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신데렐라-57화 (57/83)
  • 57화. 사라진 신부 - 외전2017.01.19.

    -실종 16일째

    뚜우 ─ 뚜우 ─  뚜우 ─

    달칵.

    ‘네. 안 그래도 전화를 기다렸습니다, 강호운 씨.

    엊그제는 나도 놀랐습니다. 신부에게 갑자기 변고가 생길 줄 우리 모두 몰랐습니다. 예상 밖의 일이었었지요.

    감사인사는 할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고 계획이 수정되는 건 아니니까.

    곧 당신에게 임무가 들어올 겁니다. 그때까지 신부를 감시 잘하도록 하세요.

    ‘감시’라는 어감이 불편하십니까?

    하지만 당신도 두려웠잖습니까. 언제 생각을 고쳐먹을지 몰라요.

    임신하면 여자는 감성적이 됩니다. 아기 아버지한테 가려고 할 겁니다. 알게 해선 안 됩니다.

    어제 병원에서 진찰 받은 결과를 자꾸 묻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럽다고요?

    그저 빈혈이라고 둘러 대세요. 신부가 당신을 떠나면 죽 쒀서 개주는 꼴입니다.

    ……사설이 길어지네요. 사실 오늘 파주 병원에 나도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 쪽도 당신이 어느 정도의 신체 능력을 지녔는지 가늠할 필요가 있었어요.

    육군 출신이라더니 피지컬이 대단하더군요.

    최혜란의 딸을 안전히 탈출시킨 것, 잘 지켜봤습니다. 힘들었을 텐데 고생이 많았어요.

    ‘그녀’는 신부실종 사건의 중요한 증인입니다.

    지금은 분노 때문에 앞뒤 분간을 못 하겠지만, 차분히 시간이 흐르고 머리가 차가워지면 우리 쪽으로 넘어올 수 있도록 설득해보세요.

    신부요?

    그녀에게 우리 존재를 말해야 하는지 고민이군요. 당연히 안 됩니다.

    당신은 대가 없이 신부에게 헌신하는 캐릭터예요.

    당신에게 죄책감을 가질수록 신부는 당신을 떠나지 못할 겁니다.

    명심하세요. 그녀에겐 남편이 있고, 당신을 사랑해서 그녀가 당신 곁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경찰이 신부를 찾고 있어요.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시간문제입니다. 당분간 연락하지 말아요.

    혹시나 덜미가 잡히더라도 당신 단독범행이라고 입 닫아야 합니다. 절대 배후에 있는 우리까지 노출되게 하지 마세요.

    적어도 신부만이라도 떠날 수 있게 하고 싶다면 말이죠.’

    호운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우비를 머리 깊이 덮어썼다.

    공중전화 부스를 나오자 장대비가 쏟아졌다.

    쏴아아아아아 ????? !

    경찰차가 지나가기만 해도 신경이 곤두섰다.

    진주양의 사람들이 일대를 샅샅이 살펴댔다. 경찰보다 그들은 집요했고 빨랐다.

    매일 장소를 이동하는데도 2~3일 차이로 그들의 행적을 귀신같이 맡고 따라붙었다.

    비가 마구 퍼부어졌다. 호운은 우비를 여미며 자전거를 몰았다.

    외진 다리 아래로 들어갔다. 다리 밑에 탑차 한 대가 서 있다. 호운은 화물칸을 열었다.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다급해졌다.

    주변을 살피는데 토악질 소리가 발길을 붙들었다.

    우거진 수풀에서 한 여자가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며칠 새 앙상하게 마른 등이 가여웠다.

    인기척에 그녀가 흠칫, 뒤를 돌아봤다.

    빛나는 웨딩드레스와, 면사포 안에 아름다운 얼굴을 감춘 신부.

    버진로드를 건너 신랑의 품에 안겼어야 할 그녀는 처량한 모습이었다.

    영원이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얼굴을 지어 보였다.

    “죽을병에 걸린 것 같아. 나 벌 받는 걸까.”무엇을 위하여, 왜, 이 꼴로 있을 거면서, 그 남자에게서 도망쳤는지 호운은 헛갈렸다.

    그들이 하는 도피가 과연 올바른 일인지, 가끔은 그녀를 그 남자에게 데려다줘야 하는 게 아닌 가 의심이 일었다.

