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59화 (59/83)
  • 59화. 실종 33일째 <1>2017.01.26.

    세상에서 유일한 신부, 그녀를 위해 재단된 치수 그대로.

    눈부신 브라이들 레이스에서 향기가 나는 듯했다.

    조명은 감탄하듯 신부의 전신 아래로 황홀하게 부서져 내렸다.

    탐나는 쇄골과 순결한 웨딩드레스.

    우아하게 뻗은 목선 못지않게 가는 허리를 풍성한 치마가 꽉 동여맸다.

    드레스는 꽃잎을 쓸어 모은 듯이, 꽃잎 수백 개가 달려 신부가 걸을 때 꽃길을 걷는 듯 보였다.

    결혼식을 며칠 앞둔 5월, 드레스가 완성됐다.

    백운당 사가로 배달된 드레스를 영원은 착용해보았다.

    곁에 선 매향이 입술을 뻥끗 했다.

    ‘영원아…… 너무 예뻐.’ 영원은 미혹하는 꽃이었다.

    예쁘다는 말로 부족할 정도로 현연한 아름다움을 이뤄냈다.

    양 비서도, 주양도 꿈결같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늘거리는 웨딩드레스에 둘러싸인 자신을 영원도 거울에 비춰보았다.

    예쁘다는 말을 생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누군가의 신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꿈에 그리던 남자와의 결혼이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꿈인지 생시인지 헛갈려서, 영원이 눈물을 흘렸다.

    ‘고마워.’영원은 눈을 맞대며 주양에게 감사인사를 표했다.

    ‘나를 여자로……, 신부로, 만들어줘서.’영원은 감격해서 하염없이 행복한 눈물을 흘렸다.

    주양의 눈에 영원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였다.

    *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서로만을 생각하며, 아주 작은 슬픔까지 나눠가지겠습니다.

    그리하여, 검은 머리가 흰 머리가 될 때까지

    그대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혼인서약문

    -실종 33일째

    장 경감은 외진 부두에 발을 내렸다. 막 밤 12시를 넘기고 있었다.

    항만은 지독한 어둠에 휩싸였다. 길을 밝혀주는 건 낡은 가로등 한 대뿐이었다. 그마저도 달려드는 부나방 떼에 위태롭게 점멸했다.

    차 보닛을 돌아 검은 유리를 두드렸다. 차창이 매끄럽게 내려갔다.

    진주양이 굴곡진 옆모습을 드러냈다.

    “경찰이 곧 들이닥칠 겁니다. 시간이 없습니다.”장 경감이 초조하게 속삭였다.

    경찰이 이 잡듯 그들을 찾고 있을 터였다.

    독단적으로 강호운과 협상을 나선 걸 지금쯤 알아냈겠지.

    그들은 강호운을 현장에서 제압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강호운은 눈치가 동물적으로 빠른 남자였다. 이미 6번에 걸친 접선에서도 경찰의 분장을 다 알아챘다.

    현기영의 어쭙잖은 공명심 때문에 이번에 강호운의 심사라도 뒤틀리면, 신부를 만날 길을 영영 잃어버린다.

    강호운이 막다른 코너에 몰려 있는 지금이 적기였다.

    밀항의 길이 막히고 강호운의 심리에 크게 변화가 왔을 가능성이 컸다.

    신영원이 아프다고 했다.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마음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배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누구를 닮아 고고하게 떠 있었다.

    “접선 장소는 저 배 위입니다. 안젤리크 호 갑판 위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진주양이 한 뼘 시선을 비스듬히 창밖으로 가져왔다.

    꼿꼿하게 쳐든 시선이 깊게 배를 응시했다.

    칙칙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도 눈초리만큼은 저 검은 바다보다 어둡고 강렬했다.

    “저 배가 확실합니까?”“무슨 문제가 있습니까?”장 경감이 물었지만 진주양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딘가로 전화를 넣는다. 그동안에도 시선은 마치 기이한 생명체라도 대하듯 가만히 배를 눈에 담았다.

    “죄송합니다. 많이 늦었죠?” 주양이 전화한 곳은 배 관리인인 모양이었다. 곧 항만공사 직원이 도착했다.

    크루즈를 개방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비행기에 탑승할 때처럼 스텝카가 배 입구에 연결됐다.

    직원은 밤중에 갑자기 불려나와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직원을 보내고 장경감과 주양은 배 내부로 들어왔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시설들이 장 경감을 압도했다.

    12층 규모의 크루즈는 고개를 한껏 젖혀야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양쪽으로 객실 발코니들이 절벽처럼 층층이 쌓여 있었다.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으로 올라갔다. 장경감이 감탄하며 물었다.

