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숙명2017.03.09.
함박눈은 소리 없이 소리 없이, 가라앉았다.
눈발이 안면으로 난입했다. 멀미 나는 피로감이 시야를 휩쓴다.
세상은 어지럽다. 어지럽고 난잡하다.
담장 밖을 넘어서는 가야금 연주 소리, 기생들이 희희덕대며 길게 뽑아내는 노랫가락,
세상이 행위예술의 한 장면 같다. 난해하기만 하고 아무 짝에 쓸모없는.
S, 소정이 죽고 그즈음의 영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다.
그 겨울, 영원은 자살을 결심했다.
‘널…… 이해할 수가 없어. 왜 사람들 앞에서 그 여자 딸인 척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아무도 사람들이 그 여자를 의심하지 않고, 좋은 계모라고 여기는 거잖아!’어릴 적 호운이 억울해 하며 소리친 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뭐라도 해보려고 했다. 절박했다.
그러나 잘되지 않았다.
아버지도, 죽은 모친도, 결국 소정도.
그녀가 노력하면 할수록 아무 잘못 없는 다른 이들을 다치거나 죽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만 그것은 곧 죽음과 일치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란 죽은 무생물과 무엇이 다른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마저 거세당한 채 삶을 유지하는 건 허기진 일이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영원은 그때, 예정된 죽음을 맞이했어야 했다.
그녀에겐 모아놓은 10만원이 전 재산이 있었고, 이 돈으로 농약을 사 마시고 죽는 선택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그마저도 하지 못한 무능한 패잔병이었다.
주양을 만났다.
…….
삶의 최후의 순간에. 운명처럼.
‘한신그룹 손자라며? 대산물산 김 회장이 요즘 자주 데리고 오는 그 남자.’‘28살인데, 미국 와튼 스쿨에서 경영자 과정 따고 이제부터 일선에 참가하게 됐대. 김 회장이 사위 삼고 싶어서 아주 혀 안의 사탕처럼 모시는데, 못 봐주겠더라.’기생들의 말이 뇌리에서 되감기됐다.
영원은 저금통을 품에 꽉 안았다.
대화의 주인공이 바로 머리맡에서 영원을 내려다봤다.
직선으로 박히는 눈동자.
남자는 느긋한 눈빛과 달리 안면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말해야 할 때를 빼고 난 말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말이 왜 필요하겠어요.’신사의 탈을 쓰고 양심과 도덕성 따위 개나 준, 폭력 같은 남자.
그게 영원이 받은 주양의 첫인상이었다.
쿵. 심장이 추락했다.
충격적이며 대단히 부도덕한 남자는 손끝으로 영원의 눈, 코, 입술 언저리를 확인하며 만져댔고, 생채기가 터진 입술을 부드럽게 엄지로 쓸어내렸다.
아득한 감촉에 옴짝달싹할 수 없다.
영원은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잘생긴 마스크,
값비싼 옷과 구두,
대담한 성적 욕망까지.
남자가 발하는 섹슈얼한 향수가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신사의 탈을 쓰고, 헐벗은 영혼들을 기만하기 위해 휘둘러지는 ‘폭력’ 같았다.
주양은 자신이 정점을 찍을 남자가 되리라는 걸 자신했다.
‘아직 사장이 아닙니다.’‘아직은 아니죠.’‘아직은.’아직은 아니나, 곧 그렇게 될 것이다.
자만일까. 무모함일까.
그는 처음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위로는 숙부가 있었다.
나이는 이제 이십대에, 한국에 조력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무슨 수로……?
그런데 보란 듯이 그는 그것들을 손에 넣었다.
하나씩 근접해가는 걸 보면서 스스로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충격적이었다.
세상에 저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자신이 원하면 행동으로 보이는 자신감과 쟁취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
영원이 택한 생존방식은 굴복이었다.
영원이 무서운 포식자로부터 도망쳐 폭력에 노출된 무력한 삶을 사는 동안, 그는 영원이 할 수 없는 것들, 주어진 굴레에 반기를 들고 쟁취하는 삶을 택했다.
적어도 그는 영원과는 다른 인생가도를 달릴 것이었다.
자신과 정반대인 그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그에게, 내가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나의 시선마저 빼앗겼다.
어째서 인간이란…… 포기를 모르는 집념의 종족인지.
다시금 그녀의 안에서 복수심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려고 했다.
내면이 악마의 유희처럼 속삭였다.
너도 저 남자처럼……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그는 위로와 희망이었을까.
