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72화 (72/83)
  • 72화. 천벌 받은 계모 - 외전2017.03.12.

    -실종 43일째

    차가운 달이 앙상한 가지 끝에 걸린 밤이었다.

    최혜란은 천장을 올려다봤다.

    죄수의 형장처럼 올가미가 매달려 있었다.

    사지 마디마디로 경련이 몰려왔다. 최혜란은 울고 있었다.

    의자를 딛고 올라섰다.

    올가미가 목을 죄는 감각을 느끼며 최혜란은 의자를 밀어트렸다.

    몸이 축 늘어졌다.

    *

    죽으려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여러 해를 지내왔지만 그때만큼 자신의 생이 치열했던 때가 또 있을까.

    혜란이 여유를 부린 것은 사실이었다.

    영원이 주양과 만난다는 사실을 첫째 딸로부터 통보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영원의 복수심이었다.

    보복이 두려웠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다.

    혜란은 맞은편에 앉은 주양을 응시했다.

    호텔 라운지 레스토랑에는 산뜻한 음악이 퍼졌다.

    걸맞은 상대와 걸맞은 대화를 나누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이 호텔에서 그 애가 이 남자와 지냈다 했던가?

    성원이 해수와 함께 한바탕 뒤집어 엎어놓고 왔다지.

    혜란은 본론을 꺼냈다.

    “모자란 아이입니다. 뒤치다꺼리해줘야 할 일이 많죠. 사회성이라곤 전혀 없어요.”“…….”“그 애를 평생 책임질 수 있으세요?” 최혜란은 비웃듯이 물었다.

    설마 결혼까지 하겠다고는 말 못 하겠지.

    재벌가의 며느리……. 쇼핑이나 해도 되는 자리가 아니다.

    매스컴은 이미 주양이 해수와 사귄다고 알고 있었다.

    심심풀이가 아니고서야, 자매인 영원과 만나는 것도 우스웠다.

    그때였다.

    “내가, 결혼이라도 한다 할까 봐, 두렵습니까?” 주양이 비스듬히 입술 한쪽을 끌어당겼다.

    정곡을 찔렸지만 최혜란은 품위를 지켰다.

    “어차피 해수와는 끝난 인연입니다. 저도, 이사님 붙들 마음 없어요.”“그런데 무슨 심술로, 잘 만나는 우리 둘을 분탕질하고 싶어 안달이십니까.”“딸, ……제 딸이니까.”뻔뻔하게 입에 담는 최혜란의 모습에 주양이 웃음을 터트렸다.

    “딸이라.”“우선, 진 회장님께서 허락지 않을 겁니다. 고난이 뻔히 예상되는 교제가 아닙니까.” 해수와의 교제는 진 회장의 귀에도 충분히 들어가고 남을 기간이었다. 자매인 영원과 만나는 걸 허락할 리 없다.

    주양은 뻔히 들여다보이는 최혜란의 속내를 읽고 웃었다.

    “패자들은 보통 사사로운 것에 얽매이는 경향이 없잖아 있지요.”“불편하네요. 제가 패자라는 소리처럼 들려서.”“회장님은 욕망에 충실한 사내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혐오하는 것은 무능력한 인간입니다.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합당하다면, 그 이유가 패자가 되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면, 얼마든지 열린 마음으로 받아주실 분입니다.”“대체 이사님의 콩깍지가 어디까지인지. 놀라울 정도네요. 영원이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 아닌지. 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는 변명치곤, 남들이 다 비웃을 상대입니다. PTSD 외상장애에, 중학교도 못 나온 학벌, 영원이가…… 좀 유별나야죠?” “하지만 그 덕에 정적을 해치웠으니 어드밴티지를 줘야죠.”“정적?”  주양은 그런 여자에게 경멸적인 시선을 박았다.

    딸의 남자가 되기를 바랐겠지.

    하지만 영원과 엮였으니 두려운 것이다.

    영원이 뒤에 자신이 있는 것이.

    영원이 복수라도 결심할까 봐.

    자기가 저지른 죄악에 보복해올까 봐.

    주양은 해수와 사귀게 된 이유를 밝혔다.

