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버림받은 신랑 - 외전 <2>2017.03.19.
호운은 파르라니 입술을 경련시켰다.
“죄를 부추기는 게 사랑이야? 그거…… 사랑 맞아?”“…….”“당신이 하는 짓들이 그 애를 더 불행하게 만든다면, 어떡할래.”“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네가 해결방안을 내봐.”“후회할 거야. 분명.”“영원일 위한 일이 아니다. 그건 결코. 그 앤, 모질지 못해. 손에 피를 묻힌 삶을 감당할 만한 위인이 못 돼. 사랑한다면 상대의 행복부터…….”말을 하다 말고 주양이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그런 팔자 좋은 말, 너무 상식 밖이잖아?”“사랑한다면 상대의 행복부터 헤아리는 게 상식이야.”호운은 끝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온정 없는 눈길이 호운에게 가 닿았다.
잘도 시선을 되받아치는 호운이 건방져서였을까.
주양이 호운의 어깻죽지를 쥐었다. 그에게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시켜주기로 했다.
퍼억, ……퍼억!
야구 배트 같은 것이 뭔가를 내리치는 두터운 타격음이 들렸다.
지속, 다발적으로 울렸다.
퍼억!
해질녘, 백운당 가까운 산중. 한신 소속 경호업체 직원들이 한 남자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은 돌아가며 남자를 팼다.
주양은 이미 피떡이 된 우양재를 봤다.
“아랫마을 양혜슈퍼란 곳의 맏아들입니다.”우양재한테 갈취한 노트를 양 비서가 주양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약혼녀님의 일기입니다.” “이걸 어디서 얻었다고 합니까.”“자기가 직접 구한 건 아니고, 여동생이 마을 나무 아래서 주워왔다고. 안에 적힌 내용을 보고 1차로 최 사장을 협박하려고 했다가, 우연히 신부가 바뀐 걸 눈치채고 저희 쪽으로 접선해왔습니다. 그걸 빌미로 거래를 시도해 오길래, 처음 한두 번은 몇 푼 쥐여줬는데 점차 놈의 간이 배 밖으로 나와서…….”“요구한 액수가?”“10억입니다.”주양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멍하니 선 강호운을 보며 똑똑히 말을 박았다.
“요구 조건, 들어주세요.”“하지만.”“10억이면, 베트남 새우잡이 배 위에서 여생을 보내는 데에, 합당한 금액 아닙니까.”주양이 호운을 꿰뚫어 보듯 말했다.
강호운이 이를 악물었다.
양 비서가 잠시 주양을 봤지만 곧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 숙였다.
신부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이 대한민국 땅에 남아선 안 됐다.
*
강호운이 어떤 것을 말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다.
화해.
평화로운 합의.
말로써 통하는 세상.
하지만 세상이 어떤 곳인가?
지금도 호시탐탐 영원의 행복을 망치기 위해 그녀를 위협하는 피라미들이 들끓었다.
이들을 처리하지 않고 평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최혜란은 영원을 납치살해하려 했고, 냄새를 맡고 찾아온 쥐새끼들이 지금도 돈을 요구하며 비밀을 들추려 한다.
그렇다고 영원이 해결할 수 있을까.
지금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다스리는데도 벅찬 상태였다.
누군가는 현실의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
그래서 주양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시켜주기로 했다.
평화주의, 박애주의.
아마추어 같은 말만 골라서 내뱉는 놈이 얼마나 상식 밖인지.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데서 그랬다.
넌더리났다.
주양이 타워 54층으로 돌아왔다.
부엌에서 조리 도구들이 달그락댔다.
주양이 벽에 어깨를 붙이고 지켜봤다.
영원이 과도와 사과를 식탁에 가져다 놓다 그의 존재를 눈치챘다.
눈이 마주쳤다.
어색한 웃음을 지어온다.
주양은 영원의 외양을 빠르게 파악했다.
허리라인을 강조한 단정하고 우아한 A라인 원피스.
