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62화 (62/83)
  • 62화. 숨바꼭질 <2>2017.02.05.

    소녀는 욕조에 머리가 처박혀 몸부림치고 있었다.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버둥거리는데도 죽으라고, 죽으라고 누군가 소녀의 뒤통수를 눌렀다.

    소녀를 물에 수장시켜 죽이려 하고 있었다.

    ‘흐……악! 우……욱.’소녀는 몸부림을 치다가 욕조 마개에 이마를 찍혔다.

    쇠모서리와 충돌한 뇌가 일시정지 했다.

    의식이 멀어져가는 걸 느꼈다.

    정신없던 몸부림은 거짓말처럼 멈췄다.

    소녀는 자신의 피가 염료처럼 느리게 퍼졌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

    “도둑질한 것도 인생인가.”해수의 낯짝에 대고 주양이 비웃음을 박았다.

    “어차피 네 이름도 아니잖아.”통보되어 오는 은밀한 비밀, 그 순간 그 방에 넘실대는 혼돈, 영원은 가슴이 요동쳤다.

    주양이…… 저것을 어떻게 알고 있나.

    그것은 파멸의 전조였다.

    ***

    ‘너’에 대해 말해보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내 인생에서 ‘너’를 빼먹고 다룰 순 없을 겁니다.

    ‘너’는 그때부터 상냥한 여자아이였습니다.

    너는 언제나 기묘한 죄책감이 뒤엉킨 얼굴로 나를 대했습니다.

    너도 인간이었을 테니 죄라는 게 뒷목을 짓눌렀을 겁니다.

    사람들이 그런 너를 보며 마음씨가 곱다고 칭찬할 때마다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상냥함이었습니다.

    이기적인 상냥함.

    착한 울림이 피가 응고되고 배를 움켜쥐게 했습니다.

    ‘내가 원한 게 아니었어. 내가 의도한 게 아니었어……!’‘어머니가 시켜서 나도 어쩔 수 없었어.’‘내 탓이 아니야. 어머니 탓이야.’뼈아픈 고해를 토해내며 너는 괴로운 눈을 똑바로 맞추고 내게 동정심을 구했습니다.

    자의가 아니었다고,

    타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했다는 듯이,

    무고한 척 상냥한 죄책감으로 파르르 뺨을 떨구고서 나를 부숴갔습니다.

    너는 알고 있었을 겁니다.

    너의 상냥함이 내게 상처가 됐다는 것.

    그 기간,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8살이 되자 나는 학교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취학통지서가 집으로 날아왔습니다.

    ‘그 무렵’부터 나는 어머니를 계모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에게 내가 딸이 아니었듯이 내게도 그녀는 계모였습니다.

    계모는 돈의 맛을 본 후 변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게 그녀의 본성이었는데 뒤늦게 내게 보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계모는 한번 범죄에 발을 물들이니 서슴없어졌습니다.

    후견인으로서 그 자금을 자신이 마음껏 운용하고픈 야망이 있었을 겁니다.

    불안감도 뒤따랐겠죠. 온전히 자신의 돈이 아니니까.

    백운당에 새로이 자신이 직접 뽑은 직원들이 생겼습니다.

    직원들이 ‘너’에게 정중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계모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부모만 잘 만나면 날개를 돋친 듯 화려하게 살 아이인데.’계모는 자신의 딸을 화냥년의 딸로 키우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노 집사가 집에 있는 동안 ‘너’는 내 연기를 완벽하게 해냈습니다.

    어쩌면 나보다 더 완벽한 백운당의 정통 후계자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침착성과 대범함이었습니다.

    계모는 원래대로 돌아가기가 싫어졌습니다.

    자신의 딸을 화냥년의 딸로 키우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대로도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계모는 점차 거짓말에 무뎌졌습니다.

    마치 그것이 일상인 듯 안주하게 됐습니다.

    어느새 다시 돌려주겠다던 나와의 약속도 잊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죄악을 끊임없이 곱씹게 하는 존재였을 겁니다.

    그들의 곁에서 그들이 잠을 잘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숨을 쉴 때나 언제나 그들 옆에서 기생충처럼 붙어살았습니다.

    나로 인해 그들은 불쑥불쑥 원치 않은 죄악을 상기했을 겁니다.

    그들 역시 나를 지켜보는 것이 꽤 고통스러웠겠죠.