    *

    개조된 탑차는 7인승으로 잠자리를 청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음식을 해먹기 어려워서 그렇지, 씻을 수 있는 작은 화장실도 있었다.

    애초에 계획했던 캠핑카는 시선이 너무 쏠렸다.

    특별히 개조된 탑차였다.

    바깥에서는 청과물 운반 차량처럼 보이도록 위장해놓았다.

    음식은 그동안 인적 없는 식당을 전전하거나 대충 패스트푸드로 때웠지만 어제부로 그것도 힘들게 될 것 같다.

    호운이 영원에게 약통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영원이 손수건으로 입 주변을 훔쳤다.

    “영양제야. 약사가 먹어야 한대.”“엽산? 이런 건 처음 먹어봐.”“너 아무것도 못 먹고 계속 토하잖아. 그러니까 더 먹어야 해.”임신한 여자들은 필수로 먹어야 하는 약이었다.

    다행히 영원은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호운은 운전석으로 들어왔다.

    흰 봉지를 털어내자 붕대와 약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영원의 약을 사면서 같이 구입했다.

    소매에 감췄던 팔이 드러났다. 눌어붙은 살갗에서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호운은 신음을 집어삼켰다.

    병원에 불을 지를 때 시너가 옮겨 붙으면서 화상을 입었다. 소독약을 붓고 연고를 발라 붕대를 감는데 영원이 다가왔다.

    “해수 만났어?”호운은 얼른 붕대 감은 팔을 옷으로 덮었다.

    호운은 차창을 내렸다. 영원에게 꿀밤을 한 방 먹였다.

    “꼬맹이. 내 능력을 의심하는 거냐?”신해수를 탈출시켰다.

    영원이 고개 숙였다.

    “미안. 위험한 일을 시켜서.”호운은 가슴 한편이 찔렸다.

    해수를 탈출시킨 건 영원이 부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위에서 원했다.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된 건 5월. 결혼식이 열리는 호텔 앞이었다.

    가짜 신부라니.

    호운은 동의할 수 없는 방식이었지만 영원이 스스로 내린 선택이었다.

    처음부터 영원을 데리고 도망치려 했던 건 아니었다. 호운은 영원을 그 남자에게로 보내주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축하해주러 결혼식장 안으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역시 그런 결혼으로 영원이 행복해질 리 없다고 여겨졌다.

    누구에게 들킬지 몰라, 평생 동안 전전긍긍 얼굴을 숨기고 살아야 할지 모르는 그런 결혼생활이…….

    두 사람 다 미쳤다. 영원은 잃어버린 자신의 삶을 보상 받기 위한 심리였다 쳐도, 그 남자가 동조해줄 줄은…….

    그때였다. 유혹의 손길이 다가왔다.

    ‘강호운 씨?’그들은 신부가 식장을 나오면 이대로 데리고 떠날 것을 지시했다.

    ‘곧 결혼할 여자가 결혼식장을 떠난다니…….’납득가지 않는 말이라고 무시하려는 찰나였다. 낯익은 여자가 신발도 잃은 채로 걷고 있었다.

    영원이었다.

    그녀는 주양을 떠나 결혼식장을 도망쳐 나왔다.

    결혼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호운은 영원이 원한다면 뭐든 해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행복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영원과 호운은 도망자 신세가 됐다. 왜 도망쳐 나왔는지 이유는 짐작했지만 묻지 않았고, 그녀도 자세한 것은 말하기 꺼려했다.

    도망쳤지만 잡히는 건 금세였다.

    마침, ‘그쪽’이 손을 내밀었다.

    ‘신부와 떠나게 해주죠. 대신, 그 보답으로 아주 작은 성의만 보여주면 됩니다.’그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진주양의 손아귀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호운의 힘으로 될 상대가 아니다.

    ‘신해수를 병원에서 빼내세요.’첫 임무였다.

    방화환자를 구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손이나 팔에 화상 자국이 있는 환자를 골라 라이터를 갖고 놀게 했다. 준비해놓은 시너를 뿌려 병원 화장실에 불을 질렀다.

    문제는 5호실 앞 경호원들이었다.

    경호원은 총 5명인데 시간마다 교대를 했다. 문 앞을 지키는 2명과 보안실에서 신해수를 상시 감시하고 있는 1명을 빼면 3명이었다.

