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68화 (68/83)
  • 68화. 의무가 있는 복수 <1>2017.02.26.

    -실종 38일째

    ……경찰의 탑차 시신 발견 당일.

    시간은 꿈속에서 표류한다.

    십 년 전의 일들이,

    과오들이,

    그동안 수고했어. 라며 어깨를 두드리며 스쳐갔다.

    자신의 죽고 썩어가는 육신을 처음 발견할 이는 그 형체에 얼마나 당혹스러움을 표할 것인가.

    영원은 눈꺼풀을 가까스로 걷어 올렸다.

    다세대주택, 빛 한 점 안 드는 반지하방에 죽음의 냄새가 깔렸다.

    썩은 형광등은 누전된 지 오래였고,

    음습한 곰팡내가 희미하게 부여잡고 있는 이성을 점차 탈락시켰다.

    툭,

    ……투욱, 넋을 잃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에서 빗물이 샜다.

    사람들의 발소리가 간혹 들렸다.

    호운이 간신히 구한 은신처였다.

    ‘신원을 밝히지 않고 구할 수 있는 집은 이런 데뿐이야. 불편해도 참자.’ 전입신고 없이 살 수 있는 곳을 원하는 사람들.

    불법체류자, 범죄자 혹은 일용직에 종사하는 사람들 때문에 생겨난 문화였다. 주민들과의 왕래도 없는 삭막한 동네였다.

    5평짜리 단칸방에 사람이 죽어가고 있을 거라고 여기는 주민은 없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힘을 놓쳤다. 피하는 법 없이 영원의 콧잔등으로 일직선으로 추락했다.

    타악,

    싸구려 암막 커튼에서 빗소리가 서로서로 엉겨 붙었다.

    비가 오는……가.

    입김이 차가워졌다.

    내려앉을 것 같……다.

    눈두덩이 무겁다.

    툭,

    ……툭,

    투욱.

    꺼져가는 의식 아래서, 빗물 소리는 어느새 수액이 떨어지는 소리로 바뀌었다.

    멀쩡했던 한 인간의 의지를 갉아먹는 것이 정신병원이었다.

    지난 4월.

    결혼식을 한 달 남겨두고 영원은 마지막으로 해수를 찾아갔다.

    “사람들을 나를 꽃이라 불렀지. 내가 향기 없는 꽃인지도 모른 채.” 그 시간, 해수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믿을 수 없는 일들을 영원에게 고백했다.

    “난 꽃이……, 꽃으로 불리는 게 너무 싫었어. 여성은 어째서 꽃처럼 다뤄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어째서…… 여성의 가치가 아이를 낳는 데만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사죄는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얼마나 불쌍한 인간이었나, 에 대해서만 늘어놓았다.

    자기연민에 빠져 남의 고통은 고려할 줄 모르는 여자였다.

    영원은 창가에 놓인 화분을 봤다.

    꽃은 물을 주지 않아 죽어가고 있었다.

    누구처럼.

    쾅! 해수가 달려들었다. 팔목에 채워진 족쇄가 팽팽하게 당겼다.

    “결혼? 해봐. 해봐! 아아아아악!”온갖 가능한 저주와 폭언을 쏟아부었다.

    어디 잘 살아봐. 웃을 수 있을 때 실컷 웃어놔. 병신, 빌어먹을 년, 남을 이 꼴로 만들어놓고, 넌 희희낙락, 애새끼 낳고 잘 살겠다?

    지독한 증오심와 절망으로 까맣게 타들어간 절규.

    한 자 한 자 씹어뱉어졌다.

    네가 가장 행복할 때가 바로 내가 너를, 찾아가는 때가 될 거다. 네 애를 죽이러……! 내가 찾아갈 거라고!

    찢어지는 비명은 병실을 나서는 복도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움찔. 영원은 희미한 태동에 눈을 떴다.

    아직 누렇게 변색된 단칸방이었다.

    얼마나 잠들었지? 영원은 아랫배에 손을 얹었다.

    그래. 그녀는 아이를 가진 상태였다.

    그녀는 여기서 죽는다. 죽어가고…… 있다.

    이 아이와 함께.

    서러움에 눈물이 나는 그때였다. 굳게 닫혔던 문고리가 달깍, 달깍, 움직였다.

    누군가 문을 열려고 하다 안 되자 유리를 깨부쉈다.