    범오사의 성철스님의 이야기부터 영원이 아들을 낳아줄 사주라는 미신까지.

    “황후의 사주라더군요. 근데 진 회장님이 답지 않게 그런 것을 맹신하셔서.” 아들을 바라고 있는 회장 탓에 진두영 사장을 견제할 수밖에 없었다는, 시시콜콜한 내용들까지 읊었다.

    “승리를 위해서였다고 하면, 막말로 내가 사람을 해쳤다 해도 용서해주실 분이, 진 회장님 이십니다.”애초에 해수와의 연애도 계약연애였다

    “그런데 하물며 자매 사이를 오가는 것쯤이야.”해수는 두 남자에게 놀아난 것이다. 최혜란은 표정에 떠오른 노여움을 애써 갈무리했다.

    “하지만 이미 언론이 떠들었고, 결코 여론이 우호적이진 않을 텐데.”“물론, 남들 이목을 무시할 순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최 사장께서 얌전히 입을 다무셔야죠.”“그 부탁, 책임질 수 없겠는데요.”“책임이 별 거 있나요.”“후. 그 자신감, 부럽지만 일단 영원이를 책임지는 모습부터…….”“까짓것, 결혼하죠.”뭐라고? 최혜란이 귀를 의심했다.

    주양이 손깍지를 끼고 깊숙이 눈을 마주쳐왔다.

    겸손의 미덕 따윈 집어치운 오만함이었다.

    “대신, ……자매를 거쳐 간 쌍놈이 되긴 싫으니. 그 이름 내놔야겠습니다.”“…….”“신해수라는 이름.”주양이 최혜란을 향해 눈을 치떴다.

    “20년이나 단물 빨았으면, 이젠 원주인한테 돌려줄 때도 됐잖아?”거침없이 존중과 하대를 섞어 신랄하게 입을 놀렸다.

    최혜란은 벽돌처럼 안면이 굳어져 내렸다.

    주양이 먼저 일어났다.

    테이블보를 노크하듯 두드리면서 웃음기 담긴 말을 흘렸다.

    “순리대로 합시다. 순리대로.”최혜란은 멍하니 호텔을 나왔다.

    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던 기사가 얼른 최혜란을 부축했다.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낭패감이 몰려왔다.

    주양을 부추긴 꼴이 됐다.

    결혼을 막으려다 결혼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최혜란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파우더 팩트를 꺼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화장을 고쳤다.

    포기하긴 이르다.

    이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할 줄 알았는가.

    천만의 말씀.

    최혜란은 굳은 표정을 애써 폈다. 비릿하게 웃었다.

    아직, 그녀에겐 믿는 구석이 남아 있다.

    최혜란은 오랜만에 사장실 비밀금고를 열었다.

    노란 봉투에 담긴 CD를 꺼냈다.

    4년 전, 이중모의 성추행 영상이 담긴 원본이었다.

    CD와 함께 주양을 압박할 서류들이 잔뜩 가지고 있다.

    ‘죽은 여종업원 혈액에서 마약성분이 검출됐다는 부검의의 소견서야. 그때 부검의한테 뒷돈 먹이느라 비상금 좀 깨나 털었지.’ 다 이런 때를 위해 준비해놓은 밥상이었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이것을 이중모와 경쟁 구도에 놓인 여당 후보 진영에 넘길 계획이었다.

    자신의 도움으로 그쪽에서 대통령이 나온다면, 당선인과 우호적인 관계를 다질 수도 있다.

    다음 5년은 또 편안히 놀고먹는 거다.

    진주양도 이중모에게 마약 스캔들이 터지면 곤란하겠지.

    결코 섣불리 영원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서지 못할 것이다.

    최혜란은 협상을 하기 전에 파일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폴더를 눌렀지만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텅 빈 공 시디였다.

    대체 언제, 누가, 금고에 손 댄 걸까.

    ‘설마, 그때 바꿔치기한 건가.’ 성매매 사건으로 백운당에 압수수색 들어왔던 것이 생각났다.

    진주양이? 하지만 한신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다.

    ‘검찰에서 한 단독 수사라고 들었는데.’이럴 수가.