    ‘그들은 5호실 방문자를 철저히 가려냅니다. 신해수와 접견해도 되는 인물을 가려내기 위해, 주변 인물 정보를 매번 업데이트 받죠. 강호운 씨 당신은 불가능할 겁니다. 신부를 데려간 위험인물이니까요.’진주양이라면 알 거라고 짐작했다.

    영원이 자신과 함께 있다는 것.

    호운은 해수를 빼내기 위해 미끼가 됐다.

    역시나 그들이 먼저 호운을 알아챘다. 특별병동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무전이 울렸다.

    호운을 잡으러 방심한 사이 5호실 앞은 보안이 뚫렸다.

    경호원들을 따돌린 뒤 호운은 해수가 탈출하는 걸 확인했다.

    호운은 영원의 등을 봤다. 작은 어깨가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가 그가 손을 오므렸다.

    호운이 영원을 안을 수 있는 것은, 영원이 기대올 때뿐이었다.

    추적추적, 짐칸에 앉아 영원은 빗줄기를 무연히 응시했다.

    여름이었다. 벌써…….

    결혼을 준비할 때만해도 따뜻한 봄이었는데.

    ‘행복했었지. 불행한 만큼.’지금쯤 해수는 병원에서 탈출해 어디로 갔을까.

    영원을 죽이겠다고 바득바득 우겨댈 것이다.

    복수에 미친 인간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해수가 처음 폭주했던 때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1년 전, 주양이 출근한 아침, 호텔 초인종이 울렸다.

    그날 그녀를 찾아온 방문객은 해수와 성원이었다.

    ‘차 한 잔 마실 수 있니?’평화롭게, 친구 집에 방문한 것처럼 해수는 청해왔다.

    영원이 누구와 이 방에서 지냈는지 알면서.

    그와 사랑을 나눴던 침대가 그대로인대.

    모든 걸 알고 왔으면서……

    ‘나 그 사람하고 결혼할 거야.’해수는 똑바로 영원을 마주하며 밝혔다.

    영원은 지지 않았다.

    ‘내, 내가 먼저 좋아했어.’영원이 당당하게 밀어붙였다.

    ‘그 사람이 좋아해도 된다고 허락했어.’온화하기만 했던 해수의 낯빛이 싸늘해졌다.

    ‘허락을 해?’‘그래.’하지만 곁에 있던 성원이 먼저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영원에게 걸어왔다.

    짜악 ???? !

    뺨에서 불길이 일었다.

    고개가 반쯤 돌아갔다.

    영원은 얻어맞은 얼굴을 감쌌다.

    성원이 욕설을 뱉듯 말했다.

    ‘눈깔아. 넌 빼앗은 년이야. 빌라고.’성원이 다시 영원의 뺨을 날렸다.

    해수는 옆에서 성원을 말렸지만 영원을 원망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신해수는 항상 그랬다. 혼자 와서 해결할 수도 있었지만 비겁하게 성원을 끌고 왔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남이 해결하게 만들었다. 더 나쁜 년이었다.

    영원은 성원을 노려보다가 해수에게 손을 쳐들었다.

    눈에 발톱을 세우고 두 대로 돌려주었다.

    짜악 ?? ! 짜악 ?? !

    해수가 뺨을 맞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영원이 성원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네가 한 대 때리면 난 이 계집을 두 대 때리고, 날 아프게 하면 나는 얠 죽여버릴 거야.’독기 서린 말이 술술 나왔다.

    성원이 어이없어 했다.

    그런 영원을 해수가 노려봤다. 무릎을 꿇고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감히! 라는 게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느새 침실까지 쳐들어간 성원이 이불을 찢어발겼다.

    ‘이것들 침대까지 나눠썼어!’분에 못 이기겠다는 듯 성원이 미친 여자처럼 발광했다.

    ‘뭐하는 거야!’ 영원이 말리러 가다 해수에게 어깨가 붙잡혔다.

    해수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다.

    ‘좋았니?’어젯밤에도 쓴 흔적이 영력한 침실을 해수가 곁눈질하다 신랄하게 캐물었다.

    ‘좋아 죽었지? 니들.’‘닥쳐. 너한테 조롱 받을 이유 없어.’‘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 남자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 남자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현실을 부정하고 싶은지 해수가 귀를 틀어막았다.

    그렇다면 현실감각을 일깨워주는 수밖에. 영원이 말했다.

