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73화 (73/83)

73화. 버림받은 신랑 - 외전 <1>2017.03.16.

제 발로 검찰청을 가기 전날, 주양이 먼저 들른 곳이 있었다.

그룹재단에서 설립한 한신병원.

진 회장은 병환으로 입원 중이었다.

잠옷 차림의 노구가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그 많은 돈과 재물을 가지고도 진 회장이 집에서 챙겨온 것들은 가짓수가 몇 개 되지 않았다.

그 몇 개의 물품 중에 죽은 아들의 사진도 포함됐다.

진 회장이 액자를 애처롭게 쓰다듬었다.

“네 애비는 마음씨가 따뜻했었지. 처음 얻은 자식이라서 너무 예뻤어. 좋은 것만 먹이고, 좋은 것만 보게 해서 그런가. 애가 유약했지. 울보에, 잠을 잘 때 곰 인형을 안겨주지 않으면 잠을 못 잤지. 나는 가끔 준영이가 살아 있었다면 너처럼 생겼을까 상상하곤 해. 넌 얼굴은 준영이를 빼다 박았어. 하지만 어째서 성격은 딴판일까? 자란 환경은 준영이와 똑같은데. 너는 어려서도 무서운 것도 없고, 잘 울지도 않았어. 네가 자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김 원장이 의심했을 정도였지.”“…….”“김 원장이 하는 말이, 내가 치매가 진행되고 있다더구나.” 주양은 놀라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노인은 지금 알까.

우리가 이 똑같은 대화를 나눈 적이 이미 열하고 다섯 번이나 된다는 것.

결혼을 앞둔 지난 4월 말경부터, 이미 진 회장은 치매가 급속도로 진행됐다.

그때, 주양은 신부를 바꿔치기하는 작업들로 바빴다.

대개 은밀한 처리가 그러하듯 합법적인 일과 불법적인 일들을 오갔다.

주양이 해댄 일들을 조부는 대략 보고 받았는지 곧 주양은 본가로 불려갔다.

그리고 오늘처럼 똑같이 말했다.

진 회장의 시간은 그때에서 멈춰져 있는 것인가.

“항암 부작용이래. 뇌세포를 보호하는 차단막이 독한 약기운을 못 이기고 구멍이 뚫린 모양이야. 얘, 듣고 있니?”치매 사실을 알려오는 진 회장에게 주양은 내색하지 않았다.

15번째 한결 같은 대답을 했다.

“인간은 태어나면 다 죽습니다.”쾅!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하는 거냐?”진 회장은 냉담한 주양에게 허탈감을 금치 못했다.

“넌 날 원망하고 있어. 그렇지?”“…….”“아마도 넌 내가 죽으면 내가 반대하는 일은 모조리 할 거다. 벽에 똥칠하게 될 날이 4개월밖에 안 남았다는데, 그 결혼 지금 반대해봤자, 나 정신줄 놓기 기다렸다가 그때 결혼하겠지. 그 애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앤지 의문이야.”“제가 선택한 여자입니다. 그 정도면 답이 됐으리라 생각합니다.”그럼 진 회장은 15번째 말할 것이다.

“그 계집은 널 버릴 거다.”이미 결혼식은 2달 전의 과거가 됐고, 그래.

그녀는 그를 버렸다.

그를…… 떠나갔다.

진 회장의 예언대로.

“지금이야 콩깍지가 쓰여 있지만, 두고 볼수록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될 거다.”“…….”“사랑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피어오를 거야.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나를 사랑하는 걸까. 나를 앞으로도 사랑해줄까. 사랑이 식으면……, 그땐.”진 회장이 속살댔다.

“그는 과연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존재인가.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의 아버지로서는 적합한 자격이 있는가.”진 회장 병환의 상태를 알면서 원장에게 시간을 끌라고 명령한 것이 주양이었다.

치매를 악화시키게 했다.

“바로 내가 너를 키워오며 느꼈던 불안감 말이다.”주양이 진 회장을 매섭게 봤다.

“그리고 결국에 깨닫겠지. 자신이 바란 건, 남들과 똑같은 평범한 행복이었다는 것을. 널,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것을.”“그럼 사람일 줄 알았습니까?”진 회장은 허를 찔렸다.

노인이 주양을 올려다봤다.

노인은 답지 않게 허술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구멍이 뻥 뚫린.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고 노인은 무방비상태가 됐다.

진 회장에게도, 주양에게도 이 대화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열다섯 번의 할큄이 있었지만 한 번도 여기까지 온 적은 없었다.