    나를 보는 것이 괴로울수록, 계모는 나와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아 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냉대와 차별,

    계모의 변모한 모습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그 무렵, 나는 ‘너’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집에서만 하던 놀이는 바깥에서도 이어졌습니다.

    ‘너’는 내 이름으로 학교에 다녔습니다.

    애들은 자라면서 얼굴이 얼마든지 바뀌기 마련입니다.

    얼마든지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습니다.

    ‘너’가 왜 양산을 쓰고 다녔는지 나는 압니다. 얼굴을 가려야 했을 겁니다.

    ‘너’는 계모만큼이나 능동적이고 치밀했습니다.

    너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이해타산이 빨랐습니다.

    첩실의 딸보다는 백운당의 후계자라는 타이틀이 훨씬 미래지향적이라는 걸 그 나이에 깨달은 겁니다.

    너는 자신의 어머니를 수치스러워했습니다.

    내가 그토록 갈망했던 어머니를요.

    계모는 나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일신상의 이유로 나는 홈스쿨링을 했습니다.

    전국의 많은 어린아이 중 한 명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않는다 해서 그 집안 사정을 들여다볼 교육청 관계자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나는 계모의 호적상 친딸인 신영원이란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친어머니가 친딸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데 이상하게 볼 사람은 없었습니다.

    ‘너’가 학교에 갈 동안 나는 집안일을 했습니다.

    나는 숨바꼭질을 그만하고 싶어졌습니다.

    ……잠시 잊고 있던 인물이 있습니다.

    노 집사입니다. 이 연극이 시작된 것은 다 노 집사 때문이었습니다.

    노 집사는 며칠 묵고 떠날 것이란 당초 계모의 예상과 달리 백운당에 뿌리를 박았습니다.

    예. 노 집사는 진실을 알고도 묵인했습니다.

    사실 연극은 한 달 만에 탄로 났습니다.

    노 집사는 예리한 여자였습니다. 주인의 딸을 구분 못 할 정도로 둔하진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 노 집사에게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인생의 막다른 곳에 서 있었습니다.

    아들의 사업이 도산하며 빚더미에 올랐고, 사채업자들이 일터로 쫓아와서 그녀를 닦달했습니다.

    아들의 팔 한 짝을 잘라버리겠다고 서슬 퍼렇게 협박했습니다.

    백운당까지 찾아온 사채업자들에게 약속한 이자를 갚아준 것은 계모였습니다.

    그 대가로 빚의 일부를 갚았습니다.

    노 집사는 뼈를 묻을 심정으로 백운당에 온 것입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습니다.

    과유불급.

    노 집사는 자신의 분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여자였습니다.

    계모를 협박해 사장 자리를 꿰차려고 욕심 부리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겐 그에 걸맞은 자리가 있는 거니까.

    숨바꼭질을 관두고 싶어 하는 나를, 노 집사는 붙잡고 단단히 일렀습니다.

    ‘세상 모든 어미는 자식을 위해 불구덩이에도 뛰어듭니다. 내가 경멸스럽다 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참다 보면 좋은 날이 오겠죠. 지금은 숨 죽여야 할 때입니다. 살아남으세요. 그 뒤의 일입니다.’나는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전 사장님이 돌아가시기 직전 내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우려의 말이 깊더군요. 그 안에는 아가씨에 대한 걱정도 함께였습니다. 사장님은 아가씨에게 엄마를 만들어주고 싶었을 겁니다.’ ‘…….’‘지금 집을 차지한 저 여자를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아가씨였습니다.’ 사람의 욕심이 그렇습니다.

    하나를 얻으면, 허전한 다른 쪽 손에 하나를 더 쥐여주고 싶어집니다.

    내 기억 속의 친어머니는 언제나 병자였습니다.

    아프고 어딘가 위태로우며 그녀의 고통은 점염되어 나까지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나약한 육체는 종잇장 같은 그녀의 정신마저 갉아먹었습니다.

    친어머니는 나를 사랑했습니다.

    꽃처럼 아름다운 미소는 항상 어딘가 슬퍼 보였습니다.

    항상 방 밖을 나설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계모를 선택한 것은 나였습니다.

    계모가 나의 가정교사일 때 친어머니가 해야 할 전반적인 일들을 처리했습니다.

    유치원 소풍이나 학예회에 참석해서 친어머니 대신 자리에 앉았습니다.

    친구가 계모를 보고 감탄했습니다.

