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숨바꼭질, 놀이의 결말2017.02.09.
-실종 35일째
아들의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다.
새벽이 되고 빈소에 객들이 뜸해질 쯤 주양이 찾아왔다.
폐인이 돼서 널브러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의연하게 조문객을 받는 장 경감의 모습에 주양이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그때 내 아들도 신영원 씨와 비슷한 또래였습니다. 9살.”“…….”“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였어요. 살 떨리는 범죄의 피해자가 되기엔 너무 어렸죠.”보복범죄였다. 그와 친하게 지냈던 범죄자였는데 오해가 있었다.
장 경감이 그를 이용해 조직에서 버림받았다고 여긴 것이다.
출소 후 아이를 유괴했고, 신속하게 범인을 검거했지만 아이는 이미……
“마지막에 살려달라던 한 아들의 울음소리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세상엔 최선을 다했다고 합리화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그는 골든타임 내에 아들을 구하지 못했다.
내가 조금만 더 빨랐어도 아들이 그런 봉변을 당하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전 이해합니다. 신영원 씨의 자책, 후회.”“…….”“얼마나 죽고 싶었을지. 죽이고 싶었을지.”그때였다.
“아니. 당신은 이해 못 해. 절대.”주양이 빠르게 받아쳤다. 장 경감은 멀거니 주양을 올려다봤다.
“당신은 이해 못 해.”주양은 납덩이를 하나 얹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뭐라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없는 먹먹한 표정.
*
작년 10월.
한 여자가 한밤중에 으스스한 백운당 뒷산을 지나쳤다.
그녀는 이제 갓 들어온 막내 기생이었다.
숙소를 향하는 그녀를 문득 기괴한 소리가 발목을 붙잡았다.
‘고라니인가?’원래도 밤이 되면 짐승소리가 판을 쳤지만 소리의 근원이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ㄲ…… 끅,
뭔가 목젖 안에서부터 긁어 올리는 소리가 기괴했다.
그녀는 휴대폰 불빛을 비추었다. 사위는 어둠뿐이었다.
그대로 가고 싶었지만 어느새 발길을 풀숲으로 천천히 들이고 있었다.
몹쓸 호기심,
마침내, 기생은 소리의 근원을 확인했다.
“아…….”발이었다.
허공에서 몸부림치는 발.
*
그 시각, 영원은 계모와 대치중이었다.
“사랑해. 늘 당신이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영원을 보는 계모의 눈동자가 위태로이 흔들렸다.
“당신만 없었으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었어.”“…….”“나, 엄마, 아빠. 다 행복했어.”“…….”“당신만 없었으면.”영원의 눈길이 핏물이 묻은 이불에 가 닿았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손이 짓무르도록 이불을 빨아줬다.
신해수는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가질 수 없는 이름이란 것과, 그 이름을 차지하고 있는 여자가 영원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랬다.
신해수는 어째서 조심하지 못하고 이불에 잔뜩 생리를 묻혀놓는 걸까…….
눈물이 쏟아지며 살갗 하나하나를 파먹었다.
평생을 영원은 그것으로 고통 받았지만, 고통엔 실체가 없었다.
“사과해.”“…….”“제발 내게 사과해줘.”“…….”“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영원은 처음으로 최혜란에게 애원했다.
어째서 이제와, 새삼스레…… 그렇게 비아냥거리지 마라.
이제야 나는 준비가 된 것일 뿐.
“……나한테 왜 그랬어?” 그 순간 야만스러운 살의가 영원의 안에서 돋아났다.
뻔뻔하게 끝까지 모르는 척하는 여자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어졌다.
생리혈이 묻은 이불을 계모의 면전에 집어던지며 악을 썼다.
“대체 왜!”과열된 심장에 숨이 헐떡여졌다.
눈시울은 뜨거운 눈물을 피할 길이 없었다.
왜 그 사실을 다른 사람한테서 듣게 하냔 말이야.
신해수,
그 이름은 내 안에서 부서진 지 오래였다.
자신으로 인해 무고한 한 생명이 목숨을 잃은 이후, 영원에겐 더 이상 그 권리를 주장할 ‘권리’가 없었다.
그 이름으로부터 이제는 자신을 완전히 객관화시킬 수 있었다.
그 만큼의 시간과 상실감이 그녀를 지나쳐갔다.