대화는 언제나 주양이 입을 봉해버리면서 끝났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정자를 냉동시켜놓았다가 녹인 뒤에, 돈 오천에 구한 여자의 자궁에서 태어났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그럼, 사람일 줄 알았습니까?” 노인이 손에서 액자를 놓쳤다.

바닥과 충돌한 액자가 쨍그랑 ?? ! 동강났다.

주양은 이제껏 한 번도 그렇게 속내를 드러내 보인 적이 없었다.

진 회장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볼만했다.

주양이 깨진 액자를 들었다.

진준영. 어린 친부가 천진하게 웃고 있었다.

정자를 제공한 이는 아버지인가.

아버지가 아닌가.

아무런 유대 없이 오롯이 정자만을 제공받아 태어난 자신은 그의 아들인가.

아들이 아닌가.

아주 오랜 시간 끊임없이 그에게 화두를 던지던 질문들이었다.

생명의 존엄성 따위.

사진 속 이 남자는 자신에게 자식이 있는지도 모를 터였다.

“그가 내게 몸뚱이는 주었지만, 영혼까지 준 건 아니잖아요.”주양은 액자를 등 뒤로 가볍게 내던졌다.

진 회장이 심장을 부여잡고 침대 뒤로 넘어갔다. 의료진들이 달려와 진 회장을 업어갔다.

주양은 텅 빈 방에 홀로 남겨졌다. 생동감 없는 표상이 진 회장이 떠나간 자리를 응시했다.

아들을 다시 재현해보고자 한 진 회장의 상냥한 욕망은 사랑이었고, 그것은 내게 폭력이었다.

상냥한 욕망은 누구도 잘못이 없다는 점에서 너무나도 폭력적이다.

사랑이 그러하듯이.

*

당신하고 결혼하고 싶습니다.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습니다.

-꿈, 정호승

*

…… 결혼 1개월 전, 그리고

신부 실종 1달 전.

“한신중공업 파업이 쉽게 가라앉을 조짐이 아냐.”햇살이 컨티넨탈 호텔 18층 유리창을 투과했다. 비즈니스 룸의 성격에 맞게 8인용 긴 패브릭소파가 테이블을 끼고 있었다.

이중모가 답답한지 넥타이를 끌어내렸다.

양주 마개를 따며 주양에게 물어온다.

“희망퇴직을 빙자한 일방적 해고, 이런 게 요즘 먹히겠어?”“중국발 저가 수주로 현재 조선 업계가 빚더미입니다. 거품 꺼질 거란 것쯤, 몇 년 전부터 예견해왔던 일입니다.” “알지.” “그나마 직원들 생각해 적자 끌어안으며 지금까지 끌고 온 겁니다. 가망 없는 사업은 빨리 손 떼는 게 상책이죠.”하지만 어쩐지 이중모는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그 돈, 어차피 이번 출범 정부에서 내건 신생사업육성에 고스란히 쏟아부어질 자금이란 거, 아시잖습니까.”“알지. 것두 잘 알지.”“근데 왜.”“실수하는 것 같아서. 이러다 언론이 주목하기라도 하면.”이중모는 지난 12월 대선에서 압승으로 대통령이 됐다.

현재는 4월, 취임을 마쳤다.

본격적으로 정권을 이어받아 시동을 걸고 있던 와중이었다. 한신중공업 노조가 일어선 것이다. 불경기로 구조조정 중에 있었다.

이중모가 우려하는 것은 친인척 비리였다.

한신중공업의 하청을 독점하는 업체 대표는 이중모의 사촌이었다. 말이야 친인척이지 이중모의 돈세탁 방이었다.

예전부터 한신중공업은 문제가 많았다. 실체는 없지만 장부상에는 존재하게끔 분식회계가 만들어졌다.

배 수주를 한 척 맡으면 두 척 받은 것처럼. 여기저기 정치자금으로 흘러드는 돈을 마련하는 뱅크였다.

검은 돈들이 불어나 재정적자가 늘어났다.

한신중공업의 구조조정이 결정됐다.

회사 제반사정이 어려워진 것은 눈먼 돈 때문인데 일반 직원들이 불황을 빌미로 해고당하고 있다는 게 노조의 주장이었다.

뭐, 주장이 아니라 사실이지만. 그 밖에 중국의 조선업 가세로 시기가 앞당겨지긴 했다.

“공장이 멈추면 자금은…….”“가동할 공장은 전국에 많으니까요.”이중모는 정치자금 외에 자신의 뒷주머니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진 회장이 병석에 있는 지금, 진두영이 싸지른 똥을 치우는 것은 결국 주양의 몫이었다.