    유리파편을 치우고 넘어온 팔이 안에서 문을 따는 것이 느껴졌다. 호운일까.

    그러나 하이힐 소리였다.

    또각또각.

    내 아이를 죽이러 찾아온 걸까. 해수가.

    빨간 하이힐이 머리맡에서 멈췄다.

    눈을 씀벅이자 해수의 잔영이 걷히고 진짜 여자의 본얼굴이 드러났다.

    누워 있는 얼굴 바로 위로 여자가 영원을 내려다봤다.

    그제야 또렷이 두 시선이 평행선에 놓였다.

    상대가 내보내는 지친 한숨에 영원은 숙연해졌다.

    매향이 붉은 입술을 실그러트렸다.

    “네가 밉다. 원망스럽고.”“…….”“이런 내 자신을 싫게 만드는 네가.”

    -1년 전, 영원 26세

    툭……. 툭…….

    유리조각 끝에서 신선한 혈액이 느리게 흘렀다. 암적색 굳은 피딱지가 손톱에 끼어 있었다.

    감전된 절지동물처럼 감각 없이 손끝이 까딱거리고 있었다.

    육체의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영원은 피로 짓무른 눈가를 깜박였다.

    얼굴이 피범벅이었다.

    퇴근하고 온 주양이 놀란 듯 가방을 떨어트렸다.

    영원이 자신의 이마를 그어버렸다.

    “어때……? 나.”“…….”“지금은, 진짜 복수할 것 같아 보여?”복수는 폭주다. 복수엔 이성을 챙길 여유 같은 건 없다. 순도 높은 폭력이라는 점에서 복수는 광기에 가까웠다.

    미쳤다, 나는 미쳤다. 상관없다.

    날…… 누구에게도 이해시키고 싶지 않으므로.

    *

    하루 전.

    여의사는 영원의 이마에 난 상처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상처가 꽤 깊네요. 오래되기도 했고, 아물려고 바동거렸는지 덕분에 울퉁불퉁해요.”“그래서 흉터를 치료할 수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영원은 비관조로 옷을 꽉 쥐었다.

    의사란 것들은 장삿속에 밝아서 부질없는 가능성에도 희망을 부추겨 환자에게 돈을 뜯어낸다.

    여의사는 빙그레 웃으며 영원을 안심시켰다.

    “100퍼센트 제거는 힘들지만, 치료 받을 수 있어요. 분명 좋아질 거예요.”낙인을 지워야만 새 출발을 할 수 있다. 과거 따윈 깨끗이 잊고 새롭게 출발하고 싶다.

    이마의 흉터를 지우면, 가슴을 도륙당한 흔적도 흐릿해질 수 있을까.

    진료실을 나오자 경호원이 외투를 입혀주었다.

    그날 밤에 잠자리에 누운 영원을 유심히 살피던 주양이 결정한 일이었다.

    계모에게 또 얻어터질까 봐 걱정한 걸까?

    하지만 그런 것치고 과잉보호다.

    아마 전처럼 훌쩍 예고 없이 사라지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리라.

    조금만 떨어지려 해도 재미없는 경호원 씨가 엄한 표정을 지어서 귀찮았다.

    “화장실 갈 거야.”거기까지 따라온다 하진 않겠지.

    여자화장실엔 아무도 없었다.

    세면대 겨울에 영원의 얼굴을 비췄다.

    머리카락 안에 손을 집어넣어 이마의 흉터를 더듬었다.

    의사는 울퉁불퉁한 면을 레이저로 깎아내서 덜 도드라져 보이도록 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한 여자가 화장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나란히 영원의 옆에 서서 손을 씻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한껏 치장한 모습이 연예인 같았다.

    눈을 무심히 아래로 내렸다가 문득, 여자의 구두에서 시선이 멈췄다.

    예전에, 주양이 영원의 휴대폰을 부러트려서 시내로 나갔던 적이 있다.

    매장 쇼윈도 안에 진열돼 있던 그 구두였다.

    아름다운 여자들만 신을 수 있는…….

    결국, 임자를 찾았구나.

    화장실을 나오자 경호원이 통화를 끝냈다.

    정중히 고개를 굽히고 영원의 귓가에 나직막이 속삭였다.

    “이사님께서 마중 나오셨습니다.”

    *

    영원은 철수를 기다린 바둑이처럼 신 나서 차에 올라탔다.