고상하게 틀어 올린 머리.
옅은 화장.
누가 봐도 잘 가꿔진 상류층 여성이었다.
주양이 손을 뻗었다.
영원은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걸어왔다.
아직도 그와 닿는 것에 부끄러워했다.
손을 뻗어 영원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녀가 이마를 그은 후 자정이 넘은 시각에 주치의가 잠옷 바람으로 달려와 처치를 했다.
다행히 덧나진 않았지만, 화장으로 완전히 가릴 수 없는 흔적이었다.
그러나 알까.
그런 건 사소한 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마를 쓱쓱 비빈 손끝이 내려와 입술을 매만졌다.
“사람들 앞에서 너무 얼굴 드러내지 마.”“아, 알아. 들키면 안 된다는 것.”금세 영원이 시무룩해졌다. 주양은 조금 웃었다.
그런 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영원이 꾸미는 것에 별로 동의하고 싶진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영원이 원해서였다.
매향은 매일 영원의 하루를 보고했다.
잠깐 바깥 외출이라도 하면 파리들이 꼬인다.
매향의 보고에는 사소한 것조차 빼먹지 않았다.
오늘은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 무얼 먹었는지.
보고서에는 그녀가 하루 동안 마주친 사람들도 기록됐다.
주위에 따라붙는 수상한 자는 없는지. 어떤 사람이 영원에게 말을 걸었는지. 그저 길을 묻는 행인일지라도.
영원은 알까. 보고서에 적힌 대다수가 남자들이었다는 것.
“기껏 세팅했는데 보여주고 싶어서. 우리 며칠 동안 못 봤잖아.”그가 요즘 바빴다.
“어때? 매향도, 강호운도, 머리 올리니까 더 낫다고 해서.” “강호운을…… 만나?”“그럴 수밖에. 그 자식 요새 백운당에 들어앉았는걸.”“놈을 믿어?”“어?”“얼굴도 보여줄 만큼?”주양의 차가운 어조에 영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차피…… 내가 아니어도 최혜란이 선수 쳤을 거야.”영원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영원이 가짜 신부라는 것은 비밀이었다.
그런데 강호운은 알고 있었다.
한 발짝 벌려 놨다 싶으면 또 다시 거리를 좁힌다.
항상 거슬렸다. 그토록 당당하던 놈의 모습.
‘당신이 하는 짓들이 그 애 더 불행하게 만든다면, 어떡할래.’주양이 영원을 위해 한 일들엔 타당성이 있었다.
근데 어째서일까.
일견 맞는 것은 강호운이고, 주양이 틀린 것처럼 느껴졌다.
강호운이 영원에 대한 아는 것은 주양이 인위적으로 수집한 영원의 보고서들보다 많을 것이다.
주양이 모르는 영원의 과거를 공유한 유일한 남자였다.
영원에 대해 다 안다고 지껄이는 것이 놈이기 때문에 화가 치밀었다.
‘죄를 부추기는 게 사랑이야? 그거……… 사랑 맞아?’마치 주양이 사랑 따윈 할 줄 모르는, 사랑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는 말 같아서.
‘사랑한다면, 상대의 행복부터 헤아리는 게 상식이야.’그에겐 누구를 사랑할, 자격이 없다는 말처럼 들려서.
상대의 행복이라니.
그럼 주양이 지금 하고 있는 이 짓들은 상대의 행복을 위한 일들이 아니라는 건가?
그가 사람을 패고, 손을 더럽히고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이 모든 것들이 그녀를 위한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잘못된 방식?
그냥 영원이 복수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영원이 고통스러워하니까,
영원의 고통이 빨리 아물 수 있도록 도와준 것뿐인데.
상대가 원하는 걸 들어주는 게 사랑이 아냐?
사랑하니까, 좋아하니까.
상대가 아픈 걸 보고 싶지 않으니까……
……
그런데…… 이게 잘못된 건가.
남들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해주지 않나.
주양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방식 따위.