금융과 중공업은 다른 분야지만 일단 이사회에서 합의 본 결정이다.

한신 중공업의 매각은 주양이 오너 자리를 물려받기 전까지 처리해야 할 숙제가 될 것이다.

이중모의 입김 때문에 손해를 감수할 수는 없었다.

“역시 안 되겠나?”“일개 본부장인 걸요.”정중한 거절이었다.

이중모가 심기가 잔뜩 불편한지 두 턱을 만들어 보였다.

“진 회장님 건강 악화설로 힘들지?” “…….”“대체 ‘카더라’는 어떤 죽일 놈들이 퍼트리는 거야?” 은연중 협박. 이중모는 비굴하면서도 뱀처럼 교활한 인간이었다.

“세상이 수상하니 잡다한 소문만 무성하지 않겠나.” 그 말에 주양은 코웃음 쳤다.

진 회장이 치매에 걸렸다는 구체적인 진상까지는 파악 못 했나 보지.

대충 건강악화설을 주워 들은 모양이었다.

얕보는 것이다. 진 회장이라는 사령탑이 흔들리는 한신은 내부적으로 현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한 명은 나가떨어졌고, 후계자라고 앉아 있는 다른 하나는 고작 30대 초반의 새파랗게 어린 놈.

적어도 승계가 제대로 이뤄지려면 주양이 40대는 되어야 했다.

정치한다는 놈들은 간교하기 짝이 없어서 조금만 빈틈을 보이면 찍어 누르려 했다.

나라에서 제일 높은 관직에 오르기도 했겠다, 대통령까지 되니 이제 눈에 뵈는 것도 없어지는가.

나를 하수인 부리듯 하겠다?

“회사 사정 전반을 좌지우지할 전권이 제겐 없습니다.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이사진들과 신중히 검토해보죠.”칫, 이중모가 짜증나게 군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화제를 바꿨다.

“사실 요즘 자네 행동 하나하나가 맘에 안 들어.”“…….”“청첩장 잘 받았네. 신부 쪽 이름을 보는 순간 뒤통수가 뻐근해지더만. 자네가 최혜란과 사돈을 맺게 될 줄이야.”이중모와 적대관계인 최혜란을 장모로 모시게 됐다.

예전에 이중모의 우려에 주양은 연애라는 건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거라고 했었다.

“회장님 부탁만 아니었음, 내가 김 회장 그 개새끼도 석방 안 했어.”“…….”“김 회장을 저대로 밖으로 내돌릴 겐가? 눈앞에서 설쳐댈 걸 생각하니 꼭지가 돌 거 같다구.” “이제 와서 뭘 어쩌겠습니까.”“그래서, 계속 살려두겠다고?”이중모가 씨근덕거렸다.

이중모가 왜 이렇게 조급하게 구는지 주양은 알고 있었다.

그가 이중모와 적대관계인 최혜란과 사돈을 맺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중모로서는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찝찝한 것이다.

이 새끼가 뒤로 뭔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닌가. 하고.

게다가 김 회장은 한 달 전에 출소를 했다. 무려 주양의 조부인 진 회장의 지시였다.

진두영의 무리수 덕분에 진 회장이 대산 김 회장과 딜을 한 것이지만, 이중모가 그런 사정을 알 턱이 없다.

그런 와중에 주양은 최혜란의 딸과 결혼을 하고, 김 회장을 갑자기 3.1절 특별사면으로 빼내줬다.

이거 이거 나만 따돌리고 김 회장과 작당을 꾸미는 거 아냐? 하고 충분히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난 자네를 믿어.”국가원수가 된 이중모가 못 할 일이 있을까. 대산 김 회장을 처리하는 것쯤이야.

이중모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변치 않은 마음이었다.

주양의 변치 않은 마음.

우리 우정이 변치 않았다는 걸 확답받기 위해 김 회장을 없애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최혜란이를 장모로 모시게 됐다 해서, 우리의 우정이 변해서는 안 되네.”이중모가 축배를 들듯이 양주잔을 맞부딪혔다.

증명해 보이는 그날까지.

말도 안 되는 투기다. 서툰 질투심에 설명해줄 길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처음부터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손톱이 부러지고 피가 비쳤다. 바닥을 박박 긁었다. 최혜란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악-! 가련한 비명이 성대를 마찰시키며 목구멍 밖으로 활로를 텄다.

“의사한테 전해! 다른 병원, 다른 곳에서 다시 검진한다고! 난 인정 못 해. 절대 사인 못 해!”한마디라도 꺼낼라 치면 무시무시한 악력이 뒤통수를 눌렀다.

