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65화 (65/83)
  • 65화. 네 복수……, 나를 굉장히 실망시켰어.2017.02.16.

    수진이 불현듯 물었다.

    ‘신영원은 왜 자기 이름을 빼앗기고도 무력하게 살았을까요?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든지, 되찾을 기회는 많았을 텐데.’‘글쎄. 죄책감 아니었을까?’장 경감이 답했다.

    ‘죄책감?’‘스스로 형벌을 받는다고 옭아맨 거지. 일기 내용을 보면 신영원은 계모가 내심 자기 엄마가 되기를 바랐어. 아픈 친엄마는 자기에게 아무런 사랑도, 도움도 주지 못했으니까.’‘…….’‘불륜은 아버지가 했지만, 처음 그의 불륜을 부추긴 것은 자신이라고. 그렇게 죄책감을 느꼈는지도 몰라. 그래서 계모의 모진 학대도 묵묵히 받아냈는지도.’‘…….’‘스스로 자기 무덤을 팠다며 자책하며 살았겠지.’이름 같은 것을 빼앗겨도 싸다고.

    ‘근데 친엄마라는 사람이요.’‘신영원의 죽은 모친?’‘몸이 아픈 게 아니었어요.’무슨 소리인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데요.’수진이 오래된 진료기록을 장 경감에게 넘겼다. 그것은 수기로 작성된 자료였다.

    ‘의부증이 굉장히 심한 여자여서…… 신정태가 정신과 상담을 받을 정도였어요. 그때 담당의를 만나봤는데 신정태가 여자 옷깃만 스쳐도 폭력적으로 돌변했나 봐요. 마지막 상담 당시, 그녀가 자기 아이를 죽이려고 했다고 해요.’‘신영원을……?’‘신정태가 최혜란과 불륜을 저지른 걸 알고, 친모가 복수심에 딸과 함께 자살하려 했던 거죠.’배우자에게 불신이 많은 사람의 경우, 아이에게 그 집착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아이를 학대한다던지.

    ‘신영원은 물을 무서워했대요. 어린 시절 누군가에게 물에서 살해당할 뻔한 트라우마 때문이죠.’‘진주양의 말에 따르면 욕조에 자기를 빠트려 죽이려 했던 사람이, 계모 최혜란이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했어. 그간 꾹꾹 눌러 담았던 고통이 폭주한 것이라고. 그래서 사과를 요구했지.’신영원이 최혜란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최혜란은 뻔뻔하게 모르쇠로 일관했다.

    죄를 뉘우치지 않는 그들에게 환멸을 느껴 신영원은 더 이상 무엇을 하는 걸 포기해버렸다.

    그랬다. 진주양의 말에 따르면.

    ‘그러니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뭐가?’‘보통은 더 화나지 않나요?’수진의 의구심에 장 경감은 반박할 수 없었다.

    가해자가 너무 뻔뻔해서 용서한다라? 지금 듣고 보니 상식을 거스르긴 한다.

    ‘어째서 신영원은 그토록 쉽게 용서하고 포기했을까요?’학대 피해자들은 나쁜 기억을 빠르게 잊고 좋은 기억만을 남기려는 경향이 있다. 과거의 기억을 미화시키는 것.

    ‘신영원은 깨달았는지도 몰라요. 자기를 죽이려 한 사람이, 계모가 아니라 자기 친엄마였다는 것을.’

    -1년 전, 영원 26세

    “제발 내게 사과해줘.”“…….”“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영원은 처음으로 최혜란에게 애원했다.

    어째서 이제 와, 새삼스레…… 그렇게 비아냥거리지 마라.

    이제야 나는 준비가 된 것일 뿐.

    “……나한테 왜 그랬어?” “미안하다.”영원은 굳었다. 최혜란은 잔디 위에 서 그녀를 응시했다.

    성큼, 다가와 몸을 밀착시킨 최혜란이 얼굴 가까이 목소리를 기울여 눌렀다.

    “해줄 말이 없어서.”뚝, 그때 영원의 안에서 실낱같던 뭔가 끊어졌다.

    “당신만 없었으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었어.”“…….”“나, 엄마, 아빠. 다 행복했어.”“…….”“당신만 없었으면!”달려들어 최혜란의 머리채를 잡았다.

    하지만 최혜란이 더 빨랐다.

    영원은 머리채가 덥석 움켜잡혀 질질 끌려갔다.

    “이런, 흐윽……! 우리 엄만 이런 당신한테 엄마 자리를 빼앗겼어.”고개가 들렸다. 최혜란이 바싹 얼굴을 붙였다.