    최혜란의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됐다.

    *

    며칠 뒤.

    최혜란이 놀라 사장실에 도착했다. 사장실이 한바탕 뒤집어졌다.

    최혜란이 사내들을 뜯어말리려다 영원을 발견했다.

    태평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해수는 오지 않아요. 어머니.”“내 딸 어쨌어. 내 딸!”최혜란은 머리가 엉망이 됐다.

    장정이 양팔에 달라붙어 최혜란을 영원 발아래 꿇렸다.

    영원이 준비해놓은 노트북을 펼쳤다.

    5호실에 갇혀 공포에 떠는 해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최혜란이 입을 틀어막았다.

    “대체 무슨 짓거리를 벌이는 거야. 저긴 어디고.”영원이 정신병원 입원동의서를 해수의 면전에 던졌다.

    “사인해.”“내 딸 내놔!”최혜란이 꽥꽥거리자 영원이 돌변했다.

    최혜란의 뺨을 후려쳤다.

    쫘아아아악 ???????!

    최혜란이 뺨을 얻어맞고 충격 먹었다.

    “참 이상한 버릇 있어. 왜 얘기할 때 사람 눈을 똑바로 안 봐?”“너. 너.”“계모라고 의붓딸 막 무시해도 되는 거야?”영원이 동의서를 눈앞에서 흔들었다.

    “기회를 줄게. 여기 사인하기 싫으면 백운당을 돌려줘. 당신이란 여자의 진정성을 확인받는 방법은 그것뿐이야. 당신의 전부인 백운당을 돌려줘. 그럼 당신 딸을 저기서 나오게 해줄게.”최혜란이 영원을 노려봤다.

    남자들을 뿌리치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책상에서 만년필을 가져와 병원 서류에 사인했다.

    영원이 기가 막히다는 얼굴을 했다.

    “끝까지 나한테 잘못을 빌지 않겠다?” “…….”“하긴. 자식보다 자기 자존심이 더 중요한 여자가 바로 최혜란, 당신이지.”다른 엄마들 같았으면 자식이 저런 꼴이 되면 제일 먼저 애원하고 빌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아냐. 나와의 싸움이 더 중요해.”부릅뜬 영원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샜다.

    “불쌍해서 눈물이 막 나네. 뭐, 이럴 줄 알고 있었어. 이럴 줄 알고 무리한 요구를 한 거야. 하지만 막상 예상대로 가니 너무 우습다 못해 한탄스러워.”“…….”“그래. 백운당 가져.”영원이 못을 박았다.

    “죽을 때까지 백운당 사장은 당신이 해먹어.”영원이 최혜란의 어깨를 억지로 눌렀다.

    사장 자리에 억지로 앉히고 거울을 끌어왔다.

    최혜란이 자기 얼굴을 보게 했다.

    “여기가 당신 자리야. 어때. 지금 당신 모습.”최혜란은 거울을 응시했다.

    그 안에 있는 여자는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교수형을 앞둔 사형수의 몰골이었다.

    “당신은 이 자리에 앉아 평생 당신 딸을 생각하게 될 거야.”  “…….”“신해수가 어떻게 비참해지는지, 얼마나 처참하게 밑바닥으로 추락하는지, 10년, 20년, 이 자리에 앉아 들여다보게 될 거야.”최혜란이 모욕을 참았다.

    “처음 이 자리에 앉았을 땐, 이 자리가 옥좌인 줄 알았지?”영원이 간신히 웃음을 억누르는 모습을 해보였다.

    “사형수의 자리야. 평생 이 자리에 앉아서, 자기가 저지른 죄를 지켜봐. 자신 때문에, 딸이, 어떤 꼴로, 살아가게 되었는지, ……미안함을 가지라구. 미안함.”

    *

    최혜란은 납득할 수 없었다.

    왜…… 왜 내가 이런 치욕을 당해야 하는 거지?

    모두들 저 애를 싸고도는 거지?

    저 계집이 무고한 피해자인 양, 저 영악한 계집을……

    정신적으로 사랑을 주지 않는다고 아픈 어미를 갈아치운 계집이었다.