최혜란에게 네 명의 사내가 붙어 있었다.

머리통을 누르는 손들이 수술동의서에 지장을 찍게 하려 했다.

최혜란은 사력을 다해 거부했다. 침이 줄줄 샜다.

“날 죽여. 차라리 내 배를 가르라고!”수술 동의를 두고 몇 시간째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최혜란의 육체가 무력하게 짓밟혔다.

주양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눈짓했다.

문이 열렸다. 검은 트렁크 가방이 대령됐다.

가방을 열자 안에 사람이 구겨져 들어 있었다. 이미 최혜란 이전에 피떡이 된 심부름센터 직원이었다.

직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최혜란이 보랏빛이 됐다.

주양이 넌지시 턱짓했다.

“아는 사람인가?”최혜란이 덜덜 떨었다.

“이건 뭐야.”“청부업자에게 돈을 주고 영원을 납치하도록 지시했다지.” “모, 모르는 일이야.”납치범이 덜미가 잡히자 최혜란은 발뺌했다.

대체 영원을 납치해서 뭘 어쩌려고 했는지는 그도 의문이었다.

“며칠 전, 동네 길에서 우리 눈이 마주쳤지.” “난 모, 몰라.”“차로 들이받아 죽이려 한 것으론 성에 안 찼나. ……납치? 왜. 네 딸처럼 수술이라도 받게 해주려고?”흠칫, 예상이 적중했는지 최혜란이 벌벌 떨던 어깨를 굳혔다.

주양이 무표정하게 되물었다.

“뭐가 그렇게 억울한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기다렸다는 듯 악담이 화수분처럼 터졌다.

“걔, 걔가 해수 이불이나 빨아주던 애야. 어디서 그런 배워먹지 못한 애가, 내가 무서워서 오줌이나 질질 싸던 애가, 그런 애가……! 허억, 한신가의 며느리라! 세상이 다 배꼽 잡을 일이군! 아하하!”자기 딸의 뒤처리나 해주던 미천한 하녀였다.

그런 하녀가 한신가에 시집을 가게 됐으니.

얼마나 배 아픈 일인가. 주양이 비웃었다.

“딸을 대신한 징벌? 복수?”“…….” “좋은 어미 아니잖아.”“…….” “백운당 사장 자리 지킬 수만 있다면, 자기 딸도 검사한테 팔아먹을 수 있는 빌어먹을 년이잖아.”“…….”“모를 줄 알았나. 당신이 검사 강규웅이한테 신해수를 상납하려 했던 것. 신해수가 그것에 몸 달아 나한테 매달렸던 것.”최혜란이 굳었다. 주양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자신의 야욕을 채울 수 있다면 아무렇지 않게 딸을 파는 여자. 이제 와서 어미 노릇 하려는 것도 우스워.”“차라리 날 죽여, 죽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야!”“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그라고 이러는 게 유쾌해서 그녀의 자리를 보전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엊그제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영원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한 것,

최혜란 앞에서 소변을 지린 것,

제 손으로 자해를 한 것.

영원의 고통을 비하한 이 여자를 죽이지 않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최혜란이 바득바득 이를 갈아붙였다.

“그 계집이 원했겠지. 죽지 못해 사는 고통이란 거 말야. 아주 득의양양하게 내게 지껄여주시던데, 맞아. 니들 말대로 딸을 정신병원에 처박아 넣은 어미야, 내가. 근데 어쩌지. 나 지금, 그렇게 죽을 정돈 아닌데.”주양의 안면에 희미한 웃음 잔재 비스무리한 것이 스쳤다.

책상에 걸터앉았던 몸을 그가 뗐다.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최혜란의 멱살을 잡아든다.

“죽지 못해 사는 고통? 그따위 허접한 복수로……?”최혜란은 놀라서 주양을 올려다봤다.

그 표정은, 그 말투는, 연인의 진심 어린 염원이 담긴 복수를 돕는다기엔 조롱 섞인 반응이었다.

영원의 복수를 허접하다는 말로 싸잡아 묶었다.

“그 앤 순진해서 믿는지 몰라도 난 달라. 인간은 그렇게 쉽게 죄를 인정하는 종자가 아냐.” 영원이 최혜란을 굴복시키지 못할 거라고 처음부터 예견했던 거다.

“아, 알면서 왜.”최혜란의 물음에 주양은 눈 하나 깜짝 않는 얼굴로 되받아쳤다.

“어쨌든 신부에겐, 든든한 친, 정, 이란 게 필요하니까.”주양의 정색이 최혜란을 빠르게 이해시켰다.

