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61화 (61/83)

61화. 숨바꼭질 <1>2017.02.02.

병실은 한산했다.

대수술을 끝내고 강호운은 여전히 혼수 상태였다. 멸균 처리된 유리벽 너머에서 띠? 띠? 비프음이 이어졌다.

장 경감은 소파에서 한 권의 노트를 발견했다.

‘주양이 놓고 간 걸까.’ 방금 전까지 남자가 앉아 있었는지 소파에 온기가 남아 있었다.

장 경감은 무심결에 노트를 펼쳤다. 그것은 편지 형식의 회고록이었다.

누군가의…….

***

나는 타인을 불편하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나는 그들의 곁에서 그들이 잠을 잘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숨을 쉴 때나 언제나 그들 옆에서 기생충처럼 붙어살았습니다.

나로 인해 그들은 불쑥불쑥 원치 않은 과거를 상기했을 겁니다.

그들의 죄악을 끊임없이 곱씹게 하는 존재였을 겁니다.

그들 역시 지난 세월이 꽤 고통스러웠겠죠.

그러나 나는 이 일기를 남겨야겠습니다. 이 정도는 내게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권리.’

참으로 나를 괴롭히는 단어였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권리가 주어지지만 어째선지 내게는 당연한 것들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제 그 권리를 포기하려고 합니다.

아마 당신이 이 일기를 읽을 쯤엔, 나는 이미 고인이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일기마저 남기지 않으면 나라는 존재는 아마 먼지처럼 사라지겠지요.

사람이 태어나서 어떻게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을 수 있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것은 내가 세상에 존재했음을 부정하고 싶은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일 겁니다.

한때, 내게도 모든 것이 당연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들을 집으로 데려왔을 때 내게 가정교사 선생님이 생겼고, 나와 같이 놀아줄 두 자매가 생겼습니다.

아버지가 재혼했을 때 그들은 내 가족이 됐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들을 증오합니다.

보이는 것들에 비해 감춰진 것들은 얼마나 또 많을 것인가, 생각해봅니다.

사람의 욕심이 그렇습니다.

하나를 얻으면, 허전한 다른 쪽 손에 하나를 더 쥐여주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까지 뺏길 정도의 과한 욕심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야박했던 것은 아닙니다.

한낱 추억이 됐지만, 나는 어머니를 존경했고 그녀의 따스함을 사랑했습니다.

어머니가 변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부터였습니다.

어머니에겐 한 푼의 재산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친딸의 몫이었으니까요.

백운당은 폐업을 했습니다.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직원들의 잔금을 치르는 데 보태 써서 보험금으로는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어머니는 거리에 나 앉을 수 없었습니다.

딸 셋을 건사하기 위해선 남편이 남긴 거액의 유산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엔 절차가 복잡했습니다.

“조사원이요?”“아무래도 거액의 돈이 오가는 문제다 보니, 조사원이 확인 차 방문하려는 모양입니다.”법률 자문가의 말에 어머니는 심기가 불편한지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내 돈을 내가 처분하겠다는데 누가 왜.”“엄연히 따지고 보면 따님의 재산이죠. 의붓따님.”모든 일에는 계기라는 게 있기 마련이죠. 어머니는 그때 느꼈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모든 게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을 거라던 막연한 꿈이,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라는 것을.

하필 조사원이 오는 날 나는 고열이 들끓었습니다.

어머니는 조사원의 매 같은 눈에 자그마한 구실도 잡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때 마침, 조사원의 눈에 비슷한 또래의 다른 딸이 보였습니다.

“이 아이가 신해수 양인가요?”어머니는 얼결에 답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10분 정도의 짧은 상담이 진행됐습니다.

7살짜리 아이에게 조사원이 바라는 게 있었을 리 없습니다.

그저 제 손으로 서류에 도장을 찍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동결돼 있던 거액의 돈을 수령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어머니는 우리 딸들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었습니다.

어머니는 미안했는지 내게 분홍색 원피스를 사주었습니다.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나는 행복했습니다.

쇼핑을 많이 했는데도 돈은 남아돌았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큰돈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술렁거렸습니다. 지금보다 더 부자가 되면, 세 자매를 잘 건사할 수 있겠지요.

그녀에게 처음으로 꿈이 생겼습니다.

남편이 남겨놓고 간 땅과 건물들을 처분해서 백운당을 키우고 싶은 야망이 부풀었습니다.