    “근데 이 배는 뭡니까? 보아하니 운행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한신그룹 소유인가요?”“배가 아니라 크루즈입니다.”“아, 네. 크루즈.”“원래라면 올 초에 보냈어야 할 선박입니다. 유럽의 최고 크루즈 운영사인 퀸텀사의 주문으로 제작됐죠.”“그런데 어째서?”“작년 초 유럽의 경기둔화로 선사가 대금을 치르지 못했어요. 그 뒤로 항구에 발이 묶여 있는 상태입니다. 그야말로 거대한 고철덩어리가 쓸모도 없이 녹슬어가고 있죠.”한신중공업 진두영 전 사장이 야심차게 준비한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작년에 일이 많았다.

    진두영 사장은 해임되다시피 퇴임했고, 배도 책임자와 운명을 같이 하듯 비슷한 수순을 밟았다.

    역작이 졸작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대화를 하는 동안 승강기는 착실히 12층에 도착했다.

    강호운과 약속한 배 갑판으로 나왔다.

    바닷바람은 생각보다 매서웠다. 내음에 섞인 소금기가 피부를 따갑게 할퀴었다.

    이 위에서 한눈에 모든 층위가 내려다보였다.

    장 경감은 1층부터 11층 복도 곳곳을 샅샅이 눈여겨봤다.

    복도를 뒤덮은 어둠은 강호운을 은신하기 좋게 만들었다.

    밤 12시는 금세 새벽 3시로 훌쩍 뛰어넘었다.

    기다림은 기약 없이 흘렀다.

    입구를 개방했으니 강호운이 들어오는데 무리가 없을 터. 저쯤 어딘가에 숨어 때를 기다리고 있겠지.

    바닥에 담배꽁초가 잔뜩 굴러다녔다.

    그 주범이 코앞에 있었다.

    아까서부터 주양이 폭주한 것처럼 담배를 줄기차게 피워대고 있었다.

    “재미있군요. 당신이 긴장한 모습.”장 경감의 그 말이 극도로 예민해진 남자를 자극했나.

    곧장 잡아먹을 것 같은 시선이 장 경감에게 집중됐다.

    장 경감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도 사람이었어.”자기 관리에 철저한 남자였다. 담배를 피울 정도로 헤비 스모커인 것은 무척 의외였다.

    아니, 그러지 않고서는 이 시간을, 이 기다림을 못 견디는 거다.

    주양은 아직도 신부가 왜 떠났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사실 장 경감이 알고픈 것은 근원적인 문제였다.

    단순히 변심했다는 것 이상의 내밀한 무엇.

    대체 그가 모르는 공백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

    가짜가 되면서까지 신영원이 얻고자 했던 신부의 지위.

    그런데 그녀가 그것을 포기하게 된 계기.

    입이 주책이었다.

    “메리지 블루였을 겁니다. 신부가 떠난 것.”위로라기엔 비참한 내용이었다. 동정 한 푼어치 던져주듯 장 경감이 내뱉었다.

    사실 바른 말로, 이미 볼 장 다 본 거 아닌가. 강호운과 떠난 것.

    장 경감은 무심결에 고개를 들다가 곤란한 입장에 처했다.

    문득 자신이 뭐라고 나불댔는지 인식했다.

    주양의 손가락 사이에서 담뱃재가 부스러졌다.

    선체가 크게 흔들렸다.

    빼곡히 주시해오는 눈동자. 진주양은 선미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대리석조각 같은 포즈로.

    잘생긴 얼굴은 단조롭게 장 경감을 눈여겨봤다.

    그러나 모호한 눈빛 너머는 심술로 가득했다.

    유려하게 곡선을 이루는 눈매가 장 경감에게 되묻는다.

    ‘너, 지금 혼자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냐?’해치울까. 일말의 자비심을 베풀 가치도 없다는 듯 냉정한 얼굴이었다.

    흉포한 감정이 뚝뚝 떨어졌다. 바람결에 그가 멋대로 풀어헤친 가학심도 함께 날려 왔다.

    당혹감이 장 경감의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실례했습니다. 전 그저…… 위로를 해드리려…….” 자질구레한 변명을 주양은 말끔하게 묵살시켰다.

    삐딱하게 난간에 기댔던 상반신을 일으켰다.

    주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주양은 손가락에서 무심하게 흘려보내던 담배를, 타들어가던 불씨를, 그대로 주먹 쥐어 으스러트렸다.

    갑작스런 행동에 장 경감은 말을 멈췄다.

    남자는 살타는 냄새를 죽이고 지척으로 다가섰다.

    돈 가방을 들고 사람 많은 거리에 얼빠진 놈처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서 있었다.

    경찰의 지리한 수사에 한마디의 불평불만도 없었고, 강호운은 그럴 때마다 조롱하듯 수사망을 빠져나갔다.

    진주양은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그런데 장 경감까지 보태 동정까지 해주시니.

    참으로 고마웠을 것이다.