결혼은 소꿉장난이 아니었다. 더욱이 한신가에 시집을 온다면.

복수는 복수고, 결혼은 현실이니까.

한 명이 이성을 잃으면 현실을 챙겨줄 다른 하나는 있어야 하는 게 팀플레이 아닌가.

영원은 최혜란한테 유감이 많을 진 몰라도 주양은 아니었다.

최혜란이 어떤 고통을 겪든지 관심 밖이다.

주양이 최혜란은 살려두는 건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맥락 때문이었다.

정재계 인사들과 커넥션이 깊은 백운당은 나쁘지 않은 친정이었다.

백운당이라는 간판은 지켜져야 했다.

한신가에서 아무 백그라운드 없는 며느리는, 도태되고 무시당한다.

여러 모로 운이 좋은 여편네였다.

주변 사람들이 나가 떨어져도 결국 원흉인 자신은 자리보전하게 됐으니.

그게 허수아비 사장일지라도.

주양은 최혜란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신부 신해수, 신랑 진주양.]

석자 이름 위에 금박이 입혀진 청첩장이었다.

주양이 괜찮은 제안을 하나 제시했다.

“가망 없는 친딸은 버리고, 진짜 재벌가로 시집오는 의붓딸로 갈아타는 것도……, 노후 준비로는 나쁘지 않아.”주양의 계획은 그런 것이었다.

해수를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영원을 앉힌다.

“미. 미친.”최혜란이 주양에게 물을 끼얹었다.

옴팡 물을 뒤집어쓴 얼굴이 차갑게 뚝뚝 물을 떨궜다.

어김없이 위험스런 눈동자가 최혜란을 강하게 눌렀다.

최혜란은 겁을 집어삼켰다.

그와 동시에 남자들이 최혜란을 억지로 잡아 눌렀다.

동의서에 지장을 찍게 했다. 최혜란이 거세게 저항했다.

경호원들이 엄지 뼈를 부러트렸다.

우두둑, 뼈가 빠지는 소리.

아아아악! 최혜란이 비명을 토했다.

헐렁거리는 엄지를 끌어다 수술동의서에 지장을 붙였다.

최혜란이 손을 잡고 덜덜 떨었다.

“딸이 정신병원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을 거야. 병원에서만 나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다시 결혼시장에 내보내서, 어떻게든 새 출발하면 된다고.” 주양이 최혜란의 지장이 찍힌 수술동의서를 챙기며 말했다.

“이로써 재기해보려는 당신의 꿈도, 추한 야욕도 여기서 멈추겠지.”최혜란은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들을 헤아려봤다. 설마…… 멀쩡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를 어느 재벌가에서 쳐다볼까.

믿지 못하는 표정에 대고 주양이 종이를 흔들었다.

“당신이 한 짓은 고대로 당신 딸한테 돌아가게 될 거야.”아리송한 수수께끼만 남겨주듯.

“이런 게 진짜 복수가 아니겠어?”아무리 죄를 저질러도 최혜란은 멀쩡할 것이다. 언제까지고. 그 딸이 대신 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이제야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당신은 이 자리에 앉아 평생 당신 딸을 생각하게 될 거야.’‘신해수가 어떻게 비참해지는지, 얼마나 처참하게 밑바닥으로 추락하는지, 10년, 20년, 이 자리에 앉아 들여다보게 될 거야.’‘평생 이 자리에 앉아서, 자기가 저지른 죄를 지켜봐. 자신 때문에, 딸이, 어떤 꼴로, 살아가게 되었는지, ……미안함을 가지라구. 미안함.’최혜란은 넋을 뺐다.

볼일은 끝났다. 주양은 청첩장을 최혜란의 얼굴에 튕겨 던졌다.

“결혼식에 신부 어머니로 참석해줘야겠어.”나가기 직전, 최혜란이 작게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목소리를 들었지만 주양은 그대로 무시했다.

사장실 복도를 걸었다. 모퉁이에서 가로막혔다.

강호운이었다. 그대로 지나치자 강호운이 그를 붙잡듯 물었다.

“당신, 어디까지 갈 셈이야?”주양이 돌아보며 무표정하게 답했다.

“이게 내 사랑이야.”전에 호운이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서글프단 자신의 사랑과 달리, 해줄 수 있는 게 넘치는 네 사랑은 너무 쉽지 않냐고.

영원이 원한다면, 그는 뭐든 해줄 심산이었다.

그가 가진 전부를 이용해, 지옥에서 저승사자도 불러올 기세였다.

호운은 인정할 수 없었다.

주양의 방식 따위. 그런 무지막지한 폭력 같은 사랑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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