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67화 (67/83)

67화. 소정2017.02.23.

백운당에는 도는 괴담이 있었다.

새로 신입이 들어오면 선임은 백운당에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건 비밀인데. 백운당에 귀신이 살아.”“아, 사장 딸 말하는 건가요? ‘얼굴 없는 귀신’이라던. 지겹게 들어서 딱지가 앉을 지경이에요.”하고 말하는 신입에게 선임은 후후, 웃으면서 말하는 것이다.

“아니. 그 귀신 말고.”“…….”“진짜 여기서 죽은 처녀귀신.”

*

거세게 휘몰아치는 강풍에 문간이 들썩였다. 테라스 바닥으로 폭우가 그대로 들이치고 있었다.

어느 고급 오피스텔. 어두운 거실에 TV가 나 홀로 돌아갔다.

“기상 특보입니다. 태풍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북상하는 태풍의 영향권 아래서 한반도는…….”주인 없는 방을 주홍빛 스탠드가 비췄다.

책상에 서류들이 수북했다. 잡다하게 엉켜 있었다.

법률 서적들이 즐비한 책장 옆으로 눈길을 돌리면 이 방 주인을 짐작시켜주는 졸업장이 걸려 있다.

유선민.

사법연수원 39기 수석 졸업생.

반대편 벽은 지역 신문의 아주 짧은 귀퉁이를 차지하는 기사 스크랩으로 도배가 돼 있었다.

공간이 남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공부의 노력이 엿보였다.

백운당에서 사고로 죽은 어느 여직원……,

그 사건에 관여된 여러 인물들의 사진과 관계도였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한 사람의 죽음을 덮은 인간들.

이중모, 최혜란, 대산 김 회장, 진주양.

치밀하고 집요한 흔적이 엿보였다.

그때 사진 하나가 바람에 떨어졌다.

다른 사진들과 달리 특별히 별표 표시가 돼 있었다.

‘신영원.’

맞은편에 걸려 있던 액자 속 졸업사진이 번뜩이는 눈으로 영원을 겨누었다.

-1년 전, 영원 26세

영원은 백운당 중정 연못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잔잔하게 고인 못은 그 안을 들여다보기가 힘들다.

계모에게 용서를 구하라고 구걸하다시피 말했지만 돌아온 것은 괴로움이었다.

계모는 뉘우치는 것 없이 오히려 영원을 미친 년 취급했다.

‘이 흉터 네 어미가 너한테 남긴 거잖아.’‘널 죽이려고 한 건 네 어미야!’비참함과 한심함. 그리고 꼭 그렇게까지 진실을 밝혔어야 했나.

미안하다. 그 한 디면 됐는데. 그 한마디면.

계모는 조금도 자기 자신에게 양심의 가책을 짊어주지 않으려고 영원을 비난했다.

영원은 피곤해졌다. 누군가를 이해해라고 하는 행위들이.

내가 그간 눈감아준 계모의 죄가 얼마나 되던가.

그러한데, 계모는 단 한 번도 나에게 빈말이라도 사죄하지 않았다.

그저……

내 탓이다. 미안하다.

그 한마디만을 듣고 싶었을 뿐인데.

그래. 나를 죽이려 한 것은 친엄마였다.

하지만 그게 뭐……? 그게 친엄마였다 해서 모든 게 없던 일이 되는가.

그 외에 계모가 내게 저지른 일들.

내 안의 증오가 옅어지나.

깨달았다.

내게 진실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내 증오와 악의의 방향은 모두 계모를 향해 뻗어 있었다.

계모가 내게 지은 죄가 얼마나 더 있었지?

그 순간 영원은 머릿속에서 셈을 하고 있었다.

계모가 저지른 죄악의 개수를. 계모를 지금보다 더 증오하기 위하여.

“밤에 보면 귀신인 줄 알겠네, 아오.”연못 가까이 있는 영원을 보고 동료들이 멀찍이 떨어져 비웃었다.

“진짜 귀신도 쟤 보고 놀라서 심장마비 걸릴 거야.”“백운당에 처녀귀신이 정말 살긴 해?”“실제로 살아.”“설마.”“진짜.”신입이 호기심을 보이자 동료가 잘난 척하듯 말했다.

