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실종 28일째2017.01.15.
목소리 끝에는 희미한 불안이 깃들어 있었다.
“이사들 출석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말을 전해오는 김 부장을 두영은 새삼 응시했다.
모두가 주양에게로 떠날 때 부족한 상사를 믿고 자리를 지켜줬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두영은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오늘 이사회가 소집됐을 대회의실.
보기 편하게 각 이사들 자리마다 배포된 종이가 무색했다.
정작 안건을 통과시킬 수 있는 핵심 멤버들이 출석하지 않았다.
“사장님. 벌써 3시간째입니다.”조금만 지나면 올 것이다.
30분만.
1분만.
하지만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참패한 결과였다.
두영은 동요하지 않았다.
질서 있는 자세로 앉아 눈을 감았다.
김 부장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김 부장이 형편없는 굴욕감을 쓰디쓰게 삼켰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두영은 속으로 반문했다.
돌아가? 어디로.
이제 어디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
두영이 본가에 도착했을 때 진 회장은 운동 중이었다.
진 회장은 골프 연습이 취미가 아니었다.
그렇게 인내심이 긴 노인이 아니었다.
따로 호출도 하지 않았다.
두영은 자진해서 진 회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사들에게 공문을 보냈습니다. 주양이의 살인자백이 담긴 녹음파일을 어젯밤 일괄적으로 전송했습니다.” 두영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종이를 응시했다.
<진주양 본부장의 이사 자격 박탈과 동시에 직위 해임>
그것은 그가 이사들에게 뿌린, 다음 주총 안건이었다.
안내문은 이사들을 거쳐 진 회장의 수중에 들어갔다.
두영은 뺨을 부르르 떨었다.
“회장님. 회장님도 직접 들어보시면 생각을 달리 하실 겁니다.”이미 끝났다고, 끝났다는 것을 아는데.
“그 자식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압니까? 그 미친놈이.”포기가 안 됐다.
덜덜 떨며 양복 안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냈다.
“그룹 전체가 흔들릴 위기에 처할 수 있어요. 싹을 잘라내야 합니다.”추레하게 두영은 녹음기를 눌렀다.
잠깐의 작동시간이 지나고 음성 파일이 돌아갔다.
좋지 않은 음질이 지지직거렸다.
……자네, 신수가 별로 좋지 못하구만.
김 회장의 음성이 흘렀다. 다음은 주양이었다.
……궁금하십니까?
……내가 알아야 할 일인가?
……아드님이 어제, 제 안방에서 칼부림을 일으켰습니다. 절 죽이고 빠져나가려고 알리바이를 치밀하게 준비해놨더군요.
……내 아들을 어떻게 한 거야. 진 이사! 네 이놈!
쾅 - ! 녹취파일에서 찻잔이 소리 나게 놓아졌다.
그와 동시에 두영의 옆에 있던 도자기가 깨졌다.
골프채가 휘둘러졌다. 두영이 순간적으로 팔로 방어했다.
쾅! 파편이 눈썹 위를 긁고 갔다.
진 회장이 골프채를 마구 내리쳤다.
선반에 올려 있던 미술품들이 산산조각 나고 골동품 조각상들이 팔다리가 날아갔다.
노인은 간신히 버티고 있던 분노를 폭발시켰다.
암홍색 핏물이 두영의 옆얼굴을 뒤덮었다.
네발로 기어서 회장의 다리를 부여잡았다.
“아, 아버지. 이성적으로 생각하십시오. 걔를 두둔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아버지 눈치 보느라 몸 사리지만, 이미 이사들 마음은 돌아섰어요. 저와 한 마음 한 뜻입니다. 그런 살인마 새끼를 어떻게 상대하겠어요!” 진 회장이 말없이 리모컨을 눌렀다.
50인치 TV에 한 화면이 떴다.
간부들이 자주 가는 일식집 내부였다.
이사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한신그룹 내부에서 심심찮게 임원들을 불법 사찰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내장 몰래카메라가 이사들의 동태를 엿보았다.