영원은 어느새 잊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자신이 누구였는지.
“미안하다.”영원은 굳었다.
최혜란은 잔디 위에 서 그녀를 응시했다.
뜻밖이어서 정신이 멍해졌다. 사죄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영원은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다.
이렇게 순순히 해줄 거였다면……, 왜 지난 세월 그토록 난,
무엇을 위해 이를 악물고……
하지만 그뿐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성큼, 다가와 몸을 밀착시킨 최혜란이 얼굴 가까이 목소리를 기울여 눌렀다.
“미안하다.”“…….”“해줄 말이 없어서.”뚝, 실낱같던 뭔가 끊어졌다.
그때였다.
“사장님!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노 집사가 그들 사이를 황망하게 달려왔다.
계모의 시선은 영원을 빗겨나 노 집사에게 집중됐다.
시계는 정각을 알렸다.
어두운 복도를 타고 괘종시계가 울렸다. 데엥, 데엥, 뎅……
“해수 아가씨가…… 아가씨가…….”노 집사의 굳은 음성이 괘종의 움직임에 맞춰 갈피를 잃은 듯 흔들렸다.
그때 그들은, 제한 속도를 위반한 폭주 자동차였다,
마지막 남은 경고 표지판을 지나치고 걷잡을 수 없이 내달리고 있는 폭주기관차였다.
품위도, 이성도 상실한 채 자신들의 비열한 이기심만을 위해 내달렸다.
*
주양이 그날 일을 회상하며 말했다.
“신해수는 자신이 결백하며 티끌만 한 흠도 없다고 여기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런 자신의 더러운 치부가 드러났고, 견딜 수가 없었겠죠.”불과 작년 10월에 벌어진 일이라고 주양은 덧붙였다.
“그녀는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시도를 했습니다.”위선자답게 진짜 죽으려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만큼 자신이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다는 것,
부채감을 느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었을까?
장 경감은 생각하며 주양을 봤다.
“그녀는 지나가던 사람에 의해 구해졌죠. 신해수는 병원으로 들어가는 날까지 영원을 저주했어요.”자신이 한 짓은 생각하지 않고 영원이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고.
끝내 자신을 정신병원에 가둔 거라고.
“하지만 약간의 복수엔 성공했군요. 병원에 가둔 것.”장 경감의 말에 주양은 단호히 반박했다.
“신해수를 정신병원에 가두기로 계획한 건 최혜란이었어요.”“자기 딸을요?”“무덤에 가두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장 경감도 깊게 수긍했다.
죽을까 봐. 실제로 병원 서류에 분명 최혜란이 직접 한 사인이 있었다.
주양이 이어 말했다.
“사과도, 자진해서 이름을 돌려주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녀와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뻔했어요.”“…….”“우리는 서로 사랑했지만 나는 한때 그녀의 자매와 사귀는 사이였어요.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죠. 그래서 신부를 바꾸자고 생각했어요.”“…….”“어차피 신해수라는 이름은 원래 그녀의 것이었으니까, 되찾는 것뿐이라고.”장 경감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일기장을 꺼냈다.
뒷내용이 남아 있었지만 내용이 길어서 마지막 장으로 건너뛰었다.
대체 결말이 어떻게 끝나는지 궁금했기에.
장 경감은 떨리는 손으로 뒷장 넘겼다.
마지막 장은 찢겨져 있었다.
그런데 종이의 재질과 디자인, 찢어진 크기가 낯설지 않았다.
그는 지갑 안에 품고 있던 쪽지를 꺼냈다.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있던 신해수가 실내화 안에 간직하고 있던 쪽지.
일기장 맨 뒷면에 거칠게 나가떨어진 이음매에 쪽지를 맞춰봤다.
‘딱 맞아떨어진다.’ 앞내용은 샤프로 썼는데 쪽지의 글씨는 검정 펜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신영원은 일기장을 다시 펼쳐서 쓴 것이다.
내용은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다.
당장 신영원의 심경변화가 글씨에 묻어나 있었다.
앞의 일기 내용을 보면 글씨에 힘이 없었다.
모든 걸 자포자기한, 자살을 결심한 사람이었지만 쪽지의 글씨는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쓴 듯, 비장함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너’를 가리키는 지칭이 ‘너’에서 ‘여자’로 3인칭 화하고 있었다.