    “와, 너네 엄마 진짜 예쁘시다. 해수 엄마는 매일 아프시다고 들었는데 아니었구나?”아이들은 ‘작은 악마’라 했던가. 나는 무지했고 너무나 순수했으며 심지어 내 어머니의 자리를 빼앗아 선생님이 내 엄마가 됐으면 좋겠다고 소원했습니다.

    아픈 엄마 따위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여겼습니다.

    나는 진짜 계모의 딸이 되고 싶었습니다.

    나는 태연하게 연기했습니다.

    “우리 엄마 진짜 예쁘지?”그때 아버지와 계모가 주고받던 어색한 눈빛 교환……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과, 예상치 못했던 감정의 기류……

    아버지가 계모를 선택한 데에 나의 의견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에겐 건강하게 집안을 지탱해준 아내와 엄마가 필요했습니다.

    계모는 그 틈을 파고들었습니다.

    얼마 뒤 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계모와 결혼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됐다고 했지만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노 집사가 왜 내게 죽은 친어머니 얘기를 꺼냈냐면 일종의 ‘속죄’를 하라는 뜻이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친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불륜’을 했고,

    그 ‘불륜’을 조장한 것은 내가 되겠지요.

    어머니는 자살 했습니다.

    복수처럼.

    우리들 눈앞에서.

    ***

    주양의 호텔에서 빠져나온 영원은 어느새 백운당 앞까지 와 있었다.

    주머니에 있던 돈을 탈탈 터니 아랫마을 입구에서 택시미터기가 찼다.

    “집이 어디예요? 저 위 아니에요? 밤길도 어두운데 그냥 타고 가요. 데려다 줄게요.”흔치 않게 예의와 책임감 있는 택시기사였다.

    영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밤길을 걸었다.

    후문을 지나 들어가는데 영원의 발에 이불이 던져졌다.

    “빨아.”계모가 영원을 교련하는 방식이었다.

    딸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겠지. 영원이 진 이사의 호텔에서 같이 지냈다고.

    기싸움이었다.

    영원이 주양과 어떤 사이게 됐건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라고 경고하는 행위였다.

    영원은 그들의 하녀니까.

    “네가 집에 없는 동안 빨래가 산더미야. 할 일을 해야지?” 해수의 이불이었다. 생리혈이 묻은 이불.

    하지만 영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금 뭐하는 거지? 신영원.”“…….”“신영원!”언젠가 주양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최 사장을 사랑하나?’어째서 그가 그녀의 복수심에 그토록 쉽게 수긍했는지,

    친딸이 친어미에게 복수를 하겠다는데 어떤 의구심도 품지 않았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빼앗긴 것을 알고 있던 것이리라.

    모든 비밀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물은 것이다.

    ‘최 사장을 사랑하나?’사랑하지 않고서는,

    그 긴 시간 빼앗긴 채,

    이 얼굴을 한집에서 매일같이 마주치며 살 수 없을 테니까.

    사랑하지 않고서야.

    “사랑해요.”계모가 단박에 굳었다.

    자신이 들은 게 확실한지 제 귀를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영원이 다시 말해주었다.

    “사랑해요.”“너…….”계모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빳빳해졌다.

    나는 7살. 욕조에 머리가 처박혀 몸부림치고 있다.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버둥거리는데도 죽으라고, 죽으라고 누군가 내 뒤통수를 눌렀다.

    나를 물에 수장시켜 죽이려 한다.

    ‘흐……악! 우……욱.’나는 몸부림을 치다가 욕조 마개에 이마를 찍힌다. 쇠모서리와 충돌한 뇌가 일시정지 한다.

    의식이 멀어져가는 걸 느낀다. 정신없던 몸부림은 거짓말처럼 멈춘다.

    내 피가 염료처럼 느리게 퍼졌나간다.

    꿈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내가 살아 있으므로.

    누군가 나를 욕조 밖으로 끄집어냈다.

    노 집사였다.

    ‘얘야. 얘야!’나는 의식을 잃기 직전 희미하게 눈을 떴다.

    날 빠트려 죽이려 한 손의 주인은 욕조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기억 속에서 살인범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뿌연 안개가 걷혔다.

    원망하듯 나를 쏘아보는 계모의 눈빛……

    잊고 있던 고통이 차올랐다.

    “사랑해. 늘 당신이 죽어버렸으면 좋겠어.”통렬한 슬픔, 사랑과 살인의 경계선을 위험하게 넘실대는 감정.