“한 4년 전인가. 크리스마스이브 며칠 전이었어. 크리스마스 시즌만 되면 백운당이 바빠져. 모든 직원이 풀가동이지. 그 여자도 이 식당 직원이었어. 추운 겨울에 손님 심부름 하면서 열심히 일하다가 빙판길에 미끄러져 연못에 빠져 죽었어.”“죽어?”“그 뒤로, 밤마다 원혼이 이 백운당을 떠돈다는 소문이 있어.”“꺄아아악! 소름.”백운당에서 살해당한 여직원……. 그때, 떠들던 직원들이 매향을 보고 후다닥, 도망쳤다.

매향이 다가와 영원의 어깨를 쥐었다.

“신경 쓰지 마. 계집애들 얘기.”“너도 믿어? 백운당에서 죽은 여자가 밤마다 운다는 소리.”영원의 물음에 매향이 무심히 곰방대를 물었다.

“세상에 귀신이 어딨어. 난 인간이 더 무섭더라.”“난 매일 듣는데.”“뭐?”“난 매일 들어. 울음소리.”쏴아아아- 바람이 긁고 지나갔다.

“매일 날 찾아와.”매향이 알 수 없는 눈길로 옆모습을 깊게 쳐다봤다. 영원은 연못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 애가…… 널 찾아온다고?”크루즈에서도 그랬다. 분명 물속에 있었지만 호운은 아니라고 했다.

‘저…… 저기 바다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구해달라고…….’‘그런 거 없어.’‘아니야. 사, 사람이…… 빠져서….’‘환영이야.’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모지리가 된 걸까.

영원의 눈에는 분명하게 보이는 죽음의 그림자가 다른 이들에겐 정신착란이었다.

전문용어로 이것을 ‘섬망’이라고 한다.

영원은 환자였다.

그래. 이것은 환영이야. 환영을 맞닥뜨리는 순간 영원의 의지와 육체는 자신의 컨트롤 밖의 일이 된다.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환영이라는 것쯤은.

그러나 올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매번 공포만큼은 가짜가 아니다.

시간과 함께 고통의 짙음도 흐려진다는데, 해묵을수록 죄책감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하다.

그래. 이것은 환영일 터다.

내 양심의 가책이 빚어낸 속삭임일 터다.

‘왜 날 보고만 있었어? 왜 살려주지 않았어?’그 애가 지금도 내 어깨에 달라붙어 귓가에 속삭여온다.

*

영원은 방 깊숙한 곳에 숨겨둔 과거를 끄집어냈다.

일기장을 다시 찾을 날이 올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잊고 있었다.

그 애가 죽고 지난 4년 동안 그 애를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바다의 이름을 예쁘다고 했던 ‘S’가 물속에서 어떻게 죽어갔는지 그 모습까지도.

그래야 살 수 있었으니까.

이제는 한계였다.

똑바로 마주하지 않으면 새 출발을 한다 해도 지금처럼 과거에 끌려 다닐 거다.

영원은 떨리는 손으로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내가 22살이 된 올해였습니다. 내 인생에 반환점을 가져다준 ‘그 사람’을 만난 것은.>

***

아마도 나 같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행복할 권리’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의심은 확신이 됐습니다.

자신으로 인해 무고한 한 생명이 목숨을 잃은 이후, 내게 그 권리를 주장할 ‘권리’는 완벽히 떠나갔습니다.

타인의 생명을 빼앗은 주제에 어떻게 행복해지길 바랄 수 있을까요.

앞서 나는 밝혔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만난 것은 22살이 된 올해라고.

그 사람도 나와 같은 22살 동갑이었습니다.

한 어린 인생이 죽었습니다. 나로 인하여.

그 사람의 이름은 S.

이 일기가 시작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

.

.

초봄이 도래한 시기였습니다.

그날도 나는 산더미 같은 빨래와 씨름 중이었습니다.

어째서 ‘너’는 조심성이 없는 걸까요.

항상 빨간 날만 되면 이불에 흔적은 남겨놔서 나를 힘들게 했습니다.

‘너’는 내가 자신의 것을 빨아주는 걸 즐기는 게 아닌가 강력한 불신이 들기도 합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너는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너’를 떠올리며 비누에 힘을 주는 그때였습니다.

매끄러운 비누가 손에서 빠져나가 굴렀습니다.

그것 잡는데 수풀에서 얼굴이 하나 튀어나왔습니다.

헉. 나는 엉덩방아를 찧었습니다.

튀어나온 여자는 자기가 더 놀란 얼굴을 했습니다.

