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69화 (69/83)

69화. 의무가 있는 복수 <2>2017.03.02.

“대체 경고를 어느 귓등으로 흘려들은 거야. 그 남자 안 된다고 했지, 내가.”“너 그 얘기 어디서 들었어? 아무도 모르는데.”“…….”“소문이 벌써 그렇게 돌았어?”“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바보야.”“상관 마. 귀찮으니까. 내가 누구를 만나건. 내 엄마도 아니잖아.”짜증 섞인 말을 내뱉은 영원이 흙을 마저 덮는데 갑자기 몸이 휘청했다.

무방비한 순간 노려진 목덜미가 사적인 흔적을 노출시켰다.

목덜미를 따라 핀 꽃잎 모양의 흔적들을 매향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영원의 얼굴에 화락- 열기가 몰렸다.

터무니없는 무례함이었다.

멋대로 옷을 잡아당기는 매향이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남의 몸을 도화지 삼아 이상한 거나 남기는 주양이나.

곁에 없는 순간에도 손가락 마다마디,

모공 하나하나,

그가 그녀 안에 머무른다는 걸 각인시키는 집요한 영역 표시였다.

누가 볼까 봐 머리카락을 꼭꼭 감췄는데.

영원은 손을 뿌리쳤다.

“옷 늘어나!”불만스럽게 씨근덕대자 매향이 절망스럽게 혼잣말했다.

“안 돼.”결사반대하고 나선다.

“그 남자는 절대 안 돼.” “…….”“차라리 다른 남자를 해. 왜 진주양이야!”외치는 목소리에 애가 끓었다.

원래부터 매향은 그녀가 주양을 마음에 담는 것을 우려했다. 다른 세계에 한쪽 발을 놓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게 매향의 입장이었다.

축하해주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렇게 진저리칠 줄이야.

진저리치다 못해 너무 과민이잖아.

심하게 다그치는 매향의 어조에 한탄이 섞여 있다. 마치 동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제에 어떻게 해수 남자를 탐내?’그 익숙하고도 창끝처럼 찔러오는 꼿꼿한 반응.

영원의 하관근육이 비죽비죽 우스꽝스런 모양새가 됐다.

“설마, 너 질투하냐?” 단단히 빈정 상해 마음에도 없는 말로 매향을 상처 주었다.

전에 없던 감정, 쓰레기 더미에서 솟은 것 같은 경멸감이 매향의 안면을 뒤덮었다. 정색하는 어조였다.

“몸과 마음을 다 바치기로 작정하니까, 친구고 충고고 눈에 안 봬냐?”“기생인 네가 운운할 말은 아니지 않나.”“기생이라고 원칙 없이 웃음 파는 거 아냐. 몸 팔아도 자존심은 지켜. 마음은 절대 안 바쳐. 그러니까 살 수 있는 거야. 마음까지 탈탈 털리면, 끝장이니까.”“…….”“그 남자가 너랑 결혼이라도 해준대?”결혼, 이라는 단어는 참 한결 같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영원을 일시정지 했다.

진두영 때도 그랬지만 아직 결혼까지 생각한 단계가 아니다.

아마도 그들 관계의 주도권을 주양이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겠지.

결혼에 대해 관심은커녕 의지 자체가 안 보이는 남자였다.

“정신 차려. 신영원.”다시 메아리치는 동료들의 목소리.

‘주제에 어떻게 감히……?’영원은 빈 웃음만 나왔다.

정신 차리라고?

자신이 제정신이었다면 진즉에 자살했거나 어디 처박혀 있었을 것이다.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만만한 삶이 아니었다.

영원은 매향을 등졌다.

가려는 그녀를 “얘기 끝내고 가!” 매향이 덥석 어깨를 움켜쥐었다.

“네가 산 채로 씹어 먹힐까 봐 그런다고 했어. 그 남자…… 인간이 아니라고 했지!”“그럼 나는!”영원이 팔을 뿌리치며 울듯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파르라니 질려 있는 숨결,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가슴을 쥐어뜯었다.

“나도 사람이 아냐.”4년 전, 그 일이 있은 후 영원은 사람이기를 포기했다.

이미 한 번 죽은 목숨이었다. 시체에게 정체성이 남아 있을 리 없다.