‘너’라는 지칭보다 훨씬 멀리 객관화하고 있다.
티끌만 한 동정심도, 더 이상 가족으로 보지 않겠다는 비장함일까.
‘나 그 사람하고 결혼할 거야.’여자의 상냥함엔 배려가 없었다.
일방적이고 통보되어오기까지 하는 상냥함엔 언제나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신념을 따르겠다는 아집이 묻어 있었다.
남의 기분 따위와 상관없이, 상냥함이란 얼굴을 두르고 상대의 살점을 도려냈다.
그 사람을 좋아한 것은 ‘내가’ 먼저였다.
처음에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도, 그가 주는 쾌락에 선선히 옷을 벗어 준 것도 오롯이 ‘나’였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며 나와 몸을 섞는지. 나를 사랑하긴 하는 건지,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 남자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증오와 고통이 범벅되어 내게 저주를 퍼붓는 여자를 보며 안심되었다.
이런 꼴을 보고도 설마 또 저 남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하진 않겠지.
넌 몰랐겠지만 비극은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어.
네가 내 언니가 되었을 때부터.
내가 짝사랑하던 남자를 네가 집에 데리고 왔을 때부터, 어쩌면 우리는 피할 수 없는 비극을 타고 난지도 모르겠다.
필연적으로 너는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갔고,
나는 너의 모든 것을 빼앗고 싶었다.
단순히 남자를 빼앗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저 재벌가에 시집가는 자매를 질투하는 졸렬한 감정이 아니었다.
영원이 이제까지 무엇을 빼앗기며 살았는지. 그리고 어째서 그녀는 신해수의 모든 것을 빼앗고 싶어 했는지 그 진짜 의미를 알게 됐다.
그것이 그녀의 당연한 ‘권리’였기 때문이었다.
장 경감은 애틋하게 손바닥으로 노트를 쓸어내렸다. 눈물 한 방울이 툭…… 장 경감의 손등을 미끄러져 내렸다.
‘신해수를 병원에서 탈출시킨 것은 강호운이었다, 강호운과 신영원과 함께였다. 전부 신영원의 의지였을까.’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신해수를 정신병원에서 석방시켜줬을지 생생한 고통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어째서 용서를 구걸하는 쪽은 가해자가 아닌 매번 피해자 쪽이어야 하는 걸까.
미움을 지속하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그들의 사죄를 기다리고 기다리다 끝내 지쳐, 신영원은 혼자 그들을 용서하기로 한 것이다.
아무도 뉘우치지 않는 용서 따위, 용서하는 사람만이 더 고통스러운 것일 뿐인데도.
*
“신부를 꼭 찾아내도록 하죠.”빈소를 떠나는 주양에 대고 장 경감이 한 약속이었다.
주양은 잠시 그렇게 장 경감을 보다 떠났다.
경찰은 강호운의 대포폰에서 또 다른 업자를 찾아냈다.
수사본부에 불이 꺼지고 브리핑이 시작됐다.
상석에 앉아 현기영이 수사관에게 물었다.
“탑차를 구한 이유가 뭐지?” “아무래도 여관이나 숙박업소는 경찰에게 발각될 위험이 큽니다. 이런 사건이 있을 경우 경찰들이 제일 먼저 뒤지는 게 숙박업소니까요. 머리를 쓴 거죠. 화물칸에서 숙식을 해결했을 겁니다. 설마 탑차에서 생활했을 거라곤 경찰이 예측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겠죠.”“그럼 신영원이 아직 그 차 안에 있을 거란 소리네.”“강호운이 죽은 것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지고 있습니다. 36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으니, 신영원이 아직 강호운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신영원은 이 사건의 주동자입니다. 신해수를 감금했든, 살인유기를 했든, 행방을 알 겁니다.”“좋아! 그럼 이제부터 그 탑차를 추적하면 되겠군!” 수사에 일말의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
며칠 뒤, 아들의 발인을 끝낸 장 경감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새 옷이라 해봐야 닳아빠진 잠바였다. 형사 시절부터 그가 입고 다니던.
그만큼 진지했다.
수진이 석연치 않은 얼굴로 다가왔다.
“신부가 아직 살아 있을까요?”수진의 우려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벌써 나흘이나 지체됐다. 경찰에서도 탑차의 행방을 찾는 시간이 예상보다 늦어져 신영원이 도망쳤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장 경감은 알고 있다.