주양이 영원을 넘어트렸다. 식탁 위에 드러눕히고 키스를 퍼부었다.
손목을 머리 위로 포박하고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들었다. 거칠게 가슴팍이 들썩였다.
주양이 고개를 들었다. 사과 깎던 과도가 손에 잡혔다. 영원에게 위협적으로 칼을 들여 보였다.
“인간에게 영혼이 없다는 거에 대해 넌 어떻게 생각해?”칼이 영원의 허벅지쯤에 닿았다. 칼끝으로 치맛단을 들췄다.
주양이 가볍게 언행을 했다.
“영혼이 없으면 여러모로 편리한 점들이 많아. 죄책감 갖지 않고 너 같은 건 몇 번이고 가지고 놀다 버릴 수 있지.” 작정하고 내뱉은 말들이었다.
그녀를 일부러 상처 주는 말들.
갑작스런 상황에 예쁜 영원의 눈에 혼란이 가득해졌다.
그것도 잠시였다. 영원이 그의 손에서 칼자루를 빼앗아 던졌다.
주양은 굳어버렸다.
무서워하는 기색도 없이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려온다.
“왜 그래……? 일이 고돼서 그래?”그를 걱정스레 보더니 소파로 끌고 간다.
주양은 무력하게 딸려갔다.
“열은 안 나는 것 같은데.”이리저리 살피고 만지고는 손길이 다정하다.
그가 소파에 늘어졌다. 위협해도 아무렇지 않게 그를 터치해오는 여자에게 극심한 벽을 느꼈다.
막막함.
동물이 이빨을 드러내는 것은 무서울 때였다.
무섭지만 강한 척하는 것. 영원은 그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그녀가 무서워 이빨을 드러내는 건 그 자신이었다.
동요를 감추기 위해 허세를 부리는 것.
절대로 떨쳐 낼 수가 없다.
주양은 영원을 가지려다가 관뒀다. 몸을 섞을 마음이 식었다.
영원이 그의 황량한 마음을 어루만졌다.
“……미안해. 나 때문에 힘들지? 너무 노력하지 않아도 되니까.”어느새 주양은 영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한 줌도 안 되는 몸체에 의지한다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는 것도 처음이었고,
기댄다는 것은 그에게 이제껏 맛보지 못한 편한 안정감을 주었다.
위로해주고 싶었던 건 자신이었는데.
위로를 받고 있다.
이성을 잃었다.
피를 흘리며 떨고 있는 영원의 눈물을 본 순간, 그에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됐다.
정말 죽여버리고 싶었던 건 그 자신이었다.
어설픈 복수라는 말로 영원을 조롱했던 그 자신.
사랑은 논리와 상식을 거스른다. 사랑은 분별력을 잃게 한다.
고로, 사랑에 빠진 그는 품위를 상실한 것이다.
최혜란이 물었지.
‘왜……, 그 계집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데……?’글쎄. 주양은 입에선 설명 불가한 말들만 맴돌았다.
왜 너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가.
무엇이기에 나를 품위도 체신도 없게 만드는가.
이토록 내게 충족감과 상실감을 동시에 안겨주는 걸까.
너는 내 무엇일까.
너는 나의……
말은 혀 위에서 맴돌 뿐이었다.
무엇이라 해야 좋을까. 너는 나의……,
주양은 어물거리다가 종래에 관뒀다.
*
주양은 잠든 영원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아무도 모르는 그의 취미였다.
영원을 오래도록 보고 있노라면 어김없이 아침이 밝아왔다.
커튼으로 빛살이 비쳐는 걸 확인하고 출근 준비를 했다.
넥타이를 매며 자는 영원을 한 번 더 보고 나왔다. 현관을 나서는데 신발장 귀퉁이에 놓인 낡은 신발이 그의 의식을 사로잡았다.
신발은 새것 같은 주양의 구두들과 나란히 놓여 있었다.
구르고 찍히고, 너덜해진 하찮은 신발이었다.