S 따위……, 내가 부탁한 죽음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살고자, 악착같이 살아남기 위해 외면했던 S의 죽음이 도리어 영원의 숨통을 죄어 갔다.

왜 날 보고만 있었어?

왜 날 살려주지 않았어?

그래도 또 살고 싶어서, 살아야겠어서 뻔뻔하게 땅에 묻으려는데 네가 그러면,

숨 쉬는 공기에도 칼날이 벼려진 듯 고통이 밀려와

……사는 것이 죄가 됐다.

*

하나둘, 세어지던 빗방울은 옷깃을 적실 정도가 됐다.

빗소리가 두둑이 고막으로 차올랐다.

여린 나뭇가지를 흔들며 가랑비는 영원의 목덜미를 적시고 턱까지 흘러내렸다.

몸이 적셔들었다.

영원은 사가 대문 아래에 구겨졌다. 비밀번호를 바꿔놔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노 집사도 없고 전부 집을 비웠다.

외투를 푹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려 가족을 기다렸다.

빗줄기를 견디지 못한 낙엽이 도로 위로 떨어졌다.

젖고 구겨진 볼품없는 노란 은행나무 잎이었다.

지금 저 잎이 그녀의 신세와 다른 게 있을까.

그때, 차 한 대가 노란 잎을 지르밟으며 들어섰다.

세 모녀는 차에 잔뜩 싣고 있던 트렁크 가방을 내렸다. 영원이 집을 비운 며칠 간 해외여행을 다녀온 거다.

“역시 기분 꿀꿀할 땐, 쇼핑이야. 생각해도 한정 판매로 나온 맥 립스틱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 어? 거지는 뭐야.” 성원이 대화를 멈췄다.

영원은 추위에 몸을 더욱 웅크렸다.

계모는 영원에게 눈길도 안 주고 집으로 들어갔다. 성원은 영원과 그런 계모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다 코를 찡그렸다.

“아오, 나도 모르겠다!”성원은 가방을 끌고 안으로 종적을 감췄다.

영원은 가만히 무릎을 끌어당겨 한기로부터 방어 자세를 취했다.

고집스레 정면을 보자, 어두운 그림자가 머리맡에 드리워졌다.

해수는 두 모녀처럼 그녀를 철저히 투명 인간 취급하지 않았다. 대신, 감정 따위가 사라진 표정으로 영원을 내려다봤다.

내리누르는 눈길이 무표정했다. 무언의 압박이 실려 왔지만 영원은 꿋꿋이 반응하지 않았다.

너를 올려다보는 것은 이제 그만할 거다.

“집에 혹시 놓고 간 게 없나 해서 와봤어.”“기다려.”집으로 들어가는 해수의 손목에서 무언가 딸랑거렸다.

노승이 말했던 염주.

‘네 애비 부탁으로 내 너에게 염주를 만들어주었느니라. 그것을 어찌했느냐.’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저런 액세서리조차.

해수는 저것을 부적이라며 가지고 다녔다.

계모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걸 제 딸에게 주었을까? 저 애에게는 어차피 아무 효력도 없는 쓰레기일 뿐인데.

모든 것을 다 빼앗아주고 싶었던 걸까.

그렇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을 만큼 내가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던 건가.

해수가 금세 밖으로 나왔다. 미리 싸놓았는지 짐 가방이 발치에 턱, 놓아졌다.

영원이 짐 가방을 열어봤다. 창고에 먼지 쌓이게 방치됐던 자신의 아기 때 앨범 같은 것들이었다.

영원이 명하니 그것들을 바라보자 해수가 말했다.

“떠난다며.”침묵이 긴 띠를 두르고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가라.”영원은 죽을힘이 다해 이 집에서 버텼다.

잊혀질까 봐. 존재가.

“대신, 여긴 다시는 오지 마. 우리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그게 다야?”“…….”“나한테 해줄 말이…… 그거, 뿐이야?”영원의 말에 해수가 주먹을 쥐었다.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말을 씹어뱉었다.

“너도 억울할 거 없잖아. 불쌍한 처지 덕에, 진주양 같은 남자를 잡게 됐으니.”

