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호텔로 돌아왔다.
영원이 욕실에서 손을 씻고 나오는데 양 비서가 와 있었다.
“진두영 사장이 영월을 방문했다고 합니다.”“영월에 공장부지가 있었습니까?”“김 회장이 서울구치소에서 이감된 곳이 영월교도소입니다.”대화가 뚝 끊겼다. 상당히 심각하게 판이 돌아가는 듯했다.
“재소자들 처우도 좋고, 감시도 심하지 않아 다들 선호하는 편이라고 합니다.”“이사들 움직임은.”“은밀하게 이사들과 접선했다는 말이 돕니다.”“혹시 김 회장한테 꿍쳐놓은 복사본이 더…….”그때 인기척에 주양이 돌아봤다. 영원은 얼른 숨었다.
이미 흐름 깨진 대화를 이어나갈 마음이 없는지 주양이 양 비서를 손짓했다.
영원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리모컨을 조종했다. 증시동향 뉴스를 살피고 있었다.
진두영이 그 몰래 호박씨를 까는 것 같은데 주양은 굉장히 느긋했다.
“네 숙부가 사고 친 거 같던데. 이러고 여유 피워도 돼?”주양이 TV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영원에게 손을 뻗었다.
머리카락을 돌돌 말며 손장난을 쳤다.
물이 튀어 조금 젖어 있었다.
“상대가 약이 올랐을 땐 처방전이 없어. 아무렇지 않은 척 여유를 부려야 해. 상대가 그 모습에 더 방방 뛰면 그때 공격하는 거야.”“어떻게?”“뒤를 치는 거지. 조용히 접근해야 해. 겉으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상대의 계획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척.” “네가 좋아.”주양이 움직임을 멈췄다.
땀이 차오르는 손을 꽉 쥐고 영원이 고백했다.
“네가 질린다고 해도 떠나지 않을 거야.”주양이 허를 찔렸다는 듯 미묘하게 웃음을 삼켰다.
“맞아. 그렇게 하는 거야.”“진짜야. 나는 이제…….”그런데 말문이 막혔다.
그가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귓바퀴를 매만지는 손길에 솜털이 오소소 돋았다.
영원의 눈동자 속에 깃든 혼돈을 그는 피하지 않았다.
똑바로 마주했다.
“허락 받지 마.”그녀를 이곳에 데려온 건 그였다.
“그 정도 책임감은 있어.”폭풍 같던 사랑도 언젠가는 그 힘을 잃고 공중 소멸된다.
그렇다고 슬픈 것만은 아니다.
그 뒤에는 가족 같이 편안하고 애틋한 사랑이 차오른다.
사랑에서 열정은 끓는점이었다.
최고치일 수 있으나 급하게 한계를 드러내고 마는 민낯.
오래도록 사랑을 지속하는데 중요한 온도는 36.9도.
사람의 체온이다. 서로를 향한 믿음.
영원은 그를 믿었다.
어떤 경우에도 그가, 그녀를 버릴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란 것.
그의 사랑을 의심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무엇이 그토록 불안했나.
.
.
.
주양이 출근한 아침이었다.
띵동 -
호텔 초인종이 울렸다.
이상하다 싶었지만 의심하지 않았다.
“누구…….”무심코 문을 열어 줬다가 영원은 빳빳해졌다.
예기치 않은 방문객.
그리고 다시 피어오르는 불쾌감의 정체.
어째서 단순한 사랑을 할 수 없는 걸까.
고통스러웠다.
*
주양은 회사에서 연락받고 급히 호텔로 돌아왔다.
“신영원 씨가 사라졌습니다.” 처음엔 단순 외출인 줄 알았다.
그 밤에 돌아오지 않아 백운당 집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무심코 넘겼다.
백운당으로 보낸 직원이 반나절이 지나가도록 소식을 전해오지 않다 전화가 왔다.
삼 일째 사가에서도 자취를 감췄다.
복도 CCTV를 확인한 결과, 3일 전, 그가 출근하고 바로 30분 뒤 방문객이 있었다.
“납치입니까?”호텔 보안실에 CCTV 판독을 부탁해 놨다.
직원이 애매하게 뺨을 긁었다.