    정반대되는 낱말이지만 이것만큼 폭력적으로 짙게 관통하는 고백이 또 있을까.

    내가 빌미를 제공한 셈이었다.

    내가 내 무덤을 팠다.

    그때로 돌아가 내 혀를 도려내고 싶다.

    ***

    모친은 나를 사랑했습니다.

    배신한 것은 나였습니다.

    모친의 죽음을 목도한 뒤 나는 정신이 온전치 못했습니다.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별로 또렷하진 않습니다.

    기억이 불분명하다는 건 멋대로 해석하기 좋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는 지금도 어머니가 자살했다고 믿지 않습니다.

    ‘기억왜곡’이라는 말을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모든 기억은 불확실성을 바탕으로 하며, 그렇게 나 스스로의 기억을 조작해버리면 언젠가 진짜 나 자신을 속일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수치, 흠집 난 영혼, 용서되지 않는 지난 세월.

    고통에 맞서 싸우면서 나는 면역력을 전부 소진했습니다.

    나는 포기가 빨라졌습니다.

    그 후에도 나는 한참 동안 백운당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부모님이 남기신 유산이 욕심나서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백운당을 떠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거 아십니까?

    폭력이라는 것이 가해자에게만 만성이 되는 건 아닙니다.

    폭력이 장기간 이어지다 보면, 폭력의 그늘이 편안해질 때가 있습니다.

    굴종이 주는 편안함.

    약간의 비참함만 참으면, 얻어지는 일신의 안위.

    최소한의 인간적 권리와 맞바꾸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세상 밖으로 나가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중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내가.

    그냥…… 삼시 세끼 밥을 얻어먹으며, 이렇게 복종하며 죽은 듯이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나는 안주하게 됐습니다.

    나는 사람을 믿지 않았습니다.

    한때 신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이 있다면 어째서 그 벌을 나 혼자만 받아야 했던 걸까요.

    고통은 이십여 년 내내 온전히 내 몫이었습니다.

    신도 돌봐주지 않는 나를 비열한 인간들이 봐줄 리 없었습니다.

    돌아갈 수 없을 것이리라. 그 무렵 나는 더 이상 권리를 되찾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지성이 깊어질수록 논리성까지 갖추며 무력감이 나를 나락을 떨어트렸습니다.

    그들은 내 권리를 빼앗고 세상에서 지워버렸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를 유일하게 증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지워지는 게 두려웠습니다.

    내가 떠나면 그들은 편안하게 나를 잊겠죠. 유일하게 나를 기억하는 그들이.

    그들은 내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고 저주 같은 희망이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지워지지 않기 위해 질기게 살아남았습니다.

    ……그렇게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죽으려 합니다.

    내가 22살이 된 올해였습니다.

    내 인생에 반환점을 가져다준 ‘그 사람’을 만난 것은.

    ***

    장 경감이 일기의 다음 장을 넘기는 그때였다.

    삐익???? !

    희미하지만 규칙적인 그래프를 그리던 바이탈 사인이 갑작스레 아래로 고꾸라졌다.

    검은 모니터 위를 그대로 직선으로 뻗었다.

    “……!”장 경감은 서둘러 유리벽 너머 호운을 들여다보았다.

    중환자실 베드에 강호운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활력징후가 점차 떨어지고 있다. 코드블루, 코드블루, 위급상황이었다.

    안내방송이 울려 퍼지고 의료진들이 황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카디악 어레스트였다.

    “혈압, 맥박, 다 안정수치를 벗어났습니다!”“심실세동기 준비해!”200J 챠지! 의료진들이 바쁘게 몸을 놀렸다.

    장 경감은 입을 다물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사력을 다해 환자를 살리려는 의사들의 숨 가쁜 처치.

    그들의 땀방울과 다급함이 귓가에서 멀어져갔다. 한 편의 연극을 보듯 현실감에서 동떨어졌다.

    장 경감이 그 안에서 할 일은 없었다. 할 수 있는 것도.

    그런 비현실성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은 자신의 뒤에 있는 저 남자 탓일 거다.

    주양은 소파에 팔을 대고 앉은 포즈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섭도록 엄숙한 동선을 그리며 그는 담배에 불꽃을 지펴 올렸다.

    장벽처럼 하얗게 담배 연기가 턱선을 쓰다듬으며 너울거렸다.