마치 그들이 영원을 하녀로 만들어준 덕에 왕자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는 궤변이었다.

“잘 가.”해수가 완전히 돌아섰다.

*

해수가 던져준 가방을 들었다. 가려는 길에 호운을 만났다.

택시에서 내린 그는 영원이 손에 든 보스턴백을 멍하니 봤다.

“떠나?”호운이 목발을 짚고 위태롭게 서 있었다. 호운은 병원에서 전치 8주의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그때, 그거 꿈이 아니었던 거지.”영원이 웅얼거리자 호운은 침묵했다.

크루즈에서 갑자기 주양의 호텔로 장소가 옮겨졌을 때 짐작하긴 했다.

“막 돌아다녀도 돼?”“간호사가 알면 나 죽이려 들걸.”“여긴 무슨 볼일인데.”“몸을 가누자마자 달려온 거야.”그렇게 말하며 그가 영원을 봤다.

병석에서 일어나자마자 부러진 다리와 갈비뼈를 이끌고 백운당까지 온 것이다.

자신 때문에.

“이제 오지 마. 나 여기 안 와.”영원은 호운이 자신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안다. 죄책감이건, 동정이건.

그래. 호운이 그렇게 바라던 대로 영원은 떠난다. 백운당을.

그런데 왜 이다지도 마음 한 구석이 착잡한 걸까. 아쉬움인가.

헛웃음이 샜다.

설마…….

호운이 믿기 어려운 어투로 재차 물었다.

“백운당을, 떠난다고?”기가 막힌다는 듯 웃음을 터트린다.

“내가 나가자 할 땐 죽어라 붙어 있더니. 그 기생오라비가 나가자니까 쫄래쫄래 따라가기냐?”갑자기 자기연민에 빠져 자조적인 한숨을 짓는다.

“하긴. 그 자식이라면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많겠지.”영원은 심드렁하니 돌멩이를 걷어찼다.

누구를 위로해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애써 참고 있는데 놈이 결정타를 날렸다.

“괴롭고 억울해도, 엄한 생각 마라.”팽팽하게 날서 있던 통제력이 올올이 끊어졌다.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영원이 눈을 치떴다.

왜 기분이 이상한지 영원은 알 것 같았다.

억울함. 손해 보는 것 같은 것이리라.

영원의 안에 담아두고 있던 말들이 넘쳐흘렀다.

“아주, 신물 나게 애처로운 효성이야. 왜, 내가 네 엄마한테 해코지라도 할까 봐? 팔은 안으로 굽는다더니.”굽을 데가 따로 있다. 그런 팔이라면 잘라내야 마땅했다.

영원이 경멸하듯 돌아서는 그때였다.

“해코지. 했다면 벌써 그때 했겠지.”영원이 멈칫 섰다.

그러는 너야말로 그 팔을 잘라내지 못하고 여태까지 질질 끈 건데.

자기 안의 목소리가 되울려퍼졌다.

호운이 영원을 똑바로 보았다.

“그 계집이 죽었을 때.”

.

.

.

몸부림이 정지된 순간, 침묵은 잉태하고 있던 서릿발 같은 추위를 집어삼켰다.

엎어진 채 죽은 소정을 보고 영원은 뒷걸음질 쳤다.

겨, 경찰서. 발을 떼는데 턱, 누군가의 가슴팍에 뒤통수를 부딪쳤다.

4년 전 겨울, 그곳엔 영원 혼자가 아니었다. 목격자가 한 명 더 있었다.

군인은 한쪽 어깨에 짊어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놓쳤다.

짧게 깎은 머리. 잘 다려진 군복.

크리스마스 포상휴가를 나온…… 호운이었다.

그들은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보았고, 같은 비밀을 품고 있다.

겨, 경찰서 가야 해. 영원이 두서없이 말을 흘렸다.

가려는 팔목을 호운이 낚아챘다.

‘실수였을 거야.’다급함에 순간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음성이었다.

새하얀 입김. 허공을 흐리는 서글픈 겨울 날씨.

영원이 제 귀를 의심하며 호운을 봤다.

비참하다 못해 참담함이 호운의 안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 자신도 놀라 눈이 커졌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내가 무슨 말을 지껄인 거지?