“아뇨,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직원이 로비 화면을 보여주었다.
방문객은 아주 잠시 머물렀다 객실을 일상적으로 떠났고, 방문객이 다녀간 직후 영원은 방을 나왔다.
그리고 로비를 통과해서 호텔을 유유히 제 발로 빠져나갔다.
주양은 상황이 잠시 이해가 안 됐다.
“이게 뭐죠?”그가 물자 직원이 송구스럽게 답했다.
“가출하신 것 같습니다.”
“진주양과는 언제부터, 어떤 경로로 일하게 된 거야?”“김 총리 아시죠?”“유명하지. 김한식 전 총리.”“그 영감탱이가 소개한 인재랍니다. 김 총리 밑에서 로비스트로 일하다가, 작년 11월 화친의 선물로 진주양에게 넘겼나 봐요. 그 뒤로 쭉 신부의 수행비서였답니다.” 신부의 수행비서라…….
한신 정도의 재벌가에 시집가는 신부에게 수행비서 하나 붙여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말이 좋아 수행비서지, 예전 조선시대처럼 수발 들어줄 하녀 하나 붙여줬다는 거였다.
근데 왜 하필 로비스트일까?
“로비스트 그거 뭐 무기 밀매상들한테 붙이는 거 아냐?”“거창하게 그런 것까진 아니어도, 요즘은 일반 기업에서도 말발 좋은 로비스트들이 요긴하긴 하죠. 일부러 고용하는 경우도 많고. 공인무도단증 보유자인데 확실히…… 신부한테 붙이기엔 과하다는 생각이 드네요.”신부에게 로비스트를 수행원으로 붙이다니.
마치 신부가 아니라 협상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했을 거 같은 모양새였다.
‘신영원은 그럼 왜 도망쳤을까? 그렇게 사랑했던 남자인데.’진주양에게 악감정을 가진 신해수였다.
악의가 담겼다는 전제에서 100퍼센트 신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역시 정황상 수진의 말대로 신영원은 강호운과 도피라도 한 걸까?
하필 강호운인 것은 그녀의 사랑이 바뀌었다는 걸 방증하는 증거일까.
유선민이 김 회장을 살해했다고 단정하는 것 역시 가정이다.
그저 우연의 일치로 그 길을 지나가던 중이었을 변수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하필 왜 그날 김 회장이 죽었고, 그 시각 유선민이 자택 근처를 지나쳤는지 개연성이 전혀 설명되지 않고 있다.
‘그 남자를 절대 믿지 마. 그 남자한테 진실은 하나도 없어. 다 거짓말이야.’‘그가 잠깐 베푸는 서푼짜리 친절, 스치듯 내비치는 슬픈 얼굴.’‘어떤 가면에 속고 있을지 몰라.’신해수의 경고가 끊임없이 장 경감을 들쑤셨다.
진주양은 김 회장의 죽음과 관련된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하지만 김 회장을 살인교사한 것은 진주양이 확실했다.
그 여자를 통해서.
“법대 출신 로비스트라는 점 빼고, 그 외에 다른 정보는 찾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직업 특성상 극비로 일처리를 하다 보니, 고급 정보는 접근하기가 힘들어요.”“…….” “국정원 정도라면 모를까.”“국정원?”“연변 출신 중에 손기술 좋은 애들 있는데, 부탁해볼게요. 국정원 서버 뚫으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는 건 아시구요.”장 경감은 유선민에 대해 생각하다가 눈을 찌푸렸다.
블라인드 사이로 비쳐든 햇살에 은색 액세서리가 비쳐 각막을 찔렀다.
“이건 어디서 주운 겁니까? 쓰던 거 같은데.”“신해수.”“에? 그 여자를 만났어요?”신해수가 흘리고 간 염주였다.
그는 기이한 문양을 살폈다.
팔각형 안에 있는 연꽃의 형상.
경황이 없어 잊었는데 무척 낯이 익는 형태였다.
이걸 내가 어디서 봤더라?
그때, TV 채널이 불교방송으로 돌아갔다.
장 경감은 벌떡 책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작년 의뢰일지 어딨지?”수진을 시켜 수첩을 찾아내게 했다.
그는 다이어리 캘린더 매 스케줄을 적어놓았다.