전보다 더 큰 자금을 융통하기 위해선 다시 의붓딸의 동의가 필요했습니다.

조사원은 이미 아이의 얼굴을 알고 있었습니다.

약간의 죄책감이 들지만 문제는 없었습니다.

다시 자기 딸에게 도장을 찍게 하면 되니까요.

자신의 성공이 모두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거짓말도 끝이 보였습니다.

나는 항상 영원이를 부러워했습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그 애는 타고났었습니다.

아주 자그마한 것을 나눠 갖기를, 그 당시 나는 바랐습니다.

노 집사는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집안일을 관장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태어나고 세 살이 되던 무렵 아들 내외의 손주를 봐주기 위해 떠났다고 했습니다.

노 집사는 아버지가 가장 믿었던 심복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유언장에 노 집사가 언급됐습니다.

어머니는 노 집사의 방문에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하필 조사원이 방문하는 날과 동일한 날이었습니다.

10분 정도 조사원을 속이는 건 문제가 없었지만 노 집사는 적어도 며칠 동안 지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 집사가 사실을 알게 되면 후견인 권리가 박탈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마도 노 집사를 며칠 묵게 하다 집에서 내쫓을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것 같습니다.

노 집사가 젊은 주인의 마지막 유언에 의리를 지키러 왔을 뿐 미련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딸들을 어떻게 납득시켜야 하는지 고민이 됐습니다.

어머니는 세 자매가 숨바꼭질을 하는 걸 유심히 지켜보게 됐습니다.

그때 어머니에게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숨바꼭질이었습니다.

놀이의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서로 역할을 바꾸는 거야. 해수가 영원이가 되고, 영원이는 해수가 되는 거지.’나는 항상 영원이가 부러웠습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그 애한테서 아주 자그마한 것이라도 나눠 갖기를 바랐습니다.

단 한 가지, 내가 유일하게 나눠 갖기를 바랐던 것은 ‘엄마’였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모정에 목말라 있다는 것을 이용했습니다.

그때도 어머니는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지만 금세 합리화를 했습니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자는 뜻이었으니까요.

나는 진심으로 어머니의 딸이 되고 싶었습니다. 의붓딸이 아닌 친딸이 되고 싶었습니다.

어머니는 약속했습니다.

‘아주 잠깐만. 잠깐이면 돼. 해수야. 선생님 믿지?’나는 그것이 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꼭꼭 숨어도 언젠가 술래가 나를 찾아주는.

원래 내가 있던 곳으로 되돌려주는,

숨바꼭질 같은.

이쯤이면 당신도 내가 누군지 짐작하셨을 겁니다.

이것은 스스로 제 무덤을 판 멍청한 여자의 반성문입니다.

나의 치부를 까발리는 내용이 아니라고 부정하진 못하겠습니다.

내 시계는 그날에서 멈춰버렸습니다.

나는 두 번 다시 내 본래 이름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나는 과거의 신해수이자,

현재의 신영원입니다.

***

장 경감은 노트를 덮었다.

뒷내용 아직 많이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읽기를 지속할 수 없었다.

영혼의 귀퉁이가 서걱거렸다.

보이는 것들에 비해 감춰진 것들은 얼마나 또 많을 것인가.

주양은 어느새 문지방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세수를 한 듯, 총체적으로 그의 고귀한 인상을 만드는 검은 머리칼이 흐트러져 있었다. 물기가 반짝였다.

처음엔, 신해수의 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용을 읽어갈수록 다른 사람을 지목했다. 신해수의 일기가 아니었다.

일기의 주인공인 ‘나’는 신해수였지만 이건 명백한 신영원의 회고록이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욕지기가 치밀었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신영원 씨가, 최혜란의 친딸이 아니었습니까?”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도무지 형태가 잡히지 않는 의문이다.

최혜란이 죽은 신정태와 재혼하면서 데리고 온 딸은, 첫째 딸과 셋째 딸이었다.

성원, 영원이다.

신영원은 호적상으로 최혜란의 친딸이었다.

호적이 증명해주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건 경찰을 비롯한 백운당에 있는 직원 전체도 같았을 것이다.

장 경감 역시 지금까지 영원을 최혜란의 친딸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친딸인 영원을 주양과 결혼시키기 위해서 의붓딸 신해수를 정신병원에 처박아둔 것을 보며 최혜란도 어쩔 수 없는 계모라고 여겼다.

아무리 신해수를 귀하고 예쁘게 길렀다 해도 의붓딸이었다.