    저 살기 위해, 자신을 구하다 죽은 친구도 외면한 계집이었다.

    저 무섭도록 괘씸한 계집을…… 왜,

    왜 모두들 저 계집만 피해자고, 나만 징벌당해야 한다고 하는 거야.

    사람에겐 각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란 것이 존재한다.

    계집이 실수였듯이 혜란도 그랬다.

    그녀도 실수로 인생이 여기까지 굴러왔다.

    첫 번째 남자는 고등학교 남자친구였다.

    아이를 가졌다는 걸 부모에게 말하기 두려워 가출을 했다.

    남자친구와 살림을 합쳤지만 술을 마시면 주폭이 심해져서 아이를 낳자마자 도망쳤다.

    두 번째 남자는 오갈 데 없는 그녀를 주워서 보살핀 참 좋은 사람이었다.

    열 살이 넘게 차이가 나는 나이가 많은 남자였지만 있을 곳이 필요했다.

    그와 같이 살게 되었다. 참 좋은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때 임신해서 다 못 마친 학업도 그 남자가 시켜줬다.

    그사이 성원과 해수를 낳았다. 행복했었지만 사랑하진 않았다.

    그가 지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두 아이만 남겨졌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다른 남자가 생겼다.

    세 번째 남자는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였다.

    가업을 잇는 젊은 사장.

    조용하고 점잖은 남자였다.

    그에겐 그림 같은 예쁜 아내와 딸이 있었고.

    언감생심. 탐낼 수조차 없는 그림 같은 남자였다.

    백운당의 사장이자, 영원이 아버지였다.

    멀리서 보면 행복해 보이는 가정도 속을 들여다보면 썩고 곪아 있다 했던가.

    그들 가정도 불행이 존재했다.

    영원의 친모는 행복한 줄 모르는 여자였다.

    비관적인 성향에 자기애가 강해서 남편을 힘들게 했다.

    혜란은 내게 이런 가정을 주었다면, 누구보다 나는 잘해냈을 텐데. 자격이 없는 여자라는 불신이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올랐다.

    혜란은 백운당을 보며 동경했다.

    그림 같은 집안, 딸을 지극히 사랑하는 좋은 남편,

    그런 그를 사랑했다.

    그래, 그는 딸밖에 모르는 남자였다.

    아름다운 남자였다.

    독서를 즐기고, 음악에 조예가 깊으며, 지적이며 다정했다.

    그런 그에겐 우수가 있었다.

    아내에게 받은 상처가 심해 여자에게 곁을 잘 주지 않았다.

    시장바닥 노점상인의 딸로 자란 자신이 이제껏 보지 못했던 존재였다.

    탐이 났다. 정복하고 싶었다.

    그를…… 사랑했었다.

    가정불화로 위태로운 남자에게 술을 먹이고 하룻밤을 잤다.

    얼떨결에 이뤄진 관계에 그는 죄책감을 느껴 했다.

    혜란은 딸의 가정교사였다. 그는 책임감이 강한 남자였다.

    결국 어떻게든 결혼까지 밀어붙였다.

    결혼을 하면 곁을 내줄 줄 알았다.

    그는 부부로서의 예의를 지켰지만 그게 다였다.

    그는 어려운 남자였다. 언제나.

    어느 날, 아이를 가진 느낌이 들었다.

    임신테스트기를 화장실에서 그가 발견한 것 같았다.

    어느 날 그가 책을 보면서 말했다.

    ‘아이는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 성원이 영원이, 그리고 해수. 우리에겐 세 딸이나 있고 그 애들한테 사랑을 쏟고 싶어.’하지만 핑계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의 딸, 전처의 그늘에게 아직 벗어나지 못해 상처가 많은 아이였다.

    불쌍한 아이였다.

    그 애에게 쏟아야 할 사랑이 나눠질까 우려스러웠던 거다.

    다행히 테스트기는 오류였다.

    아이는 갖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의 그 말이 너무 서운해서 혜란은 마음 깊은 곳에 담고 있었다.

    남편이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남들은 한 번 하는 결혼을 세 번이나 했고,

    한 번 할까 말까 한 사별을 두 번이나 거쳤다.