    “왜 시치미니.”최혜란이 영원의 눈을 들여다봤다. 동채에 이는 떨림이 한 눈에 들여다보였다.

    “너 알잖아. 네 엄마가 어떤 여자였는지.”“헛소리 마.” “너야말로 헛소리 좀 작작해. 왜 그랬냐고……?”최혜란의 얇실한 입술이 일그러지듯 치켜 올라갔다.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너희’들이 그런 거지.”“…….”“너도, 네 아빠도 그 여자한테서 도망쳐 온 거야. 나에게.”그렇게 생각하면 죄책감이 좀 덜해지는가. 남의 가정을 파탄내고 자리를 차지한 후 계모에게 영원의 모친은 콤플렉스였다.

    유독 모친에게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잘 손질된 손톱이 영원의 이마를 쿡, 쿡 밀었다.

    영원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어릴 적이라 분별이 안 가니? 기억까지 바꿨니?” “다 기억해! 똑똑히 기억해. 그녀가 어떻게 자살했는지까지도!”“자살?”최혜란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자살하려다가 실패했지! 너와 함께!”뭐…….

    뽑힐 듯 영원의 앞머리가 틀어 잡혔다.

    최혜란이 영원의 이마 흉터를 긁었다.

    “이 흉터 네 어미가 너한테 남긴 거잖아.”“…….”“널 죽이려고 한 건 네 어미야!”영원의 홍채가 넓어졌다. 심장 박동이 증폭했다.

    나는 7살. 욕조에 머리가 처박혀 몸부림치고 있다.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버둥거리는데도 죽으라고, 죽으라고 누군가 내 뒤통수를 누른다.

    나를 물에 수장시켜 죽이려 하고 있다.

    ‘흐……악! 우……욱.’나는 몸부림을 치다가 욕조 마개에 이마를 찍힌다.

    쇠모서리와 충돌한 뇌가 일시정지 한다. 의식이 멀어져가는 걸 느낀다.

    정신없던 몸부림은 거짓말처럼 멈춘다.

    내 피가 염료처럼 느리게 퍼졌나가는 걸 지켜보는 그때 극적으로 욕실 문을 벌컥 연 누군가 나를 욕조 밖으로 끄집어낸다.

    아버지다.

    ‘얘야. 얘야!’나는 의식을 잃기 직전 희미하게 눈을 뜬다.

    날 빠트려 죽이려 한 손의 주인은 욕조 앞에 주저앉아 있다.

    아버지가 흐느낌을 섞어 절규한다.

    ‘당신 미쳤어! 내가 미워도 그렇지. 어떻게 자기 딸을. 당신의 그 미친 의부증 감당 못 하겠다고!’기억 속에서 살인범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뿌연 안개가 걷힌다.

    가위로 마구잡이로 잘라낸 듯 기괴한 헤어, 병색이 완연한 새파란 입술, 정신 줄을 놔버리고 웃음을 풀어헤치는 히스테릭한 웃음,

    원망하듯 아버지를 쏘아보는 눈빛…….

    ‘엄마…….’나는 소리 내어 불러본다.

    모친은 나를 보지도 않고 아버지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계모 밑에서 자라게 할 순 없어.’‘내 자식이니까 내가 데려갈 거야. 내 배에서 나왔으니까!’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어머니는 영원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려 했다.

    그런 여자였다.

    꽃같이 아름다운 얼굴로 한 번도 영원에게 미소 지어주지 않았던.

    그런 영원에게 계모는 ‘첫정’이었다.

    첫사랑이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따스함이었다.

    “하, 하지만, 어머니는 자살을…….”“그 자살은 실패였어! 그 여자는 요양원에서 죽기 직전까지 나와 네 아버지를 괴롭혔어! 자살 같은 걸 절대 할 여자가 아니었지. 오죽하면 네 아버지가 널 절에 데리고 다니면서 불공을 드렸을까. 너까지 미쳐버릴까 봐 그 양반은 죽는 날까지 네 걱정뿐이었지. 널 보면 네 그 여자가 떠올라. 네가 네 애미를 빼다 박았어. 불길해, 특히 이 눈, 이 더럽게 기분 나쁜 눈! 끔찍해!”계모는 체벌할 때마다 영원의 얼굴을 거울에 들이밀고 저주했다.

    ‘천박한 년. 넌 네 애미랑 똑 닮았어.’눈물 젖은 뺨이 흉하게 유리에 짓눌렸다.

    ‘특히 이 눈! 봐라. 천박하다 못해 불길하지. 분명히 너한테는 죽은 네 애미의 망령이 따라다닐 거야.’저주처럼 퍼부어지는 목소리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순간 아래가 팟! 하고 뭔가 터지면서 뜨끈해졌다.