작년 11월 페이지를 펼쳤다.
빼곡하게 어지럽혀진 일정은 온통 사찰들을 방문한 기록뿐이었다.
그때 의뢰인 돈 떼먹고 달아난 놈 찾으러 산속 전국 방방곡곡 안 돌아다녀본 사찰이 없을 것이다.
어떤 사찰이었는데 저 문양을 봤다.
그게 어디였지?
그러다 범오사를 발견했다.
“그래. 여기야.” 규모 면에선 다른 사찰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운치만큼은 뒤지지 않던 절이었다.
장 경감은 포털에 범오사를 검색했다.
하단에 제일 먼저 한신그룹 관련 헤드라인이 떴다.
진 회장이 사별한 부인,
거문고 명장과 첫째 아들의 재를 <범오사>에서 지냈다는 기사가 짤막하게 다뤄졌다.
기묘한 우연의 일치에 수진이 팔짱을 꼈다.
“범오사라면, 진두영 사장이 작년 겨울 내 기거했던 사찰인데요.”“요양을 했다지?”“한신중공업 사장 자리 내놓은 게 10월이든가. 그리고 칩거에 들어간 게 11월인가 그럴 거예요.” 신해수가 정신병원에 갇힌 시점과 같았다.
진주양이 영원을 신부로 탈바꿈시킨 시점이기도 했다.
“항간엔 폐위 당한 충격에 야인이 되는 거 아니냐는 말까지 돌았어요.”“거기 주지승이 정치권 인사들하고 친분이 깊다지.”장 경감이 차곡차곡 사건 정황을 되짚어갔다.
“진두영의 말동무를 해줬을 테고, 그러다 보면 집안사가 안 나올 수 없을 테고.”범오사……
신해수와 진두영. 그리고 진주영과 신영원. 이들의 교차점이라.
“거기 주지승을 만나봐야겠어.”헛발질이라도 상관없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니까.
범오사에 뭔가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피가 들끓었다.
*
산맥으로 아주 조금만 깊이 들어왔을 뿐인데 평행한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 생경했다.
차끼리 뒤엉켜대는 클랙슨 소음 대신 햇살과 나무와 바람의 속삭임이 귀를 간질였다.
절간에 핀 들꽃이 간절히 누군가를 기다리듯 청초하게 살랑댔다.
“어제 지방에서 바로 수확해 올려 보낸 새순이라오. 맛이 순해서 그만이지.”범오사 주지인 성철이 차를 대접했다.
녹차 잎이 진하게 우러났다.
장 경감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운을 떼야 하는지 어려웠다.
성철이 암갈색 입술로 호를 그렸다.
“그래, 사람은 찾았소?”“아뇨. 아직.” 실종된 신부는…… 이리저리 생각들을 손질하다 장 경감이 멎었다.
“그걸 어떻게…….”“돈 떼먹고 간 사람을 찾고 있다 하지 않았소. 반년이나 지났는데 여태 감감무소식이오?”장 경감은 멍청하게 이마를 두드렸다.
그거였나. 웃었다.
장 경감이 내민 염주를 성철이 신중하게 살폈다.
“내가 만든 게 맞아.”하지만 성철이 기억하는 주인은 다른 사람이었다.
“어린 딸아이를 데리고 온 한 불자였지. 집안에 화가 미쳐 아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 애비가 근심이 많았지.”“이 염주를 신해수라는 여성에게서 얻었습니다.”“그 딸아이가 바로 신해수일세.”성철은 염주를 그 딸을 위해 만들었다고 했다.
딸이 상태가 많이 안 좋았다고.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단서는 성철이 말하는 딸이 신해수라는 것.
그리고 그 딸을 손 붙잡고 데려온 애비는 신정태였다.
“염주를 만드신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칼에 묻은 피를, 피로 씻어내는 사주요. 그 애.”섬뜩한 말이었다.
칼에 피를 묻히는 것도 모자라 그 피를 흥건한 피로 다시 씻겨낸다니.
끝도 없이 피를 묻힐 거란 소리였다.
“화마가 비껴나는 법이 없으니, 팔자가 세도 너무 세. 그러다 부러지지.”장 경감은 신해수를 떠올렸다.