아님…… 마시면 치사에 이르는 독극물이었을까.
4년이 지난 후,
영원은 시야를 가리는 핏물 사이로 눈앞의 남자를 응시했다.
그가 바로 영원의 앞에 있다.
이렇듯 손닿을 만큼 가까이.
‘네 복수……, 나를 굉장히 실망시켰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시시한 신파였어.’그래. 그의 말이 맞다. 그때, 영원은 복수가 아니었다.
복수란 교활하게 냉정하고 무서운 살의다.
복수 대상이 여기는 가장 중요한 것을 상실시키는 것. 그런 게 진짜 복수였다.
그의 말대로 백운당을 빼앗는 것 정도로는 복수도, 뭣도 안 됐다.
흐지부지한 미움과 갈팡질팡하는 애증.
사과를 받아내겠다고, 집에서 내쫓겠다고.
복수의 이름을 빌려 쓰기엔 턱없이 모자란 분노.
복수는 폭주다. 순도 높은 폭력이라는 점에서 복수는 광기에 가까웠다.
복수엔 이성을 챙길 여유 같은 건 없다.
“과거엔 실패했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해.”소정은 힘이 없었다. 하지만 주양은 다르다.
주양…… 나의 롤 모델.
“네가 함께라면…….’나는 천하무적이다.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폭주하는 내 복수를 누구도 막을 수 없으리라.
“생각해보니, 아무도 뉘우치지 않는 용서 따위, 그저 자기 편안하기 위한 위안일 뿐이잖아.” 주양의 눈동자에 무수히 많은 파장이 일었다.
불안, 초초, 그와는 어울리는 않는 표정이었다.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가.
복수에 대해 일깨워준 것은 너였다.
그때. 영원의 안에 이미 해답이 있었다.
내가 진짜 신해수였다…….
이제부터는 내가 신해수다.
다 빼앗아버릴 거야.
당신이 고통 속에서 처절하게 울부짖게 할 거야.
멋대로 죽을 수도 없게 만들 거야.
영원의 이마에서 흐른 피가 천천히 눈꺼풀을 적시고 피눈물을 이루었다.
“복수의 방법엔 이런 것도 있어.”“…….”“복수할 대상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망가트리는 것.”“…….”“어때……?”그어버린 상처에게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지금은 진짜 복수할 것 같아 보여?"용서하려고, 잊으려고 했는데 그게 잘되지 않았어.
계모가 자기 온 인생을 걸고 사랑했던 딸이,
신해수가,
어떻게 비참해지는지,
자신의 분신이 얼마나 처참하게 밑바닥으로 몰락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게 하겠다고.
계모가 집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내 인생은 산산이 조각났다.
내가 죽어야 한다면, 그건 계모와 계모의 두 딸들에게 복수를 끝낸 뒤야 했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숙명이었다.
*
영원이 떠나고 처음 맞이하는 아침이었다.
해수는 잠에서 깨 평소처럼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눈앞의 상황을 의심했다.
집나간 영원이 음식을 차리고 있었다.
“기껏 짐 싸들고 내보냈더니 왜 다시 기어들어온 거래?”성원이 불안하게 해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무슨 말 좀 해봐. 어? 어?”해수는 주변이 흐릿하게 느껴졌다.
부엌에서 무근하게 밥 냄새가 퍼졌다.
또다. 세상에 영원과 자신 단둘만 남은 것 같은 착시.
피할 수 없는 무언가로 묶인 것 같은 느낌.
영원은 완전히 집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밥을 차리고 청소했다.
적과의 동침도 며칠이 돼갔다.
다들 애써 태연한 척 꼿꼿이 턱을 들었지만 누구도 영원에게 따지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영원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였다.
영원 뒤에 있는 진주양이란 남자 때문이었다.
일련의 행동들이 보여주는 미스터리함이 그들을 불안하게 했다.
떠날 것처럼 짐을 다 싸서 가길래 얼씨구나 보내려 했다.
다시 기어들어오는 건 무슨 심보지? 게다가 진주양.
가만히 있을 리 없는 남자다.
그 남자의 침묵은 어떤 의미일까.
적의 소굴에 영원을 보내놓고, 대체 무슨 수작인가.
해수는 영원이 외출을 한 동안, 다락방을 뒤졌다.
저 계집애 무슨 꿍꿍이지?
집에서 마주칠 때마다 계집이 해수를 바라보는 눈빛,
자신의 민낯을 들여다보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눈빛,
야금야금 인내심을 갉아먹어 한계를 맛보게 했다.