    투명한 물이 다리 사이로 흘러내렸다.

    계모가 아연해졌다.

    오줌이었다.

    영원은 비참함에 패닉이 몰려왔다.

    계모가 그런 영원을 보며 한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가지가지 한다.”그녀는 그냥 떠나버렸다.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뜨자 제일 보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서 있었다.

    주양이 마루 기둥 뒤에서 나왔다.

    영원을 응시했다.

    낭비라는 것을 모르는 듯, 경멸과 인생을 부정당한 채 살아가는 영원과는 삶의 위치가 다른 남자.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반쯤 가려놓고 살아가는 그녀를, 주양은 무슨 생각을 하며 볼까?

    구질구질하다 못해 기분 나쁘겠지.

    아무도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그녀의 삶을.

    주양이 재킷을 벗었다.

    오줌이 적신 다리와 발을 닦아준다. 영원이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더러워.”그는 가만히 숨을 골랐다.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붙잡힌 발목에서 강한 악력이 느껴졌다. 그가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게 보였다.

    정원에 버려진 것은 재투성이 하녀.

    그리고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산더미 같은 이불빨래들.

    대상을 잃은 분노가 영원의 그림자 끝에서 흔들렸다.

    그녀는 눈물을 새도록 내버려두었다.

    -실종 41일째

    장 경감이 유전자 검사기록을 내밀었다.

    찾아올 줄 알았다는 듯 주양은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생각보다 빨리 알아챘군요.”99.9퍼센트로 최혜란과 신영원이 모녀관계가 성립된다는 내용의 서류였다.

    경찰은 아직 신영원이 최혜란의 친딸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시신의 DNA가 최혜란과 일치하면 당연히 신영원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즉, 그 시체는 신해수라는 소리다.

    흥신소로 찾아온 신해수는 두려움에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흐윽……, 난 죽을 거야. 죽을 거라고.’‘그 남자를 절대 믿지 마. 그 남자한테 진실은 하나도 없어. 다 거짓말이야.’‘그가 잠깐 베푸는 서푼짜리 친절, 스치듯 내비치는 슬픈 얼굴.’‘당신도 어떤 가면에 속고 있을지 몰라.’‘그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여.’신해수는 이 모든 걸 예견하고 있었다.

    자신이 죽을 것이란 것을,

    그리고 자신이 죽는다면 그것은 진주양의 짓일 거라고…….

    주양은 두 주먹을 바지에 찔러 넣고 빌딩 아래를 내려다봤다. 가히 악인다운 뻔뻔한 모습이었다.

    “신해수입니까?”희미한 노기가 어른 물음에 주양이 그를 돌아봤다.

    “맞다면? 그래요. 저들이 찾은 시체는 실종된 신부가 아니라 신해수입니다.”“치과기록까지 신영원과 일치했습니다. 어떻게 한 겁니까.”“파주정신병원에서는 환자들의 쾌적한 삶의 질을 위해 6개월에 한 번씩 치아검진을 합니다. 가장 최근 기록이라면 신영원의 이름으로 입원되어 있던, 신해수의 것입니다.”그의 철두철미함에 장 경감은 섬뜩해졌다.

    당신이 신해수를 살해한 겁니까?

    목구멍까지 묻고 싶은 말이 치밀어 올랐다.

    신영원이 돌아왔을 때 완벽한 제 자리를 만들어주려고 신해수를 죽였다. 는 것이 장 경감의 추리였다.

    한여름 뙤약볕에 밀폐된 탑차는 기하급수적으로 온도가 높아졌을 것이고, 그 안에서 시체는 부패되어 갔을 것이다.

    사망 추정 날짜는 시체의 부패 속도를 감안해 실종 38일째였던 발견 당시로부터 최소 13~18일 전.

    신해수를 마지막으로 본 것인 비 오는 날 흥신소 앞에서. 실종 23일째가 되던 날.

    그리고 시신이 발견된 게 실종 38일째.

    그사이엔 15일의 간격이 있다.

    신해수는 아마 장 경감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실종 23일째 날, 그를 만나고 곧바로 살해당했다.

    장 경감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사방이 어둠에 집어삼켜졌다.

    신해수를 쫓던 검은 무리들이 내는 발소리가 생생하게 귀를 되울렸다.

    진주양의 수하들.

    그때 진주양은 신해수를 죽이려고 했다. 사건을 어떻게든 종결시키기 위해서.

    장 경감이 한 발 남자에게 다가가며 따졌다.

    “현 과장이 신부가 돌아왔다는데. 사실입니까?” 장 경감은 주양의 54층 집을 둘러봤다. 여자의 흔적을 찾으려고 했다.