두영은 침을 삼켰다. 그들은 두영이 뿌린 녹음 파일의 진위여부에 대해 토론 중이었다.
“김 회장의 일방적인 주장이지, 어디에도 진 본부장이 살인을 했다고 고백한 말은 없잖아.” “아들 잃은 애비야 뭔 말인들 못 하겠어요. 누구든 탓을 돌릴 사람이 필요하겠지.”“설령 사람을 죽었다고 해도, 먼저 칼부림을 시작한 쪽은 김인택 사장이야. 주거침입에 정당방위 아닙니까?”“정당방위요?”그들이 의미심장하게 입술을 뒤로 당겼다. 야만적인 웃음이었다.
그들은 약속한 것처럼 주양을 옹호하는 쪽으로 입을 맞췄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성이 아니다.
그들이 보유한 주식이 깡통 휴지조각이 되지 않게, 가치를 높여주는 경영자다.
“알아보니, 김인택 사장이 혼자만 간 게 아니던데. 사람 여럿을 고용했다던데. 진 이사도 용케 살아 나왔습니다.”“근데 진두영 사장은 그 파일을 어떻게 구한 겁니까. 설마…… 김인택 사장과 같이 공모를 한 걸까요?”진두영은 악! 소리를 삼켰다. 오히려 두영은 주양을 살해하려 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이번만이 아닙니다. 여러 시도가 있었어요. 진주양 이사가 입이 무거운 사람이니 말을 안 해서 그렇지.”“백운당에 앰뷸런스 울렸다는 그 소문?”“참 쪼잔한 일입니다. 진주양 이사가 일본총리를 접대하니 견제 들어간 거라면서?”“실망입니다. 진 사장 그렇게 안 봤는데.”“조카를 끌어내리고 싶어도 그렇지. 범죄예요! 살인교사라고요!” “자자. 다들 술이나 마시자고. 후계 싸움에 우리까지 휘말려봐야 좋을 게 뭐가 있어.”TV가 꺼졌다. 두영은 뒷걸음쳤다.
아버지를 두렵게 봤다. 턱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집사가 다가와 회장에게 전화를 건네었다.
“회장님. 대산 김 회장입니다.”진 회장이 전화를 귀에 대었다. 교도소에 수감 중인 김 회장과 통화를 했다.
“허허. 그간 잘 지내셨나? 나 진 회장이올시다. 내년 3.1절에 시간 어떠신가? 아아. 차나 한잔하자고. 누구 덕분에 감방에서 말년 보내게 생겼는데 어떻게 나가냐고? 허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좁아터진 교도소 대장 노릇이나 하더니 깜냥이 다 됐나? 소식이 많이 늦구만. 내년 대통령 경제인 특별사면 명단에 김 회장이 포함이 됐어.” 진 회장이 씨근덕거리는 숨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들이 싸지른 똥은 진 회장의 몫이었다. 상당히 굴욕적인 상황이 되었다.
“아주 잘된 일이지. 그동안 딸내미는 내가 잘 보살필 테니 목욕재계하고 새 출발할 준비하라고. 나올 때 주둥이에 단단히 자크 채우는 거 잊지 말고.” 진 회장이 수화기를 업었다.
집사가 새로운 주총 안내문을 두영에게 건네었다.
<진주양 본부장의 대표이사 대리 선임과 더불어, 진두영 사장의 직위 해임> 안이었다.
대표이사 대리.
회장이 병환이 깊어 공석일 땐 회장의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절대적인 자리였다.
그야말로 공식적으로 후계자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주양을 후계자로……
“아버지.”진 회장이 두영을 버렸다.
“아버지!”“조용히 나가. 외국으로 떠나든, 머리 깎고 출가를 하든, 내 눈 앞에서 꺼져.”진두영이 가려는 진 회장을 잡으려고 했다.
진 회장이 골프채를 쳐들었다.
두영의 등짝과 다리를 마구 후려쳤다.