    주양이 휴대폰에 눈길을 주느라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그사이 차는 부드러운 승차감으로 목적지인 백운당을 향해 달려갔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까.

    “병원에선 치료를 내일부터 당장 시작하는 게 좋다고 했다는데. 네 생각은?” 주양이 슈트 안주머니에 기기를 넣으며 그녀를 봤다.

    대화가 급작스럽게 단절을 맞이했다.

    영원의 입술에 주양의 눈길이 빤히 박혔다.

    영원은 바짝 긴장했다.

    삐질삐질 땀을 훔치며 영원이 물었다.

    “왜, 왜? 내 얼굴이 뭐 묻었어?” 묻지도 않았는데 제 발 저려서 실토했다.

    모르는 척 해줬으면 바랐건만.

    이상해? 쥐를 잡아먹은 듯 붉은 입술이 우물거렸다.

    매향이 준 립스틱을 조금 발라봤다.

    눈치를 보는데 주양이 경고도 없이 영원의 턱을 잡아들었다.

    상체가 갑자기 그녀 쪽으로 기울여졌다.

    덮쳤다. 운전석에 비서도 있는데 다짜고짜 영원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입술이 빨렸다. 갑작스런 입맞춤에 놀랄 틈도 없었다.

    탐욕스럽게 립스틱이 완전히 먹혔다. 까칠한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샅샅이 핥아냈다.

    찢겨질 것같이 아파서 영원은 몸부림쳤다.

    한참만에야 주양의 상체가 떨어져 나갔다.

    제대로 지워지지 않아 입 주변에 립스틱 번짐이 남아 흉했다.

    “뭐하는 거야!”

    영원이 펄쩍 뛰자 주양이 뻔뻔하게 입가를 엄지로 쓰윽 훔치며 말했다.

    “가끔, 이런 인상적인 키스도 나쁘지 않아.”영원이 황당하게 눈자위를 떨었다.

    “또 발라. 지워줄 테니까.”립스틱을 바르는 게 싫은 거다. 영원은 불만이 봇물처럼 터졌다.

    “그, 그치만 나도. 나도 예뻐지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당연하잖아!”주양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괜찮다는데 뭐가 문제지?”“너는 그렇게 잘 빼입고 다니면서 나는 거지처럼 하고 다니라는 거야? 불공평하다고. 타인에게 보이는 시선이라는 게 있어. 나는…… 예쁜 구두도 신고 싶어.” 혼자일 때는 상관없다.

    하지만 그와 있는데 좀 더 어울리는 여자가 되고 싶다.

    주양은 다른 데에는 아낌이 없었지만, 영원을 치장시키는 데 흥미가 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데리고 다니기 쪽팔리지 않나.

    고심에 잠긴 채 주양이 관자놀이를 괴었다.

    “그게 널 불행하게 해?”뜬금없는 물음이었다.

    검은 듯 푸른 기가 느껴지는 눈동자가 영원을 꼼꼼히 살폈다.

    “지금 이 문제가 네 불행과 연관 있는지 묻고 있는 거야.”영원의 모습을 그가 침투하듯 유심히 어루만졌다. 적잖이 당혹감이 몰려왔다.

    그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계모와 드잡이를 한 일을 묻고 있는 거다.

    너무 충격적이고 절망스러워서 오줌까지 쌌다.

    그 일은 영원이나, 주양 둘 다에게 트라우마였을 거다.

    연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비참한 모습을 들킨 한쪽과,

    허물어져가는 연인을 보며 그녀가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 다른 한 쪽.

    주양이 이렇게까지 신경 쓸 줄 몰랐다.

    영원은 억지 부리던 걸 포기하고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는 이렇게 뜻밖의 말들로 놀라게 했다.

    영원은 안심시키듯 과장되게 연기했다.

    “하. 얘 뭐래니? 그깟 일로 내가 여직 찌질하게 꽁해 있을 거 같아? 그런 건 아무것도 아냐.”주양이 물끄러미 그녀를 보았다.

    “행복해?”주양의 물음에 영원은 얼굴을 붉혔다.

    “당연한 거 아냐?”“세상에 당연한 건 없어.”“네가 있잖아.”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영원이 부끄러워서 손장난을 쳤다.

    “너는…… 날 떠나지 않을 거잖아.”그 말이 어떤 스위치를 건드렸는지 기폭제가 됐다.