    “어디 있죠? 그래도 내가 발에 물집 잡히도록 뛰어다닌 사람인데 인사 정도는 하고 싶군요. 저 방에 있는 건가요?”여러 방을 무작정 열어 재꼈다.

    신부가 돌아왔다는 현기영의 말은 신빙성이 적었다.

    담당 수사 지휘관도 모르는 신부의 귀환이라니.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말란 말이야!” 수사 내내 진주양이 보였던 진심과 신부를 찾고자하는 애가 타는 마음.

    그런 것들의 진실은 어디 가고 거짓만 남아 있는 걸까.

    그것마저 거짓으로 치부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현기영의 말대로 정말로 신부가 돌아왔다면, 진주양은 어떻게 신부를 찾아냈지?

    강호운이다.

    총을 맞고 강호운이 의식을 잃어가며 진주양에게 뭘 건네려 했다.

    얼핏 종이 같은 거였다.

    신부의 위치가 적힌 메모였을까.

    신부를 찾는 데 힌트가 될 만한 단서라도 넘긴 게 분명했다.

    아마 강호운은 신부를 안전하게 다른 장소에 묵게 했을 거다.

    다른 시신으로 신부의 시신인 양 위장시키고 신부는 진주양에게 안전히 넘기고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그럼 진주양은 강호운이 혼수상태에 있는 4일 동안 그 단서를 토대로 신부를 찾아낸 건가?

    아무 데도 없었다.

    어떤 것이 진실일까. 신부를 찾았다는 것도 거짓말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모든 것이 자작극이었나?

    모두들 주양의 장기 말이었고 그가 짠 장기판에서 놀아난 건가.

    대체 저 남자가 원하는 게 뭘까.

    진주양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모든 게 가짜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신이 병원에서 해준 얘기도 이상했어. 당신이 그 대화 내용을 어떻게 알고 내게 말한 거지?”“…….”“신영원과 계모가 나눴던 대화.”

    ‘사랑해. 당신이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사과해.’‘제발 내게 사과해줘.’‘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진주양은 신영원과 계모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어떻게 상세히 알고 있었을까?

    그때 진주양은 신해수와 함께 있었다.

    신해수는 주양에게 무릎을 꿇었다.

    신영원은 두 사람을 목격한 후 호텔을 빠져나와 백운당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계모와 단둘이 대화를 나눴지.

    근데 진주양 이 남자가 그 대화 내용을 어떻게 알고 있을 수 있는 거지?

    “당신. 그 자리에 있었던 거야. 신영원이 사라지자 백운당으로 찾아왔던 거야.” 우연히 듣게 된 거지. 주양은 장 경감은 차갑게 볼 뿐이었다.

    “내게 또 거짓말한 게 있어.” “…….”“신해수는 스스로 목을 매다는 짓 따위 하지 않았어.”진주양이 만들어낸 거짓말이다.

    신해수는 목을 매달지 않았다.

    최혜란이 신해수를 정신병원에 보낸 것도 아니다.

    신해수를 정신병원에 보내버린 건 신영원이다.

    신해수는 강제적으로 정신병원에 갇혔다. 그래서 그토록 신영원을 죽이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래. 수진의 말대로 용서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쉽게.

    그렇게 간단히 용서했을 리가 없다.

    ‘어째서 신영원은 그토록 쉽게 용서하고 포기했을까요?’‘이상하지 않습니까? 보통은 더 화나지 않나요?’세상한테서 부정당한 여자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던 남자의 사랑이라.

    그런 사랑은 도대체 어떤 형태를 띨 수 있을까.

    세상 모두에게 부정당한 삶을 살아야 했던 여자에게 진주양은 기회였을 것이다.

    계모와 두 딸들을 심판할 엄청난 기회.

    재투성이 신데렐라가 엄청난 힘을 얻게 되었을 때, 뭐부터 했겠어?

    장 경감의 머릿속에 빨간 경고등처럼 떠오르는 한 단어.

    복수……

    ……광기에 가까운 복수.

    범오사 노승은 경고했다.

    ‘칼에 묻은 피를, 피로 씻어내는 사주요. 그 애.’신영원은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완성했다.

    -1년 전, 영원 26세

    영원의 다리 사이로 뜨듯한 물줄기가 흘렀다. 소변을 지렸다.

    주양은 얼른 재킷을 벗어 그녀의 다리를 감쌌다.

    영원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신경 쓸 거 없어. 이런 거 아무것도 아니야.’ 다 잊고, 다시 출발하면 된다. 공허하게 다짐하던 영원이었다.