“이사들 앞에서 날 개망신을 줘도 유분수지. 호로새끼도 안 할 짓을 해?”“으…… 컫!”“집안일을 어디 담장 바깥까지 새나가게 해. 이번 대선에 쏟아부은 돈이 얼만지나 알아? 돗자리를 깔 때가 있고 안 깔 때가 있지. 회사를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어!”이번 대선에서 이중모의 승리가 확실히 점쳐지고 있다.
주양은 이중모 의원과 각별한 사이였다.
주양이 김 회장을 친 것은 이중모 때문이었다.
주양의 살인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 이중모도 타격을 입는다.
한 명이 죽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올해, 12월에 있는 대선 직전에 정치 스캔들이 터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야당만이 아니다.
여당 내에서도 들고 일어나면 한신의 압수수색이니 뭐니 물타기 하려고 난리가 날 것이다.
진 회장이 감옥에 들어갔다 나와야 할 정도의 대형 비리 스캔들이었다.
수행원들이 진 회장을 뜯어말렸다.
건강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진 회장이 손짓했다.
“저거 갖다 버려.” 두영은 사약을 받는 장희빈처럼 끌려 나갔다.
그러다가 막 돌계단을 올라오던 주양과 마주쳤다.
두영은 굳었다.
일전에 자신에게 경고하던 목소리가 되새겨지듯 떠올랐다.
‘회사 갖고 분탕질하다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나면, 그야말로 불효입니다.’마치 예상했다는 듯이었다.
두영은 충격 먹었다.
주양이 치밀한 눈빛을 떴다.
두영은 주먹을 그러쥐었다.
두영이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저놈이 이렇게 만든 것이다.
이 모든 게 주양의 덫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이렇게 형편없이 버려질 리 없다!
아버지가 나를 스스로 끊어버리게…….
내가 사리판단 못 하고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도록 끊임없이 자극했다.
“너. 너 이 새끼 다 알고서 일부러. 내가 어떻게 나올지 알면서…….”“실패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뭔지 압니까? 남 탓을 잘한다. 그렇게 남 탓하면 좀 마음이 위로가 되나?”“이 개새……!”“큰 불효를 저질렀어. 저 노인네한테 한신은 자기 분신이야. 핏줄보다 소중히 여기는 한신에, 털끝만 해도 흠집은 흠집인데, 걸 가만 둘 거 같아?”주양이 한 발짝 두영에게 걸어갔다. 귀에 속삭였다.
“내가 회장이라도 불효자식은 안 키우겠어.” “…….”“그러니까 새겨들으셨어야지. 조카의 충고를.”두영이 경호원들에 잡혀 개처럼 질질 끌려 나갔다.
주양은 가련한 사내의 마지막을 조용히 응시했다.
물론 진 회장이 진두영을 끊어낸 데는 그런 단조로운 이유만은 아니었다.
진두영이 크게 간과한 것이 있었다.
진 회장이 주양에게 부채감이 있다는 것.
누구를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한다는 원리가 아니다.
진 회장에게 주양은 죽어서도 끌어안고 싶었던 아들의 대신이자,
보고 싶지 않은 자신의 흉물스런 마음이며,
그 욕심이 빚어낸 형벌이었다.
왕처럼 군림하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진 회장을 초라하게 만들며, 채찍질하고, 그 흉터에 고통스럽게 새겨진 주홍글씨.
그게 바로 주양이었다.
진두영은 몰랐겠지만 주양은 알고 있었다.
진 회장이 자신을 버리지 못할 거라는 것.
다음 날 이사회에서 안건이 통과됐다.
며칠 뒤에 열린 주총에서 주주들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서 주양은 선출됐다.
*
승강기가 한 층씩 고요히 내려갔다.
주양과 진 회장 사이에 진한 침묵이 밀려왔다.
“건방진 놈.”휠체어에 앉아 진 회장이 읊조렸다.