    ‘네 남자 아냐. 내 남자야.’해수의 움직임이 일순간에 멎었다. 해수가 텅 빈 눈으로 영원을 돌아봤다.

    신해수의 남자였던 적이 있긴 했던가?

    그를 좋아한 것은 ‘내’가 먼저였고 먼저 그와 몸을 섞은 것도 나였다.

    해수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내…… 남자?’‘그 사람이 너한테 헤어지자고 했잖아. 찼잖아.’언제 거실로 나왔는지 성원이 해수 옆에 서서 비식, 웃었다.

    ‘그거였어? 말병신 네가 기가 찰 만큼 당당했던 이유가. 이미 헤어졌으니 거리낄 게 없다?' ‘둘이 진짜 사귀었는지 어쨌는지 알게 뭐야.’ ‘과연 남들은 그렇게 생각할까? 세상이 그렇게 생각해 줄까?’‘그게 무슨 소리야?’성원 대신 해수가 그 물음에 답했다.

    여성잡지를 바닥에 던졌다. 영원의 근거 없는 자신감을 짓밟아주겠다는 듯, 비장한 표정이었다.

    영원은 두려움을 누르며 기사를 읽었다.

    열애설이었다. 주양과 미모의 한 여자.

    모자이크 처리된 열애설의 주인공은 해수였다.

    둘이 어떤 계기로 만났으며 이런저런 핑크빛 이야기가 구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결혼까지 이어질까? 하며 물음표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거 알아? 세상 사람들은 내가 그 사람하고 연애하는 줄 알아. 드라마 봤지? 임자 있는 남자를 빼앗는 년을 화냥년이라고 해. 화냥년.’한 발씩 걸어오며 해수가 강조했다.

    결국 근육 하나 꿈틀대지도 못하는 영원 앞에 섰다.

    ‘날 엿 먹이고 싶어 했지. 빼앗고 싶어 했잖아, 너. 소감은? 좋니? 이제 만족해?’영원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축하해.’‘…….’‘네가 그토록 경멸하던 우리 엄마랑 똑같은 년 된 거.’음성이 서리처럼 그녀를 내리쳤다.

    천박하고 상스럽기 그지없는 짓을 하다니. 천벌을 받아 마땅한 짓을 하다니.

    네가…… 감히 계모와 똑같은 짓을 하다니.

    그런 여자와……

    제정신이 아니었다. 영원은 유령처럼 호텔을 빠져나왔다.

    빨간 불에 차도를 건너려다가 욕을 집어먹었다.

    ‘넌 남의 남자를 빼앗은 화냥년이야.’본능적인 혐오감이었다.

    해수를 상처 입히는 것이 행복해야 하는데 어째서 이런 마음이 걸리는지 영원은 의아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편네들이 떠드는 ‘세컨드’라는 단어에 왜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했는지.

    왜 도망치듯 바로 백운당으로 돌아갔는지.

    이제 알겠다. 무엇이 그렇게 걸리고 불편했는지.

    아버지의 외도는 내게 올무였다.

    목에 칭칭 감겨 풀려고 하면 할수록 내 목을 옭아매며 고통을 주었다.

    아버지는 내게 죄를 지었다.

    간단히 계모와 어울린 것.

    아무리 운명적이고 멋있는 사랑이었다 해도,

    ……아버지.

    당신의 사랑은 ‘불륜’이었다.

    영원은 길을 헤매다가 어느 상점 앞에 주저앉았다.

    호텔에서 가출하듯 빠져왔다. 이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주양이 걱정할 텐데. 찾을 텐데.

    아마 그때가 두 번째 가출을 하게 된 시점이었다.

    주양의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졌었던.

    길을 가던 누군가 멈춰 섰다.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퉁명스런 목소리에 영원이 고개를 들었다.

    ‘나오랄 땐 그렇게 버티더니 이제야 그 집구석에서 완전히 나온 거냐?’ 집 안 사람들 중 누구도 계모의 만행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중 유일하게 양심이 남아 있는 계모의 자식이었다.

    강호운. 계모의 아들.

    ‘꼬맹이. 너 울어?’영원이 힘겹게 입을 뗐다.

    ‘불륜도 사랑이었어?’염산같이 눈물이 뺨을 짓물렀다.

    함정이었다.