해수는 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책상 서랍, 침대 아래.
‘떠나! 제발 내 인생에서 떠나!’물건이 죄 바닥에 쏟아졌다.
헤집는데 노란 공책이 손에 잡혔다.
집어던지려다 알 수 없는 기분에 공책을 펼쳤다.
일기장이었다.
계집의 속마음이 온전히 보존된.
그리고 최근에 마침표를 찍었는지 페이지 마지막 장에 짧은 글 귀가 적혀 있었다.
……
네가 내 언니가 되었을 때부터.
내가 짝사랑하던 남자를 네가 집에 데리고 왔을 때부터, 어쩌면 우리는 피할 수 없는 비극을 타고난 지도 모르겠다.
필연적으로 너는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갔고,
나는 너의 모든 것을 빼앗고 싶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해수의 입주변이 스산하게 일그러졌다.
이거였어? 신영원 네 속마음이 이거였어?
다시 빼앗아가기 위해, 집에 돌아온 거야?
해수가 마지막 페이지를 찢어 구겨버렸다.
나머지 것들도 찢어버리려다 멈칫했다.
지난 20년간의 비밀, 범죄의 증거였다.
‘안 돼. 이건 흔적조차 남겨선 안 돼.’일기장을 들고 무작정 뛰쳐나갔다.
아랫마을 당산나무까지 달려오니 해거름이 거의 내려앉아 있었다.
노을이 산등성이에 붉은 염료를 풀어놓았다.
나무는 샤머니즘의 분위기를 풍겼다.
색색깔의 천들이 어지러이 나부꼈다.
해수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라이터를 켰다.
지랄 발광하는 심장과 시뻘건 저녁놀이 온몸을 죄어온다.
불태워버리겠다고 마음먹었다.
피할 수 없는 비극이라.
그래, 숙명이라, 정말 존재하는지도 몰라.
해수는 적어도 자신이 숙명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걸터앉아 있다고 여겼다.
어머니 혜란은 어릴 적부터 해수에게 그녀가 타고난 숙명에 대해 주입을 시켰다.
‘너는 재벌가에 시집을 가야 해. 그게 네 숙명이야. 네 외모를 봐라. 남자들이 가만두지 않을 거다. 결코 여기서 네 인생을 쫑 내선 안 돼. 넌 재벌가의 아이를 낳아, 그 집안의 안주인이 되어라.’지겹도록 세뇌된 어머니의 못다 한 꿈들.
한풀이처럼 자신을 통해 야망을 이루려는 집착.
어째서 여자는 좋은 남자를 잡고, 아이를 낳는 삶에만 가치를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남자에게 빌붙어 사는 인생은 엄마의 대에서 끝내야 하지 않겠나.
깨부수고 싶었다.
‘세상에 그딴 숙명 따윈 없어.’ 해수에게 예쁜 외모는 1그램의 가치도 없었다.
재벌가에 시집가는 허상 따윈 꿈도 꾸지 않았다.
능동적인 삶을 살고 싶었다.
한 인간으로서, 여자가 아닌 예인으로 세상에 명예롭게 인정받고 싶었다.
무수히 많은 남자들이 꽃다발을 바치고 달콤한 말을 노래했지만 그녀를 흔들지 못했다.
단 한 남자 빼고.
‘백운당에 핀 해어화는 누구도 꺾을 수 없다고 하던데, 저는 사람들이 떠드는 얼굴 모르는 양귀비보다, 눈앞의 꽃이 더 아름다운 것 같군요.’‘…….’‘언제 연주를 들으러 다시 들르겠습니다.’주양의 말이 해수를 뒤흔들었다.
꽃처럼 아름답다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를 한 예인으로서 대우해줬기 때문이었다.
낮게 속삭여지는 목소리가 심장으로 침투했다.
‘기왕이면, 빠른 시일 내에.’명백한 호감이었다.
그때는 해수에게도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영원보다 빨리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그 말에 가슴이 떨렸었다.
얼굴이 붉어졌고 그래서 그렇게 수줍은 목소리를 내었다.
‘기회가 된다면, 얼마든지요.’그 남자를 사랑했던 걸까.
분별력이 있는 여자라면 누구든 거부할 수 없는 스펙의 남자라는 점을 빼고, 인간 대 인간으로 그 남자의 어디가 마음에 뒤흔든 걸까.
무엇이 그토록 나 자신을 초라하게 내몬 건가.