    침묵이 분노였음을 어째서 읽지 못했는가. 붙박여 있는 위험한 시선에 명백한 살의가 깃들어 있었다.

    장 경감은 가슴이 묵직해졌다.

    재킷 안주머니에 심장과 맞닿아 있는 총이 움츠러들었다.

    죽임 당할 것 같은 공포에 집어삼켜졌다.

    검고 단단한 구두가 담배꽁초를 잔혹하게 부스러트리며 한층 목을 졸랐다.

    장 경감에게 끈질기게 시선을 붙이고 주양이 지갑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었다.

    압도적인 악력이었다. 못 박듯 현금을 손에 욱여 넣어준다.

    “오늘 고생했습니다. 비도 오고 힘들었을 텐데 따뜻한 율무차라도 뽑아 드세요.”경고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찍어 누르는 눈초리.

    “내 건 됐습니다.”정중함이 극대화 시켜주는 폭력성.

    ‘너 지금 당장 내 눈 앞에서 꺼져.’ 장 경감은 주양의 분노를 충분히 인지했다.

    그는 ‘버림받은’ 신랑이었다.

    *

    물살마저 숨 죽였다.

    시커먼 바다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엇도 저 어둠에 범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홀로 남아 주양은 영원이 작성한 결혼서약문을 되새겼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검은 머리가 흰 머리가 될 때까지. 나, 그대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곁에 있겠다, 고 했다. 제 입으로.

    화가 났는가.

    불필요한 순간에도 감정은 충실히 몸집을 불려왔다.

    마침내, 자제하지 못하고 남들을 겁주고 있었다.

    영원이 약조한 결혼서약은 영원 자신에 의해 지켜지지 않았다.

    주양은 세심한 손끝으로 난간을 쓸었다.

    최고급 삼나무 원목이라 바닷바람에도 강했다.

    바로 이 장소였다. 이 난간, 이 갑판 위에, 영원은 서 있었다.

    .

    .

    .

    ‘저…… 저기 바다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구해달라고…….’‘그런 거 없어.’‘아니야. 사, 사람이…… 빠져서…….’‘환영이야.’크루즈에서 열렸던 선상파티. 그때 호텔에서 사라지고 다시 가출한 지 한 달 만에 찾은 영원의 행방.

    그녀의 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가 아닌 다른 이였다.

    강호운은 그를 알아봤으면서도 당당히 영원을 데리고 사라졌다.

    무엇을 위한 도발인가.

    어딘가에 꾹꾹 눌러 담고 있던 흉포한 노여움과 정면으로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주양이 양 비서에게 말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매잖아요. 그런 건.’‘의붓남매라…….’마침내, 주양은 자기 안에 있는 분노를 정직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잡아. 잡아와요.’강호운은 영원을 업고 멀리까지 가지 못했다. 사면이 바다였다. 배는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었다.

    수하들은 크루즈 내 소극장으로 강호운을 여우몰이했다.

    아직 개장하지 않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비명이 맹렬하게 자지러졌다. 파열음이 난무했다. 수하들이 강호운을 에워싸고 마구 구타했다.

    영원이 소리를 내질렀다. 강호운은 영원을 감싸 안고서 온몸으로 발길질을 막았다.

    위대한 순간과 배우들의 열연이 담긴 무대, 관람석에서 주양은 다리를 꼬고 앉아 감상했다.

    지독히 깊은 혼란이 그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최 사장의 정부가 아니라…… 최 사장이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랍니다.

    양 비서의 음성이 뇌리에서 어지럽게 표류했다.

    의붓오빠.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매.

    영원의 과거에 속해 있는 남자였다.

    주양은 모르는 영원의 과거를 아는 남자.

    영원의 아픔과 고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며, 주양이 침범할 수 없는 것을 저 사내는 영원과 나누었다.

    ‘신해수 씨가 그날 방으로 찾아와서 심하게 모욕을 준 것 같습니다.’양 비서가 말했다.

    ‘열애설 기사는 오보로 내렸습니다만, 신영원 씨가 크게 상심해서 가출하신 것 같습니다. 현 계모와 아버지가 저지른 불륜의 상처를 무시하긴 힘들었겠죠.’영원은 주양과의 연애에서 얻은 고통을 왜 다른 남자와 나눠가지는가.

    둔탁하게 뼈 부러지는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선혈이 낭자했다.

    강호운이 온몸을 불살라 영원이 발길질을 받지 못하게 방패가 됐다.

    피범벅이 된 호운한테서 주양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죽도록 얻어터지면서도 끝까지 영원을 보호하는 모습에서 강호운의 본심을 읽어냈다.

    오래되고 묵직한 짝사랑.

    사랑하는 여자를……

    온 정성을 다해 지키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가슴 깊이 부대꼈다.