    생과 사를 오가는 반대편 병실의 위급한 상황과 다르게, 이쪽은 한없이 느긋하다.

    아련한 어조는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이상했지. 최혜란 같은 여자가 자기 친딸도 아닌 신해수를 그토록 살뜰히 챙기는 이유가 뭘까.”냉소적으로 정면을 주시하던 주양이 장 경감에게 말했다.

    “5년 전, 우연찮게 그 사실을 알게 됐죠. 이중모 의원의 약점을 쥐고 있는 최혜란은 화약고였어요. 유사시에 그녀의 폭주를 멈추게 할 약점이 필요했죠.”비현실인 듯, 꿈꾸는 듯했다.

    설마 그것이…… 장 경감의 눈빛에 주양이 나직이 읊조렸다.

    “당신의 생각이 바로 내 생각입니다.”최혜란이 어마어마한 짓을 저질렀다는 걸 알아냈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게 크리스마스이브 겨울이었던가. 사실 난 이미 5년 전부터 영원을 알고 있었어요.”영원의 22살. 크리스마스이브의 밤……

    “그 눈에 깃든 절망과 고통, 그때 분명 그녀는 자살하려고 했습니다.”장 경감은 일기장의 뒷표지를 확인했다.

    일기장의 제조연월이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이었다.

    일기는 ‘내가 22살이 된 올해’라고 진술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일기는 5년 전, 영원이 22살일 때 쓰인 것이고 5년 전에 아마, 자살을 하려 했다.

    주양의 목소리는 조금씩 경련하고 있었다.

    “책에서는 봤지만 스톡홀름 증후군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어요.” 그 당시 주양은 영원을 보며 두 가지 가정을 내렸다.

    영원이 계모를 살해하거나, 계모의 폭력을 못 견뎌 집을 나가거나.

    그런데 살인사건이 일어나지도, 가출하지도 않았다.

    4년 후, 영원이 그에게 복수를 제안했을 때 오히려 놀랐다고 밝혔다.

    머리가 빈 멍청한 여자라고만 생각했다.

    때로, 복종은 자유보다 더 안락함을 느끼게 한다.

    맞고 사는 것도 당연시 여기면 찌그러져 살 만하다.

    그러나 모든 것은 치밀한 연기였나.

    최혜란 몰래 키워왔던 영원의 복수심이 경이로웠다.

    그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가족을 살해하고 싶어 하는 건 어떤 마음인가, 궁금했습니다.”그 뒤에 알 수 없는 운명으로 그녀에게 정을 주게 되었다.

    처음엔 호기심이었고, 작은 관심을 넘어, 영원에게 진심까지 바치는 지금의 수준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 이상한 신부 연극을 한 겁니까?”장 경감의 물음에 주양이 간단히 답했다.

    “그녀의 고통을 묵인할 수 없습니다.”이름이 바뀌었다.

    이름을 빼앗겼다.

    “이름을 되찾아주고 싶었습니다.”노 집사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세상한테서 부정당한 여자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던 남자의 사랑이라. 그런 사랑은 도대체 어떤 형태를 띨 수 있을까.’세상에게서 부정당해야 했던 여자……

    영원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남자……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되찾은 것이다.

    *

    장 경감은 병실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없는 복도. 그는 차가운 벽에 조용히 몸을 기대었다.

    다행히 그사이 강호운은 안정을 되찾았다.

    강호운 역시 최혜란의 정부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강호운이 신영원을 여자로서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신영원도 없잖아 그런 감정이 있어서 주양을 떠난 게 아닐까 하고.

    하지만 강호운이 최혜란의 아들이라면, 신영원과는 의붓남매였다.

    이뤄질 수 없다.

    ‘그렇다면 신영원은 무엇 때문에 떠난 것인가?’

    <내가 22살이 된 올해였습니다. 내 인생에 반환점을 가져다준 ‘그 사람’을 만난 것은.>

    장 경감이 일기의 다음 장을 넘기는데 전화가 왔다.

    Rrrrrrr- Rrrrrrr-

    아들이 입원한 병원의 주치의였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장 경감의 물음에 어딘가 다급하고 화가 난 목소리가 돌아왔다.

    “간호사가 연락을 했는데 왜 안 받으신 겁니까?”전화 받을 여유가 없었다.

    “18시 23분. 아드님 방금 전 사망했습니다.”

    휴대폰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

    .

    .

    실종 34일째.

    ……신부 발견까지 4일 남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