

이런 불상사를 위해 영원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위로 보고되어야 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펜을 휘갈겼다.

xx일. 오전 6시 15분. 찻집 방문.

접촉인,

없음.

만약에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영원의 말대로 시간이 해결해줄 날이 온다면,

그때 제대로 사과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매향은 차를 출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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