    많은 것을 원한 것도 아니었다.

    ‘남편 그늘 아래서 편안한 삶을 살겠다는데! 그냥 남들처럼 살아보겠다는데 왜!’어째서 평범한 것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는 걸까?

    다시 또 외로움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세 아이와 살아남아야 했다.

    남편은 자신의 친딸에게 모든 권리를 남겼다.

    아내인 자신이 아닌 딸에게.

    믿지 못한 것이리라.

    그가 나를 사랑하긴 했을까?

    다시 가슴속에서 비참함과 당연한 원망이 밀려왔다.

    영원이 미웠다. 미웠고 미웠다.

    20년이 지난 후에도 미움은 반복됐다.

    주양에게 거부당해 괴로워하는 해수를 보니 그 옛날 자신이 생각났다.

    영원에게 밀려 남편에게 뒷전이 된 자신 같았다.

    자신은 남편에게 2순위였고, 딸은 좋아하는 남자에게 거부당했다.

    그 모든 원흉에 영원이 있었다.

    모녀가 영원에게 모두 남자를 빼앗겨 허우적대고 있었다.

    악연이다.

    어떻게 말로 설명하기 힘든.

    저 애한테만은 질 수 없었다.

    경쟁심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절대로, 사과 따윈 할 수 없었다.

    *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됐다.

    4월, 영원은 결혼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영원은 백운당을 떠나지 않았다.

    혜란과 성원, 모녀와 한집에서 살았다.

    보란 듯이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눈앞에서 고통스럽게 하기 위함이었다.

    주양의 사람들이 매일같이 집에 드나들었다.

    영원은 신부수업을 받았다.

    하루는 해외 유명 디자이너가 집으로 찾아왔다. 영원의 치수를 재고 갔다.

    단 한 명의 신부에게 어울리는 웨딩드레스를 맞출 거라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였다. 영원은.

    혜란은 그 모든 걸 무력하게 지켜봤다.

    비참하게 정신병원에 있는 자신의 딸을 떠올렸다.

    해수가 정신병원에 갇힌 지 여러 달이 지났다.

    며칠 전에도 병원 원장의 면담 요청으로 방문했다.

    ‘음. 이런 말씀 유감입니만 보호자께서 꼭 아셔야 할 문제라서요. 우리 병원에서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건강검진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게 검진결과서입니다. 따님의 난소에 종양이 의심된다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암수치가 높고요. 원래도 자궁이 약했고, 갑작스런 환경 변화로 극심한 스트레스가 영향인 듯싶다는데. 그래서 요점이 뭐냐면 그러니까…… 난소를 적출해야 합니다.’최혜란은 헛웃음이 났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꽃 자수가 입혀진 양산을 쓴 여자를 봤다.

    혜란은 순간 해수? 하고 차창을 내렸다.

    우산이 살짝 들리면서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자칫, 해수라고 착각할 만큼 똑같은 모습이다.

    패션, 옷 취향, 머리스타일까지.

    양산으로 해수처럼 얼굴을 감춘 영원이었다.

    순간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해수는 정신병원에 갇혔고, 여성으로서의 인생도 끝장났다.

    영원은 그런 해수의 모든 것. 인생, 이름, 심지어는 양산마저 빼앗고 재벌가에 시집을 간다.

    ‘죽여 버린다!’저도 모르게 엑셀을 꾹 밝았다.

    영원을 향해 그대로 돌진하려는 그때였다.

    낯익은 세단이 그 앞을 막아서듯 지나쳤다.

    짧은 순간에 상석 검은 유리창이 있는 내려갔다.

    혜란이 차로 영원을 밀어버리려 한 걸 본 거다.

    주양이 엄중한 눈동자로 최혜란을 눌렀다.

    당신의 속내를 다 읽고 있다는 눈초리가 보내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른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익 - ! 세단은 그대로 보닛을 스쳐 영원에게 당도했다.

    방금 전 자신이 죽임당할 뻔했다는 것도 모르고 영원은 주양에게 해사하게 웃었다.

    양산을 접었고 세단에 올라탔다.