“너 누구야?”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엇, 여기 사장님 사가잖아? 그럼 네가 영원이? 사장님 막내 딸?”여우같이 조밀한 예쁘장한 이목구비의 여자는 미소 지으면 길게 퍼지는 눈웃음을 지었습니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 길을 잃었어. 온 지 얼마 안 된 신입이거든.”그래요. 그것이 S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S가 내게 웃어주었습니다.

“소정. 난 한소정이야.”‘S.’

소정을 만난 것은 그 해 봄이었습니다.

.

.

.

학대를 받다가 머리를 심하게 얻어맞아 뇌의 어딘가가 망가져 버린 건 아닐까,

종종 고민합니다.

나는 공감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타인의 삶에 무관심했습니다.

세상 인간 중에서 내가 유일하게 관심을 쏟는 이들은 계모와 두 딸뿐이었습니다.

증오라 불러도 좋았고, 체념이라 불러도 괜찮았습니다.

나는 폭력의 그늘 아래서 일신의 안위를 유지하기 위해 이미 굴종을 선택했습니다.

살아남는 것.

살고 있다 것 이외에 내가 이 비참한 삶에서 거머쥘 수 있는 장점은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복종하며 사는 것.

그것이 내가 그나마 이 인생에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장점.

산다는 ‘행복’을 지키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애가 끼어든 겁니다.

돌발적인 변수는 가까스로 다져놓은 평화를 위협하기도 합니다.

갑작스런 타인의 개입이 불안했고 불편했습니다.

그 뒤로 그 애는 종종 나를 찾아왔습니다.

“남은 화과자야. 주방 숙수 몰래 훔쳐왔어.”주전부리들을 챙겨서 점심시간이면 내 주변에서 알쫑댔습니다.

나는 빨래를 하거나 화단을 가꿨습니다.

“백운당 직원들은 항상 네 얘기만 해. 어떤 애인지 궁금했어. 난 네가 TV에서 나오는 것처럼, 심장병을 앓아서 집 밖으로 못 나오는 연약한 공주님이라고 생각했어.”나는 화단을 가꾸는데 열중했습니다.

바닥에 사는 생물을 가꾸는 것은 유일한 내 낙이었습니다.

“너 진짜 이상해. 재미없다구. 땅바닥에 금이라도 숨겨놨어?”바닥으로 추락한 뒤 나는 하늘을 보지 않았습니다.

나는 가장 미천한 자리에서 살아남기 위한 삶만을 보았습니다.

“어! 저게 뭐지?” 이상한 아이였습니다.

그 애는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는 내게 억지로 하늘을 보게 했습니다.

“아니. 이번엔 진짜야! 구름이, 모양이 꼭 ‘봄’이라고 쓰여 있는 것 같은데?”봄, 하면 사람들에게 떠오르는 어떤 이미지들이 있을 겁니다.

따스함, 부드러움, 솜사탕처럼 달짝지근한 느낌들.

그러나 내게 봄이 와서 좋은 점은 빨래를 해도 손이 곱아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내게 계절의 변화 따위는 빨래가 잘 마르냐, 안 마르냐의 차이였습니다.

자꾸 하늘을 보라고 하는 그 애가 귀찮고 거슬렸습니다.

자유 같은 것은 함부로 만끽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한때, 신을 생각했던 때가 있습니다만 포기했습니다.

더욱 외로워지니까. 자유를 갈망하면 살 수 없을 테니까.

얕은 수에 넘어갈 내가……,

“아…….”나는 감탄했습니다.

구름이 정말 ‘봄’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S와 나는 멍청하게 눈이 마주쳤습니다.

S가 먼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뭐야, 저거. 황당해.”하늘을 올려다‘봄’ 게 얼마만인가.

후우, S가 풀밭에 드러누웠습니다.

“오늘 기분 나쁜 일이 있었는데 좋아졌어. 낮에 가게에서 옛날 부모를 만났어.”부모면 부모지 옛날 부모는 어떤 신조어인가요.

“밥 먹으러 왔더라고. 나 사실 말 못 한 비밀이 있어. 나 고아야. 이제껏 창피해서 아무한테도 말 안 했는데 파양 당한 뒤 쭉 혼자 살았어.” 항상 밝고 즐거워서 그런 아픔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이상하네. 이상하게 왜 네 앞에서는 술술 나오지? 너와 있으면 외롭지 않은 느낌이야.”S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벌떡 일어났습니다.