밤늦게 호텔로 주양을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
‘나를 선택하지 않아도 좋아요. 그 애한테는 가지 말아요.’‘…….’‘제발, 부탁이에요.’사랑을 구걸했다.
그리고 장렬히 차였다.
찬바람을 잔뜩 맞고 돌아와 며칠 내리 앓았다.
실연의 아픔을 다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지랄 맞게도 그녀를 찬 남자가 마음에 둔 여자가 영원이었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벙 쪘다.
어째서 또 너야……?
하지만 그때도 역시 숙명이란 이름으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 숙명이란 것이 존재하는지도 몰라.
상황이 이렇게 악화된 걸 보니, 어쩌면 숙명이란 건 진짜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우린 피할 수 없는 숙명을 타고난 거였을까.
탁탁!
되는 일도 없지.
라이터는 불꽃을 튕기기만 할 뿐 잘 안 붙었다.
진저리치는 그때였다. 검은색 5인승 티볼리가 흙길을 달려왔다.
해수는 불꽃을 일으키는데 열중했다.
끼이이익 - ! 차에서 남자들이 내렸다.
남자들이 해수의 입과 몸을 틀어막고 차에 욱여넣었다.
“우……읍!” 라이터와 일기장이 툭, 떨어졌다.
차는 순식간에 해수를 납치하고 떠났다.
다시금 고요해진 마을로 누군가 걸어왔다.
양혜슈퍼 손녀였다.
양혜는 며칠 전 벼락 맞아 두 조각이 난 당산나무를 구경하다가 눈길을 아래로 내렸다.
고개를 갸웃했다.
양혜는 품에 안은 인형 머리카락을 빗질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끝에 결정을 내렸다.
일기장을 주워갔다.
*
와장창!
집기가 부서졌다.
5555호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발작을 일으키는 신규 환자를 안심시켰다.
“진정하세요. 이런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가까이 오지 마!”해수가 링거 지지대를 무기 삼아 몸을 보호했다.
한 눈에 봐도 정상적인 곳이 아니었다.
“다, 당신들 뭐야. 왜 날 납치한 거야!” 창처럼 쳐들고 의료진들을 위협했다.
“신영원 짓이지? 그 계집이! 감금? 납치?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해수는 링거지지대를 던졌다.
뒷걸음을 치다 벽에 부딪혀 더 이상 물러날 곳을 잃었다.
그 틈을 타 여자 간호사들이 팔을 잡았다.
악! 해수의 발광이 심해지자 의사가 짜증난다는 듯 오더를 내렸다.
“나 원, 꼭 이렇게 말썽들을 피운다니까. 수면유도제 투여해.”돌팔이 의사가 가시를 세운 해수에게 접근해왔다.
“해를 끼치지 않아요. 우린 환자분을 도우려고 존재합니다. 당신은 이 병원의 VIP입니다.”의사가 미소 지었다.
웰컴 투 헬.
무표정한 얼굴에 드리운 영혼 없는 웃음이, 소름끼치도록 무서웠다.
.
.
.
.
어두운 밤이었다.
진정제 성분에서 해수가 깨어났다.
덜컹, 덜컹. 팔다리가 침대에 묶여 있었다.
“……힘드니?”“누구야!”해수가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불쑥 다른 이의 목소리가 불거졌다.
영원이 달빛 안으로 걸어 나왔다.
서서 잠든 자신을 지켜본 건가.
한쪽 벽에 기댄 영원이 말했다.
“나도 여기 며칠 있어봐서 알아.”“장난치지 마. 정신병원이라니.” 해수의 말에 영원이 장난은 없다는 듯 말했다.
“너에게 똑같이 되돌려 주고 싶었어. 여기서, 진짜 죽음 비슷한 고통을 맛봤거든.”“일기 봤어.”“아, 이거?”영원의 손에 딱지 모양의 쪽지가 쥐어져 있었다.
찢어버린 일기의 마지막 페이지였다.
영원이 해수에게 던져주었다.
“너 가져.”영원은 예고하고 있었다.
네 모든 것을 빼앗을 거라고.
너도 내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았으니 나도 천천히 네 걸 빼앗아가겠다고.
해수는 고개 숙였다. 어깨가 들썩였다. 산발된 머리카락 사이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원한 게 아니었어. 내가 의도한 게 아니었어!”영원에게 호소했다.