결국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

아무리 못나도 아픈 손가락인 영원에게 좋은 남편감을 주고 싶었을 거라고,

결국 최혜란도 자기 핏줄이 우선이라고,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모두가 속았다.

모두를 속였다.

“신영원 씨가…… 신영원이 아니었습니까?”정작 주양은 섬뜩하리만치 비정상적인 태연함을 두르고 있었다.

보이는 것들에 비해 감춰진 것들은 얼마나 또 많을 것인가.

진실을 자꾸 알아갈수록 두려워졌다.

그 진실은 또 어떤 거짓 같은 진실 안에 감춰져 있을 것이며,

또 새로운 진실로 얼마만큼 나의 심장을 주저앉게 할 것인가.

한 여자가 있었다. 인생을 통째로 부정당한 채 살아야만 했던.

자기 이름을 남에게 빼앗긴 것도 모자라, 주홍글씨를 혼자 짊어져야 했던.

‘신데렐라, 오늘부터 네 이름은 신데렐라야.’

이름엔 마법 같은 신비한 힘이 있었습니다.

계모와 의붓언니들이 그렇게 부르니까

……

나는 정말 <재투성이 하녀>가 되었습니다.

-영화 신데렐라 中

-1년 전, 영원 26세

‘저…… 저기 바다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구해달라고…….’‘그런 거 없어.’‘아니야. 사, 사람이…… 빠져서…….’‘환영이야.’영원은 눈을 번쩍 떴다. 극한에 다다른 동공에 공포 어린 핏기가 어려 있다.

그녀는 비온 듯 땀을 흠뻑 뒤집어쓰고 있었다.

크루즈에서 어떤 웨이트리스를 마주쳤다. 아는 여자였다.

미친 듯이 따라가다니 보니 갑판이었다. 기절했던 것 같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주변을 둘려봤다.

필름이 끊긴 듯 기억은 드문드문 기워진 자국을 남겼다.

깔끔하지 못한 박음질이 사이사이에 공백을 남겼다.

이것은 공백 안의 일이었다.

분명 호운과 크루즈에 승선해 있었는데, 지금은 주양과 묵었던 호텔 침대 위였다.

“왜 내가 이곳에 있지?”호텔까지 돌아온 하룻밤 새의 일이 감쪽같이 증발했다.

영원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

조심스럽게 거실로 나갔다.

호운이 나를 여기로 남긴 걸까.

아니다.

호운과 주양은 일면식도 없는데 어떻게?

환각에 몽유병까지 겹쳐서 제 발로 돌아온 것이 분명하다.

마음 깊숙한 곳에 돌아가고 싶다는 잠재의식이 잠결에 무의적으로 발동한 거다.

멋대로 나가고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여자에 그는 지쳤을 지도 모른다.

‘주양에게 뭐라고 변명하지.’‘정신이 온전치 못한 나를 들여보내주긴 했지만 왜 돌아왔냐고 하면?’ ‘이제 너의 자리는 여기에 없다고 하면?’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두려운 생각이 옆통수를 스쳤다.

영원은 조심스럽게 옷장을 열었다.

버릴 여자의 옷 따위 그가 보관해뒀을 리 없으니까.

영원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안을 확인했다.

다행히 그녀의 옷들은 떠난 날 그대로 있었다.

낌새를 봐서 돌아오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며칠 민박집에서 죽 치고 있는데 생각이 많아졌다.

민박집의 늙은 할멈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지도, 안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무얼 시키지도 않았다.

그녀는 손님이었다.

26년을 살아오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적이 없던 것 같았다. 한 번도 뭘 손에서 떼어놓은 적이 없는 가파른 삶이었다.

설거지를 하거나, 밥을 차리거나, 청소를 하던 손이었다.

냉대를 받았지만 영원의 뒤통수엔 언제나 눈과 귀가 따라붙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뭘 하는지, 집안 사람들은 365일 그녀의 동태를 주시했고 의식했다.

그때 자신이 이 고요함을 즐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원의 손가락이 옷장에 메이커 별로 걸린 주양의 셔츠들을 건드렸다.

노골적일 정도로 그의 체취를 닮은 향이 영원의 코를 마비시켰다.

짙다.

매일 밤 그가 나타나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그와 격렬하게 정사를 나눴다. 현실과 가상이 혼재되어 뒤엉켰다.

헤어져 있는 순간에도 남자는 그녀에게 영향력을 뻗쳤다.