“우리, 비밀 노트 교환하지 않을래?”

며칠 뒤, S가 노란색 노트를 내밀었습니다.

동갑내기의 제안을 어째선지 거절 못 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고 다락방까지 올라왔습니다.

신기한 시선으로 노트를 이리저리 구경했습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펄이 입혀진 노트는 예뻤습니다.

비밀이라니. 누군가와 콩 한 쪽도 공유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유대감 주는 단어는 이상하게 간질거렸습니다.

그러나 거대한 벽에 막혔습니다.

노트를 폈지만 막상 자랑할 만한 게 없었습니다.

무엇을 말할까요. 내 아버지가 불륜을 저지른 것?

어머니가 자살한 것? 스스로 제 무덤을 판 치부를 까발리라고?

굴욕으로 점철된 삶은 자랑할 만한 게 못 됩니다.

굴욕을 당하는 일은 아무렇지 않았으나, 타인에게 그 모습을 보이는 것엔 면역이 돼 있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그걸 방구석 어딘가로 던져버렸습니다.

내가 이 비밀 노트를 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계절이 변했습니다. 중정 연못의 물비린내가 심해졌습니다. 여름이었습니다.

짜악 ????? !

코피가 후드득, 바닥에 흩뿌려졌습니다.

반지를 낀 주먹에 얻어맞은 코가 얼얼했습니다.

“실크를 물빨래 하면 어쩌자는 거야. 집안일 한 지 몇 년인데 아직도 물빨래, 드라이클리닝 구분을 못 해? 만찬 모임에 입고 갈 수 없게 됐잖아!”걸레짝이 된 옷을 계모가 바닥에 패대기치고 갔습니다.

코피가 터진 부위를 손으로 막았습니다.

나는 마음으로 상처 입지 않았습니다.

내 인내는 쇠로 달궈진 방패였습니다. 어떤 충격에도 꿈쩍하지 않을 겁니다.

해파리처럼 물에 젖어 쭈글쭈글해진 옷을 평소처럼 태연하게 줍는데, S가 날 보고 있었습니다.

굴욕을 당하는 일은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애에겐 보이고 싶진 않았습니다.

S가 우연히 목도한 광경에 당황해했습니다. 언제나처럼 먹거리를 가지고 온 겁니다.

천에 싸인 화과자를 들고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때 내 안에서 울컥, 가시 달린 감정이 돋아났습니다.

‘수치.’

나는 처음으로 초라한 내 자신이, 내 존재가, 내 인생이, 수치스러웠습니다.

.

.

.

제일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을, 들켜버렸습니다.

‘탑에 갇혀 사는 공주님인 줄 알았어.’S가 멋대로 상상한 탓입니다.

나는 공주가 아니었습니다.

하녀였습니다.

그 애는 내가 이 집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낱낱이 알게 됐겠죠.

남들이 부러워하는 백운당의 딸이 아니라 하녀라는 것을.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민낯이 까발려진 기분이었습니다.

S가 자기 일처럼 화를 내었습니다.

“왜 그러고 살아?”“너 바보니?”그 말이 내 자격지심에 불을 지폈습니다.

아무도 나를 비웃어선 안 됩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안다면, 그렇게 비난할 순 없을 겁니다.

“친엄마인데 왜 너를 못살게 굴어? 너는 이래도 괜찮아?”친엄마가 아냐. 친엄마가 아냐!

계모가 얼마나 무서운 여자인지 알기를 바랐습니다.

내가 ‘비밀’을 말한다면 계모는 S를 가만두지 않겠죠.

S는 이제 백운당에서 쫓겨날 겁니다.

하지만 그 순간 내게 일말의 기대가 없었다고 말하진 못하겠습니다.

사실 누구보다 구제 받기를 기도했습니다.

용자가 나타나주기를.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알면 떠날 거라고 생각한 동시에, 그 애가 진실을 감당할 용기 있는 친구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잘난 척하지 마. 그래서 너는 뭘 할 수 있는데.

나는 코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차게 말했습니다.

“네가, 날 구제해줄 수 있어?”나는 비겁했습니다.

비극은 거기서 시작됐습니다.

별무리가 차가운 겨울밤을 선회했습니다.

입김이 하얗게 얼었습니다.

어느 덧 12월입니다.

S는 그 여름 후로 나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가끔 마주쳤지만 S가 재빠르게 먼저 내 시선을 피했습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습니다.