신영원은 몸이 아팠다. 아무 데도 가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죽겠지.”장 경감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수진이 고개를 숙였다.
“희망에 기대를 걸어보자고.”아들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반드시 영원을 찾아내야 했다.
*
지열이 무겁게 영원을 짓눌렀다.
희망.
누가 그녀에게 그런 단어를 가르쳤나.
운명은 정해져 있어서 바꿀 수 없다고 배웠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텐데.
삶에 이정표가 정해져 있다고 배웠으면, 방황할 필요가 없이 엇갈리는 일 따윈 없을 텐데.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 말라가고 있었다.
밧줄은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호운은 밧줄을 제대로 묶지도 않았다.
저가 돌아오지 못해도 그녀가 언제든지 제 발로 나갈 수 있게 허술하게 밧줄을 묶었다.
그래서 돌아오지 않는가. 그렇게 안심해버리고……
영원은 몸을 웅크렸다. 복통이 찾아왔다.
배 속의 아이가 잘못된 것일까.
아이를 가진 줄도 모르고 결혼식장을 빠져나왔다.
임신 한 달이 조금 넘어서 티도 안 났다.
울음 섞인 신음을 참았다.
여기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
‘나를 묶고 가.’말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 억지를 부렸다.
‘또 도망치지 않게 나를 묶어.’영원은 이 좁은 방에 방치된 채 소리 소문 없이 죽을 것이다.
‘못 돌아올 수도 있어.’‘돌아오면 돼. 내가…… 내가 제어가 안 돼서 그래.’ 답답한 남자 강호운은 죄책감이 가득 씐 얼굴로 그녀를 묶었다.
멍청이. 그렇게 물러 빠졌으니까 이용만 당하는 것이다.
영원은 그를 이용했다. 예식장을 떠나야 했고, 아무나 도움이 필요했다.
마침 호운이 있었고 혼자 도피하는 건 외로웠으므로 호운을 동행자로 삼기로 했다.
호운을 이용했다. 그녀의 외로운 도피 길을 달래는데.
그것도 모르고 호운은 열성을 다해 필사적이었다.
자신이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그녀가…… 그녀가 얼마나 약아 빠진지도 모르고.
‘벌’을 받는 것이다.
되찾겠다고 하는 게 아니었다. 빼앗겠다고 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이기심이었다.
그 고집으로 무고한 한 사람이 죽었고 이제 또 다른 사람이 죽게 될지도 몰랐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불분명했다.
“여기 사람이 있어요.”필사적으로 바깥으로 나가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말라비틀어진 목청에서 쉰 소리만 맴돌았다.
날을 세운 손톱이 바닥을 긁었다. 영원은 배를 움켜쥐었다.
식은땀이 등을 적셨고 온몸이 뒤집히는 고통이었다.
의식이 희미해지는 걸 느꼈다.
어차피 5년 전에 이미 죽었어야 할 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는……
이렇게 허무하게는……
나는 죽어도 됐지만 이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마지막까지 살고자하는 본능이 미련을 떨었다.
‘너는 행복해질 권리가 있어.’한때, 호운의 말처럼 영원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었던 순진한 때가 있었다.
그래서 앞뒤 재지 않고 맹렬하게 피를 묻혔다.
‘너는 행복해질 권리가 있어.’아니. 그들의 죽음에 내 잘못이 있었다.
그깟 ‘권리’ 때문에……
한 여자는 살해당해야 했고,
나는 가짜 신부가 되었으며,
호운은 납치범이란 올무를 썼다.
그러니까 나는 행복해서는 안 됐다.
‘금방 돌아올게.’눈물은 마음에서부터 솟아올랐다.
왼쪽에서 시작된 눈물줄기는 콧등을 넘어 반대편 눈물과 합해졌다.
슬픔은 두 배가 됐다.
올무에 걸린 사슴이 발버둥을 칠수록 수렁에 더 빠져가듯이, 희망이란 그런 걸 것이다.
아무런 기약 없이 사람을…… 말라 죽여가는 것.
……주양이 내게 실망했을까.
나를 잊겠지.
서글픔이 덮쳤다. 희미하게 시계가 째깍거렸다.
*
실종 38일째.
“탑차를 찾았습니다!”고함이 빗속을 파고들었다.