“기분이 좋으냐? 나를 이용해서 기어이 삼촌을 잘라낸 게.”회장도 사람이다. 자식을 잘라내는 것이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다 망해가는 중공업 정돈 떼어줘도 됐잖아. 먹고는 살아야지. 그 정도 아량을 베풀 수 있었잖아?” 애석하게도 진 회장이 죽으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쓸데없이 커다란 한신그룹의 몸집을 줄이는 일이었다.
특히, 방만하게 운영해온 한신중공업은 구조조정에 들어갈 것이다.
“약속해라. 두영인 살려둬. 이제 한신 근처엔 발도 못 붙일 거다. 한신그룹 너 줄 테니까 내가 죽은 후에, 걘 건드리지 마.”엘리베이터가 24층에서 멈췄다.
문이 활짝 열렸다. 주양은 남처럼 행동했다.
승강기 맞은편에 내려 진 회장을 돌아봤다.
치매기가 악화되어 가고 있는지 면밀히 살피던 시선이 곧 관심을 잃고 가라앉았다.
아들이건 손자건 둘 중 하나는 잘라내야 할 때가 온 것뿐이다.
잠재적 위험분자를 품고 살 수는 없다.
“보름 뒤에 크루즈 명명식이 있습니다. 그 자리를 숙부님의 퇴임식으로 삼을 생각입니다.”완전한 작별. 일방적인 통고. 주양이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렇게는 못하겠다. 진 회장이 그런 주양을 노려보다 고개를 돌렸다.
끝내 그를 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닫혔다.
*
주인 잃은 호텔 객실은 텅 비어 황량했다.
주양이 소파에 등허리를 기대었다.
피로한 눈가를 눌렀다.
3류 매거진에 기사가 실렸다. 주양의 열애설이었다.
상대편 여자는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지만 누가 봐도 신해수였다.
신해수와의 관계가 정리된 지는 한참이었다.
총장과의 필드 약속에서 딱 한 번 동행했을 뿐이다.
그 딱 한 번의 기회를 노린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캡쳐다.
‘이 기사를 누가 냈을 거 같습니까.’그에 양 비서의 대답은 주양과 같은 생각이었다.
진두영, 아니면 최혜란.
그날 방문객은 이것을 들고 영원을 찾아왔다.
영원의 가출 원인이었다.
사람을 시켜 찾게 했지만 기약 없이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다.
그래도 납치가 아니라는 것에 위안했다.
시간은 흘러 보름 뒤, 퇴임식이 다가왔다.
인천 앞 바다에 10만 톤급 크루즈가 떠 있었다.
선상파티는 오후 6시부터 시작됐다.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철제덩어리는 칠흑 같은 바다 위에서 홀로 빛났다.
배 가장자리마다 긴 띠처럼 화려한 레일등이 늘어져 선박의 골격을 이루었다.
한편에서 울려 퍼지는 바이올린 연주. 크루즈 완공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각계 인사들이 뜻깊은 자리에 참석해주었다.
그러나 속내는 진두영의 퇴임을 바라보는 호기심 어린 추측이 난무했다.
‘정말 퇴임을 하는 거야?’‘진 회장이 한순간에 아들을 변병으로 내친 데에는 어떤 내막이 있지 않겠어?’그들은 정보교류를 했다.
이 크루즈는 진두영이 한신중공업 사장으로 만드는 마지막 배일 것이다.
쌉싸래한 밤바람이 바다 한가운데서부터 밀려왔다.
주양이 인적 드문 14층 맨 꼭대기 갑판에 섰다.
내려다보이는 갑판 아래로 한 여자가 걸어왔다.
여자는 맨발이었다.
걸음은 제정신이 아닌 듯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작고 시려 보이는 발을 유심히 살폈다.
난간을 더듬더듬 딛고 여자가 몸을 바다 쪽으로 기울였다.
그녀가 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낚아채듯 한 남자가 빠르게 그녀를 배 위로 끌어올렸다.
안전팀 직원인 듯 사내는 경호원 복장을 하고 있었다. 여자가 중얼거렸다.