감당하기엔 두렵고 어려운 진실이었겠죠.

백운당 여직원들의 말소리가 담장 밖으로 샜습니다.

“소정이 오늘 당직 아냐? 숙소에도 없었지?”S가 돌아오지 않는 모양입니다.

오늘 낮에 나를 찾아왔습니다.

‘해수……, 소리처럼 의미도 참 예쁜 이름이야.’‘해수라는 이름엔 아주 좋은 의미가 있지.’알 수 없는 말만 던져놓고 웃어 보였습니다.

그날따라 계모가 야근을 했습니다.

밤참을 들고 사장실로 향하는데 어디선가 말다툼이 일었습니다.

뒤이어 풍덩!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중정 연못으로 달려갔습니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 반대편 어둠으로 후다닥- 사라졌습니다.

연못에 누군가 있었습니다. 버둥거리는 뭔가가……

그것은 S의 머리였습니다.

연못에 빠진 그 애를, 살려고 발악하는 그 애를,

하지만 수심이 깊어서인지 허우적거리는 그 애를,

살리려고 했습니다.

의지와 달리 물가에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역겹고 숨 막히는 트라우마가 나를 죄었습니다.

과거에 내가 당했던 일 때문이었습니다.

죽이려는 손과 살려달라고 울부짖던 내 자신.

살려고 살려고 허우적거리면 죽으라고 죽으라고 욕조에 얼굴을 처박던 손.

물 곁에만 가면 손발이 차게 식고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습니다.

두려워서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애를 눈앞에서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렇게 얼마간 가위에 눌려 있다가 얼른 정신을 차렸습니다.

발버둥 치던 S는 이미 몸부림을 멈춘 후였습니다.

나는 멍하니 그걸 지켜보았습니다.

며칠 뒤, 경찰이 죽은 S의 사건 파일을 들고 백운당을 찾아왔습니다.

돈을 먹은 경찰은 이미 S가 발을 헛디딘 걸로 수사를 종결했습니다.

형사는 계모 앞에 나를 나란히 앉혀 놓고 물었습니다.

“그럼 한소정 씨가 학대로 고소한 건은 어떻게 할까요?”S가 마지막으로 남겨놓았던 것.

“그래도 진술은 받아놓는 게 절차라. 마침 한소정 씨가 주장하는 피해자가 있으니 물어보죠. 어머니께 학대를 당한 일이 있었습니까?”형사가 형식적으로 물었습니다.

계모가 눈앞에서 나를 빤히 봤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한 방에 두고 묻다니. 답을 하라는 건가 하지 말라는 건가.

나는 계모의 팔뚝에 난 할퀸 상처를 봤습니다.

몸싸움의 흔적이었습니다.

계모는 내가 비밀을 제3자에게 발설한 걸 알았을 겁니다.

그러나 나를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더욱 확실한 방법으로 본보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계모는 나를 시험하는 겁니다.

자신이 데리고 살아도 되는 겁쟁이인지. 아니면 S처럼 처리해야 하는 검은 머리 짐승인지.

아마 내가 진실을 밝혔어도 계모는 돈과 인맥으로 진실을 틀어막았을 겁니다.

계모가 유지로 있는 폐쇄적인 시골 마을에,

계모와 친분이 두터운 형사에,

계모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이 백운당에서,

지난 20년간 내가 뼈저리게 통달한 것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냥 빨리 모든 것이 끝나서 다시 평화가 찾아왔으면 했습니다.

내 안에 그런 냉혈함이 존재할 줄 꿈도 몰랐습니다.

나는 무심히 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일은 없어.”계모는 이로써 나를 완벽하게 복종시켰습니다.

나는 평화주의를 가장한 겁쟁이였습니다. 심지어 비열한.

그 애는 이런 인간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겁니다.

*

지금 S를 위해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S는 내 인생에 그렇게 큰 비중도, 의미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내 안중에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과 계모와 두 딸들 이외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타인의 삶과 죽음에 무관심했습니다.

S가 죽고 나는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낮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집안일을 했고 밤에는 계모에게 폭행을 당했습니다.

빠른 복귀, 그리고 빠른 일상의 안정.

S가 죽은 지 일주일 쯤 되던 때였습니다.

털썩-

발치에 빨랫감이 던져졌습니다.