‘신영원, 그 계집부터 먼저 찾아내서 죽여 버릴 거야.’핏발이 죽죽 그어진 흰자로 저주를 퍼부었다.
피를 봐야만 하는 사주……
진주양은 신해수가 누르고 있던 본성에 불을 지핀 셈인가.
“이건 부적일세. 사나운 기운을 염주에 담긴 간절한 누군가의 염원으로 희석시키지. 그래. 그 애비의 염원이야. 자신의 운으로 사나운 딸아이 팔자가 평탄해기를 바랐지.”“운을 나눈다고요?”“좋게 말하면 교환이고, 나쁘게 말하면 훔치는 거야. 세상에 속하는 모든 만물, 운 역시도 총량이 정해져 있는 법이지. 운이 부족한 사람이 풍족한 사람에게서 운수를 훔쳐오면 공평해지지 않겠나. 불교엔 무주상보시라는 것이 있네. 조건 없이 타인에게 베푸는 것. 그 애비는 자신의 운으로 아이를 살리기를 바랐어.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란 게 그렇지 않겠나.” 그렇게 말하지만 그 애비 역시 운이 대단히 좋은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혼하고 얼마 안 돼 명을 달리했으니.
백운당 전대 사장.
신정태의 사인은 등산 중 실족사였다.
설마 그 산이 범오산은 아니겠지?
장 경감은 다과상에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사실 제가 스님께 걸음을 한 것은 진두영 사장 때문입니다.”“한신그룹의 진두영 사장. 잘 알지.”“스님의 답에 따라 누군가가 살 수도 있고,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일입니다.”장 경감은 한 단어 한 단어 힘주어 박았다.
“숨김없이, 양심에 따라 털어놔주십시오.”
장 경감은 성철과 찢어지고 사찰을 홀연히 나왔다.
108계단을 하나씩 걸어 내려가는 내내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한참을 고심한 듯 노승이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108계단.
‘자업자득. 모든 비극이 거기서 시작된 것은 틀림이 없지.’101계단.
‘진두영 사장은 아들을 간절히 바랐소.’98계단.
‘아내가 아들을 낳아주지 못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74계단.
‘여자가 있었어.’66계단.
‘아들을 낳아줄 관상의 여자.’59계단.
‘헛된 희망을 불어넣는 게 아니었소이다.’44계단.
‘결국 아들을 낳았다네.’발이 힘없이 비틀거리며 계단에 얹어졌다.
장 경감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일이 그렇게 꼬인 거야.
이제야 장 경감은 납득했다.
아들 낳아줄 관상.
진두영은 신해수가 필요했고, 진두영을 견제하기 위해 진주양은 일부러 신해수와 사귀는 척했다.
그리고 숙부와 조카가 한 마음으로 동시에 한 여자, 신영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문득 진두영이 품에 안았던 갓난아기를 떠올렸다.
분명 아들을 낳았다. 그렇다는 건……
‘그 여자가…… 아들을 낳아준 겁니까?’물음에 노승이 서늘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탐욕을 부리다 파멸한 인간의 말로를 경멸하는 눈초리였다.
‘난 아내가 아들을 낳지 못할 거라고 말한 적이 없소.’솨아아아아 ────────
32번째 계단에서 장 경감은 소스라치는 나뭇잎 소리를 들었다.
아들을 어떻게 하면 낳을 수 있냐는 물음에 방법을 일러준 것뿐이지, 아내가 아들을 낳지 못할 거라고 하진 않았다.
병원의 오진은 우연의 일치일 뿐.
모든 건 진두영의 욕심과 조급함이 불러온 참사였다.
아내를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지켜주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딴 여자에게 마음이 흔들렸다.
다름 아닌 조카의 여자에게.
패배감은 그를 짓눌렀고, 돌이킬 수 없는 자충수를 두었다.
장 경감은 충격을 먹었다.
노승은 다소 냉소적으로 차를 입가에 붙였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아들을 낳았으니 다행이 아닌가.’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진두영은.
‘당연한 거 아니겠소? 욕심이 지나치면 탐욕이 되고 탐욕이 괴물이 낳는다는 것쯤은.’‘…….’‘자업자득이란 말을 난 믿소. 인간의 욕심이 결국 어떤 파국을 불러오는지.’