    남들에겐 그저 더럽고 추잡한 불륜이 당사자들에게 애틋한 사랑이라는 것을.

    내게도 해당될 수 있는 말이었음을.

    내심 그것을 알고도 그를 좋아했다. 내 사랑이 더 중요했으므로.

    내게는 이토록 진실하고 순수한 사랑이, 이 마음이,

    타인의 눈에 남의 영혼을 살해하는 죄악이라면,

    내게, 계모를 비난할 자격이 있겠는가. 앞으로도.

    *

    “바다 보러 갈래?”상념에 빠져 있던 영원은 가까이서 들려오는 음성에 놀랐다.

    고개를 드니 호운이 빤히 그녀를 보고 있었다. 생각에 너무 오래 빠져 있었나.

    영원은 산만해진 정신을 수습했다.

    그가 어디를 가자고 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해변에 도착하고 나서야 바다…… 라고 한 것을 인식했다.

    영원은 멍하니 바다를 보았다.

    호운이 도로 반대편 슈퍼를 가리켰다.

    “음료수라도 사 올게.”덩그러니 혼자 서 있었다.

    영원은 가만히 있는데 철썩- 철썩- 바다가 왔다.

    ……영원에게로.

    물살은 쓸려갔다 다시금 크게 밀려들어와 발목을 잠기게 했다.

    영원은 아무렇지 않게 물속을 들여다봤다.

    예전이라면 꿈도 못 꿨을 행동이었다.

    물 근처에만 가면 몸이 나무토막이 됐다.

    그때 찰나의 속삭임.

    ‘바다의 다른 이름이 뭔지 알아?’‘소리처럼 의미도 참 예쁜 이름이야.’어렴풋한 기억이었다. 과거 기억에 존재하는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라는 이름엔 아주 좋은 의미가 있지.’한때 이 바다를 무서워했던 때가 있었다. 세상 모든 물이란 물은 질겁하고 봤다.

    그건 가질 수 없는 열망에 차라리 혐오하기로 작정했던 걸까.

    기억의 목소리가 끄집어내기 전에 먼저 그녀가 소리 냈다.

    “해수…….”바다의 또 다른 이름은 해수였다. 해수라는 이름엔 바다라는 좋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멀리서 호운이 걸어오고 있었다.

    철썩- 철썩- 마찰하는 파도 소리가 다시금 영원을 뒤흔들었다.

    그때만 해도 호운과 이렇게 되리라고 짐작도 못 했다.

    이렇게 그와 정말로 떠나게 되리라고는.

    .

    .

    .

    ‘불륜도 사랑이었어?’호텔에서 해수와 성원을 만나고 도망치듯 빠져온 날, 거리에서 호운을 만나 그 말을 끝으로 의식을 잃었다.

    만신창이로 거리에 쓰러진 그녀를 호운은 업어갔다.

    안면을 튼 민박집 할멈 집에 호운이 그녀를 맡겼다.

    그가 자취하는 집은 좁았다.

    그는 지방을 전전하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 꼴로 찾아와 영원의 생사를 확인하는 식이었다.

    한 달이었다. 한 달은 정말 빠르게 지났다.

    영원은 집에도 돌아가지 않고 동면기를 가졌다.

    공교롭게도 그 할멈의 집에 친척이 오게 돼 방을 비워줘야 했다.

    마침 호운은 서울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군대에서 일한 경력을 살려, 경호 쪽 일을 맡게 됐다.

    파트타임으로 그가 보안을 맡게 된 곳은 크루즈, 배 위였다.

    ‘바다는 싫어.’승선하지 않으려는 영원을 호운이 설득했다.

    ‘보안팀장한테 잘 말해서 객실을 따로 마련했어. 오늘 하루뿐이야. 다른 곳을 구해볼게.’ 얹혀사는 처지에 영원은 제멋대로였다. 그가 계모의 아들이어서였다.

    응석을 받아주는 호운도 우스웠다. 계모가 영원에게 죄를 지었지만 호운이 영원에게 절절매야 할 이유는 없었다.

    계모에게 장점이 있다면 자식을 대하는 태도의 ‘일관성’이었다.

    의붓자식이나 친자식이나, 자식을 이용하는 데 써먹었다.

    좋은 어미가 아니었다.