“어, 어머니가 시켜서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너도 알잖아. 어머니가 어떤 여자인지.”“끝까지 네 잘못은 없다고 회피하지.” “도대체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영원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넌 나쁜 년이야.“나라고 그 긴 세월이 편했을 것 같아? 너한테 잘해주려고 노력했어.”“…….”“네가 그렇다고 온순한 애는 아니었잖아. 그 성질머리 다 받아주면서, 나도 맘고생 심했어.”불뚝불뚝 네 심통 맞은 성격을 감당할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은데.
항상 영원에게 공평하게 대하려고 했다.
아니, 편애했다.
다른 이들에게 쏟는 성의를 영원에겐 곱절로 베풀었으니까.
“고통스러웠어. 죄책감 때문에 힘들었어. 네 비위 맞추느라 나도 힘들었다고!”이런 마당에도 이기적으로 소리치는 해수였다.
영원은 한 점의 감정도 남기지 않은 눈을 했다.
한 발 물러선 채 언제나 손을 더럽히지 않았다.
계모가 주는 대로 따르는 척,
하지만 결국에 넌 모든 걸 묵인하고 자기 것인 양 써왔다.
네가 한 게 아니라는 이유로,
자신도 피해자라는 무고한 가면을 두르고 비겁하게 말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상냥함이었다.
상냥함. 착한 울림이 피가 응고되고 배를 움켜쥐게 했다.
신해수. 상냥한 여자.
해수는 언제나 기묘한 죄책감이 뒤엉킨 얼굴로 그녀를 대했다.
‘내가 원한 게 아니었어. 내가 의도한 게 아니었어……!’‘어머니가 시켜서 나도 어쩔 수 없었어.’‘내 탓이 아니야. 어머니 탓이야.’뼈아픈 고해를 토해내며 해수는 괴로운 눈을 똑바로 맞추고 영원의 동정심을 구했다.
자의가 아니었다고,
타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했다는 듯이,
상냥한 죄책감으로 파르르 뺨을 떨구고서 영원을 부숴갔다.
“고통스러워? 죄책감 때문에 힘들어?”영원은 웃음이 샜다.
“네가 만약 내 입장이었어도, 그렇게 여유롭게 말할 수 있었을까?” 본질을 뚫는 말에 해수가 얼어붙었다.
빼앗기는 입장인 자신에게 감히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자기도 피해자였다는 망발을 지껄여선 안 된다.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웠다는 변명을 백날 울부짖어봤자 신해수는 손해 본 게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계모와 공범으로 영원의 것으로 호사를 누려왔다.
자신의 것인 양, 그렇게 감쪽같이 살아왔다.
신해수가 됨으로써 얻는 모든 이득을 맛봤다.
“자신에게 이로운 상황일 때 인간은 얼마든지 자비로워질 수 있지.”해수의 안색이 파래졌다. 영원이 뒤엉킨 눈물을 어쩌지 않은 채 경고했다.
“착한 척하지 마.”“…….”“너는 빼앗는 입장이었어.”네가 누린 호사에 비해 죄책감은 너무나도 값싼 고통이었다.
신해수의 상냥함엔 배려가 없었다.
오롯이 자신을 위한, 자기 위안을 위한 친절일 뿐이다.
“또 착한 척해.”영원이 손바닥으로 해수의 목을 감쌌다. 간신히 살의를 억눌렀다.
“그땐 정말 죽여버릴 테니까.”
*
별채에서 혜란이 손님을 모시고 있는데 매니저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사, 사장님. 이상한 남자들이 사장실을 헤집고 있습니다.”최혜란이 놀라 사장실에 도착했다.
사장실이 한바탕 뒤집어졌다. 비밀통로가 활짝 열려 있었다.
주인 허락 없이 들이닥친 한신 직원들이 박스째 서류들을 챙겨가고 있었다.
“당신들 뭐야, 누구 허락 받고 개인 사무실을 뒤져!”그들은 묵묵부답으로 할 일만 했다.
최혜란이 사내들을 뜯어말리려다 영원을 발견했다.
태평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최혜란이 휴대폰을 얼굴 앞으로 들이밀었다.
“전화해. 진 이사한테 전화 넣어. 멈추라고, 당장.”“해수는 오지 않아요, 어머니.”최혜란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쏘아붙였다.
영원이 테이블에 종이를 밀어놓았다. 무슨 병원 동의서 같은 것이었다.
최혜란은 천천히 병원 이름을 확인했다.
“정신…… 병원?”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잖아요?
영원은 진심이었다. 해수도, 찬란했던 당신의 전성기도,
오늘부로,
“돌아오지 않아요.”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