“깨끗하게 빨아놔. 핏물 남기지 말고.”계모가 던져놓고 간 이불을 나는 익숙하게 주섬주섬 집어 들었습니다.

딸들의 생리 혈이 묻은 이불이었습니다.

마당으로 나가자 하얗게 입김이 일었습니다.

계모는 찬물에 빨아야 피가 더 잘 빠진다며 한겨울에 바깥에서 이불 빨래를 시켰습니다.

허드렛일은 일상이었고, 손이 부르트도록 집안일을 했지만 아프고 힘들다고 운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 여유조차 내겐 사치였습니다.

한겨울에 마당에서 언 이불을 빨고 있던 나는 문득, 뺨에 닿는 차가운 기척에 눈꺼풀을 들어 올렸습니다.

하늘에서 흰 눈이 소리도 없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희디흰, 깨끗한 눈이었습니다.

산더미처럼 빨래를 쌓아놓은 내 비참한 삶과는 상관없이 눈은 평화롭고 적요했습니다.

S는 올겨울을 기다렸습니다.

자신에게 두 번 다시 겨울이 오지 못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나는 가족이 없어서 그런가. 안정이 안 되었는데 이상하게 너와 있으면 외롭지 않은 느낌이야. 우리, 비밀 노트 교환하지 않을래?’간간이 그 애를 떠올릴 때마다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 애에게 해준 것이 없습니다.

어째서 나 같은 하찮은 인생을 위해, 자신의 제일 귀한 것을……

실은 S가 그날 밤 경찰서에 갔으리란 걸 난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 애와 교환한 비밀 노트에 내 비밀을 전부 다 적어놨습니다.

모든 비밀을 알게 된 S는 충격을 먹었을 겁니다.

양부모에게 모진 구박을 받았던 S는 나를 깊게 이해했겠죠.

나를 자기 분신처럼 여기며 영웅 심리가 끓었을 겁니다.

두려웠지만, 외면하기엔 스스로가 너무 비겁했을 겁니다.

쭉, 괴로웠을 겁니다.

내 눈을 피했던 지난 몇 개월.

똑바로 마주하면 자신의 비겁함이 탄로 날까 두려웠을 겁니다.

결국 용기를 냈습니다.

‘널 여기서 도망칠 수 있게 해줄게.’그러니까 납득할 수 없습니다.

별로, 그렇게 미안해 할 일은 아니지 않나.

타인의 삶에 무관심할 수도 있지 않나.

다들 그렇게 한 쪽 눈을 질끈 감고 불의를 참고 사는데.

내가 해야 할 일은 왜 그 애는 대신 해결해주려 했던 걸까요?

‘눈은 원래 공기였잖아. 근데 공기에 무게가 생기니까 형체가 돼. 사랑도 그런 것이 아닐까. 처음엔 보잘것없는 공기였으나, 우주가 되고 세상이 되는 거지.’ 아, 그것은 ‘사랑’이었나요.

이해관계 없이 숭고하게 상대를 아끼는 마음.

나는 사랑을 받았던 겁니다.

‘너에겐 ‘행복’해질 권리가 있어.’내게 희망을 가르쳐준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하늘을 보라고 말해준 사람도 처음이었습니다.

‘난 알아. 네가 말은 그래도 사실 굉장히 다정한 애라는 걸. 꽃을 아끼는 사람이 나쁜 심성일 리 없어.’ 길가에 굴러다니는 하찮은 돌멩이 같은 나를,

유일하게 봐준 사람을,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나는 바보같이 허무하게 놓쳐버린 겁니다.

하늘에서 눈이 내렸지만 모두들 나를 비껴갈 뿐이었습니다.

잃은 후에야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두 번 다시 그런 사랑은 받지 못하겠죠.

그 애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 애는 눈이었습니다.

눈송이는 한순간에 뺨에 닿았다가 물기만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그것을 깨닫자 내 무표정함을 가장한 냉연함이 점진적으로 붕괴되었습니다.

뺨이 젖어들었습니다.

미련처럼 남겨진 물기가 턱 아래로 추락했습니다.

지독한 상실감.

S의 죽음을 봐서인지 못 할 것도 없겠다 싶었습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삶이었습니다.

한 번도 두려웠던 적이 없었는데.

그 겨울 예상치 못하게도, 마음까지 청결시켜주는 백색 결정……

그 깨끗한 눈을 보며,

어쩌면 이다지도 삶은 잔혹한가.

나는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이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