왜 그 여자를 옹호하는 말을 한 거지?

영원은 야멸차게 호운의 팔을 떨쳐냈다. 그녀는 냉정히 호운을 비껴나갔다.

호운은 멍하니 서 있었다.

최혜란을 증오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녀 보란 듯이 군에 말뚝을 박았다. 여자라면 지긋지긋했다. 여자가 없는 세상이 좋았다.

그에게 있어 자신과 동등하게 대하고 싶은 인간 여자는 ‘영원’이 유일했다.

최혜란은 그토록 마음으로 증오하면서 백운당과 인연을 끊지 않은 것,

영원 때문이었다.

휴가를 나올 때, 잠깐씩 몰래 그녀의 얼굴을 엿보고 가는 게 그가 아는 낙이었고 여자를 마음에 품는 시간이었다.

그녀를 대함에 있어 진심이 아닌 적은 없었다.

‘널…… 이해할 수가 없어. 왜 사람들 앞에서 그 여자 딸인 척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아무도 사람들이 그 여자를 의심하지 않고, 좋은 계모라고 여기는 거잖아!’그렇게 기고만장하게 소리쳤건만.

단 한 번도 결정적인 도움을 준 적은 없다.

패륜이라는 핑계로 호운이 최혜란의 악행에 침묵하는 사이 죽은 그 여종업원은 영원을 진심으로 구제하려 했다.

그리고 살해당했다.

머리로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어미이기 때문인가.

말뿐인 걱정,

그가 속죄해야 할 것은 두 가지.

첫 번째.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죄.

두 번째. 어머니의 아들이기에 묵인 할 수밖에 없었던 죄악들.

영원을 위했다면 여종업원이 밝히려 한 진실을 그가 나서서 뒤늦게라도 알렸어야 했다.

마을 파출소에 신고가 접수됐지만 최혜란의 얘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호운은 눈을 감았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휴가였다. 군을 전역했다.

.

.

.

“행여나 허튼생각 마라.”“…….”“인정 안 하겠지만…….”쓰디쓴 사약을 삼키는 심정으로 호운이 웃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넌 악역이 되기엔 너무 착해. 순둥아.”호운은 우유부단했고, 영원은 너무 물러 터졌다. 최혜란에겐 축복이었다.

영원은 다리가 부러진 호운을 외면하기가 그랬다.

주양 때문에 그랬다는 것을 양 비서를 통해 전해 들었다.

말하지 말았어야 했지만 아마도 영원이 또 사라지는 일을 막기 위해 경고한 것이리라.

다친 몸으로 영원의 생사까지 확인하러 백운당에 왔다.

호운을 남자 숙소까지 안내해주고 나오는데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일기장.’화단에 파묻다가 말았다.

다급하게 비를 뚫고 달려갔다.

영원은 당황했다. 화단이 파헤쳐져 있었다.

일기장을 담은 상자만 뱀 허물처럼 벗겨져 있고, 내용물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지나가던 가게 동료를 잡아 물었다.

“매향이 어슬렁거리던데?” 쏴 -! 쏴 - !

성기던 빗줄기가 굵어졌다. 악천후에 천둥번개까지 번뜩였다.

매향은 빈 전각에 서서 무연히 빗줄기를 응시하고 있었다.

영원이 나무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그녀의 손에 들린 일기장을 낚아채려는데 매향이 빨랐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어린 여동생과 함께 고아가 됐어. 살아남아야 했어. 고아원에선 삼시 세끼 먹여줄 테니 차라리 그 삶이 나을 거라고. 어린 동생을 버렸지. 사법연수원에 있을 쯤 동생 소재를 알게 됐어. 원장의 성을 이어받아 한 씨 성으로 살고 있었더라고. 또 한 번의 파양, 여동생은 장하게도 혼자 힘으로 살아가고 있었어. 나 같은 언니 따윈 기억에서 지우고.”매향이 영원을 돌아봤다.

“근데 죽었더라고. 억울한 일로.”“…….”“내 동생, 죽은 모습이 어땠어?”영원의 표정이 딱딱하게 내려앉았다.

“별로 안 놀라는 것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죽는 순간에 어떤 표정이었니. 그 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