범의 아가리에 집어삼켜진 듯 숨을 쉬기 힘들었다.

그의 곁에 있다는 것은 본가와 연장선상의 일이었다.

절대로 편안한 남자가 아니다. 언제나 그녀에게 극도의 긴장감을 준비시키는 남자였다.

그가 너그러워진 것은 두 달이 채 안 된다.

그가 보내는 손짓, 눈빛, 순식간에 돌변해서 예측할 수 없는 남자의 행동들, 그가 접근해올 때면 근육의 텐션이 바짝 기립했다.

팽팽한 긴장감은 집에서나, 호텔에서나 24시간 그녀를 동여맸다.

그에게 잘 보이고 싶다.

어울리는 여자가 되고 싶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노력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연애는 피곤함을 수반했다. 애정과 편안함은 별개였다.

영원은 거실로 걸어 나왔다.

가출이 그를 분노케 했으리란 건 자명했다.

어떤 처벌을 해도 달게 받겠다.

서재 쪽에 불이 켜져 있었다.

“왜 내게 책임을 묻지 않는 거죠.”영원은 짓쳐드는 목소리에 멈칫 했다.

시곗바늘이 밤 9시를 넘어가는 시각. 주양이 앉은 책상 앞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그 애가 사라진 것이 내가 왔다 간 후라는 걸 알았을 텐데.”두꺼운 가죽 의자에 앉아 주양은 담담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한 음절 한 음절 말을 박아 넣었다.

“이렇게 찾아와 구구절절 하소연할 게 뻔했으니까. 구구절절 당신이 하는 하소연 따윈 듣고 싶지 않았으니까. 신해수 씨 당신.”자존심을 바닥에 내려놓은 여자는 해수였다.

해수가 무릎을 꿇었다.

“나를 선택하지 않아도 좋아요. 그 애한테는 가지 말아요.”“…….”“제발, 부탁이에요.”주양은 발아래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영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녀를 버리라고 주청하러 온 거다.

고작…… 고작 그따위 부탁을 하기 위해 이 밤에.

해수는 그새 초췌해져 있었다. 푹 꺼진 눈두덩에 고생의 흔적이 엇비쳤다.

“제발.”“제발이란 단어는 이렇게 함부로 쓰는 게 아닙니다.”“제발요.”“아껴둬요. 그 단어를 쓰게 될 경우는 앞으로 당신 인생에서 무궁무진할 테니까.” “이해할 수가 없어. 당신의 안목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런 거지같은 계집하고 나를 저울질한다는 게 말이 돼? 그런 배운 거 없는 무지렁이와 나를…….”“…….”“어떻게. 어떻게 감히!”주양의 단호함에 해수가 분개했다. 주먹을 덜덜 떨었다. 비참함이 그녀를 휩쌌다.

“나 신해수야.” “…….”“나 신해수라고! 그따위 계집한테 밀릴 내가 아니란 말이야!” 너는 항상 온화한 낯짝으로 나를 위하는 척했지. 그리고 내가 너보다 조금만 유리해져도 그것을 참지 못했다.

해수가 악에 바쳐 달려들었다.

따귀를 날리려는 팔목을 주양이 틀어쥐었다.

“고귀하게 태어났다 해서 고귀한 팔자라 할 수 없고, 천하게 태어났다 해서 천하게 살라는 법만은 없어. 당신의 인생신조가 아니었던가?”“내 인생 신조라니. 그게 무슨…….”해수의 물음에 주양이 바싹 그녀를 당겼다.

해수의 귓바퀴에 그가 입술을 붙였다. 입을 달싹였다.

영원은 멍하니 주양을 바라보았다.

자동 음소거를 한 것처럼 세상은 단절과 고요로 가득 찬다.

귓가에 말이 깊숙이 속삭여질수록 해수의 안색이 나빠졌다.

심판자는 위선 가득한 거짓말쟁이에게 찬사를 보냈다.

“도둑질한 것도 인생인가.”해수의 낯짝에 대고 주양이 비웃음을 박았다.

“어차피 네 이름도 아니잖아.”

통보되어 오는 은밀한 진실, 그 순간 그 방에 넘실대는 혼돈에 영원은 가슴이 요동쳤다.

주양이…… 저것을 어떻게 알고 있나.

균열조짐은 아주 조금씩 틈새를 벌리고 있었다.

그것은 파멸의 전조였다.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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