★
-1년 전, 영원 26세
영월 교도소.
“4051번. 면회.”대산물산 김 회장은 어두운 감옥에서 눈을 떴다.
덩치 큰 간수가 무표정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 사람이 없을 텐데.
회사가 망하고 떠날 사람들은 다 떠났다.
그래도 교도소에서만큼은 남부럽지 않은 특혜를 받고 있지만 변호사 말고는 올 사람이 없었다.
김 회장은 눈을 감았다.
“면회 받지 않겠소.”“나오십시오.”“딸의 면회는 받지 않겠다고 했잖아.”“딸이 아닙니다.”의아하게 간수를 바라봤다.
간수가 그를 데리고 간 곳은 3평 남짓 면회실이 아닌 교도소 소장실이었다.
안 소장이 김 회장을 깎듯이 맞이했다.
“회장님을 만나 뵙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김 회장이 소장의 뒤를 살폈다. 진두영이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고생이 많으셨나 봅니다. 얼굴이 많이 상했습니다.”입에 침도 안 발린 소리에 김 회장이 픽, 비웃었다.
누구 덕분이지.
“이번엔 또 뭘 누굴 사지로 몰아넣으러 왔나. 너 같은 인간을 아주 잘 알아. 자신은 도덕적인 우의를 차지하고 부처님 같은 얼굴을 하지만, 사실 본성은 그렇지 않아.”김 회장은 침을 뱉듯 진두영에게 말했다.
“내가 말해줄까? 넌 쓰레기야. 진주양보다 더 지저분한 새끼야.”그래.
진주양에게 죽임 당한 것은 백번 양보해 아들이 먼저 죽이려 했으니 잘못했다 쳐도, 진두영이 말짱하게 앉아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 납득가지 않았다.
아들을 부추긴 것은 저 자식이었는데.
“손에 피가 안 튀었으니 넌 네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지.”아들은 순진했다. 그리고 저들은 약았다.
그게 아들의 잘못이었다.
“내 아들을 네 세치 혀로 갖고 놀다 죽였어. 그 애의 진심 어린 감정을 농간했다고.”이곳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저들을 상처 줄 수 있을까.
하지만 그가 가진 것은 작은 비밀이었고, 고작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뺨에 흠집을 내는 정도뿐이었다.
소장이 눈치를 살폈다.
험험, 헛기침 하며 모르는 척 자리를 비켜주었다.
진두영이 변방으로 물러난 뒷방 늙은이를 찾아온 까닭을 간략하게 압축했다.
“이사회를 열 겁니다. 이미 몇몇 대주주들을 소집해서, 그 애가 저지른 살인을 폭로했습니다. 아드님에 관한 것입니다.” 김인택을 죽인 살인혐의를 수면 위로 드러내려는 것이다.
“그날 시신을 운반한 배 선주에게 증언을 부탁해놨습니다. 근데 좀 더 확실한 물증이 필요한데.”턱을 지분거리던 진두영이 예리하게 눈빛 끝을 세웠다.
아무것도 준비해놓지 않았을 리 없다 짐작한 것이다.
“그 애 입으로 살인을 자백하는 뭔가가 있었으면 합니다. 확실하게 종지부 지을 수 있게. 회장님도 이제 패자부활전 준비하셔야죠.” 고작 흠집이라도 누가 할퀴느냐에 따라 정도는 달라진다.
1cm가 될지 뺨 전체가 뜯겨나갈지.
김 회장은 결정을 내렸다.
간수를 시켜 방에서 책을 가져오게 했다.
두꺼운 책 한 권이 교도소에서 그가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재산이었다.
법전이었다.
책을 펼치자 홈이 패여 있었다.
녹음기가 들어 있었다.
“가져가게.”서늘하게 웃는 진두영을 보며 김 회장은 더더욱 서늘하게 웃었다.
누구라도 좋았다.
서로 물고 뜯고 할퀴고,
그러다 한쪽이 파멸에 이를 수만 있다면,
그리고 다른 한 쪽이 치명상을 입은 불명예스런 승리를 얻는다면,
그것으로 족했다.