“저…… 저기 바다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 구해달라고…….”“그런 거 없어.”“아니야. 사, 사람이…… 빠져서….”“환영이야.”여자를 품에 안고 가려다 경호원이 위층에 있는 주양과 눈이 마주쳤다.
주양을 알아보는 눈치였다.
그러나 위축되거나 흔들림 따윈 없었다.
당당하게 그녀를 데리고 사라졌다.
주양은 무의식적으로 난간을 비틀어 쥐었다.
양 비서가 다가왔다.
“강호운. 정말 최혜란 정부가 맞습니까?”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양 비서가 깜박했다는 듯 쩔쩔맸다.
“그게…….”“더 있습니까?”“최 사장의 정부가 아니라…… 최 사장이 첫 번째 남편 전에 동거했던 남자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호적이 오르지 않아, 아들이 있다는 것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던 모양입니다.”“…….”“의붓오빠입니다.”“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매잖아요. 그런 건.”주양은 목덜미를 더듬었다.
셔츠 깃 안에 가려진 칼자국을 긁었다.
영원의 생각을 할 때면 기워진 상처가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았다.
긁어도 긁어도 메워지지 않는 갈증.
“의붓남매라……,”주양을 보고도 주눅 들지 않은 사내는 강호운이었다.
그리고 그가 품에 안은 여자는 영원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영원은 지금껏 강호운과 함께였다.
난간을 죄고 있던 손마디가 우둑, 우둑, 뼈 부러지는 소리를 내었다.
차라리 최혜란 정부였을 때가 나았다.
의붓남매라니.
“잡아.”“…….”“잡아와요.”기분이 더러웠다.
★
-실종 28일째
‘신영원은 그럼 왜 도망쳤을까? 그렇게 사랑했던 남자인데.’‘신부는 납치된 게 아닙니다. ‘도망’을 친 겁니다. ‘그’에게서.’‘난 그놈이 얼마나 욕심이 많은 놈인지 잘 알아요. 그는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두 개 다 가질 방법을 고안하는 놈입니다. 보세요.’인간의 욕심이 결국 파국을 불러온다.
노승이 말하는 ‘욕심이 불러온 파국’이 진두영이 아닌, 진주양에게도 해당되는 거라면
그 파국은 <신영원의 실종>일까?
신영원이 진주양을 당연히 사랑했다고 여겼다.
어떻게 된 걸까.
신영원 씨의 마음이 바뀐 걸까.
수진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날 장 경감은 기어이 진주양을 만났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강호운과 도망친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아는 눈치였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따져 물었다.
진주양은 노코멘트였다.
곤란한 것이다. 답변해주기가.
그 영원할 것 같던 사랑도 어느새 바닥나고 다른 인연에게로 옮겨간 걸까.
분명한 것은, 신영원은 진주양이 아니라 강호운과 도피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사랑에 변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잠시였다.
사건은 다시 급물살을 탔다.
수진이 다급하게 사무소로 들어왔다.
“소장님! 드디어 왔어요.”장 경감은 벌떡 일어났다.
“신부를 납치했다고 주장하는 남자에게서 협박전화가 왔습니다.”“뭐? 협박전화?”“본부로 신부를 찍은 사진과 함께 신부의 목숨 값으로 돈 20억을 준비하라고 했대요. 그렇지 않으면 신부를 죽이겠답니다.”강호운과 함께 도피한 건데 무슨 협박전화?
“용의자 특정했어?”“키 180 이상. 30대 초반의 건장한 체구의 남성이랍니다.”그동안 한신그룹 신부실종 사건은 단순 가출로 취급당해왔다. 납치라는 어떤 정황도, 물증도 없었기 때문에.
실종이 납치로 확정되는 첫 번째 요건이 바로 범인으로부터의 협박전화였다.
이로서 현기영 쪽도 공식적으로 가출에서 납치사건으로 방향을 전환을 하게 될 것이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소량의 침이 나왔어요. 경찰 데이터베이스에 나오진 않았지만 역시 그 자인 것 같습니다.”수진이 눈동자를 검게 빛냈다.
“강호운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