    주양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출렁였다.

    어느새 백운당이 보였다. 영원은 눈길을 회피했다.

    “다 왔어. 여기서부터 혼자 갈 수 있어.”  영원이 얼른 내리려고 했지만 그가 지그시 손목을 쥐었다.

    그리 큰 힘도 아니었다. 부드럽게 죌 뿐이었다.

    굵고 짧게 함의된 욕망.

    결국 차는 한적한 길가에 세워졌다.

    비좁은 차 안에서 입술끼리 부대꼈다. 단말마 같은 신음이 목젖까지 치받혔다. 아랫입술이 잘게 떨렸다.

    부드럽기만 했던 손아귀 힘과 달리 신사답지 못한 거칠고 동물 같은 식욕,

    그는 허락도 없이 침범했다.

    불순하고 차가운 손바닥이 안의 살갗을 매만졌다.

    그의 눈동자가 영원을 완전히 담았다.

    빨갛게 상기된 뺨이 시트에 붙여졌다.

    주양이 그녀의 얼굴을 잡아 저를 보게끔 고정했다.

    믿을 수 없이 강렬하게 흡입하는 표정이 흥분으로 물든다.

    “다시 한 번 말해봐.”그가 잔뜩 쉰 목소리로 명령했다.

    “다시.”영원은 심장 표면으로 잔물결이 일었다.

    그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좋다.

    논리적 판단력을 잃은 것처럼 내게 달려들 때, 그리하여 나를 가장자리로 몰아갈 때,

    ……미칠 것 같다.

    수줍게 고개를 도리질을 치자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희미한 숨결이 어깨를 데웠다. 그가 웃는 것도 같았다.

    심장박동이 가파르게 상승한다. 너무 평탄해서 이상하고 기이한 나날들이었다.

    주양 덕분에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곁에 누군가 있어준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매일 혼자였으니까.

    …… 행복한 것은 사실이었다.

    “사람 같은 거 붙이지마. 안 도망칠 테니까.”문득 주양이 영원이 등 뒤에 숨긴 상자를 발견하고는 턱짓하며 물었다.

    “그건 뭐지?”영원은 백운당에 왜 왔는지 상기했다. 납작한 상자를 꽉 껴안다.

    “처리해야 할 물건.”

    *

    영원이 떠나는 모습을 주양이 사이드미러를 통해 지켜봤다.

    언제 사랑을 속삭였냐는 듯 무정한 겉껍데기로 돌아왔다.

    영원이 존재함으로써 잠시 느슨하게 벌어졌던 틈이 지체 없이 원래의 압박감을 되찾았다.

    실망도, 분노도, 애써 참고 있는 것뿐이다.

    차체는 주양의 저조한 기분을 시사하는 숨 막히는 공기로 꽉 메꿔졌다.

    조수석의 양 비서가 뒷좌석에 대고 의견을 구했다.

    “최혜란 일가를 어떻게 처분하실 겁니까.”주양은 미러에 박고 있던 눈동자를 떼지 않았다.

    영원이 이 길모퉁이를 완전히 돌 때서야, 그렇게,

    “순리대로 갑시다. 순리대로.”툭, 낮은 한마디가 던져졌다.

    창유리가 그를 집어삼켰다.

    검은 세단이 출발했다.

    *

    비가 올 모양이다. 전나무 숲을 감싼 공기가 습윤했다. 이런 날이면 백운당 한옥의 원목향이 더욱 짙게 공기에 밴다.

    매의 날갯짓에는 비효율적인 동작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군더더기 없는 방향감각, 침입자에게 보내는 경고성 영역 표시.

    제 새끼가 있는 둥지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잿빛 하늘을 선회했다.

    영원은 걸음을 빨리했다. 경호원을 간신히 떼놓고 왔다.

    수막새에 새겨진 꽃문양을 따라 돌담이 이어졌다.

    11월, 돌담 기와에 노랗고 빨간 단풍잎들이 소복이 쌓였다.

    바짝 햇볕에 말려지기를 반복, 스스로 빛바래져 가고 있었다.

    상자를 품에 안고 막 뒤뜰로 들어서는 그때였다.

    여종업원들이 기와집 앞마당을 쓸고 닦고 있었다.

    “비 소식 있다는데 마당 쓸어봤자 아냐?”영원이 가출한 동안 한 계절이 지났다.