그가 사람을 시켜 사다놓은 구두는 많은 터였다.
왜 이것은 아직도 가지고 있나.
닳아 헤진 신발을 보다가 그는 자신이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었다.
*
시간은 더디게, 그러나 아차 하는 순간 지나갔다.
결혼이 며칠 안 남았다.
두 사람은 마을을 거닐었다.
해질녘, 주양이 어느 바위 아래에 영원을 앉혔다.
그가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새 구두를 꺼내 영원의 발아래에 내려놓았다.
영원은 조금 놀란 얼굴을 하다 그 의미를 알아채고 희미하게 웃는 기색을 띄웠다.
그가 영원의 발에 구두를 신겨주었다.
그녀가 눈시울을 붉혔다.
“이러니까…… 내가 신데렐라가 된 것 같아.”“…….”“지금 너무 행복해.”고작 구두 한 켤레일 뿐인데, 그녀는 너무 행복해한다.
수백 켤레의 구두를 사 날랐지만 그것을 버릴 수 없던 것은, 그 낡고 헤진 신발이 그녀의 자아였기 때문일까.
지난 수개월.
영원은 신해수를 철저히 연기했다.
자신을 버리고 신해수처럼 양산을 쓰고, 사람들 앞에서 신해수로 그와 다정한 모습을 연출했다.
누구도 의심치 않는 결혼을 만들기 위해서.
이 결혼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남들이 다 보는 촌 동네를 매일같이 산책을 다녔다.
오늘은 그들 계획의 마지막 날이었다.
영원도 알고 그도 알았다.
“내가 괴물 같지?”영원이 주양에게 반문했다.
이러는 스스로가 질린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징그럽지?” 주양이 말없이 영원을 응시했다.
“나…… 이제 싫지. 하나도 안 순수해서.”그녀는 예전의 그녀가 아니고, 이제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
그건 그도 알고 그녀도 알았다.
주양은 영원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영원의 맑은 눈이 그와 시선을 얽었다.
두려움이 일렁이고 있었다. 자신의 변한 모습에,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이 떠날까 봐.
그러나 주양의 속내를 말할 수는 없었다.
아니. 처음엔 영원의 타락이 두려웠다.
영원이 자신처럼 황량해질까 봐, 고통스러워질까 봐.
하지만 오히려 이 기회가 감사하게 느껴졌다.
우리 사이에 놓인 격차가 좁혀지는 것 같아서.
할 수만 있다면 영원을 더……,
그리해서 그에게 도망칠 수 없도록 만들고 싶다.
그가 영원의 뺨을 쓸다가 턱을 기울였다.
입을 맞췄다.
아슬아슬한 입맞춤이었다. 다시 오지 않을, 그리고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영원의 날숨이 그대로 넘어왔다.
“사랑해.” 라고. 그녀가 속삭였다.
“당신도 날 사랑하지?” 나도, 하지만 사랑한다고 하긴 싫었다.
사랑이란 단어는 이 시대로 와서 너무 흔하고 간편했다.
그는 진심인 고백을 원했다.
의미는 같지만 사랑한다는 말 이상의 것.
그런 고백.
“너는 나의…….”“…….”“넌 나의…….”내내 그의 혀 위에서 맴돌다 사그라졌던 어휘.
너는 내 무엇일까.
너는 나의……
“나의, 영혼이야.”예상치 못했던 단어였다. 주양은 그 자세로 굳었다.
그렇게 뱉자 그의 안에서 우르르 - 뭔가가 무너져 내렸다.
그 자신도 혼란스러웠던 감정의 정체들이 제자리를 찾은 듯 성립됐다.
그녀는, 나의 영혼, 이다.
그것을 깨닫자 미칠 것 같았다.
영원을 꽉 껴안았다.
한 번 내뱉자 두 번째는 쉬웠다.
“넌 내 영혼이야.”가진 것을 다시 잃을 순 없었다.