    차는 떠났고, 혜란은 눈물을 흘렸다.

    *

    그 계집에게는 언제나 그 계집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죽는 순간에도 그 애를 걱정한 남편,

    그 애를 위해 목숨을 바친 친구,

    그리고 이제는 막강한 방패가 되어주는 연인까지.

    그런 것에 비하면 해수와 자신은 불모지에서 혼자 살아남아야 했다.

    자신의 힘이 아니면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불쌍하다고 여긴 적이 없다.

    저렇게 복 많은 계집이 다 있을까?

    해수가 결국 난소절제술을 받았다.

    수술이 끝나고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딸은 아직 현실감각이 없는지 멍했다.

    무연히 자신의 배를 쓰다듬다가 두서없이 말을 쏟아냈다.

    “그것들이 이상한 약을 먹인 거야. 매일 나한테 주던 진정제라는 거, 분명, 이상한 암을 유발하는 약이었을 거야. 내가, 내가 제일 용서할 수 없는 게 뭔지 알아? 하아…… 그 연놈들이 내 인생을 멋대로 재단해버렸다는 거야. 아악…… 학! 정신병원에 가둬둔 걸로도 모자라서……! 나를……! 아아악!”해수는 영원의 짓이라고 원망을 퍼부었다.

    “내 인생을 멋대로 재단해……?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릴 거야!”“그래도 얼마나 다행이니. 청첩장에 신영원이 아니라 신해수 석 자가 박혀 있어서.”가만히 있던 최혜란이 중얼거렸다.

    해수는 머리카락을 마구 뜯다가 굳었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의 어미를 보았다.

    최혜란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기괴한 표정을 들썩이며 웃었다.

    “세상 사람들은…… 네가, 한신가 후계자와 결혼하는 줄, 알 거야.” 해수는 그런 어머니를 아연하게 보았다.

    웃지 않으면 패배하는 것뿐이다.

    벌어진 일에 대해 수습할 수 없다면 후회도 하지 말아야 한다.

    잘못 되었다고 인정하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이 지난 과오들이 몰려왔다.

    혜란은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하면 그 계집에게 지는 것이었다.

    버티고 또 버텼다.

    그 계집의 결혼 전날에도,

    결혼 당일에도,

    그 정신 나간 계집이 실종됐을 때도.

    백운당을 천연덕스럽게 운영했다. 하지만……

    텅 빈 백운당 사장실.

    부슬비가 내렸다.

    혜란은 올가미에 대롱대롱 목이 감겨 흔들거렸다.

    “으…… 어…… 커억.” 이제 더는 못 버티겠다.

    삐걱삐걱.

    줄이 연결된 천장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내려앉으려 했다.

    결국 줄이 끊어졌다.

    몸뚱이가 떨어졌다. 쿠탕!

    흥신소에서 돌아온 성원이 바닥에 널브러진 혜란을 발견했다.

    “엄마, 무슨 일이야. 머, 머리에서 피가 나!” 성원은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해수가 죽었다고 다 끝이야? 나는! 나는!

    소리 지르지만 아무것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최혜란은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최혜란은 울음을 삼키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턱이 덜덜 경련했다.

    ‘늘 당신이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영원이 남기고 간 외마디가 가슴을 둔탁하게 쳤다.

    ……네가 이겼다.

    그러나 혜란은 후회하지 않았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때와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두 번 기회가 왔으니 더 철저하게 속일 것이다.

    “계모가 ……흐윽, 의붓딸 미워하는 게 뭐가 잘못이야.”그녀는 마지막까지 항변했다.

    “계모는 원래 악역이야…….”

    *

    -실종 43일째

    장경감은 폐차하기 전 탑차를 구석구석 살폈다. 이미 경찰이 살폈지만 더 확인할 것이 없나 해서였다.

    의자 아래서 굴러다니는 약통을 주웠다. 약국에 가져가서 물어보니 엽산이라고 했다.

    “엽산이 뭐에 쓰이는 약입니까?”“임산부들이 먹죠.”  장 경감은 황망하게 약국을 나왔다.

    뇌리를 스치는 육감.