    동료들은 주홍빛 물을 들인 동복 개량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1년 전만 해도 이맘때면 자신 역시 저 무리에 동참해 있었다.

    그들은 옹기종이 모여 수다삼매경이었다.

    “요즘 신영원 보기가 하늘의 별 보기보다 힘들어?”“가출하셨단다.”“걔 사춘기냐? 돌아온 지 얼마 됐다고 또?”“해수가 한신그룹 왕자하고 스캔들 났는데 그 성격에 배알이 얼마나 꼬이겠어.”걸레로 마루 훔치던 한 아이의 말에 마당을 쓸던 동료1이 나섰다.

    싸리비로 몸을 지탱하고 시건방진 표정을 지었다.

    “그 계집애가 진 이사한테 마음 있던 거 맞지? 역시.”“제 주제에 어떻게 해수 남자를 탐내?”욕설과 함께 달려들었어야 함이 마땅했다. 머리를 죄 뜯어내고 얼굴을 할퀴어줬어야 했다.

    하지만 영원은 어째서인지 그들이 떠날 때까지 죄인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계모와 그 일이 있은 뒤 범오사를 다녀갔다. 기억이 돌아오면서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친모의 기억과 더불어……

    “당신은 나를 알고 있지. 아주 오래전부터.”노승이 어렴풋이 어린 기억 속에 있었다.

    불교에 업이라는 말이 있다. 업보. 이것은 나의 업보일까.

    문득 영원은 자신의 운명이 궁금해졌다. 땡중은 어찌하여 그녀에게 그런 말을 했는가.

    ‘너는 관상이 좋으니 말만 좀 곱게 하면 좋을 것이다.’‘너는 네 못된 심보 때문에 팔자를 빌어먹고 있어.’마치 영원의 과거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학예회에서 계모를 내 엄마라고 친구들에게 소개했을 때부터, 소정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 것까지.

    영원의 못된 심보와 못돼 처먹은 말들이 사람들을 죽였고 자신의 팔자를 빌어먹게 하고 있다.

    제 발로 찾아온 영원에게 성철이 말했다.

    “너는 기억 못 하겠지만 어렸을 적 너를 본 적이 있다.”이름이 바뀌어 어찌된 영문인지 몰랐으나 잊었을 리가 없다.

    10년도 안 된 인생이 칠십 먹은 노파보다 더 풍파를 많이 겪은 눈을 한 아이와,

    그런 딸의 정신이 온전히 돌아오게 하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불공을 드리러 온 젊은 아비.

    “네 애비 부탁으로 내 너에게 염주를 만들어주었느니라.”그것을 어찌했느냐. 해수야.

    염주라니. 그런 건 알리가 없잖아.

    영원은 그저 자신을 해수라고 알고 있는 부르는 성철에게,

    “나 해수 아니야.”하고 부인했다.

    “나를 신해수라고 부르지 마.”고집스럽게 인정하지 않는 것과 달리 목소리 끝에 파동이 일었다.

    세상의 이치와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을 통달한 먹빛 눈동자가 영원에게 오랫동안 머물렀다.

    수천 개로 갈라져 번민하는 마음을 들여다본다.

    성철이 강하게 못 박았다.

    “너는 해수가 맞다.”마치 그렇게 불러주기를 바라지 않았느냐며.

    그 단호한 울림이 번져와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성철과의 만남을 끝내고 법당을 나왔다.

    108계단에 앉아 있는데 한 중년 남자가 헉헉 대며 올라왔다.

    170 정도 되는 키에 퉁퉁한 몸을 가진 그는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대체 돈 육십억을 튀어먹고 어디로 숨은 거야? 개새끼. 잡히기만 해봐라.” 남자는 마주 오던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어봤다. 그 역시 이 사찰의 주지를 만나려는 모양이었다.

    문득 사내가 명함을 돌리며 자기소개를 했다

    “대성기획 장영범입니다. 바람나서 도망간 마누라, 보증 서줬더니 토낀 친구, 길 잃은 개새…… 애완견까지. 돈만 주면 다 찾아줍니다. 찾고 싶은 게 있으시면 연락 주십시오.”“잃어버린 건 다 찾아드립니다.”사내가 영원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그의 말이 귓전을 끈질기게 안 놔주었다.

    잃어버린 건 뭐든 다 찾아준다.