주양은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낮에 노인이 저주처럼 퍼부었던 말들 따윈 개의치 않았다.
‘그 계집은 널 버릴 거다. 지금이야 콩깍지가 쓰여 있지만, 두고 볼수록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될 거다. 사랑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피어오를 거야. 결국에 깨닫겠지. 자신이 바란 건, 남들과 똑같은 평범한 행복이었다는 것을. ……널,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것을.’마음속에 피어오르는 불안도 잠재우고,
그 순간에, 설령 네가 나를 떠난다 해도,
그때 그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영원의 눈물로 어깻죽지가 젖어들었다.
*
텅 빈 신부대기실.
버려진 웨딩드레스.
충직한 비서는 결혼식을 앞두고 있을 수 없는 말을 전했다.
“신부님이…… 사라지셨습니다.”양 비서가 반응하지 않는 주양을 보다가 대타를 구하기 위해 밖을 나섰다.
Rrrrrrrrr-
방 한구석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웨딩드레스를 들추자 영원이 두고 간 휴대폰이 나타났다.
전화를 귀에 조용히 붙였다.
“어디야.”주양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저편에서 상대가 숨죽였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영원의 호흡엔 지문이 달려 있다. 주양은 알 수 있다.
주양아 다시 외쳤다.
“어디야. 지금.”“나, 당신과 결혼하지 않을 거야.”주양은 조금도 표정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
왜.
왜……!
영원이 남긴 말은 잔혹하게 사랑에 대한 말뿐이었다.
“사랑해줘서 고마웠어. ……안녕.” 일방적으로 전화가 뚝 끊겼다.
몸이 비틀거렸다. 벽에 지탱해 섰다.
모래 위에 ……성을 쌓았다.
이제껏 모래성을 쌓으려고 그는 그렇게 열심히 하였는가.
영원의 향기와 추억들이 모라알갱이가 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서로만을 생각하며, 아주 작은 슬픔까지 나눠가지겠습니다.
슬픔을 나눠 짊어질 인생의 동반자로 네 마음에 내가 미덥지 못했는가.
주양은 그녀의 향기라도 붙잡겠는 듯 웨딩드레스에 코를 묻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주양의 뺨을 타고 흐른 것.
그것은,
그들이 쌓아올린 추억,
잠든 날 밤, 빛살처럼 네 여린 뺨을 어른거리던 내 시선,
너에게 닿지 않는 나의 그리움.
채워지지 않는 공허.
영혼은 슬픔과 동의어임을.
★
-실종 43일째
“그게 바로 네가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증거지. 그 애가…… 왜 네 곁을 떠났을 거라 생각해?”찻잔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얀 자수 천을 입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진두영이 말했다.
“널 떠난 게 아니야.”“…….”“너에게서, 도망, 친 거야.”이내 진두영은 주양에게 비수를 꽂아 넣었다.
“그런데도 너는 미련을 떨며 신부를 찾겠다고 설치고 있지. 비참하게 말이야. 네가 싫다고 떠난 여자를…… 진주양. 언제부터 이렇게 호구가 된 거야?” “그래서 할 말이?”항상 두영은 주양에게 휘둘리는 쪽이었다.
보고 싶었다. 놈이 무너져 내리는 것.
자신의 발아래 무릎 꿇고 애원하는 꼴을.
“만약 내가 신부가 어디 있는지 안다면.”“…….”“넌 뭘 걸래.” 그 밤바다보다 시커멓고, 속을 읽을 수 없던 두 눈에 변화가 보였다.
마침내 진두영은 두 계절 만에 웃을 수 있었다.
‘난 그놈이 얼마나 욕심이 많은 놈인지 잘 알아요. 그는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두 개 다 가질 방법을 고안하는 놈입니다.’아무리 생각해도 그 나부랭이 전직 형사한테 했던 말은, 시기적절한 타이밍에, 절묘하게 어우러진 대사였다.
진두영은 잔혹하게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두 개 다 가질 수 없어. 하나를 가지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