경찰 경광봉이 흐릿하게 길을 비췄다.
장 경감은 산비탈을 허겁지겁 미끄러져 내려갔다.
폭우로 질퍽해진 땅을 튀기며 모두가 달려들었다.
한낮까지 땡볕을 직사로 받으며 탑차는 폐건물 뒤에 주차돼 있었다.
긴 숨바꼭질도 이제 끝날 때가 왔다.
걱정 마. 진아, 아빠…… 아빠가 구해줄게.
걱정 마. 진아, 아빠…… 아빠가 구해줄게. 이번만은……
이번만은 늦지 않아……!
문을 개방했다.
폭염이 지속되던 사흘,
“우웁!”내내 탑차 안에 고여 있던 화기와 엄청난 썩은 내가 몰아닥쳤다.
“찾았어? 뭐야! 어떻게 됐어!”현기영도 뒤늦게 달려와 장 경감에게 물었다.
장 경감은 멍하니 내부를 응시했다.
현기영도 안을 봤다. 그곳에 있던 모두가 숙연해졌다.
아마 당신이 이 일기를 읽을 쯤엔, 나는 이미 고인이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일기마저 남기지 않으면 나라는 존재는 아마 먼지처럼 사라지겠지요.
시신은 천장을 보고 똑바로 누워 있었다.
풍선처럼 잔뜩 부풀어 오른 시신은 부패가 진행되고 있었다.
구더기가 들끓었다.
“육안으론 힘들고요. 부검해봐야 신영원인지 신해수인지 판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수사관 한 명이 탑차 안을 굴러다니는 소지품들 투명 증거봉투에 담았다.
물품들 표면에 붙은 지문들을 떠보면 나중에 이 변사자의 시신이 누군지 정확해지리라.
다른 형사들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희망은 있어. 신영원일 확률이 커.”
한때 신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이 있다면 어째서 그 벌을 나 혼자만 받아야 했던 걸까요.
장 경감은 천천히 탑차 안으로 들어갔다. 엿가락처럼 녹아내린 시신에 어린 순경이 벽을 부여잡고 뛰쳐나갔다.
“우웩……! 웩!”
나는 그것이 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꼭꼭 숨어도 언젠가 술래가 나를 찾아주는.
원래 내가 있던 곳으로 되돌려주는.
숨바꼭질 같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째서 이런 곳에 숨어 있는가.
숨을 곳이 그렇게 없었던가.
그녀를 찾아다 헤맸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그녀를 간절히 찾아다녔다.
내 시계는 그날에서 멈춰버렸습니다.
나는 두 번 다시 내 본래 이름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
세상에서 지워지는 게 두려웠습니다.
“찾았습니까?”장 경감은 우뚝 멈췄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주양이 장 경감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찾았어요? 그녀를 찾았습니까?”장 경감은 돌아보지 못했다.
신랑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 긴 침묵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지 주양의 목소리 끝이 흔들렸다.
“이제…… 다 끝난 겁니까?”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남은 건 행복뿐이라고 말해달라고,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는 주양에게 장 경감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를 찾으면 어쩔 겁니까.’빈소에서 장 경감의 물음에 주양이 답했다.
‘제대로 된 결혼식을 다시 올릴 겁니다.’ 딱딱하게 힘주어 다문 턱이 일그러졌다.
최선을 다 했다는 말로 합리화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때도 그랬을 터인데. 왜, 우린 자꾸 부질없는 희망에 목을 매는 걸까.
그 밧줄이 올가미가 되어 우리들의 목을 죌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숨바꼭질에 20년은 너무도 늦은 시간이었나.
그는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실패자. 치가 떨리는 무능함.
아버지. 또 실패했어……
아들의 실망스런 어조가 둔탁하게 장 경감의 가슴을 쳤다.
너무 늦었다.
또.
다.
시.
늦었다.
이내, 환청은 시니컬한 조롱으로 바뀌었다.
아버지 당신,
……나를 구할 마음이 있긴 했던 거야?
쏴아아아??????!
서러움 가득한 날씨가 마지막까지 포악을 떨쳤다.
장 경감은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끝없이 지속되는 상처를 껴안고 사는 건 비참한 일이었다.
남은 것은 살아남은 자가 감내해야 할 슬픔뿐이었다.
“미안합니다. 신부님을…… 찾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