    ‘나한테 잘해주는 이유가 뭐야. 내가 이대로 빌붙겠다면, 날 계속 먹여 살리기라도 할 거야?’내일이면 또 어디론가 옮겨야 한다. 계속 민박을 전전할 순 없었다.

    차갑게 쏘아붙이자 호운이 한술 더 떴다.

    ‘나와 같이 떠나. 너 하나 먹여 살릴 힘은 있어.’영원이 턱에 힘을 주었다.

    눈앞의 사내를 노려보는 한 쌍의 눈동자에 노기가 어렸다.

    ‘내가 왜, 너랑 떠나야 하는데?’‘…….’‘네가 뭔데 나를 그 집에서 나오게 해?!’‘넌 그 집에 있으면 안 되니까.’‘거긴 내 집이야.’‘너, 왜 사람들 앞에서 그 여자 딸인 척해.’뇌 회로가 정지했다. 그가 칼날같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호운이 무섭게 영원을 다그쳤다.

    ‘그래. 거긴 네 집이야. 근데 왜 네가 신영원이야.’‘…….’‘너 아니잖아. 신영원.’영원은 단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폭발직전의 활화산에 불씨를 당긴 것 같아 두려웠다.

    그가 죽어도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이유.

    왜 꼬맹이라 부르는지.

    ‘너 자신에 대해 묻고 있는 거야.’‘…….’‘네가 누구야.’‘…….’‘그거 아니야.’‘…….’‘너.’ 선상 파티에 초대된 사람들이 하나둘씩 크루즈에 승선했다.

    진공상태에 갇힌 듯 영원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철썩- 철썩- 바다 소리가 귀 가까이서 쳐댔다.

    땅이 흔들렸다.

    ‘해수……, 소리처럼 의미도 참 예쁜 이름이야.’‘해수라는 이름엔 아주 좋은 의미가 있지.’4년 전, 크리스마스이브……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S’를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호운 때문에 잊고 있던 ‘S’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바다의 이름을 예쁘다고 했던 ‘S’가 그 물속에서 어떻게 죽어갔는지 그 모습까지도.

    기억이 만든 흑백사진들이 파라노마가 되어 눈앞을 스쳐갔다.

    영원은 속엣말을 삼켰다.

    가늘게 경련이 이는 입술로. 웃기지마. 이제 와서……

    눈물이 비어져 입술에 닿았다.

    강호운, 이래서 네가 싫고 불편했다.

    너와 있으면 잊고 싶었던 기억들이 잔뜩 떠올라 괴로워졌다.

    우린 함께 있으면 안 됐다.

    그 자체로 고통이 아닌 순간이 없었다.

    언니가 동생이 되고,

    동생이 언니가 된 순간부터.

    *

    -실종 27일째

    ‘어처구니없는 실수였습니다. ‘신해수’는 중요한 증인이었습니다. 내가 누누이 강조하지 않았습니까. 분명 두 번은 없다고 했을 텐데요. 그때 국회 앞에서 말하는 겁니다. 정말 아슬아슬했어요. 미리 접선 장소를 내가 알아내서 망정이지, 신랑이 신부를 데려갈 뻔했습니다. 결국 자기가 임신한 걸 알고 신랑에게 가려 하지 않았습니까. 다시 한 번 경고합니다. 신부 철저히 감시하세요. 신랑에게 또다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잡히면, 당신들 밀항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신부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마세요. 그리고…… 위에서 지시 내려왔습니다. 일이 틀어졌지만 원래 계획대로 진행합니다. 행동개시하세요.’전화가 끊기자마자 호운은 동전을 채우고 또 다른 곳에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기다렸다는 듯 받았다.

    호운이 먼저 칼을 빼들었다.

    “돈 20억을 준비해.”“…….”“그렇지 않으면 신부를 죽일 거야.”예상대로 호들갑스런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신부를 걱정하는 마음과 별개로 주양은 원래 그런 남자였다.

    수화기 반대편에서 침묵이 고집스럽게 버텼다.

    둘 사이에 깊은 공백이 흘렀다.

    이윽고, 상대가 턱을 무겁게 움직였다.

    “잡히지 마라.”깊게 생각할 필요 없는 위로.

    “잡히면, 너 죽어.” 진주양의 살해욕구가 호운의 모가지를 잡아 비트는 착각이 일었다.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호운은 수화기를 내려놨다.

    전화가 먼저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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