    “이름도, 이름 같은 것도 되찾아주나?”신해수,

    그 이름은 그녀 안에서 부서진 지 오래였다.

    자신으로 인해 무고한 한 생명이 목숨을 잃은 이후, 영원에게 더 이상 그 권리를 주장할 ‘권리’가 없었다.

    그 이름으로부터 이제는 자신을 완전히 객관화시킬 수 있었다.

    그 만큼의 시간과 상실감이 자신을 지나쳐갔다.

    영원은 어느새 잊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자신이 누구였는지…….

    아니. 부서지지 않았다.

    애초에 부서진 적 따위 없다.

    가지지 못하니 외면한 것일 뿐.

    그래, 원래대로 돌아기기를 바랐다. 나는 오랫동안.

    ‘나 그 사람하고 결혼할 거야.’해수는 호텔에 찾아와 영원과 주양의 관계를 알면서도 뻔뻔하게 자기 권리를 주장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해수, 그 이름이 가지는 힘이 있는 걸까.

    그 사람을 좋아한 것도 영원이 ‘먼저’인데.

    처음에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도,

    모두 다 영원인데.

    왜 그녀는 안 되고 신해수는 된다는 거지.

    영원은 동료들이 깨끗이 쓸고 간 마당을 응시했다. 동료들의 비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제 주제에 어떻게 해수 남자를 탐내?’하지만 내가 신해수인데…….

    원래는 내가 진짜 신해수인데…….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큼은 되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품에 안고 있는 상자는 그것을 약속하기 위함이었다.

    그 이름으로 인해 죽은 여자가 있었다. 빼앗긴 것을 다 찾아와도 영원에겐 이름을 가질 권리가 없었다.

    후드둑, 상자 위로 축축한 흙이 깔렸다.

    화단에 구덩이를 팠다.

    상자에는 5년 전 영원이 썼던 회고록이 담겨 있었다. 회고록은 영원의 치부를 까발리는 치열한 반성에 대한 결과이자 S를 기리기 위함이었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이 사실을 세상에 폭로할 의도가 없이 작성됐다.

    그저 우연히 이것을 본 누군가 영원이 살다 갔음을 기억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이 직접 폐기한다. 진심으로 사죄하는 마음을 담아 일기를 땅에 묻기로 했다.

    자신이 신해수라는 비밀이 담긴 유일한 증거였다.

    이것을 땅에 묻으면 누구도 알지 못하리라.

    이 이름 때문에 죽은 그 애에게 유일하게 영원이 속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름과 맞바꾼 사죄.

    멍을 때릴 때마다 불쑥불쑥 계모를 향한 증오가 뻗어났다.

    계모가 내게 지은 죄가 얼마나 더 있었지?

    머릿속에서 셈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계모가 저지른 죄악의 개수를. 계모를 지금보다 더 증오하기 위하여.

    그러나 그뿐이었다.

    계모를 증오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런 과거는 묻는 게 좋다.

    아무도 용서를 빌지 않는, 그리고 미워해봤자 고통스럽기만 한 과거라면 더더욱.

    최고의 복수는 잊는 거라던가. 다 잊고, 다시 출발하면 된다.

    주양에게 그렇게 약속했다.

    ‘신경 쓸 거 없어. 이런 거 아무것도 아니야.’ ‘똥 밟은 셈 치고 잊어버리면 그만이야.’ 주양은 예정에 있던 출장도 미루었다. 그녀와 붙어 있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바쁜 남자였다.

    배려라는 것은 피곤한 일이었다. 피곤함이 지속되면 상대에게 지치게 된다.

    그가 영원에게 신경 쓸 때마다, 조심히 살필 때마다 고문이었다.

    귀찮은 존재가 될까 두려웠다. 더 이상 그를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찌질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집안일로 민폐 끼칠 순 없다.

    새 출발을 위해서 이마 흉터를 제거하면, 멀리 떠날 거다.

    백운당 따위 뒤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신영원.”잔뜩 응축시킨 어두운 음성이 영원을 불렸다.

    흙을 덮으려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분노로 찌그러진 뺨.

    “……매향.”하지만 반가운 마음에 다르게 매향은 섬뜩하게 발톱을 세웠다.

    “대체 내 경고는 어느 귓등으로 흘려들은 거야. 그 남자 안 된다고 했지. 내가.”폭풍우가 밀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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