    ‘똥 밟은 셈 치고 잊어버리면 그만이야.’ 영원은 앵무새처럼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고통 받지 않기를 원했다. 과거 기억을 지웠으면 했다.

    새 출발에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이마 흉터 제거였다.

    흉터는 비참했던 영원의 인생에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내일부터 열심히 피부과치료 받기로 약속했다.

    헌데, 그렇지가 못했던 것이다.

    다 정리됐다고 생각했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주양이 퇴근하고 호텔로 돌아왔는데 집이 조용했다.

    핏물이 욕실부터 침실까지 점점이 찍혀 있었다.

    주양은 희미하게 열린 침실로 들어갔다.

    영원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주양이 영원에게 다가갔다.

    그의 시선이 영원의 오른손으로 내려갔다.

    감전된 절지동물처럼 감각 없이 손끝이 까딱거리고 있었다.

    암적색 굳은 피딱지가 손톱에 끼어 있었다.

    육체의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가.

    힘주어 움켜쥔 유리조각 끝에서 툭…… 툭…… 신선한 혈액이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용서하려고, 잊으려고 했는데 그게 잘되지 않았어.” 영원은 얼굴이 피범벅이었다.

    피로 짓무른 눈가를 영원이 깜박였다.

    세면대 유리로 이마 흉터를 더 깊고 진하게 그어버린 듯했다.

    “생각해보니, 아무도 뉘우치지 않는 용서 따위, 그저 자기 편안하기 위한 위안일 뿐이잖아.” 좋은 음악을 들어도 그들이 생각났고, 맛있는 음식 앞에서도 그들도 이런 즐거움을 누릴 것 같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과거를 청산하지 않고는 새 출발도 할 수 없어.”이마에서 피가 줄줄 흘러 피 눈물을 이루었다.

    영원은 소리도 없이 울고 있었다.

    고통에 절은 한 영혼이 처절하게 분노했다.

    “내가 복수에 성공할 수 있을까?”영원이 혼몽하게 물었다.

    주양은 떨리는 손을 들어 영원의 얼굴을 감쌌다.

    눈물과 피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는 소매로 영원의 얼굴을 뒤덮은 피를 닦아주었다.

    빡빡 문질러도 피가 완전히 씻기지 않았다.

    상처가 곪을까 봐 걱정되었다.

    “대답해줘.”그때, 영원은 복수가 아니었다.

    복수도, 뭣도 아니었다.

    흐지부지한 미움과 갈팡질팡하는 애증.

    사과를 받아내겠다고, 집에서 내쫓겠다고.

    복수의 이름을 빌려 쓰기엔 턱없이 모자란 분노.

    “아무 의미 없는 말이었어.” 주양이 애써 부정했다. 그러나 아무 의미 없는 말이었어도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자신에게 되돌아올 줄 알았다면……

    그렇게 남일 말하듯 비웃는 게 아니었다.

    ‘신영원 씨. 당신의 복수는 무척 흥미로웠어. 복수라. 그 어떤 드라마보다 선과 악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권선징악의 결말이지. 그런데 그 복수의 대상이 가족이라니. 너무 궁금했어. 과연 어떤 복수가 될 것인가.’‘네 복수……, 나를 굉장히 실망시켰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시시한 신파였어.’영원이 주양에게 새파란 시선을 박았다.

    “네가 그랬잖아. 내 복수가 시시했다고. 참아 눈 뜨고 볼 수 없이 어설프다고.”“…….”“어때? 나.”“…….”“지금은 진짜 복수할 것 같아 보여……?주양은 쓰러질 것 같았다. 참지 못하고 그대로 영원을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그녀를 꽈악, 끌어안았다. 복수는 폭주다. 복수엔 이성을 챙길 여유 같은 건 없다.

    순도 높은 폭력이라는 점에서 복수는 광기에 가까웠다.

    영원은 곧장 주양의 의식 속으로 투신해왔다.

    영원이 조용히 그의 가슴께에 뺨을 묻었다.

    “그들이 나와 똑같은 고통을 겪게 해줘.”메마른 눈동자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아무도 이해 못 해. 날…… 아무도 이해 못 해. 하지만 비난도 할 수 없을 거야.

    계모와 그 딸들은 이제 이 시간 이후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이 땅에서 그들이 소유할 수 있는 건 그들을 두른 그 껍데기뿐일 것이다.

    전부 빼앗기게 될 거야.

    영원이 슬프게, 그러나 그렇게 해버리지 않고는 이 안의 불덩이를 잠재울 수 없다는 듯, 광기 어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주양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인내하는 것뿐이었다.

    상처가 곪지 않도록.

    상처가 아물 때까지.

    상흔을 달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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