    ‘진주양을 떠났던 신영원이 중간에 돌아왔던 것은, 임신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나. 마음이 흔들렸겠지.’ 강호운이 죽음을 각오로 신부를 되돌려주려 한 이유.

    바로 이것이었다.

    강호운은 신영원의 임신 사실을 알리려 했다.

    장 경감은 차를 몰았다. 수진에게 전화가 왔다.

    “소장님. 전에 유선민 관해 자료 부탁한 것 말입니다. 해커 쪽에서 국정원 서버 뚫었다고 합니다.”수진이 PDF 파일로 유선민 신상기록을 보내왔다.

    장 경감이 스마트폰에서 파일을 열어 확인했다.

    대략 아는 내용과 모르는 내용들이 섞여 있었다.

    본명은 유선민.

    사법연수원 수석 졸업생.

    로비스트 출신 변호사.

    현재 한신그룹 법무팀 소속 변호사로 활동 중.

    “사법연수원 수석이면, 판사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인데, 느닷없이 백운당 기생일을 시작했네?”그의 말에 수진이 답했다.

    “뭐, 그 덕에 김 총리와 인연이 닿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성공한 셈이죠.” 일개 경력 판사로 끝내느니 김 총리 눈에 들어, 그의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성공가도를 윤택하게 다지는 일일 터다.

    “국정원도 딱히 김 총리의 사람이라는 점 빼고는 없었어요. 근데 아주 재미있는 인연이 있더라구요.”장 경감이 눈썹을 쳐올렸다.

    “재밌는 인연?”“이중모, 요.”멈칫.

    “대통령?”“이중모가 한국당 정책위의장이었던 시절에 유선민이 그 보좌관의 애인이었어요.”이중모, 매향. 우연치곤 절묘한 인연이다.

    하지만 매향은 진두영 쪽으로 붙었다고 했는데.

    “아, 꼬여도 단단히 꼬였어요, 이상해서 좀 더 과거를 털어봤는데.”수진이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고모라는 여자가 가지고 있던 사진이에요. 유선민의 가족사진입니다.”“뭐야…….”엄마, 아빠. 어린 유선민. 그리고 한 아이가 더 있었다.

    카톡 메시지가 떴다.

    [어릴 적, 헤어진 여동생이 있었어요.]그때 장 경감은 신호대기에 걸렸다.

    마침 태평양 일보 사옥을 지나치고 있었다.

    전광판에 그가 즐겨보는 뉴스 타임이 전해지고 있었다.

    장 경감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방금 전 들어온 속보가 짧게 자막 처리됐다.

    한신파이셜그룹 진주양 본부장,

    방금 전 검찰 출두.

    감금 및 약취 혐의.

    그리고 크게 뜨는 글씨

    <자수>

    여자 아나운서가 뉴스를 전했다.

    “오늘 새벽 5시. 재벌 4세 J씨가 검찰에 자진출두 해 자신의 범죄 사실을 자백했습니다. 지난 XX일, 파주 병원화재 사고로 죽은 신양을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이 납치감금 및 약취했다는 내용인데요. 한 대기업 총수 후계자의 갑작스런 양심 고백으로 검찰은 당혹스런 기색을 보이고 있습니다. 검찰은 현재 사실관계를 확인 중에 있다고 전했습니다.”기사가 뜨기 무섭게 도시 시민들이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SNS로 기사가 실시간으로 퍼졌다.

    주양이 현재 검찰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 낱낱이 까발려졌다.

    빠아아아앙????? !

    뒤에서 클랙슨이 울려댔다.

    장 경감은 차를 출발하는 것도 잊고 멍해졌다.

    왜…… 왜…… 저런.

    ‘뭐가 보입니까.’‘저게 뭐 같습니까.’빌딩 아래를 내려다보며 주양이 던졌던 물음이 마구 한데 뒤섞였다.

    주양은 장 경감에게 오롯이 혼자 힘으로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내 가족, 경찰, 심지어는 내 편들도. 아무도 믿어선 안 됩니다.’아무도 믿지 마라. 그가 처음부터 한결같이 요구한 것은 오직 하나였다.

    ‘신부를 찾아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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