    강호운이 마지막 피 찌꺼기를 토했다.

    퍼부어지던 공격들이 주양이 관람석에서 일어나자 단숨에 그쳤다.

    마침내, 주양이 무대 위에 올랐다.

    엎어진 강호운을 발로 차서 밀었다.

    영원이 기절한 채 아래에 깔려 있었다.

    주양이 영원을 간단히 안아 올리자 피 묻은 손이 바짓단을 움켜잡는다.

    ‘내려, 놓고 가, 새끼야.’숨이 허덕거리는 사내는 마지막까지 여자를 지키려 애썼다.

    주양이 양 비서에게 영원을 넘겼다.

    수하들이 강호운을 일으켜 머리채를 잡아들어 얼굴을 보였다.

    주양은 무릎을 굽혔다. 시선을 마주했다. 경고를 박아 넣는 음성이 자상했다.

    ‘함부로 지키지 마. 네 몫이 아니야.’강호운의 턱을 움켜쥐었다. 으스러트릴 듯 손은 악력을 더했다.

    ‘죽을 수도 있어.’주양의 말에 강호운이 포기할 수 없는지 눈싸움을 겨뤄왔다.

    손은 간단히 뿌리쳐졌다. 앙칼진 반항을 주양은 자비롭게 봐줬다.

    가소로이 웃으며 돌아서는데 강호운이 발길을 세웠다.

    ‘죽을 수 있어.’주양의 걸음이 멈췄다. 강호운이 눈을 강하게 빛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거라면. 죽을 수 있어’‘…….’‘그래서 만약, 그 애를 위해 행동해야 할 때가 온다면, 난 그 애를 위해 죽을 거야.’‘…….’‘근데 넌 뭐지?’‘…….’‘좋은 집……? 명품백……? 네 사랑은, 너무 쉬운 거 아닌가?’주양은 호운을 돌아보지 않았다. 가난한 사랑 고백을 무시하고 나왔다.

    차에 올라탔지만 여전히 속이 부대꼈다. 운전석에 대고 명령했다.

    ‘호텔로 가죠.’그때 양 비서가 왔다. 배웅하며 차 밖에 서서 물어왔다.

    ‘놈은 어떻게 처리할까요.’주양은 품에 있는 영원의 머릿결을 쓸어내렸다.

    눈물자국이 말라붙은 얼굴이 가련했다. 기절하면서 느낀 공포가 아직 가시지 않아 절망적이었다.

    한 달 새에 살이 빠졌다.

    영원은 정작 힘들거나 고통스러울 때 그를 찾아온 적이 없었다.

    왜 나를 찾아오지 않는 거지?

    왜, 내게 의지하지 않는 거지?

    영원은 자신을 ‘배려’한 것이겠지만 그는 그럴수록 더 외로워졌다.

    영원에게 마음을 주기 전보다 더 쓸쓸해졌다.

    들어온 자리는 모르나 난 자리는 표가 난다.

    전에는 몰랐던 고독감을 이제는 알게 됐다.

    영원은 언제나 감당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면 포기해버리거나 사라졌다.

    그런 영원이 자신이 아닌 강호운은 찾아갔다.

    그녀가 가장 힘들 때 찾아간 사람이 자신이 아닌 강호운인 것에 패배감을 느꼈다.

    주양은 강호운을 죽여 버리고 싶은 살인충동이 일었다.

    불안은 그런 것이었다.

    영원의 감정이……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자신을 향한 영원의 마음은 동경과도 같았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줄 수 있는 남자.

    유명인을 바라보듯이 신기하고 동경하는 마음.

    그가 하는 것과 영원이 하는 것이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놈은 어떻게 처리할까요.’양 비서가 다시 물었다.

    가난하다고 사랑마저 가난한 것은 아니다. 그건 배신감이 아니었다.

    ‘죽여.’ ‘…….’‘죽여, 버리세요.’질투라는 이름의 추잡한 감정이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서로만을 생각하며, 아주 작은 슬픔까지 나눠가지겠습니다.

    슬픔을 나눠 짊어질 인생의 동반자로 네 마음에 내가 미덥지 못했는가.

    .

    .

    .

    1년 뒤, 또다시 영원의 선택은 ‘강호운’이었다.

    그는 바다를 느꼈다. 등 뒤로 장신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철컥.

    주양의 뒤통수에 차갑고 딱딱한 금속성 물체가 대어졌다.

    강호운이 비장하게 내뱉었다.

    “쭉 생각했어. 우리가 다시 만나야 한다면 이곳뿐이라고. 그때 일을 여기서 결판냈어야 했어.”마른 바닷바람이 두 사람의 얼굴을 건조시켰다.

    주양은 가만히 감았던 눈을 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내에게 열패감을 느낀다는 것.

    그것을 인정하는 꼴이 될까 아직까지 죽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한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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